처음에는 통역이 있었다고 하던데.
“고맙게도 두산 베어스에서 통역을 보내주셨다. 그런데 한 달 정도 같이 있으니까 영어도 제자리이고 선수들과의 관계도 가까워지지 않는 것 같아 홀로서기를 했다. 엎어지고 넘어진다고 해도 내가 직접 부딪히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통역이 있다가 없어서 더 어려움을 겪었을 것 같다.
“영어로 인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고민 끝에 피닉스에 있는 야간반 ESL 영어 수업을 신청했다. 2시간에 30불을 받는데 일주일에 2회 수강 신청했고, 아무리 피곤하고 쓰러질 것 같아도 학원 수업을 빼먹지 않았다. 그곳에서 수업 받은 게 도움이 됐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까 조금씩 들리는 귀가 생기더라. 지금은 질문에 답 하는 정도는 된다. 선수들 앞에서 간단히 스피치도 한다.”
가족들을 한국에 두고 혼자 애리조나를 찾았다. 훈련 이외의 시간을 혼자 보내며 더 큰 외로움을 느끼진 않았나.
“가끔은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겹게 즉석밥만 먹어서 그런지 용기의 플라스틱 냄새가 너무 싫더라.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도 있었지만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지 못하는 미안함이 컸다. 나보다 아내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외로움은 잠시 뿐이었고 시간이 날 때마다 동영상으로 영어 공부를 했고 쓰기, 읽기 등을 보충하는 시간을 가졌다. 마흔 살 넘어서 공부에 눈을 뜬 것 같다. 생존을 위한 영어 공부라 목숨 걸고 매달렸다.”
미래를 떠올리면 불안함이 상당했을 것 같다.
“당연히 있었다. 시즌이 끝나갈수록 불안 초조한 마음이 커지더라. 과연 내가 여기서 정식 코치가 될 수 있을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미국에 오면서 호텔비, 식비, 교통비 등 모든 걸 내 돈으로 해결했다. 인턴 코치한테는 식비조차 안 나온다. 100% 자급자족이다. 한 번은 카드가 한도 초과로 나와서 당황한 적도 있었다. 차도 중고차를 구입해서 다닌다. 한 푼의 수입도 없는 내가 그동안 모아 놓은 돈으로 생활해야 하는 터라 무조건 절약해가며 살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은퇴 후 한국에 남았다면 어떻게 됐을 것 같나.
“내가 은퇴한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방송국으로부터 연락이 많이 왔다. 어느 곳에선 MC 제의를 해오기도 했다. 출연료도 상당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끌리지 않더라. 방송을 떠올리면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야구를, 선수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했다. 만약 한국에 남았어도 방송보다는 야구 일을 했을 것 같다. 내가 가장 열정적으로 땀 흘릴 수 있는 곳에서 말이다.”



<홍성흔은 선수 시절에도 보여준 특유의 열정을 애리조나에서도 유감 없이 발휘했다. 덕분에 선수들은 물론 다른 코치들로부터 야구의 열정과 성실함이 뛰어난 코치로 인정받았다.(사진=이영미)>
이곳 선수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느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 같다.
“선수 때의 난 강한 게 최고라고 생각했다. 강하게 던지고, 강하게 치고…. 그런 강함 속에 부드러움이 있어야 한다는 걸 여기서 배웠다. 만약 내가 어린 나이에 그 부드러움을 배웠더라면 좀 더 오랫동안 포수 마스크를 쓰지 않았을까 싶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야구의 기본기는 다 똑같다. 그러나 이곳에는 수백 가지의 훈련 프로그램이 있다. 거기서 선수한테 맞는 프로그램을 빼내 적용시킨다. 미국 야구를 접하면서 새삼 깨달은 게 있다.”
어떤 부분을 깨달았다는 건가.
