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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시는 하나님
이사야 57:17~21
지난 주일 저녁에 우리는 이사야 57장 14절 이하를 함께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 본문에서 이르기를 하나님은 지극히 존귀하신 분, 영원히 거하신 분, 거룩하신 분, 높고 거룩한 곳에 계신 분이시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렇게 거룩하시고 지극히 높은 곳에 거하시는 그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택한 백성들을 굽어 보시고, 그들과 함께 거하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시어 굽어 찾아오시고 함께하시는 그의 백성에 대하여 이르기를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라고 이어서 밝히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는 인간적으로 흠이 전혀 없는 자가 아닙니다. 도리어 고난 중에 깨어지고 죄악의 공격에 직면하여 흔들리면서 주님의 은혜의 옷자락을 붙들면서 지켜달라고 매달리는 자입니다. 많은 실패와 넘어짐을 겪었으며, 자기 자신으로서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음을 자각하여,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나옵니다.”라고 고백하는 자입니다. 그는 여전히 자기 자신을 자랑할 꺼리가 전혀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붙잡으셔서 영적인 은사의 귀한 그릇으로 크게 사용될지라도, “이러한 능력과 은사들은 내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이 하신 것이요 나는 진짜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고백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세월이 가고 신앙의 연륜이 깊어져갔지만 여전히 하나님 앞에 서기만 하면 주님께서 자기 같은 죄인을 품어주시고 지금까지 한결같이 함께해주신 나날들을 인하여 늘 콧날이 시큰거리며 눈물을 종종 흘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강압적으로 자기의 영성을 자랑하거나 강요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과 함께 하시고 앞으로도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참으로 오해 참으시는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 우리가 잘못과 허물과 실수가 있어도 잠시 노하셨더라도 진노를 오래 품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혹시라도 너무 혼이 나서 주눅이 들까봐 늘 부족하여도 격려해주고 우리 눈치를 보시고 위로자와 격려자를 붙여주시고, 자기 백성이 고난 가운데 지치고 낙심할까봐 종종 기쁜 일들도 허락하시면서 다시금 용기를 내어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본문 말씀인 17절 이하에서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고쳐주시는 자로서 자기를 소개하고 계십니다.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의 탐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고 노하였으나 그가 아직도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걸어가도다”
여기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죄악을 ‘탐심’의 죄악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에 가장 근원적인 죄악이 바로 탐욕입니다.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더 가지려는 욕심 때문에 인간은 끝없는 죄악의 늪으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주어진 분수보다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에서 금지된 것들을 탐하는 욕망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패망으로 이끌어가는 주된 원인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더 많이, 더 높이, 더 넓게 자기의 소유를 자기려고 탐심을 부림으로 인하여 오히려 더 가지고 있던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는 많이 있지 않습니까? 성령의 사람 다윗조차 금지된 것, 남의 것을 탐내다가 얼마나 많은 슬픔과 괴로움의 징계의 쓰라림을 맛봐야 했습니다. 또한 부귀와 영광과 전무후무한 지혜까지 받아 가졌던 솔로몬 왕조차 그러하였습니다. 그도 탐욕의 늪에 빠져서 많은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맞아들이되 후궁만 칠백명 첩이 삼백명이나 되었습니다. 이 수많은 여인들을 탐한 솔로몬은 신명기 17:17 말씀에 이스라엘의 왕은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라고 하신 계명을 어겼으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라고 하였는데, 배를 건조하여 멀리 다시스까지 보내어 금과 은과 상아와 원숭이와 공작들을 실어와서 자기 왕궁에 금과 은이 널리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노년에 환난이 찾아오고 그의 아들 대에는 나라가 반쪽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사 시대의 기드온도 그러합니다. 그에게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게 하심으로써 백성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미디안 전쟁이 끝나자마자 마음에 큰 물욕이 생겨나서 백성들로부터 금고리를 달라고 청하여 자기 집에 채우고 금으로 에봇까지 만들었습니다. 또 아내도 많이 얻어서 자식들이 칠십 명이나 늘어났습니다. 그러더니 그가 죽자마자 아들 중에서 악한 아들 아비멜렉이 그 형제들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다 모아놓고 깡패들을 시켜서 다 죽여버렸습니다. 