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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진 목사 / 바로 병거의 준마 (아 1: 9-11)
= 견고한 복음입장 =
요 약
성도는 바로 왕의 준마와 같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면 생명 걸고 믿어야 한다. 예수의 복음에 견고히 서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예수를 만난다. 그러므로 주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에 도달하도록 진리와 성령 충만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예비된 모든 것은 참으로 아름다우며 이 진리를 이해하며 순종하는 모습 역시 아름답다. 성도의 성화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작품으로 성부는 계획하시고 성자는 구속하시고 성령은 이를 적용하신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참 사랑을 맛보며 그리스도의 것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설 명
1. 배 경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혼인 약속을 하는 장면이다.
2. 적 용
(진단) 서로 간에 원수처럼 여겨집니까?
(해결) 단점 지적을 의무로 하지 말고 늘 장점을 말하십시오.
3. 호칭 연구
1) 솔로몬이 술람미를 부르는 호칭
① “내 사랑아” - 1:9, 1:15, 2:2, 4:1, 4:10, 6:4…
② “나의 사랑” - 2:10, 13, 4:7, 5:2,…
③ “사랑아” - 7:6
④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 4:9, 10, 12, 5:1 …
⑤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 - 2:14, 5:2 등
2) 술람미가 솔로몬을 부르는 호칭
①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이별상태일 때) - 1:7, 3:1, 2, 4
② “나의 사랑하는 자”(연합상태일 때) - 1:13, 14, 16 등 24회
4. 혼약성사의 결정적 의미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꿰미로 아름답구나”(9-10절)
① 내 사랑아 - 주님에게 도달함이 암시됨
② 바로의 병거의 준마 - 환경과 상태보다 복음에 굳게 선 믿음
③ 고운 두 뺨 - 그리스도 안의 칭의와 성화에 견고히 섬
④ 긴 목 - 진리에 대한 이해와 견고한 순종
5. 삼위일체의 작품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 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11절)
거룩한 성화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작품으로 성부는 계획하시고 성자는 구속하시고 성령은 이를 적용하신다.
아 2:9-11
9 (솔로몬)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10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꿰미로 아름답구나
11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 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원 문
9 יתססל 레수사티(나의 암나귀에게)
הערפ יבכרב 베레케베 파르오(바로의 마차의)
ךיתימד 딤미티크(내가 너를 비교하였구나)
יתיער 라야티(내 사랑)
10 וואנ 나우(어울리는도다)
ךייחל 레하야이크(네 뺨이)
םירתב 밭토림(장식품으로)
ךראוצ 차와레크(네 목이)
םיזורהב 바하루짐(구슬꿰미로) 11 בהז ירות 토레 자합(금 장식물을)
ךל־השׂדנ 나아세 라크(우리가 너를 위해 만들리라)
ףסכה תודקנ םע 임 네쿠토트 핰카세프(은으로 고정시켜서)
스 토 리
동무 목자가
가르쳐 준 말은 적중하였고
연모하던 님을 만난 술람미는 뛸 듯이 기뻤다.
솔로몬 앞에 나타난 술람미의 모습은
지난날의 술람미가 아니었다.
그녀의 모습은 흡사 바로 왕의 병차를 끄는 명마보다
더 근사하며 기품이 있어 보였다.
특히 희고 고운 얼굴은 땋은 머리털로 인해 보기 좋게 드러났고
목에 드리운 구슬꿰미는 그녀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순간 솔로몬의 마음은 그녀에게 반하고 말았다.
그리고 솔로몬은 정식으로 술람미에게
혼인을 약속하였다.
이 시간에는 “바로의 병거의 준마” 라는 제목입니다. 연인을 찾아 광야에서 방황하던 술람미는 목자가 가르쳐준 대로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염소새끼들을 돌보는 동안 그 찾고 찾던 목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술람미를 만난 솔로몬은 그만 깜짝 놀라게 됩니다. 그것은 자기 앞에 나타난 여자는 전에 검게 그을고 마음마저 상심해 찌들은 그 술람미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술람미의 눈부시도록 희고 아름다운 얼굴에 그리고 전에 상심한 그 모습은 흔적조차 없고 목자를 찾아 나설 만큼 그 용기 있고 당당한 모습은 흡사 바로 왕의 전차를 끄는 세계 최고의 명마처럼 그 자태가 뛰어나고 기품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여기서 완전히 반하여 술람미와 부부의 언약을 맺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연인들의 이야기입니까? 그러나 너무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여기 솔로몬이 예수님이시고 술람미가 바로 우리 성도들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우리 마음도 그렇게 강하고 아름다워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죄인도 사랑하사 구원하셨지만 그러나 이제는 옛날의 그 추한 모습이 아니라 은혜 받아 그리스도의 공로로 티도 흠도 주름잡힌 것도 없이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모습이어야 합니다. 본문은 술람미에게 있어서 황후로 간택되는 아주 결정적인 장면인데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란 과연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1. 그리스도의 신부는 주님의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9절에 “내 사랑아” 그랬습니다.
