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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장
치유와 구원
치유
치유의 사례가 사회 안의 어느 곳에서나 나타난다. 전통의학을 통한 치유가 일반적이다. 그런데 그러한 것 없이 우리가 어디에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때로는 치유가 대체의학을 통하여 일어나기도 한다. 이를테면 침술 같은 것이다. 때로는 전혀 의학에 의하지 않고서도 치유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치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이 사실을 그들의 영적 삶의 한 부분으로 그리고 천국을 침노하는 증거로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서 매우 고귀한 치유사역은 사도행전에서 계속되었다(예, 행 3;1, 9:18, 18:8, 20:9-10, 28:8). 서신서에서도 나타난다(예 고후 12:12, 고전 12:9, 30, 야 5:16). 성령의 놀랄만한 은사를 따라 섭리(통치)가 사도시대의 마지막에 멈추었다는 속설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그들의 중간쯤에서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치유사역을 잘 알고 있었던 교부들의 증거를 신뢰하고 그것들을 기대한다면 이것은 논증적으로 잘못이다. 여기에 몇 가지 사례가 있다. 곧, 죤 윔버(John Wimber)가 그의 책 ‘능력 복음주의’(1)의 부록 A에 편리하게 수집하였다. 저스틴(Justin)은 첫째와 둘째의 ‘사과’(apology)란 책에서 그 주제에 대하여 많은 말을 한 바 있다. 그는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에게 십자가형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축귀사역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치유하였으며 치유하고 있다(2 Apol. 6). 2세기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이레니우스는 확실하고 진정한 축귀로부터 사악한 영이 깨끗해진 사람들은 자주 자신들을 자주 교회에 참석한다고 말하였다. 다른 치유 사역은 손을 환자위에 놓으므로 치유한다. 그래서 그들은 고침을 받았다(Adv. Haer. 2.32). 터툴리안은 그 주제에 대하여 보다 분명하다. 그리고 사악한 영으로부터 구출된 사례를 들었는데 그들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기도로서 여러 가지 질병을 치유하였던 개인들 (예를 들면 안토누스 피우스의 아버지 세베루스)의 이름을 거명하였다(Apol.23).
밀란베어의 사제 암브로스(Ambrose)는 치유의 은혜로 방언의 은사를 부어주시는 아버지에게 증거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치유와 어두움의 세력으로부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하나님의 간섭에 관하여 글을 쓴 사람은 그의 잘 알려진 문하생이었던 어거스틴(Augustine) 이었다. 그것은 때로는 반대이라고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22.28)에서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나야 한다고 요청한 기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진실은 오늘날 기적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행한다. 때로는 그의 성례전이나 때로는 성도들의 유품의 중재를 통하여 이뤄진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경건한 일반화로서 고려되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사례를 수록한 전 성서주석집을 주었다. 곧, 소경의 고침, 관상의 직장, 중풍, 그리고 헤르니아 탈장, 통풍 등을 고쳤으며, 히포에 사는 한 어린 처녀의 귀신들림을 풀어주고 어거스틴의 이웃에 대하여 그리고 귀신(마귀)의 격노로 눈이 빠져나와서 연약한 포도나무 가지에 매달은 귀신들린 소년을 위하여 고침으로 그 눈은 회복되었다. 그는 오늘날 기적의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단순한 사실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우리가 읽는 성경에서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그가 선택하시는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을 사용 하신다.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시대를 통하여 아멘이라고 말하여야 하는 교회를 요청한다. 비록 역사적으로 보다 이성적인 시대 안에서 조차 하나님의 능력의 이러한 명세는 생명적인 믿음의 시대에서 보다더 드물게 있었다.
물론 우리들은 기도에도 불구하고 손을 모으고 보다 깊은 믿음의 자세를 가진 사람이라도 고침을 받지 못한 헌신적인 신자들의 사례를 알고 있다. 우리들은 깊은 신비로서 면면히 알고 있으나 치유사역에 관하여 매끄럽지 못한 일반화는 쓸모가 있다. 기도 없는 것 또는 믿음이 부족함에서 물리적인 치유의 실패를 경험하는 데에 있어 잔인함과 천진난만함의 두 가지가 있다. 고난과 죽음은 우리 모두가 직면하게 될 궁극적인 신비로 남는다. 그리고 이러한 죽을 인생을 결속한 것 안에 마지막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성경적인 근거는 이러한 치유의 주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좋은 것이며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이 그들의 중심에서 보려고 기대하였던 어떤 것임이 분명하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