이는 기드온이 가졌던 물욕과 여인에 대한 욕심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 권력에 대한 욕심, 눈의 정욕과 쾌락에 대한 욕심은 마치 강물이 쉼없이 흘러 들어가도 늘 채워지지 않는 바다의 무서운 탐욕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사망 권세가 죽은 자들을 끝없이 삼킬지라도 족하게 여기지 않고 전쟁이나 전염병이나 사고를 통하여 혹은 늙고 병듦을 통하여 사람들을 계속하여 족족 사망의 캄캄한 곳으로 데려가고 있는데, 탐욕은 마치 사망처럼 끝이 없고 결코 족하게 여기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탐욕이 가장 끈질긴 무서운 죄악의 본성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스스로를 살펴서 탐심을 물리쳐야 합니다. 주님께서 사역하실 때에 청중 중에서 형과 상속 재산 분쟁이 나서 예수님께 말하기를 자기 형에게 명하여 유산을 자기와 나누게 해달라고 말씀해달라고 청하였을 때에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예수님을 재산 상속 분쟁에서 재물을 공정하게 나누도록 개입하는 재판장 역할이나 하는 존재로 치부하였던 그 사람에게 일침을 날리신 것입니다. 재물은 공정하게 나누어 가지도록 해야 하지만, 주님은 그 사람 마음 속에 있는 물질에 대한 탐욕을 보셨던 것입니다. 종종 형제 간에 재산 싸움이 나곤 합니다. 자라나면서 화목했던 형제들도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쯤에는 형제간에 재산 분쟁으로 사이가 벌어지고 지루한 재판에 돌입하여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홧병과 미움으로 병들어 죽는 경우를 보곤 합니다. 재물이 뭔지 그것 때문에 모든 관계가 다 깨어집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관계가 파괴되고 미움과 원망의 관계로 변질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한 말씀 충고하신 후에 거기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고 말씀해주셨습니다. 탐욕 곧 물질의 탐욕으로 망하거나 권력을 탐하다가 망하거나 규범을 넘어서 남의 소유에 대한 이성을 탐하다가 사람들은 망하곤 합니다. 탐욕은 마음에 평안을 도적질하고 영혼의 순결함을 망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가르치라고 권면한 말씀에 이르기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디모데전서 6:9,10)
라고 가르쳐주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고 감사하면서 성실한 땀과 수고를 통하여 재물을 모아서 우리 자신의 모든 쓸 것을 공급하고 나아가 약한 자들을 돕고 나누고 선한 사업에 쓸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재물은 우리의 삶의 목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리의 삶과 선행을 위한 수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쓸 것을 다 아시고 우리의 필요도 구하기 전에 아십니다. 그리고 그는 결코 우리를 떠나거나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아주신다는 그의 신실하신 약속을 분명히 지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주셨을 때 더 많은 것을 탐하지 말고, 적게 주셨을지라도 너무 염려도 말고, 미래에 대하여서도 미리 염려하지 말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아갑시다. 그리하여 탐심의유혹을 물리치고 늘 자족하며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자유인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의 결심과 각오로는 부족할 것이 분명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는 약속의 말씀을 덧붙여 주셨습니다. 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그의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를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17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사람은 그 탐욕스러움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때리시기도 하고 얼굴을 가리고 노하시어 징계함으로 가르쳐주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기 마음의 욕심을 따라 탐욕의 멸망 길을 계속 걸어가곤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러한 심령의 무감각함과 고집스러움 때문에 끝내 망하는 길을 돌이키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나님께서는 할 수 없이 그들을 행한 대로 갚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다 쏟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돌이키시고 그들을 고치시는 일을 하십니다. 더 이상 탐욕의 종이 되지 않고 우상 숭배의 종이 되지 않고 이제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면서 욕심을 버리고 자족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다움을 삶 속에서 갖춰갑니다. 자기의 마음의 생각과 고집대로 살아가던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율법과 그 규례를 자원함으로 행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과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자기 중심의 삶에서 이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이웃을 섬기는 자로서 성숙한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틈엔가 고질적인 욕심이 서서히 약해져갑니다. 