이 호칭은 솔로몬이 술람미를 부르는 호칭입니다. 그런데 최초에 등장하는 소유격이 붙은 호칭으로 뭔가 술람미에게 좋은 예감을 줍니다. 아가서 전반에 걸쳐서 솔로몬이 술람미를 부르는 호칭을 연구해 보면 “내 사랑아”(1:9, 1:15, 2:2, 4:1, 4:10, 6:4…) 혹은 “나의 사랑”(2:10, 13, 4:7, 5:2,…) 혹은 “사랑아”(7:6) 그리고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2:14, 5:2) 등입니다. 반면 술람미가 솔로몬을 부르는 호칭은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1:7, 3:1, 2, 4) 혹은 “나의 사랑하는 자”(1:13, 14, 16 등 24회) 등 약 두 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내 사랑아”는 대화자가 바로 솔로몬임을 가리킵니다. 그 동안 예루살렘 여자들이나 술람미가 솔로몬을 마음속으로 흠모하고 사랑했지만 이제 솔로몬이 술람미를 최초로 내 사랑이라고 불러줍니다. 이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는 비단 청춘의 만남에서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미 결혼한 기혼 부부에게도 적용됩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남편은 아내에게 배려를 다하여 아내로 하여금 남편을 사모하게 만드십시오. 그러므로 아내에게서 여성스러움을 유발시키지 못한다면 남편의 사랑 부족입니다. 그리고 아내는 자신을 단장하여 남편으로 하여금 내 사랑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드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첫 사랑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신령한 관점에서 볼 때 여기 “내 사랑아” 란 그 사랑의 성격이 일반적인 하나님의 사랑과는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흔히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면 희생적인 구원의 사랑만 생각하기 쉬운데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차원에서 우리를 만나시고 사랑하시고 기뻐하시길 원하십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성숙한 아들의 모습이라든지, 그리스도의 마음에 쏙 든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이라든지,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충성된 종의 모습이라든지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내 사랑아” 란 주님의 마음에 든 성숙하고 아름다운 성도들을 바라보시며 기뻐하시는 주님의 그 사랑입니다. 아가서는 바로 이 성숙한 사랑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가서를 연구하면 우리의 신앙이 아름답게 자랍니다. 우리들도 주님께서 “내 사랑아” 라고 불러주실 수 있도록 그 분의 마음에 드는 수준에 도달하시기 바랍니다.
2. 그리스도의 신부는 이기고 이기는 강한 자여야 합니다.
다시 9절에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했습니다.
여기 바로 왕의 병거의 준마는 술람미의 자태의 아름다움을 비유한 말씀입니다. 당시 근동 지방에서는 애인을 말에 비유했는데 이는 당시 그 지역에서 유행하던 문학적 표현양식이었습니다. 그 만큼 말은 남자들의 위신을 지켜줄 만큼 위풍 있고 언제 어디를 가더라도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특히 암말은 아름답고 힘과 용기와 인내와 순종과 다른 말과 협력 면에서 수말을 능가했다고 합니다. 당시 애굽은 세계적인 명마의 주산지였습니다. 거기다 애굽 왕이 타는 말이 아닙니까? 그리고 당시 애굽은 대제국으로 애굽 왕은 세계를 제패할 꿈을 가졌습니다. 그러한 왕이 탈 병마니까 특별히 영리하고 자태가 뛰어나고 힘있고 호전성이 강한 용기 있는 말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험한 적진을 돌파할 수가 있습니다. 거기다 “준마”는 원문에 ‘암말’ 혹은 집합명사로 사용되어 ‘말의 무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술람미를 이런 여러 필의 말에 비유하였다는 사실은 앞에 있는 어떤 악조건도 불사하고 믿음으로 전진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앞의 장막 곁에서 먹이던 염소새끼들이 자라니까 이런 바로 왕의 병거의 병마들이 된 것입니다. 이는 이치적으로는 불가능하나 비유적인 시문학에서만 가능한 표현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신부는 복음에 서서 죄악된 영적 전쟁터에서 언제나 예수의 복음에 견고히 서서 이기고 이기는 강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성도는 세계를 정복하던 바로 왕의 준마와 같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면 생명 걸고 믿어야 합니다. 이 복음에는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환경과 내 육신적인 느낌이나 내 본질을 보지 마시고 복음에 설 때 예수를 만납니다. 그 때 과연 주님의 내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아시아 일곱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약속들을 보십시오. 모두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로 사단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육신의 정욕을 이기고 죄악을 이겨야 합니다. 이 이김은 이미 이기신 예수님을 나의 이김으로 믿을 때 이루어집니다. 그러기 위해 복음 진리를 알고 섬과 아울러 성령 충만의 지원을 받아야 합니다. 특히 빌라델비아 교회에 이기는 자에게는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계3:12) 기록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완전한 영광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부는 칠전팔기하는 강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긴 자는 애굽의 명마와 같이 아름답습니다.
3. 그리스도의 신부는 항상 섬기며 헌신해야 합니다.
