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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절의 영감
열왕기상 2: 6-11
6.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의 백발이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7.마땅히 길르앗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그들이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여하게 하라 내가 네 형 압살롬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그들이 내게 나왔느니라
8.바후림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너와 함께 있나니 그는 내가 마하나임으로 갈 때에 악독한 말로 나를 저주하였느니라 그러나 그가 요단에 내려와서 나를 영접하므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내가 칼로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였노라
9.그러나 그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지어다 너는 지혜 있는 사람이므로 그에게 행할 일을 알지니 그의 백발이 피 가운데 스올에 내려가게 하라
10.○다윗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워 다윗 성에 장사되니
11.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십 년이라 헤브론에서 칠 년 동안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다스렸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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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 말씀에서 역사적 배경 설명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경험한 대로 세상의 모든 역사는 어느 민족에게 전성기가 있는가 하면 쇠퇴기가 있어왔다는 것입니다.
역사에서 바벨론의 전성시대를 배웠고, 페르시아의 전성시대, 애굽의 전성시대, 로마의 전성시대, 그리고 가까운 칭기즈 칸은 세계 44개국을 점령하는 전성시대가 있었고 스페인이나 영국, 일본과 독일은 사실 침략자로 전성기 시대를 누린 적이 있었습니다.
유대 나라의 전성시대는 언제였는가?
다윗 통치 40년과 솔로몬 왕 통치 40년 이렇게 80년 동안 그 민족의 가장 전성기였습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영광스런 이스라엘의 회복을 노래하고 있는데, 바로 다윗, 솔로몬 시절과 같아 빛나는 국가 건설을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왕기 성경에서는 최고의 강대국을 이루었던 히브리 민족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데 절정까지 올랐던 화려한 역사가 솔로몬 시대에 와서 끝나고 몰락의 길을 가게 된 유대 나라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열왕기 성경은 솔로몬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가 무엇을 잘했으며 혹은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대해 초점이 맞춰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업적 가운데 네 가지를 뽑습니다.
하나는 성전 건축을 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 민족의 정신적 고향인 성전을 완벽하게 건축함으로써 솔로몬 성전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남겼습니다.
그 다음에 그런 영적인 일을 위해 일천번제를 드렸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천 번이나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림으로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튼튼하게 하는 일을 국왕으로서 아주 잘한 업적으로 남겼습니다.
그 다음에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라고 불렸습니다.
여러 가지 일을 지혜롭게 잘 처리해서 유명한 어린 아기 재판 같은 이야기가 성경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솔로몬의 재판’이라고 해서 공공연하게 왕의 이름을 사용해서 프로그램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잖아요?
그 다음에는 궁전 건축을 완성했습니다.
그래서 이 네 가지 커다란 업적이 솔로몬 시대에 이루어졌습니다. 이때는 나라가 얼마나 부강했는지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지금까지도 부귀와 영광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으며 예수님도 솔로몬의 영광을 인정하신 말씀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6장 29절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라고 간접 비유 말씀으로 솔로몬 영광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잘못이 무엇인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이방 종교를 솔로몬 시대에 허용했습니다. 성전 건축, 궁전 건축에 필요한 인력과 목재 수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방 나라들과 무역을 열심히 하다가 그 틈을 타고 이방 종교가 들어오는 것을 막지 못하는 큰 잘못이 생겨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에 석유 줄기를 타고 이슬람이 한남동에 굳게 자리를 잡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다음에는 강대국의 최고 통치자의 자리에 앉게 되다 보니까 사생활이 매우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그래서 궁중에 수없이 많은 여인들을 데려다놓고 방탕스러운 생활을 계속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여인들의 꾀에 빠져서 그 여인들이 섬기는 그 당시의 미신 종교인 몰록과 아스다롯, 밀곰신은 섬기면서 여호와만 섬긴다는 유일 신앙이 유대 나라에서 흩어지게 되어 버리는 어려움이 찾아 왔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니까 위엄을 떨치던 강대국은 날로 문제가 생겨지기 시작했고 국민 총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국론 분열이 생겨 솔로몬이 마지막에 죽으면서 자기 아들 르호보암에게 왕권을 물려주었는데 이스라엘은 12지파로 되어 있습니다. 솔로몬 후계 정보를 따르는 바는 두 지파 밖에 남지를 않고 솔로몬의 신하였던 여로보암이 혁명을 일으키니까 10지파가 그곳으로 가서 다른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그래서 마치 우리 대한민국 운명과 같이 남북으로 갈려져서 남쪽 나라는 유다라고 하고 북쪽 나라를 이스라엘이라고 국호를 정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이 두 나라의 혼란기 역사가 시작되었는데 결국 만국의 길을 걷게 되어 유다 나라는 BC 586년에 바벨로니아 느브갓네살 왕에게 침략을 당해 멸망하고, 북쪽 나라는 BC 722년에 앗시리아 제국의 식민지가 되는 슬픈 역사가 되었습니다.
유대 민족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이들은 하나님이 선택한 택한 민족이라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 민족에게 있어서 이 선민사상은 생명과 직결되어 있으며 이런 과정에서 그들의 선민사상의 생활 철학은 이 민족에게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두 가지를 가져왔습니다.
