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가난한 시골출신으로 영국으로 건너가 사업가로 성공한 최금례 화장의 이야기를 실어봅니다. 유럽 12 개국에서 1,200 개 매장, 연 매출 6,000억 원이라는 고속 성장을 이룬 글로벌 기업 켈리델리의 창업자이자 회장이라네요. 이 글을 읽는 이들이 그녀의 포기하지 않는 집념과 끈기와 노력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정읍 시골 마을 출신의 "켈리 최" 를 아십니까?’
한국 이름 최금례(54 세) 회장. 도시락을 팔아 영국부자 345 위에 랭크.
"정읍의 시골 출신 흙 수저에 난독증 저서 "웰 씽킹" 1 년 만에 20 만부가 팔리는 베스트 셀러 세종대학교에서 독자 2,000명 초청 강연".
유럽에서 도시락을 팔아 성공한 기적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선데이 타임지에 선정된 주인공입니다. 현재 유럽 12 개국 1,200 개 매장, 연 매출 6,000억 원이라는 고속 성장을 이룬 글로벌 기업 켈리델리의 창업자이자 회장입니다.
정읍의 한 시골 마을에서 8 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는데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두 명은 영양실조로 안타깝게 죽었습니다. 소녀는 정읍의 시골 중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형편 상 대학 진학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6 세의 어린 나이에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읍 역에서 서울 행 기차표를 끊어 난생 처음 기차를 타 보았습니다. 서울에서의 삶은 쉽지가 않았지만 와이셔츠 봉제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며 주경, 야독하며 이를 악물고 살았습니다.
라면 한 봉지로 일주일을 버티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기숙사 생활을 함께 하던 친구가 공장 일을 마치고 야간 고등학교로 가는 버스 안에서 백설기 떡을 먹다가 목이 막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배가 너무 고파 급하게 끼니를 때우다 발생한 안타까운 사고였습니다. "그 친구도, 나도 이렇게 살려고 태어 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소녀의 꿈은 "패션 디자인" 이었습니다.
그래서 패션디자이너가 되려고 서점에서 수많은 디자인 서적들을 접해 본 결과 가까운 일본의 패션 디자인 관련 잡지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실제로 대학의 디자인학과 학생들은 일본의 패션 디자인 잡지들을 거의 참고하였고, 이에 일본 유학을 생각하였습니다.
야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공장을 그만 두고 어린 나이에 자신의 큰 꿈을 위하여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일본으로 무작정 떠났습니다. 디자인을 꿈 꾸게된 계기도 참으로 우연이었습니다. 와이셔츠 공장에서 난생 처음 외국인을 보았는데 자신이 매일 만들던 와이셔츠가 그 외국인이 디자인한 제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나도 해 볼 수 있겠다" 는 생각이 들었고, 동생에게 "유서" 를 써서 맡겨 놓고 무작정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일본에 와보니 일본의 디자인은 유럽의 디자인을 베낀 거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패션 디자인의 유행이 유럽, 특히 파리에서 오고 있었던 것 입니다. 그래서 다시 "봉주르" 라는 단어 하나도? 모른 채 프랑스 파리로 또 무모하게 떠났습니다. 프랑스 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했지만 편, 입학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알바를 해가며 패션 디자인 대학교를 두 군데나 졸업하였는데 그 만큼 열정이 있었습니다. 본명이 "최금례" 라 프랑스에서는 이름이 복잡하여 교수님이 "너는 앞으로 "프랑수아즈" 라고 부르겠다." 고 하였습니다.
젊은 시절 유럽에서 생활을 많이 한 탓에 한국어를 잃어버리게 되고, 초등학교 수준도 안되어 사업하기가 어려워 그 때 "금례" 에서 "Kelly"(켈리)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소녀는 프랑스 파리의 패션 학교에서 전시 광고업을 하던 친구를 도와주다 본격적인 동업을 하며 사업에 첫 발을 디뎠는데 한 때 화려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결과는 보기 좋게 "참패" 였습니다.
