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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10-20
요단 동편 두지파 반이 쌓은 제단을 통한 영적 교훈 / 김유민 목사
EX) 옛날 속담에 오이밭에 가서는 신발끈을 고쳐매지 말고 감나무 밑에서는 갓끈을 고쳐 매지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의 뜻이 무엇입니까? 「오해를 받을 짓을 하지말라」는 의미입니다.
사실상 오이밭에 가서 신발끈을 매는 것은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감나무 밑에가서 갓끈을 고쳐매는 것 자체도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보는 사람의 각도에 따라 오이밭에서 신발끈 매는 것이 오이를 따가는 것으로 보일수도 있고 감나무 밑에 가서 갓끈을 고쳐매는 것이 마치 감을 따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내가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은 의식해서라도 모든 면에서 조심스러운 삶을 살라는 옛 어른들의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는 바로 이ㅘ같은 상황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형제 지파들을 위해서 자신들의 안락한 삶까지 포기했던 두지파 반이 여호수아의 축복을 맏고 이제는 자신이 분배 받았던 요단동편의 땅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요단강을 건너자마자 아주 거대한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러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나머지 요단서편의 아홉지파반은 화가나서 당장가서 제단을 부수고 두지파반을 공격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조사단을 파견해서 알아본 결과 그 제단은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말씀을 어기는 제단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르르 잊지 않으려는 신앙고백의 제단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속에 나타난 오해의 사건을 살펴보며 함께 은혜나누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두지파반이 요단동편에 제단을 쌓았다는 소식을 듣고 나가 9지파반이 왜 그렇게 흥분하였는지를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하니라」
이제껏 자신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가나안 정복 전쟁에 동참해 주었던 두지파반들이 그 제단을 쌓았다고 그들에게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그들과 싸우러 가겠다고 나서고 있는 9지파반의 모습을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두지파반이 쌓은 제단이 얼마나 잘못된 것을 알았을까요?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무데서나 제단을 쌓지말고 오직 한곳 중앙에만 성소를 세우고 그곳에서 단을 쌓도록 하셨습니다. 다시말해서 아무나 함부로 여기저기 단을 쌓지 못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신 12:13-14절에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곳에서든지 번제를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의 한지파중에 여호와의 택하실 그곳에서 너는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단을 쌓는 것은 내가 보기에 좋다고 아무데나 덥썩덥썩 예물을 올려 놓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장소와 제단에 번제를 드리고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신앙생활 가운데 참으로 귀중한 영적교훈을 베우게 됩니다. 한번 따라하실까요?
「올바른 신앙이란 내중심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믿는것이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의 말씀속에서 발견하기보다는 내가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의 생각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도구로 믿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예를들어, 하나님의 말씀의 공급은 없으면서 오로지 기도만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중심의 신비주의나 독선적인 신앙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내가 기도해서 교회가 부흥되고 내가 기도해서 목사님이 설교잘하고 내가 기도해서 당신 응답받은 것이고 내가 없으면 우리 교회는 아무것도 안돼!
목사님들이 성경적으로 안내하고 권면해주어도 「알았습니다. 목사님. 내가 집에가서 하나님께 기도해보구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면 하겠습니다.」
사실상 우리의 삶의 방향은 성경속에 가르쳐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또 다시 말씀을 주시거나 이래라 저래라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도 발못된 내용으로 해석해서 자기가 생각하는 쪽으로 유리하게 갖다 붙일때도 자기중심적인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여태까지 있었던 모든 이단 종파들이 모두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다가 생겨난 집단들입니다. 때문에 올바른 성경해석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성경말씀 적용이 참으로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중심적인 신앙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장소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의 제사와 신앙이 되도록 친히 제정하여 주시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요단동편 두지파반이 자기네 땅으로 가자마자 또 하난의 제단을 쌓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나님의 징계와 책망을 듣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얼마나 어렵게 해서 얻는 축복의 땅입니까? 또 그땅에서 쫓겨 나야한다면 이것처럼 억울한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때문에 9지파반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득달처럼 달려가 그들과 싸워서라도 그 제단을 없애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영적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혹시라도 그들 지파와 나라 가운데 범해진 죄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이 떠나갈까 두려워하며 그 죄의 모습을 없애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홀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가족이 있고 친척이 있고 구역이 있고 지역과 교구가 있으며 그리고 교회, 사회와 나라가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 뗄레야 뗄수가 없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만든 다리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앗아 갈 수 있으며 내가 잘못한 건축공사가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는 더더욱 중요합니다. 우리의 올바른 신앙생활이 우리 구역, 지역 교회 전체에도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으로 가득하게 할 것입니다. 나라가 잘못한 범죄가 다른 사람에게 영적으로 아픔을 갖다주고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 막을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서로서로 죄에서 떠나 하나님의 말씀안으로 들어와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형통의 축복을 함께 나누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본문에 있는 9지파반이 그들속에 나타난 죄의 모습을 무관심하게 방심하지 않고 달려가서 제거하려고 했다는 것은 매우 본받을 만한 모습입니다.