돈이 전부라는 생각이 마음을 꽉 붙들고 있었는데, “내 삶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이 계신데 내가 왜 이렇게 돈에 집착하지?”라고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제는 돈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벌고 모으고 움켜 쥐는 데서 얻는 기쁨보다 주님께 드리고 사랑하는 이들과 이웃들과 어려운 이들에게 나누고 베푸는 행복도 굉장히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조금이라도 수중이나 통장에 잔고가 떨어지면 불안에 떨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사람이 수중에 돈이 떨어져가도 걱정하지 않게 됩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는 마음 상태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변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 자신 스스로는 절대로 안 되는 변화입니다. 술이나 도박이나 어떤 중독에 빠진 듯한 세상적인 취미에서 벗어나는 것, 절대로 사람 자신의 힘으로 안 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속박에서 자유로워집니다. 달라집니다. 이것은 사람의 결심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고치주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만져주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 마음 깊은 곳을 치유해주심으로써 우리가 본질적으로 치유를 받고 내면에서부터 회복이 되면서 그 동안 우리를 붙잡고 있던 욕심들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스스로는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고치실 수 있습니다. 백살이 되어도 안 고쳐지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지시고 고쳐주시고자 하시면 우리는 기적적으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합시다. 우리를 고쳐주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문제들을 솔직히 아뢰고 우리의 무능력함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 우리를 맡기고 고쳐주시기를 간절히 간청하십시오. 분명히 주님은 고쳐주실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지으신 자요, 우리의 문제점이 정확히 무엇임을 아시는 자요, 우리를 고칠 능력이 충분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도 어느 틈엔간 변화된 자신의 달라진 모습에 깜짝 놀라서 이렇게 고쳐주신 우리 하나님, 우리 주님, 우리 성령께 진정 찬양하며 영광 돌리게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쳐주시는 하나님이 주의 백성들을 만지시는 결과는 평강입니다. 1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시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입술로는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도 실상은 자기를 섬기며 신앙을 자기 욕망의 수단으로 삼고 실제로는 재물 우상, 성공 우상, 쾌락 우상, 자기 자신의 우상을 섬기기에 급급하였던 그의 백성들을 아무리 징계하고 때릴지라도 달라지지 않았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돌이켜서 그들을 고쳐주시는 은혜를 베풀자, 그들이 자기 마음의 길로 걸어가던 데서 돌이켜 주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 때에 그렇게 고침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표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평강입니다. ‘평강’ 히브리어 원어로 ‘샬롬’입니다. ‘샬롬’이란 충만해짐으로부터 오는 평안함입니다. 모든 것이 균형 있는 채워짐으로부터 주어지는 기쁨과 행복입니다. 이 평강은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써 주어지는 충만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특징은 평강입니다. 지금 쫄딱 망했는데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습니다. 근심과 걱정에 잡히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 오히려 한번 다시 시작해볼까 하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이제 다 망했으니 하나님과 함께 다시 해볼까 하는 설레임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고쳐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그의 마음을 만져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신다고 말씀하시면서, 덧붙여 이르신 요한복음 14:27 말씀에 보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만져주시면 심령 깊은 곳에 세상이 줄 수 없는 깊고 견고하고 풍부한 평강이 넘실거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갈 때 이런 저런 일로 인하여 마음에 평강이 없어지고 불안과 두려움과 근심에 휩싸일진대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께 우리 마음을 솔직히 아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과 우리 삶을 고쳐주시기를 간절히 구합시다. 우리의 삶의 환경도 고쳐주시기를 청합시다. 마음의 두려움과 근심과 불안의 문제도 맡기고 고쳐주시기를 청합시다. 그리할진대 고치시는 주님께서,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것입니다. 우리를 고쳐주실 것입니다. 평강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환경도 치유해주실 것입니다. 