창세기는 하나님이 인류를 남자와 여자로 함께 온전하게 만드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을 동산에 두셨다. 그들에게 고난과 죽음이 목적이었다는 암시는 없었다. 반대로 고난, 질병 그리고 죽음은 사람이 원래의 순결과 순종으로부터 재앙을 불러온 타락의 부분이라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하였다. 그리고 같은 장 창세기 3장에서 우리는 인간의 반역에 의하여 어떤 폭동 같은 것을 인식할 수 있으며 하나님 자신이 구세주로서 들어오시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그들의 벌거벗음을 가죽옷으로 가려주시는데 이것이야 말로 성경에서 가장 빠른 희생의 암시이며 속죄에 대한 대가의 제안이다. 그리고 구약성경을 통하여 초기의 그림에 동조하면 우리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볼 수 있다. 구원이나 총체적인 것에 관한 환상적이거나 영적인 것이 없다. 그것은 황당스럽게도 물리적인 것이다. 그것은 사망으로부터의 구출을 의미(시 6:4,5)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힘(시 107:13)이며, 질병(사 38:20), 그리고 많은 종류의 괴로움(예 렘 30:7)으로부터의 구출이다. 그것은 적으로부터의 구출(예 삼상 14:23)이다. 하나님이 특별하게 들어 쓰신, 예를 들면, 삼손, 기드온 같은 구원자들에 의하여 초래되었다. 때때로 하나님의 홀로 중재하심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그의 약속한 백성의 번영에 방해와 위협을 주는 어떠한 것을 제거하기 위한 사역에서 하나님을 본다. 그것이 바로 구원 또는 치유를 말하는 “야사(yasha)”의 근본적인 뿌리를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회복에 대한 목표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의 이해를 강조하셨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
복음서에서 구원이란 말의 사용에는 모호한 점이 있다. 그것은 보다 깊은 의미에서 ‘치유하다’와 ‘구출하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마가복음 2장 1-12절과 마가복음 5장 34절, 10장 52절과 같은 구절에서 중풍병자의 이야기로부터 매우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믿음은 육체적 치유의 대문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보다 깊은 구원의 의미인 영적 회복을 가져온다. 성경 저자는 신성과 속세,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의 우리의 후기 계몽주의시대의 이원론에 대한 것을 알지 못하였다. ‘구원’이란 말은 예수님의 치유의 기적에 대하여 복음서 저자들에 의하여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었던 단어이다. 이처럼 접촉하는 대로 구원(치유)받았다(막 6:56). 소경 바돌로메가 예수님 안에서 구원을 얻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 문둥병자(한센병자)(눅 17:19), 손마른 사람(막 3:3-4)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다. 보편적으로 언제나 그렇듯이 예수님은 믿음에 대한 반응으로 치유하셨음을 말하여 주고 있다. “너희의 믿음이 너희를 구원하였다”는 계속되는 후렴이다(예, 막 9:23, 11:24, 눅 8:50). 동일하게 이러한 치유사역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식하는데 유효한 것이다. 그것들이 예수님 개인을 메시아로 묶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의 리더쉽과 그분 개인 아래서 천국은 침노 당한다. 남자와 여자가 구원을 받고 치유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예수님 자신에 그리고 예수님의 전적인 사역에 의하여 이루어진다(요 5:34, 10L9, 12:47). 예수님과 삭캐오의 이야기에서 우리 앞에 보다 더 강력하게 인도한 것이 어디에도 없다. 누가복음 19장 5-6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삭캐오의 집에 오셔서 9절에서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렸다.” 라고 말씀하는 것을 듣는다. 두 가지는 동일한 것이다.
치유는 계속되다
예수님은 치유 사역을 제자들에게 계속시키셨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모든 귀신들과 질병을 치료하는 권세와 능력을 그의 제자들에게 사명으로 주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설교하고 병을 고치기 위하여 내보내셨다. 그리고 다시 70명의 제자들에게 임무를 부여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병자들을 고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고 전하라고 하셨다(눅 10:9).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위탁으로서 이것을 분명하게 고려하였다. 그들이 확신하였던 하나님의 나라(천국)은 단지 말로서가 아니라, 권능이었다(고전 4:20). 그것은 사도행전 처음 3장에서와 마지막 28장에서 현저히 나타난다. 야고보 사도는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형제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기대했다. 그리고 그것은 2세기에서 3세기 위에서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저자와 함께 옛 옥스퍼드 대학의 안뜰에 있는 상상을 하여 보자. 쿼드(안뜰건물)에 있는 방에 한 젊은 사람이 침대에 누워있다. 그 사람은 여러 주일동안 등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야고보서 5장 14절을 읽었다. 그리고 순종하여서 대학에 있는 그의 교구 담당인 그리스도인 지도자와 저자를 함께 불렸다. 우리들은 그를 위하여 손을 그에게 얹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런 다음 일어나서 함께 산보하자고 종용했다. 그 젊은이는 안뜰을 현저한 기쁨으로 여러 차례 돌았다. 우리는 그로 하여금 여러 주 동안 그의 알맞은 식사를 하도록 재촉하였다.
또는 보호감호소에서 죽어가는 우리 교회에 한 노파를 방문하도록 소환을 받았을 때 그 노파는 저자가 그녀를 위하여 기도할 때 순간적으로 의식을 회복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의료진들은 분명하게 그녀는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전에 죽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 날 저녁 그녀가 회복 단계에 들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성격도 바뀌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돌아왔다. 곧, 그녀에 대하여 알고 있었던 예리함과 불평이 사라지고 새로운 양순함과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이 자라나서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으며 몇 해를 더 살았다.