또 본문에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그랬습니다.
여기 땋은 머리털을 칭찬하고 있는데 이것은 솔로몬이 그녀의 머리를 칭찬한다기보다 이 땋은 머리를 통해 드러난 술람미의 두 뺨 즉 환한 얼굴을 칭찬함입니다. 이 모습은 전의 검은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희고 고운 모습입니다. 앞의 5절에서 술람미는 자기 얼굴을 게달의 장막 같다고 했습니다. 게달이란 유목민인 베드윈 족을 가리키는데 그들의 장막은 검거나 암갈색의 염소 가죽으로 제작했기 때문에 검었습니다. 그러나 연인을 생각하는 술람미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그 검은 얼굴은 이제 하얀 얼굴이 되었습니다. 이 하얀 얼굴이 땋은 머리로 인해 밝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 검은 모습은 바로 죄인된 우리 인간의 심령을 상징합니다. 예수 믿어 의롭다함을 받아도 행실은 아직 검습니다. 그것은 경건치 않는 죄인을 의롭다고 칭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심령의 죄를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그래서 엡5:26에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땋은 머리여야 합니다. 땋은 머리털은 정돈된 헌신을 뜻합니다. 이는 하다 말다 하는 훈련되지 못한 헝클어진 머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화는 복음에 견고한 기립과 함께 잘 훈련된 경건한 신앙생활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영적 생활을 유지할 때 성화의 길로 접어듭니다. 성경은 아직 죄 가운데 거하는 성도를 어린아이라고 말합니다(고전3:1). 물론 원리상으로는 어려도 신부이지만 신부로서 합당한 신앙을 가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항상 섬기고 헌신하는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4. 그리스도의 신부는 복음을 이해하고 견고히 순종해야 합니다.
10절에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했습니다.
여기 ‘구슬꿰미’는 (םיזורה 하루짐) 진주로 꿰어 만든 목걸이를 의미합니다. 동방에서는 여인들이 얼굴과 목에 금과 은과 보석으로 아름답게 장식했습니다. 아랍인들은 사람은 물론이고 말과 낙타에게도 장식물을 달았다고 합니다. 즉 일광에 그을음의 잔재라곤 찾을 수 없는 그녀의 깨끗한 얼굴과 목에 아름다운 진주 목걸이를 했으니 얼마나 찬란하겠습니까? 이 아름다움이 바로 그녀를 왕후로 간택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 구슬은 주옥같은 성경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진주 구슬이라 했습니다. 진주는 고통의 산물이듯 성경은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가 그 핵심입니다. 그리고 목 역시 목숨처럼 중요한 곳입니다. 즉 이 구슬들이 목걸이가 되려면 구슬을 꿰어야 하듯이 성경의 핵심적인 진리를 깨달아야 하며 나아가 그 복음을 목숨 바쳐 믿어야 합니다. 핵심적인 진리란 예수 구원과 하나님을 경외함이듯 예수를 잘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 보시기에 찬란한 모습이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11절에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 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했습니다.
여기 금 사슬은 애굽 궁중의 풍습이었습니다. 이 금 사슬은 왕이나 왕후들 만이 사용하던 목걸이입니다. 그런데 요셉에게도 이 금 사슬이 제공되었다는 것은 그 만큼 왕의 사랑이 각별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이 금 사슬은 앞의 바로 왕의 병거의 준마 즉 애굽 문화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금 사슬은 왕후의 목에 걸어 주던 목걸이입니다. 그러니까 이 금 사슬은 술람미에게 왕후가 되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여기 “우리가” 란 국가의 중대사인 왕후의 간택이므로 혼인을 위한 공식적인 절차를 거치겠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니까 이미 솔로몬의 마음에는 간택이 결정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 보면 우리란 삼위일체 하나님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이 성도로서의 아름다움을 구비하면 저 새 예루살렘의 왕궁을 경험하게 인도하십니다. 즉 금 사슬이 신령한 축복이라면 은은 구속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은을 박은 금 사슬이란 구속의 성격을 가진 신령하고 영화로움을 시사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의 경험은 하늘에 속한 놀랍고 신령한 것입니다. 물론 복음적 안에서 보면 성도는 이미 높이 되신 그 분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하여 믿어 그것을 구체적으로 경험해야 합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이미와 아직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복음적으로 보면 이미이지만 그것을 체험하는 것은 아직이라는 과정 속에서 진행됩니다. 이 아직을 다른 말로 성령의 적용케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성부는 계획하시고 성자는 이루시고 성령께서는 적용하십니다. 복음을 믿어도 실재가 되지 않거나 성과가 없다면 복음을 잘못 이해하거나 경건 생활이 부족해서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신부는 주님의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술람미가 강하고 희고 아름답게 변신하자 놀라운 언약이 주어졌습니다. 이와 같이 신부로서 합당한 모습을 갖출 때 우리는 주님의 특별한 임재 의식을 느끼며 살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사랑 받는 신부 되어 저 하나님 나라의 왕궁 생활을 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