“메이저리그로 올라가는 게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게 된 것이다. 프로와 계약한 선수가 루키리그부터 시작해서 빅리그까지 올라가려면 7,8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 단계를 거치며 수많은 선수들이 탈락의 쓴맛을 맛본다. 빅리그까지 도달하는 선수는 그들 중 1% 밖에 안 된다고 들었다. 찬호 형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 추신수가 얼마나 큰 선수인지, 그리고 한 시즌을 뛰고 한국으로 돌아간 황재균을 비롯해 남아 있는 박병호, 김현수 등 모두가 엄청난 일을 했고, 하고 있는 중이다. 나도 한국에 있을 때는 메이저리그가 이토록 닿기 힘든 곳인지를 잘 몰랐다. 여기서 선수들과 함께 뛰고 부대끼면서, 또 트레버 호프만, 노모 히데오 등 레전드 급의 코치들과 함께 미팅하고 야구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메이저리그 세계의 위대함을 배우고 느꼈다.”
인턴 코치는 혼자뿐이었나.
“아니다. 일본, 대만인 인턴 코치도 있었는데 조용히 정리됐다. 그들도 나처럼 인스트럭셔널 리그에 참가하고 싶어 했지만 모두 이곳을 떠나야만 했다. 솔직히 그들과 헤어지는 게 안타까웠고, 약간은 뿌듯했다. 3명의 동양인 인턴 코치 중에서 나 혼자 남았고, 정식 코치로 계약을 맺게 된 게 자랑스러웠다(웃음).”
만약 샌디에이고 구단에서 정식 코치 제안을 해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계획이었는지 알고 싶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무조건 3년은 버티려 했기 때문에 다른 팀 인턴 코치 자리를 알아봤을 것이다. 그 정도의 각오는 항상 갖고 있었다.”
다른 코치들과의 친분이 상당해 보인다. 어떻게 해서 이토록 밀접한 관계를 이어갈 수 있었나.
“내 별명이 ‘I got it’(내가 할게, 알았어)이다. 훈련 마치고 종종 코치들이 내게 전화를 걸어선 바에서 술 한 잔 하자고 부른다. 몸은 피곤해도 눈을 부릅뜨고 뛰어나갔다. 그들이 형성한 이너서클에서 제외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자리에서 오히려 영어를 더 많이 배웠다. 종종 코치들이 내게 음식주문을 시키기도 했다. 뭐든지 직접 해봐야 영어 실력이 늘게 된다면서.”
코치나 선수들과 부대낀 적은 없었나. 동양인 코치를 보는 선입견으로 생긴 해프닝 등이 있을 것 같은데.
“한 번은 남미 출신의 선수가 내게 큰 실수를 했다(자세한 내용은 공개하길 꺼려했다). 여기 와서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는데 그때는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터라 감정 제어가 안됐다. 헬멧, 방망이, 쓰레기통, 심지어 휴대폰까지 모두 내던졌다. 모두가 깜짝 놀랐고, 감히 내게 말을 붙이지 못할 정도였다. 그날 라일리 웨스트맨이란 포수 코디네이터를 찾아가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냥 한 소리가 아니었다. 진짜 돌아가려 했다. 내게 예의 없이 구는 선수랑 함께 생활하는 게 너무 싫었다. 그날 밤 이곳에 있는 7명의 코치가 모두 내 방을 찾아왔다. 7명의 코치들과 내 방에서 맥주를 마시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모든 코치들이 그 선수 뒷담화를 하는 게 아닌가. 순전 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얘기를 나누면서 감정이 가라앉았고, 결국 그 선수한테 장문의 반성문을 받는 걸로 조용히 정리됐다.”
그렇게 한 번 대폭발을 하고 나면 더 친해지지 않나.
“구단에선 그 선수에게 페널티를 부과하겠다고 했는데 내가 반대했다. 난 코치이고, 그런 선수를 가르쳐야 할 책임이 내게 있다고 말했더니 굉장히 놀라워하더라. 그 말을 준비하면서 번역기 도움을 많이 받았다(웃음). 망가진 휴대폰 대신 중고폰을 구입해서 쓰고 있고. 맞다. 그 일 이후로 코치들과 더 끈끈해진 건 사실이다. ‘아, 나도 이들한테 보호받고 있구나’ 하는 고마운 마음도 들었고.”