저자는 말라위(Mallawi)의 상황을 생각해본다. 성직과 회의가 있었는데 마침내 성직자가 나에게 자기 다리를 위하여 기도하여 달라고 요구하였다. 분명히 가능성이 없었다. 그리고 저자의 믿음은 신뢰로부터 멀리 있었다. 저자는 다른 두 사람을 데리고 와서 그들과 함께 기도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 성직자의 다리에 사랑하는 손을 얹고 하나님에게 우리의 심령을 다하여 기도하였다. 그러자 그 성직자는 발로 구르며 교회 주변을 돌아가며 춤을 추었다. 우리가 주의 하라고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또는 병원의 중환자실에서의 한 장면을 연상하여 보자. 버스와 충돌한 21세의 소녀가 심하게 머리 속에 중상을 입었다. 의학적으로는 죽었거나 기회가 주어진다면, 배추와 같은 형편이었다. 저자의 동기생과 본인이 들어가서 그녀를 위하여 기도를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허락을 받아서 우리가 도착하여 보니 그녀는 사고 이래로 나흘 동안 혼수상태로 있었는데 일시적으로 우리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하자 간호사가 나가버렸다. 신비스럽게도 환자의 고통이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한 참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녀를 완전하게 치유하실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것은 약 오후 5시 경이었다. 그 소녀는 일어나서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였다(물론, 사고 이후 한번도 식사를 한 적이 없었지만) 점식식사 때에는 일어났으며 하루 만에 보호자실로 돌아 왔다. 그리고 며칠 이후에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제는 해외 선교사역을 하고 있다. 그녀의 치유는 병원 주치의로부터 문지기에 이르기까지 병원의 화제가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의 경이로운 현시이었으며 인간의 예지를 뒤죽박죽으로 만든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이 언제나 그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치유에서 실패
저자의 개인적인 체험으로부터 언급한 바 있는 그러한 이야기는 치유하시는 주님의 권능의 영광스러운 표현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절반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치유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 첫째 날부터 있었던 사실이다. 사도들에 의하여 초래된 치유 사역은 비록 그들이 영광스러운 사역을 계속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주인이신 것과 동일한 본질이 아니었다. 한 가지 예로 들면, 예수님은 실패하신 적이 없으시다. 그리고 그 치유 이후에 역전이 한번도 없으시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 치유사 들은 두 가지를 경험한다. 다른 예로서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완전하셨던 것으로 여겨지며 치유가 완성되기 전에 약간의 지연과 새롭게 된 사역이 있었던 두 가지 기록된 사건과는 달리 순간적이다. 교회에서의 치유사역은 불행하게도 그와 같지 않다. 가끔 지연이 있으며 가끔 실패도 있다.
어째서 그처럼 우리가 치유를 위하여 기도하였을 때 가끔 실패를 경험하는가? 문제는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사도 바울조차 밀레도(딤후 4:20)에 있는 드로비모(Trophimus)가 병들어서 남겨두었다고 말해야 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처지에 응답되지 않는 기도를 기록해야 했는데 그것은 자기의 육체의 가시라고 부르는 어떤 고통을 제거하여 달라고 주님께 빌었다(고후 12:8). 모든 것이 허사였다. 그의 기도는 비록 주님께서 그의 강력한 능력을 주셨으나 그 능력은 인간의 연약함에서 결실을 가져오며 그로 하여금 상황에 직면하도록 하는 것이지만 긍정적인 확답을 받지 못하였다. 그것이 오늘 날에도 그러한 경우가 가끔 있다.
치유(2)에서 프란시스 맥넉트( Francis MacNutt)와 능력의 치유(3)의 죤 윔버(John Wimber)가 표제의 이 이슈(issue)와 위대한 진실에 직면하였다. 그들 두 자료는 치유 사역에 많이 사용되어진다. 주제에 대한 그들의 저작은 깊은 반영과 많은 체험 그리고 지혜로부터 왔다. 치유를 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 몸의 무관심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죄를 고백하지 않거나 불확실한 신앙 때문만은 아니다. 아니, 그러한 요구를 한다는 것은 손상을 더하는 것이며 이미 크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유 없는 괴로움을 쌓는 것이다(때로는 그것이 경우가 될 수 있으며 그래서 만일 그것이 표출되어야 필요가 있다면). 그러나 네 가지 주요한 이유가 하나님의 은혜가 치유에 대하여 방해물로서 저자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
첫째, 우리가 묻지 않기 때문에(야 4:2)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아니한 경우가 가끔 있다. 많은 교회와 목사들이 오늘날에는 하나님이 치유하고 있음을 믿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어디서나 그들의 가르침 가운데서나 교회 생활에서 그 모습을 볼수 없다.
둘째. 우리는 대단히 큰 외적을 가지고 있다.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사단은 질병을 포함하고 있다. 복음서의 곱사등이 부인을 생각하여 보자(눅 13:16): 사단은 여러 해 동안 그녀의 등을 굽게 하였었다. 육신에 있는 바울의 가시를 생각하여 보자 - 그것은 그를 치는 사단의 사자이었다. 저자는 나의 친구가 들어 왔을 때 사라지는 병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사악함의 존재를 감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단의 지배로부터 해방되고 떠나가기 위해 도전했다. 우리는 이처럼 고난을 주는 가능한 악마적 차원을 허용하는데 실패한다.
셋째,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에게 신성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다. 그의 치유 사역과 우리들의 것과의 사이에 정말로 연계성이 있다. 그것은 성령에 의하여 허용되었다. 그러나 또한 불연속성이 있다. 그것은 승천에 의하여 허용되었다.