선지자 엘리사에게 여리고 성 사람들이 나아와서 이 여리고 성의 물이 좋지 못하여 토지 소산이 결실하지 못하고 도중에 떨어진다고 알렸을 때에 엘리사가 그들에게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오라고 시킨 후에 그것을 가지고 물 근원으로 올라가서 그 물 근원에 가서 소금을 던지면서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고 선포하자 그 때 그 땅이 고쳐져서 토지 소산이 풍성히 맺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면서 우리의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께 낱낱이 아룁시다. 그는 우리를 고쳐주실 것이요 우리에게 놀라운 평강을 우리 심령과 우리 삶의 환경에도 넘치게 부어주심으로써 그의 온전한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우리로 누리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완고하고 교만한 자, 하나님을 외면하며 자기를 우상으로 삼고 세상에 온갖 우상과 잡신을 섬기며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그 마음에 늘 깊은 죄와 악을 끊임없이 품고 두려움없이 죄악을 더듬어 찾는 자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들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20절과 2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악인 곧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 자리에 우상을 놓고 자기 자신이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고 그 마음이 완고하고 높아진 마음을 가진 자는 통회하며 마음이 겸손한 자와 정반대로 고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얻지 못합니다. 그는 성령님의 만지심을 받지 못합니다. 그는 세상 것을 다 가진다 해도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사람들 위에 떵떵거리며 군림할지라도 그 마음은 항상 불안합니다. 그의 마음은 늘 더럽고 추하고 악하고 불안한 생각들이 끊임없이 생겨납니다. 늘 자기를 누군가가 죽일 것 같고 자기의 미래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감으로 허덕입니다. 그 영혼은 늘 허기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 대신에 헛된 것들로 채웁니다. 육신의 것, 헛된 우상 숭배, 잡신 숭배, 더러운 세상 정욕, 인간의 권세, 사람들의 찬사 등으로 채우려 몸부림을 칩니다. 하지만 그 허전하고 불안한 마음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요동하며 흔들립니다.
그는 마치 구약 성경에 나오는 첫 이스라엘 왕 사울처럼 늘 쫓기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또한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자마자 죽이려고 했던 헤롯 대왕이 그러하였습니다. 헤롯 대왕은 누군가가 자기 자리를 노린다는 의심과 두려움에 잡혀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의심 때문에 자기 뒤를 이을 장남도 죽이고 다른 아들들도 죽기 4일 전에 살해하고 장모도 아내도 살해합니다. 그래서 그의 친구였던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이르기를
“헤롯의 아들이 되기보다 그의 개 돼지가 되는 것이 안전하다”
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악인은 하나님을 대적함으로써 그 본인 자신이 자신을 망가뜨립니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를 학대하고 괴롭힙니다. 그의 환경과 주변 사람들을 향하여 악을 행함으로써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 벌을 줍니다. 그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하나님께서 선언하셨듯이, 그는 끊임없이 평강을 찾지만 평강이 그를 멀리 밀어내고 그에게는 불안정과 허무와 공포와 장차의 영원한 형벌에 대한 공포, 저주 의식이 그를 뒤쫓습니다. 이는 잠언 28:1 말씀에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악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고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친히 성령의 치유의 손길로 만져주심으로써 고쳐주시고 우리를 향하여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축복하시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하시기에 비록 끝없는 환난과 시험과 위기가 닥칠지라도 흔들리는 풍랑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 심령 깊은 곳에는 흔들림없는 평강이 가득차 있을 것입니다. 마치 지중해의 해상 여행 중에 유라굴로 폭풍을 만났던 사도 바울을 태운 뱃 사람들이 폭풍에 시달려 지쳐 쓰러진 중에 사도 바울은 그 가운데 놀라운 평강을 누리면서 그들을 진두지휘하여 지중해의 한 섬 몰타 섬으로 그들을 안전하게 인도해들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평생 우리에게는 우리 모든 것들을 온전히 고쳐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우리의 모든 것들을 그에게 내어 맡기며 고쳐주시기를 청합시다. 그는 우리 심령과 삶의 환경을 고쳐주실 것이요 우리가 만난 시련 속에서 기꺼이 우리 심령에 강하고 담대함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끝내 환난의 풍파를 뛰어넘는 놀라운 평강을 주시어 너끈히 모든 것을 이겨나갈 수 있게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에게는 그 심령에 진흙물이 솟구쳐나는 요동하는 바다가 있어 그의 삶에 평강이 절대 없을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한 고백록의 한 구절, “하나님이여 주께서 내 영혼을 지으셨나이다. 내 영혼이 주를 찾기까지 내 마음에 평안이 없었나이다”라는 고백은 참으로 진실한 말입니다. 우리 영혼과 삶은 오직 고치시는 하나님,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