휴대폰을 잃은 대신 사람을 얻은 것 같다(웃음). 코치 홍성흔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가. 여기서 어디까지 도달하고 싶은 건지 궁금하다.
“찬호 형이 말하길 메이저리그 코치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하더라. 목적지를 정하는 대신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다. 미국 생활을 하면 할수록 이곳이 굉장히 냉정한 곳이란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사탕이 녹을 때까지 입에 물고 있다가 다 녹거나 약간의 쓴맛이 나면 그냥 뱉어 버린다. 한국은 정이란 게 있지 않나. 여긴 무조건 해야만 한다. 봐주는 일이 없다. 잘해야지만 살아남는 곳이다.”
홍성흔에게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정식 코치란 어떤 의미인가?
“취업비자를 받는 것?(웃음) 월급도 받고, 호텔, 식비 등 모든 걸 지원받는 것?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홍성흔이란 코치의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선수 때 못 이룬 꿈을 나이 먹어서, 은퇴 후에 경험하고 있다는 것도 의미가 크다.”
샌디에이고 마이너리그 코치들이 본 ‘홍 코치’
홍성흔은 애리조나에서 보낸 6개월 넘는 시간 동안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코치 홍성흔이 감사를 전하고 싶은 코칭스태프를 찾아다니며 관련 인터뷰를 진행했다.

<오티즈 타격 코치와 홍성흔.(사진=이영미)>
타격 코디네이터인 루이스 오티즈(Luis Ortiz)는 코치 홍성흔의 장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홍 코치는 항상 배우려는 자세를 갖고 있다. 그런 열정이 우리 팀에 긍정의 에너지를 전해준다. 홍 코치처럼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지도자는 반드시 좋은 결과가 뒤따른다. 난 홍 코치를 처음 봤을 때 그가 여기서 살아남으리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절제하면서도 위트가 넘쳤고,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자세가 탁월했다. 야구 시즌은 길다. 재미가 없으면 그 긴 시즌을 감당하기 어렵다. 홍 코치는 단조로운 생활을 하는 선수들에게 ‘재미’를 심어줬다. 우리가 홍 코치를 만난 건 행운이나 마찬가지다.”
<홍성흔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라일리 웨스트맨 배터리 코치.(사진=이영미)>
라일리 웨스트맨(Ryley Westman) 포수 코디네이터
“홍 코치는 거짓으로 밝은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니라 진실된 마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선수들과의 대화를 잘 하기 위해 영어 수업을 따로 듣고 있다는 얘기에 그가 뒤에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겸손하고 이기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본인의 이득을 위해 코치가 되려고 하는데 그는 그렇지 않다. 선수들을 위해서 항상 노력하는 사람이다. 좋은 지도자가 되기 위해선 선수들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홍 코치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1년 만에 우리 구단에 자리를 잡았다는 게 놀랍다. 지금처럼 지속적으로 열정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그가 원하는 미래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게 어떤 자리든지 말이다.”
웨스트맨 코치는홍성흔이 출연했던 샴푸 광고를거론했다.
“홍 코치를 처음 만난 후 그의 프로필이 궁금해서 구글로 검색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전에 찍었던 샴푸 광고 사진이 보이는 게 아닌가. 그래서 그 사진만 다운받아 프린트해선 샤워실에 있는 샴푸통에 다 붙여 놓았다. 샤워실에 12병 정도의 샴푸통이 있는데 그 사진을 하나씩 붙여 놓고 사용 중이다(웃음).”