넷째, 구원에는 성경에 정하여 진 그대로 세 가지 시제가 있다. 구원이 이미 성취되었고 증명된 점이다. 우리가 그 구원을 계속적으로 경험하는 점이다. 그리고 구원이 아직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다. - 그리고 주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서 결정적인 참조가 있다는 점이다. 구원과 치유는 이 세상에서는 언제나 불완전하다. 이러한 방법으로 생각하여 보자. 마치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처럼 우리가 질병에 대하여 고통을 받고 괴로움을 당하여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 숙명적인 세상에서 하나님이 그 어느 것도 원치 아니하는 것처럼 두 가지를 허용하신다. 만일 우리가 상황에 대하여 균형을 취하고 있다면 우리들의 현재 상태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의 본래대로가 아니며 우리가 천국에서 하나님의 집을 소유하려 갈 때의 마지막 상태도 아니다 라는 성경적인 통찰로 돌아와야 한다. 바울신학에 맞추어 보면 비록 우리가 침입과 오는 시대의 건강을 유지하는 권능을 즐긴다고 하더라고 우리는 이 시대에 남아 있으며 질병의 공격과 연약함에 따라야 한다. 어느 날 우리는 오는 시대에 충분히 잠겨있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들은 우리에게 그것이 실재임을 보증하며 그것에 대한 갈망을 자극하기 위한 일시적인 열매를 맛본다.
그리스도인의 태도
초대 제자들과 같이 신의 치유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질병의 특별한 경우에 접근하는 것처럼 마음속에 다음의 회상(감상)을 지녀야만 한다.
첫째, 하나님은 치유의 최고의 근원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녀들을 위하여 완전하심(구원)을 계획하신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완전의 맛을 많이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질병과 죽음으로부터 마지막 완전 이후에 완성될 것이다. 그런데 그때에야 온전하게 완성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치유자이시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때로는 하나님은 육체의 자연회복 능력을 통하여, 때로는 의약을 때로는 아무것도 없이 치유하신다. 출애굽기 15장 26절 말씀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를 상기해보자. 만일 치유가 약을 통해서라기보다 기도를 통하여 온다면 더 좋은 것도 아니며 더 나아가 그 나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선택하신 어떠한 방법이든지 사용하시는 통치자이시다. 또한 만일 우리들이 가장 흥미로워하는 것에 있는 것을 본다면 치유를 보류하신다. 중요한 일은 우리가 아플 때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돌아서기 전이라면 주님에게 돌아오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문제를 그분에게 내어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그분의 치유하시는 가능한 길로서 의약이거나 그리스도인 사역 중의 어느 것을 보거나 자유하게 될 것이다.
셋째, 이것으로부터 다음은 우리가 병이 왔을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체험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치기를 원하시는 어떤 것이 있다. 죄의 고백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신 것에 대한 무엇에든지 열림이 죽음에 이르는 모든 숙명적인 병의 마지막 치유가 된다고 하더라도 요구되는 것이다. 오직 이런 것으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축복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이런 것으로서 치유에 대한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뜻에서라기보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임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아니 된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팔을 비트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목적에 협력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에게 나아와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사망조차 온전함을 이루는데 우리를 빼앗지 못한다는 것을 확신한다. 우리는 고치시는 하나님에게로 믿음으로 나아와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의 목적과 그의 시기(때)를 찾고 받아드려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용서된 죄를 가지고 그리고 버려야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치유의 은사에 대하여 그것이 어디로부터 왔던지 열려야 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치유는 다른 종류가 있다는 것을 반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들의 즐거움과 우리의 몸에 빠져서 그 무엇보다도 물리적인 치유를 찾는다. 그러나 그것은 최고한 선은 아니다. 건강이 아니라 천국이 우리들의 목표이다. 그리고 병듦의 대부분은 근원적이거나 본질적으로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대부분은 몸과 마음, 의식과 무의식, 집과 일, 개인과 사회 사이의 갈등에 관련되어 있다. 곧, 가족 안에서의 마찰, 우리의 포부와 성취 사이의 마찰 등이다. 이러한 어떤 분야에서 참을 수 없게 된 긴장이 있을 때 우리는 병을 얻게 되며 그래서 치유를 필요로 한다. 주님은 몸 된 교회가 인간적 치유 안에서 매개체 중의 하나가 되기를 기대하신다. 주님의 오심에 의하여 좌절과 분열의 치유, 그리스도를 믿음에 의한 염려의 치유, 그리스도의 만지심에 의한 아픈 기억의 치유, 그리스도께서 가져온 화해에 의한 증오의 치유, 그리스도의 현존에 의한 공포의 치유, 이러한 것들이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지금 이 생명 안에서 풍성하게 관련되어 있음에 대한 인간의 필요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분야가 있다. 궁극적인 치유는 무덤 건너에 놓여 있다.
구출(구원)
2/3의 세계의 많은 부분에서 신자들에게 있는 것으로서, 우리는 어두움과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익숙하였던 영성의 논쟁점에 왔다. 그러나 서구의 수백만 명을 따라서 저자는 세상의 가장 정교한 도시 중의 하나 가운데서 그것으로 얼굴과 얼굴을 대면할 때까지 전적으로 무시하였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귀신의 전적인 아이디어를 비웃는다. 다른 사람들은 모든 수풀에서 귀신을 본다. 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1. 성경에서 사탄으로 알려진 최고한 하나님 반대 세력이 있는데, 사탄, 악마, 이 세상 임금,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바알세블, 거짓말쟁이, 훼방꾼, 살인자 그리고 그 외의 다른 이름이 있다. 그는 성경 작가들에 의하면 대단히 심각하게 취급하고 있다. 저자로서는 이러한 적대적인 하나님의 세력의 존재에 대하여 강력하게 주장하는 적어도 7가지 고려할 점이 있는 것 같다. 곧, 철학, 신학, 환경, 비학(秘學)적인 고려, 유혹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 성경의 정형적인 증거 그리고 예수님의 명확한 가르침이다. 저자는 사탄의 타락(4)을 믿는 제1장의 머리글을 채웠다. 그러므로 지금 더 이상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저자는 예수님께서 성경 중에서 다른 어떠한 선생보다 귀신(악마)에 관하여 말씀하셨다(예, 마 4:1-11, 마 6:13, 12:22-45, 막 3;22-26, 마 4:15, 요 12:31, 14:30 등). 그것은 단지 적응의 신학과 자기 비하에 근거를 가지므로 인하여 증거의 세력을 피할 수 있으며 엄격한 시험에 저항하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예수님이 사탄의 무서운 실체에 관하여 분명하며 모호하지 않으셨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제자들을 위하여 충분한 것이 될 수 있다.