EX) 남편의 잘못이 가족전체의 아픔이 되지 않도록 아내의 눈물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아내의 잘못이 가족전체의 아픔이 되지않도록 남편의 눈물의 기도가 필요 합니다.
자녀의 잘못이 가족전체의 아픔이 되지않도록 부모의 눈물의 기도가 필요 합니다.
부모의 잘못이 가족전체의 아픔이 되지않도록 자녀의 눈물의 기도가 필요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서로서로가 상대방의 방해물이 아니라 서로 연합하여 함께 축복을 누리는 공동체의 모습을 지켜나갈 때 더 큰 은혜가 임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9지파반이 단을 쌓은 두지파반에게 주었던 영적충고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9지파반의 진상조사단은 두지파반 사람들에게 제단에 대한 오늘날 우리식으로 말하면 예배생활에 관한 몇가지 권면과 충고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제단을 쌓되 자기자신을 위하는 제단을 쌓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본문 16절을 보겠습니다.
「야웨의 온 회중이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하나님께 범죄하여 오늘날 야웨를 좇는 데서 떠나서 자기를 위하여 단을 kTkg아 야웨를 거역하고자 하느냐」
본문에 보면 「자기를 위하여 단을 쌓아 야웨를 거역하고자 하느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배란 철저히 하나님께 가치를 두고 하나님의 영광 받으시는 자리가 되냐랍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의 영광이나 자랑이나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종교적인 모습으로만 그쳐진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예배든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예배를 드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브올의 사건을 잊지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브올의 죄악으로 인하여 여호와의 회중에 재앙이 내렸으나 오늘날까지 우리가 그 죄에서 정결함을 얻지 못하였거늘 그 죄악이 우리에게 부족하여서」
본문의 브올의 사건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할 때 모압땅 싯딤이란 곳에서 바알부올이라는 우상신을 섬겼다가 우려 하루아침에 2만4천명이죽었던 사건이었습니다. 때문에 과거에 우상을 숭배하다가 하나님께 징계 받았던 모습을 기억하고 또다시 같은 범죄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 속에서도 과거의 잘못된 것 때문에 많은 아픔과 손실을 겪었음에도 어느 날 보면 똑같은 짓을 또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연약한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
다. 이같은 것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늘 깨어서 경성 하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 앞에 패역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본문 19절 하반절에 보면 「오직 우리 하나님 야웨의 단 외에 다른 단을 쌓음으로 야웨께 패역하지 말며 우리에게도 패역하지 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배역」또「패역」이란 말은 하나님 이외에 또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우리 신앙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자기자신의 의지와 마음대로 행동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대적하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사실상 누가 하나님과 대항하여 싸우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거나 그 말씀을 떠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대적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아간의 사건」을 잊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본문 2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세라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에 대하여 범죄 하므로 이스라엘 온 회중에 진노가 임하지 아니하였었느냐 그 죄악으로 망한 자가 그 사람뿐이 아니었느니라」
여러분! 아간의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여리고성에서 아간 한 사람이 남몰래 시날산 외투와 금덩어리, 은덩어리를 훔쳐서 숨겨놓았다가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아이성 전투에서 대패하는 고통을 얻게 했던 사건입니다.
물론 그 이후에 아간의 범죄는 밝혀져서 아이성은 점령되었지만 이것은 한 사람의 잘못이 그 남은 사람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 될 수 있는지를 말해주는 아주 소중한 영적 교훈 사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복이란 나혼자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만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행복이란 혼자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식과 아내를 위해서라도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살아야 합니다. 어머니는 자식과 남편을 위해서라도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살아야 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라도, 자식은 부모를 위해서라도 올바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의 공동체 속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고, 보살펴 주고,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어서 서로서로 살기 좋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나 하나의 잘못이 다른 사람의 아픔이 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날마다 점검하고 올바른 신앙의 모습을 지켜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한 사람이 스스로를 아름답게 가꾸고 지켜나갈 때 나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행복하고 아름답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갈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비록 요단 동편 두지파반은 자신들의 신앙고백으로 제단을 쌓았지만 요단 서편 9지파반 사람들에게는 놀람과 충격이 되었습니다. 혹시 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행동이 될까봐 놀랐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삶속에서도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 또 사회와 나라 속에서도 죄의 모습이 나타날 때마다 우리는 놀라야 합니다. 그리고 충격을 받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것이 고쳐지도록 기도도하고 때로는 힘을 모아 대처도 해야합니다.
죄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방비가 되면 죄에 점령당하고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지고 맙니다. 때문에 9지파반은 두지파반에 신앙의 권면과 충고를 일러줍니다.
①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되 자신을 위해서 쌓지는 마십시오!
② 우상 숭배하다 하나님 앞에 크게 징계 받았던 브올의 사건을 잊지 마십시오!
③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배역 죄를 범하지 마십시오!
④ 한사람의 잘못으로 온 가족과 민족과 공동체를 아프게 한 아간의 사건을 잊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과 권면과 충고는 사실상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신앙 속에서도 주께서 늘 함께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예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과 감사가 되는 예배, 모든 공동체에 축복이 되는 아름다운 신앙생황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