소녀는 정말 죽을 만큼 열심히 살았는데 빚만 10 억 원이나 남았습니다. 소녀는 다시 무일푼으로 인생 제 2 막을 새롭게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2 년간 할 수 있는 모든 준비와 공부는 다 마치었습니다.
그리고 "안 되겠다 싶어" 그 때부터 세계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습관" 을 면밀히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5 년 안에 반드시 성공 할 수 있다" 는 원대한 목표를 세웠고, 목표를 세운 뒤 다시 성공한 사람들의 습관을 분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마존 정글을 혼자 헤치고 가는 것과 누군가 지나간 길을 밟고 가는 건 천지 차이" 라고 생각 하였습니다. 소녀는 "내가 무엇을 좋아 하고 잘 할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동양 음식" 으로 '도시락' 사업을 하기로 생각을 정하였습니다.
'드니 하네칸' 당시 맥도날드 유럽의 최고 경영자이자 스시 장인 "야마모토 구니오" 를 무작정 수소문 하여 찾아 갔습니다. 그러나 그를 만나는 건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를 만나기 위하여 몇 날, 며칠을 노력하며 수 없이 노크를 하였지만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매일 출근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회사 앞에 새벽부터 진을 치고 기다렸지만 직원들은 번번이 거절하였고, 실패하였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 "야마모토 구니오" 대표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소녀는 손을 힘차게 흔들고 고함을 쳤습니다.
그 모습을 본 대표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직원에게 물었습니다. 직원은 개의치 않는 듯 "며칠 째 대표님을 꼭 만나야 한다며 막무가내로 기다리고 있었다." 고 했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어렵사리 맥드날드 유럽의 최고 경영자와 만날 수 있었습니다.
소녀는 아주 겸손하고, 간절하게 자신의 계획과 포부를 전하며 자문을 부탁하였습니다. "대표님의 고귀한 자문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만약에 지금 대표님의 말씀처럼 제가 바로 실천 할 테니 저에게 기회를 한 번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소녀는 확신에 찬 어조로 당당하고, 야무지게 악착 같이 매달렸습니다. "대표님 제가 열심히 노력하여 초밥과 김밥을 만들 테니 대표님의 체인점에 납품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소녀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 녀의 당찬 모습에 마음의 문을 연 "야마모토 구니오" 대표는 "알았다" 며 대답했습니다. 이는 정읍 시골 출신 소녀의 성공의 계기를 마련하는 큰 발판이 되었습니다. 소녀는 열심히 준비하고, 노력하여 유럽의 대형 마트 체인에 초밥과 김밥을 납품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유럽과 남미 12 개국 1,200 개의 푸드 매장과 연 매출 6,000 억원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단 5 년 만에 마침내 이뤄 내었습니다. 소녀가 세운 기업 "켈리델리" 는 매 해 지속적으로 성장해 가면서 100년 기업이 되기 위한 혁신 시스템을 차례로 구축해 나갔습니다.
그는 언제나 "행복" 을 1 순위로 정하고 이를 기업 문화에도 적용하여 자신과 가족 뿐 아니라 직원, 가맹주, 파트너사와 고객, 나아가 전 인류까지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실천을 위한 방법으로 저술과 강연, 유튜브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하여 자신이 깨달은 인생의 비밀들을 널리 전하며 많은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인생의 멘토" 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그 영향으로 "덕분에 삶이 바뀌었습니다." 라는 많은 메시지를 다시 동력으로 삼아 오늘도 많은 이들에게 꿈과 희망의 에너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동갑내기 프랑스인 제롬 카스탕이며, 슬하에 딸 하나를 자녀로 두었습니다.
그의 소식은? KBS 아침마당에 90세이신 어머니와 함께 출연하여 전국에 방영되어 큰 화제를 낳기도 하였습니다. 정읍 시골에서 8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두 동생을 영양실조로 잃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 정읍 소녀의 꿈을 향한 대 장정에 대해서 여러분들의 소감은 어떠신지요?
오늘 어렵고, 실의에 빠진 많은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큰 뉴스입니다.
~ 칼럼니스트 이형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