성경은 악마의 취급을 삼가고 있다. 그러나 사탄은 하늘에서 버려진 존재로서 거만한 자랑을 가진 타락한 천사임을 지적하고 있다(겔 26-28장, 사 14, 눅 10:18, 계 12). 욥기서는 사탄이 하나님과 동등 되지 않으며 반대임을 매우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곧 사탄은 상대적인 자유를 가지고 있으나 긴 사슬에 묶인 하나님의 악마로서 있다. 그의 목적은 하나님의 세계를 훼방하는 것이다. 곧, 사회에서는 전쟁으로, 가정에서는 파괴된 관계를, 몸에서는 질병과 영혼에는 죄를 짓도록 한다. 비록 강력하다고 할지라도 그 마지막은 파멸이다(계 20:10). 한 동안 사단은 모든 선한 것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최고한 것에 대항하여 끊임없는 전쟁을 부과한다.
2. 사탄은 악마들의 연합을 이룬다. 이러한 연합은 인간을 괴롭힌다. 다시 한번 성경은 하나님은 인간뿐만 아니라 천사의 생명의 근원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의 세계에는 천사의 존재가 있다. 그리고 천사는 성경에서 대단히 많은 숫자를 나타낸다. 하나님을 대항하여 사탄의 반란에 참가한 천사들 중 일부는 타락에 동참하였으며 연합을 이루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가 되었다(계 12:7-9, 벧후 2:4, 유 6절). 이 어둠의 영적 세력이 인간을 공격한다. 그들이 확보한 장악력의 크기는 넓고도 다양한 것으로 나타났다. 비록 압박과 소유 사이의 일반적인 구분이 성경에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단어는 가장 다이모니즈타이(daimonizedtahi) 곧, 악마에 속하였다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귀신 들렸다는 구절이다. 이러한 악마의 존재가 지식(막 1:24, 행 19:15), 정서(막 1:24, 야 2:19), 언변, 의지(막 12:44)를 나타내며 그들은 헬라어로 중성으로 간주하고 있다. 만일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기괴하게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성주의 후기 계몽주의시대 - 곧, 초자연적인 형상을 나추어보는 견해를 가진 것으로 동시에 우리 수백만 시민들이 환상적이며 위험하며 신비로운 실재의 세상을 포함하고 있는 것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적인 대안을 시험할 가치가 적어도 있다.
3. 예수님은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시려고 오셨다. 그분은 사탄(마귀)의 역사를 파괴하기 위하여 오셨다(요일 3:8). 그분은 사로잡힌 자를 자유하게 하시려고 오셨다(눅 4:18).
복음서에는 귀신들린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에 관한 많은 일반적인 설명이 있다(예, 막 1;32-34, 1:39, 눅 4;41, 6:18). 귀신의 역할은 어떤 질병을 초래한다. 예로서 소경, 벙어리(마 12:22), 간질(마 17:14-17), 정신병(눅 8:27)과 육신적인 병(눅 13:11)을 일으킨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이 정상적인 원인이라고는 밝히지 않는다. 모든 병이 귀신의 활동에 의하여 일어난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실 질병을 고친다는 것과 사단(귀신)을 내쫒는다는 것 사이에는 조심스러운 구분이 있다(눅 13:32). 누가복음 4장 40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자유(구속)하시는 사역의 그림을 가지고 있다. 거기서 예수님은 가끔 손을 환자들에게 얹으시고 그들을 고치셨다. 그러나 귀신들린 사람(귀신으로 연합된 것으로 표현되는 것으로서)들에게는 손을 얹으시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들을 꾸짖고 내쫓는 것을 발견한다. 귀신은 추출되었고 병은 나았다. 구별은 분명하다. 예수님은 사탄의 사역의 두 가지 개념을 파괴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리고 우리들은 복음서를 통하여 그것을 하셨던 것을 발견한다.
이러한 일반적인 참조에 추가하여 귀신으로부터 개인들을 구출(자유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임무에는 일곱 가지가 있다(마 9:32, 막 1:21-28, 3:22-27, 5:1-20, 7:24-30, 9:14-29, 눅 13:10-17). 이것들 중에 세 가지는 게라손의 귀신, 간질병 소년, 그리고 바알세불에 대한 논쟁이 공관복음 세 곳에 모두 나타난다.