<포수 인스트럭터 존 네스터가 말하는 홍성흔.(사진=이영미)>
존 네스터(John Nester) 포수 인스트럭터
“여기 있는 선수들은 대부분 나이가 어리다. 그런 선수들은 야구를 재미있고 즐겁게 인식해야 동기부여가 된다. 그런 점에서 홍 코치의 유머는 선수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편이다. 영어 실력이 뛰어나지 않아도 선수들은 그의 얘기에 배꼽을 잡고 웃는다. 난 여러 나라에서 온 코치들을 만나봤는데 홍 코치처럼 짧은 시간에 대화가 가능할 정도의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무척 신기할 정도이다. 무엇보다 그는 예의가 바른 사람이다. 그 부분은 야구를 배우는 선수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에이시 고로키와 홍성흔. 박찬호의 소개로 홍성흔에게 샌디에이고 인턴 코치 자리를 내준 인물이다.(사진=이영미)>
에이시 고로키(전 LA 다저스의 아시아 담당 스카우트로 활약하며 구로다와 사이토를 영입했던 인물. 지금은 샌디에이고 구단 임원으로 홍성흔을 정식 코치로 발령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내가 홍 코치를 알게 된 건 박찬호와의 친분 때문이다. 박찬호가 우리에게 홍 코치를 소개해줬다. 파드리스는 유망주 육성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좋은 지도자를 만들어가는 것도 선수 육성 못지않게 중요하다. 박찬호가 적절한 타이밍에 아주 훌륭한 인성을 가진 홍 코치를 소개시켜줬다. 박찬호 말로는 에너지가 차고 넘치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 말 그대로이더라(웃음). 한번은 마이너리그 코치들을 담당하는 디렉터가 내게 전화를 걸어선 홍 코치를 정식 코치로 발령내면 안 되겠느냐고 묻더라. 난 그 얘기를 듣고, ‘나야 당연히 찬성이지만 그 질문은 당사자에게 먼저 물어봐야 하는 게 아니냐’고 답했다. 홍 코치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했다. 그 경험들을 선수들에게 전할 수 있으니 우리로선 그가 우리 팀에 온 게 큰 행운인 셈이다.”
<팜 디렉터 샘 기니에와 홍성흔.(사진=이영미)>
샘 기에니(Sam Geaney) 팜 디렉터
“홍 코치를 정식 코치로 선임한 것은 그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선수들을 대하는 그의 열정과 노력은 우리도 배울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모든 코치들이 홍이 정식 코치가 되는데 찬성 의견을 나타냈다. 그는 이제 파드리스 구단의 한 일원이 됐다. 해외에서 온 코치들 중 홍 코치처럼 제대로 자리매김한 코치를 보긴 어렵다. 홍 코치를 우리에게 보내준 KBO리그에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홍성흔에게 가장 많은 도움을 준 로페즈 타격 코치.(사진=이영미)>
로페즈(Lopez) 타격 코치
“난 홍 코치의 열정이 부럽다. 그는 선수들을 즐겁게 해주는 방법을 알고 있다. 애리조나에 처음 오는 나이 어린 선수들은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 낯선 음식 문화에 적응하기 어려워한다. 이럴 때마다 홍 코치는 선수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인사를 건넸다. 우리 팀 선수가 삼진을 당해 벤치에서 슬퍼하고 있으면 홍 코치는 그 선수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들이며 괜찮다고 위로해줬다. 그가 항상 하는 말이 있는데 ‘Keep Fighting’이란 말이다. 그 말이 선수들에게 큰 힘과 위로를 준다. 그는 선수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이다.”
로페즈 코치는 코치 홍성흔이 감독 자리에까지 오를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물론 메이저리그 감독이 아닌 마이너리그 감독이라고 설명했지만 그만큼 홍성흔의 지도법이 인정받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맨 땅에 헤딩한다고 모두 인정받는 건 아니다. 맨 땅에 헤딩한다고 모두 살아남는 것도 아니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든 생각은 한 가지. 홍성흔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게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이 모든 건 홍성흔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코치 홍성흔의 질주가 어디까지 향할지 지켜봐야 겠다.(사진=이영미)>
<미국 애리조나=이영미 기자, 통역 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