확실하고도 중요한 원리가 나온다. 첫째, 예수님은 찾으려 다니시지 않으셨으며 귀신과 직면하셨다. 즉, 사람들이 환자들을 데리고 왔다. 둘째, 예수님은 일반적으로 명령의 말씀으로 귀신을 내어보내는 것 같다(막 9:25). 그리고 그들과 협상을 하지 않으셨다. 정말로 그는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으나(막 1:34) 단지 게라손의 귀신은 예외이다. 셋째, 예수님께서 매우 직접적으로 귀신에게 접근하는 고려할만한 변화가 있었다(눅 4:35). 때로는 재갈을 물렸다. 때로는 그는 귀신을 결박하였고(마 12:29) 때로는 명령을 되풀이 하였다(마 5:8 그리고 눅 11;14). 때로는 악한 영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금하셨다(막 9:25). 예수님은 재침투의 위험을 잘 알고 있었다(마 12;43-44). 그래서 즉각적으로 문제에 접근하셔서 언제나 사람이 아니라 귀신에게 강조하였다. 단지 한번 우리는 예수님께서 먼 거리에서 축귀하신 것을 기억한다(마 15:28). 그것은 예외적인 믿음과 완고함과 단순한 마음의 요구의 상황이 있을 때 일어났다. 물론 십자가는 최고한 축귀이다. 그것은 사탄과 그의 귀신 연합들이 여기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8장 16-17절은 이것에 대한 분명한 힌트(암시)이다. 곧, 그러나 가장 분명한 설명이 골로새서 2장 15절에 나온다. 그는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리고 그것을 공공의 사례로 만드셨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다.
4.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구원(구출)의 사역을 계속하도록 권세를 주시고 위임하셨다. 우리들은 이것이 누가복음 9장 1절에서 12명의 제자들로 참인 것을 안다. 그리고 누가복음 10장 17절에서 70명이며 사도시대 교회에서 계속되었다(막 16:17, 행 16:16-18, 19:11-17). 그리고 그들의 계승자들에 앞서 주요한 줄거리였다. 2세기 초반의 작가중의 한사람인 순교자 저스틴(Justin)을 예로 들면, 이와 같이 요청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형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상에서와 여러분의 도시에서 헤아릴 수도 없는 마귀 (귀신)들을 몰아내는 사역을 하여왔다. 다른 축귀사들이나 전문가들이 주문 (주술)이나 약을 가지고도 실패하였을 때 그들은 치유하였으며 지금도 치유 하고 있으며 마귀(귀신)들을 무력하게 하고 그들을 축출한다.(5)
그것은 장소나 사람들의 두 가지에 마귀들의 군무(群舞)로부터 구출하기를 찾기 위하여 언제나 교회의 실재적인 부분이었다. 그것은 대단히 선교(목회)에 민감한 영역이다. 왜냐하면 너무 쉬워서 잘못된 방향으로 가기 쉽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을 때 모든 두려움이 관련된 사람에게 일어난다면 마귀의 간섭을 진단하기 위하여 그것은 그리스도인 선교(목회)에 있어서 처음이 아니라 맨 나중의 장소가 될 것이다. 교회의 전방위 사역(선교)의 적절한 부분인 이러한 구출의 사역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므로 저자는 그들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했던 그대로 행하므로 우리에게 직면 할 실제적인 이슈들의 어떤 부분을 강조하기로 제안한다.
실제적인 이슈들
1. 오늘 날 마귀들의 활동이 증가되고 있는가? 확실히 그러하다. 독일의 히틀러와 러시아의 스탈린이 그러한 모습을 나타내 보였다. 우리 세대에 신묘함으로 선점하였다. 그리고 의식적인 사탄의 경배를 주도하고 있다. 이러한 발달에는 이유가 있다. 곧, 물질주의의 공허, 인간의 종교적인 본능 그리고 성령을 나타낼 교회의 무활동 등이다. 또한 개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붕괴된 사회에서 집단을 삶에 대한 권세의 갈망과 따라서 사실들을 보다 더 작게 보려는 사회 안에서 드릴과 의미에 대한 굶주림이 있다.
2. 무엇이 신비함을 포함하는 목적인가? 그것은 영적 세계의 세 가지 주요한 부분과 관계되는 세 가지 중첩이 있다. 그것은 권능에 관한 모든 것이다. 점보는 것, 손금 보는 것, 트럼프 점, 천리안, 또는 통찰력이 미래를 침투하려고 한다. 그것은 지식에 관한 모든 것이다. 부적을 통한 강신술, 몽환의 경지, 영매, 죽은 사람들과의 접촉 등이다.
3. 그것에 대한 잘못된 점이 있는가? 물론 있다. 그것은 성경에서 명백하게 금지되어 있다. 신명기 18장 19절에서 이방인 이웃이 마술적인 이러한 세 가지 부류 안으로 들어갔음을 지적한다. 그것은 치명적인 범죄이다(출 22:18). 신약성경에서 금지가 매우 엄중하였고(예 고전 10:20-21) 마술의 사탄적인 근원이 분명하게 노출되었다(계 16;12). 어째서 이처럼 견고한 것인가?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아닌 권세에 마술(비술)에 자신을 복종하고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에 대항하여 반항적인 활동(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에 더하여서 사람들에 대하여 능력을 따라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지식에 대한 욕망을 기만한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죽음의 벽을 깨트리려고 한다. 마치 사울 왕과 무낫세에게 있었던 것같이 그것은 위험하며 파괴적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나쁜 것은 마술(비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직접적인 불순종이기 때문이다. 모반(반란)은 마술의 죄와 같은 것이다(삼상 15:23).
4. 비술의 연루는 마귀가 출몰하는 유일한 방법인가? 아니다 그러나 주요한 수단이다. 그것은 신중한 것처럼 보인다. 완고한 죄는 때때로 우리들의 능력을 넘어서 침투하려는 권세를 허용한다. 성적인 죄와 자연 숭배 또는 거짓 신들의 숭배는 사람들을 상처를 받기 쉽게 한다. 때때로 이교도 신들에게 제공된 부적이나 장식의 소유가 가계의 저주와 말썽을 일으키는 것같이 이러한 결과를 가질 수 있다.
5.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것에 감염될 수 있는가요? 물론 그럴 수 있다. 이 생각할 수 없는 억압과 소유의 구별로 비성경적인 것으로부터 흘러나온 확신은 만일 그리스도의 성령이 여러분을 소유한다면 그리고 악한 영이 분명히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으로부터 연결된다. 만일 여러분이 그것을 소유한 것으로 본다면 반론은 선한 것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이 보아온 것처럼 신약성경에서 의미하는 다인몬니조마이(dainmonizomai) 라는 것이 아니다. 신자들이 어두움의 세력에 의하여 영향을 받아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 깊은 영적 통찰이후 바로 발견한 사도들의 왕자로서 첫째의 목표이다(마 16:23). 때때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생애에 있어서 사전에 귀신의 영향을 받았던 경험이 있다. 그리고 시작 시점에서 취급하지 않는 한 그것은 작은 거짓말이 될 것이며 오는 여러 세월동안 좋은 정원에 다른 것이 아닌 마치 잡초의 넝쿨을 무시한 것같이 문제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6.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건에 어떻게 접근하여야 하는가? 일반적으로 사단의 모든 권세를 넘어 십자가에서 예수님에 의하여 이긴 결정적인 승리에 감사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보좌의 중앙에 있는 한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모든 역사를 이해하는 열쇠이다(계 5:1-12). 사탄으로 말하면 패배한 적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계 12:7-11).
명세서가 에베소서 6장에 영적 전투에 대한 유명한 문장(귀절)에 펼치어 있다. 우리들 자신의 생활에서 마귀의 어떠한 올무를 거절할 결정된 자세 안에서 우리는 확고하게 서있다(14절). 우리들은 양보나, 패배나 두려움 없이 이러한 사역(선교)에 도전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13절)를 취하고 행하여야 한다. 그리고 주님의 보호를 요청하여야 한다. 우리는 기도하고 다른 사람들로 기도 안에서 우리를 돕도록 할 필요가 있다(18절). 그리고 우리가 선교(사역)하는 대로 우리에 관하여 관찰하고 많은 예지를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18절).
7. 어떻게 우리들은 활동 중인 마귀의 힘을 분별할 수 있는가? 영분별이 은사이다(고전 12:10) 그리고 만일 작은 그룹에서 선교를 하고 있는 어떤 사람이 이 선물을 소유하고 있다면 대단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떤 지시 계는 비정상적인 탐욕과 강한 능력, 초자연적인 지식, 예수님의 이름에 반항하는 폭력적인 반응 또는 십자가에 대면할 때, 교제, 성경 또는 교회에 들어가는 것이다. 어떠한 신비함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크리스챤 사이언스, TM, 그리고 정령숭배(물활론)적인 종교는 우리에게 악마의 존재의 가능성을 경고한다. 그것은 가까운 관계 중에서 연쇄적인 자살 또는 전 세대에 있던 강신술(심령술)일 수 있다. 성적 도착의 비자연적인 속박 또는 다른 강박관념을 가진 습관, 원치 않는 신에 대한 불경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신에 대한 모독은 또한 이상한 습관으로서 눈까풀을 펄럭거리거나 목소리를 바꾸는 것이거나 기도할 수 없는 무능력에 대한 강박관념, 그리고 이름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힘과 같은 것으로서 우리의 의심을 일으키게 한다.
이러한 특성들은 고갈되는 것도 악마의 이해를 표시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것들은 정신적인 질병과 연계된 점에서 발견된다. 어떤 것은 그것이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받는 것이란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서도 발견된다. 이런 종류의 사역에서 조급한 결론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은 극도로 현명하지 못한 처사이다. 그러나 악한 영들은 감추어 두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들을 살아있는 은사적인 경배에서 마치 거룩한 교제 또는 여러 가지로 가장 깊게 헌신한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서처럼 가장 분명히 하는 것으로 유도한다. 가끔 관련된 사람들은 게라손의 귀신들린 사람이 보여준 것처럼 예수님에게 사랑을 미워하는 반응을 보이게 될 것이다. 그들은 두 가지로 찢어져서 우리들이 그들이 자유를 발견하는 것을 도와 줄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진단에 실수를 하게 된다면, 특히 우리들이 쉬운 관계를 세웠다면 그것은 재앙이 아닌 것이다. 어두움의 세력이 존재 하는가 아닌가를 당신이 분명하게 하는 것을 설명하라.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있는 경우에서 도전이 될 것이다. 결과는 매우 분명하다.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만일 어떤 사람이 귀신들렸다고 주장하면 그것을 의심하라.
8. 어떻게 우리가 사역을 위한 구출의 시간을 위하여 준비할 수 있는가? 매우 간단하다. 적어도 우리가 이러한 일에 경험을 가진 다른 사람을 찾아갈 필요가 있다.
주님 안에서 여러분 위에 있는 자가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탄의 세력은 권위를 매우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만일 여러분이 우리위에 있는 권위에 자신을 복종하지 않는다면 떠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기도는 핵심이다. 그리고 사역이 실제로 행하여지고 있는 동안 뒤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좋다. 만일 여러분이 행하려는 예수님의 이름의 승리의 깃발인 모든 것인 적절함과 십자가인 그 사역이 이루어졌을 때 기름부음을 위한 기름을 준비하여 두는 것이 도움이 된다. 첨언하면 서두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작은 것을 하려고 할 때 보다 큰 사역(선교)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9. 구출(구원)의 사역. 일정한 정석은 없다. 다른 귀신들린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접근에서 변화를 주목하는 것이 흥미롭다. 그러나 우리들은 안식으로 두려움을 고정하므로 시작하여야 하며 사람들을 안식하도록 하여야 하며 협조에 기민하여야 한다. 그것이 많은 시간과 문제점을 줄여줄 것이다. 자유(해방)의 일에 관한 사실은 이루어 질 것이다. 곧, 저자는 목회 사역의 매우 정상적인 부분으로서 그것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설명은 끝났다. 악마의 손아귀가 들어왔던 것을 통하여 활동의 모든 형태의 상세한 포기로서 정직하게 고백하여야 할 시간 안으로 움직여야 할 때이다. 이것은 문제가 따라와야 하는 것이며 그래서 성경으로부터 구절을 고무시킨다. 저자는 두려움과 분개가 자유의 도로 상에 있는 가장 일반적인 방해물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저자는 가끔 "당신이 용서하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있습니까? 라고 물어본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무장 요구를 함께 진행하기 전에 취급되어야 할 것이며 그리고 나서 조용하게 그러나 삼위일체의 이름 안에서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분명하게 언급하면서 확고하게 사악한 것이 나가도록 명령하여야 한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명령하시오. 즉각 가도록 한다. 도전을 하며 결코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당신을 모욕하며 혹은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애걸하는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이상한 소리로서 임시변통 할 수도 있다. 떠나기를 고집스럽게 하는 명령은 되풀이 되어야 한다. 성경 구절은 이러한 사역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나올 수 있다. 곧, 그것은 도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방언의 은사 혹은 아마도 성수(그것은 저자가 발견한 것 중에 가장 효험이 있는 것으로서) 혹은 십자가의 초상을 사용하여 기도를 간곡하게 되풀이하여 찬미한다. 우리들은 무엇인가를 준비하여야 한다. 그리고 일어나야 할 사건이 무엇인가를 가깝게 바라보아야 한다. 모독, 속임, 냉소, 비웃음, 구토, 동물적인 행동 - 아마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저자는 어떻게 그들이 우리가 진행하는 대로 느끼는가에 관하여 사람들에게 묻는 것이 가장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언제나 더 많은 일들이 이루어졌을 때를 알고 있으며 그들이 자유로운 때를 알고 있다. 만일 여러분들이 구속을 위하여 그들을 위하여 주님에게 요청하는 관계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비록 그들이 무엇이며 그들이 때로는 그들 자신들을 부르는 것이 가끔 명료하다고 하더라도 나쁜 영향이 아닌 사역에 파트너로서 그들 자신을 보게 된다. 그들이 그렇게 할 때 그것은 자유가 오기 전에 얼마간의 시간이 걸린다. 서두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사역이 진행하는 동안 하나님의 조명을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확신으로 인도하시거나 어떤 이들이 사역하는 마음 가운데로 오는 그림을 그려 줄 것이다. 여러분들이 그를 신뢰하는 대로 성령이 인도하실 것이다. 만일 한 시간정도 이내에 어떠한 진도가 없다면 거기에 있는 어떠한 악한 세력을 결박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능력을 요청하시오. 그런 다음 새롭게 된 사역을 위하여 시간을 따로 설정하시오. 사람이 장해의 원인을 반영하기 위하여 시간을 가진 다음, 그리고 기도하기 위하여 시간을 가지고 보다 더 경험을 가진 자로부터 충고를 들으시오. 긴 시간을 피하시고 만일 성공적으로 끝나지 않으면 모두가 깊이 실망하는 낭비적인 긴 회합을 피하시오.
일들이 지나간 때를 언제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보통 기쁨과 자유의 눈물을 흘린다. 그다음에 그들은 사랑, 음식 그리고 안식을 필요로 한다. 힘을 쓰므로 소비하였던 것에 대하여 휴식은 필수적이다. 부드러운 사랑의 돌봄이 계속되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사역에 약속된 사람들에게 마지막 말은, 거기에 억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너무나도 극적이여서 쉽게 불건전하게 빠져 버리게 된다는 점이다. 저자는 다른 방법으로 사역하는 자들에게 사람들 가운데를 제외하고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결론
만일 이 모든 것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와 같은 소리로 독자들에게 들린다면 저자는 그를 동정하게 될 것이다. 그와 같은 소리가 저자에게도 들린다. 불행하게도 저자는 고통스럽게도 그것이 실재라는 것을 발견했다. 교회는 이것이 연령을 낮추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서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귀신들린 사람들을 위한 구출을 기대하기를 멈추었던 시대는 바로 이 세대이다. 이러한 실패의 결과는 심각한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의사들에게 가게 되나 우리들은 그들을 도울 수가 없으므로 그들의 상태에 대하여 적절하지 않은 정신 병원에 간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성령을 주시는 그의 생명에 의하여 그들을 자유하게 하신다. 그래서 교회는 자유하게 하는 이러한 사역을 무시하므로 사람들을 실망하지 않도록 교회의 주님에게 의탁되었다. 영적무장, 기대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새롭게 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들의 무기이다. 그리고 누가복음 10장 19절에서 20절을 기억하시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첫댓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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