긍정적인 면은 이 사상 때문에 수천 년 고난의 역사 속에서 절대로 쓰러지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측면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것을 국수주의를 만들어서 다른 민족을 멸시함으로 주변 민족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가끔가다 우리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믿음은 우리 주변의 현실이 아무리 고난스럽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꿋꿋하게 살아남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되면 주변이나 다른 불신자들의 멸시적 반응이 나타나는 어려움도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유다와 이스라엘로 분열된 왕국 시대에 가장 어려웠던 것은 이 혼란기 틈을 타고 들어온 이방 종교, 바알 종교의 세력이 순수 아브라함 후손의 정신사를 흐리게 만들었고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반역 역사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열왕기 성경 말씀의 배경은 이러한 혼합 종교, 바알의 세력이 왕성했던 시대에 가장 절망적 암흑기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국의 6번째 왕, 오므리는 외교 정책에 밝은 정치가로 조명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웃나라 베니게와 동맹을 맺어 무역을 증진시키므로 국가의 물질적 번영에 공언한 왕입니다. 당시 그의 생각은 ‘넉넉하게 사는 강대국인 베니게와 영원히 사이좋게 지내려면 궁중 결혼이 이루어져야 한다. 왕족 간에 혈맹을 만들어 놓으므로 피차 도움이 되게 하자.’라고 하는 정치적 계산에 의해 이웃나라 공주인 이세벨을 며느리로 데려 온 것입니다.
이방자 여사가 우리나라에 온 것이나 똑같은 내용입니다. 문제는 오므리 왕이 죽고 그의 아들 아합이 왕에 올랐을 때 중전 마마가 된 이세벨이 국가를 자기 마음대로 뒤흔드는 실세가 됩니다. 그래서 자기 고향의 종교인 바알을 끌어드려서 바알 성전을 전국에 세우고 국고를 이용해 아브라함 후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막고 바알 종교를 믿도록 포교 정책을 열심히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이때 국민들은 이 바알 종교가 지니고 있는 물리적 힘의 위력에 눌려서 하나님 믿는 것을 버리고 ‘내가 이려다가는 괜히 살아남지도 못하고 말할 수 없는 불이익을 당하는 곤란이 올 수가 있다.’
그래서 국민의 절대 다수가 바알 종교를 믿게 되어 버렸습니다. 엘리야의 말에 의하면 나만 남았다고 그렇게 표현할 만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바로 이러한 암흑기에 마지막 꺼지지 않는 불빛 하나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엘리야라는 선지자입니다. 열왕기라고 하는 성경 전체에 나타나는 사건과 사람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사건이 바로 이 엘리야 사건입니다. 바로 이 작은 불빛 하나가 결국 야훼 신앙 재건에 기초가 되었고 선민, 히브리 민족의 정신사로 새롭게 쓰는 희망의 빛이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 어려운 암흑기 시대에서 혼자 남아 꺼져가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살려내기 위해서 노력을 하다 지쳤습니다. “더 이상 못하겠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가서 마지막 결단의 기도를 드리는데 “하나님, 빨리 나를 죽여주십시오. 마지막 기도를 드립니다. 그 이유는 만약 하나님이 나를 죽여주지 않으면 이세벨의 바알 세력에 의해 처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나라가 이 꼴이 될 때까지 왜 하나님은 잠잠히 계시나이까? 나마저 죽게 생겼습니다. 빨리 죽여주십시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히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이제 나만 남았습니다. 마지막 남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죽기 전에 빨리 하나님이 나를 죽여주소서. 비참한 바알 신자들에게 죽는 것을 면하게 해 주십시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네 생각과 다르다. 네 생각은 너만 남았고 다 망하였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지금이 시작이다. 내가 너에게 할 일을 가르쳐 줄 터이니 너는 빨리 엘리사를 찾아가서 네 후계자를 삼으라. 네가 하던 일을 네가 지쳤다고 쓰러지니까 엘리사에게 맡길 것이다.”
그래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엘리사를 찾아내서 자신이 하던 하나님의 영적 사역을 맡기고 오늘 말씀에 하나님의 나라로 승천하였다고 했습니다. 엘리사는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다가 그 당시 최고의 영적 지도자이신 엘리야가 별안간 자기를 찾아와 후계자 역할을 하라고 하니 엘리사가 감당할 길이 없잖아요? “나를 그동안 데리고 훈련을 시킨 것도 아니고 미리 통보를 한 것도 아니가 이렇게 별안간 와서 당신 같은 큰 영적 지도자가 네가 일을 하라고 하면 내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엘리야가 그 사명을 주고 떠나고 맙니다. 그래서 자기를 떠나가는 엘리야에게 요청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그러면 내가 할 수 있겠나이다.”
우리 인류 역사에는 언제나 똑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모든 민중은 누군가를 바라보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민중은 하늘의 소리를 전달하는 예언자들을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때로는 회개하라는 예언자들의 소리가 귀에 거슬려서 핍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핍박을 하면서도 예언자들을 보지 못하고 그 소리를 듣지 못하면 살지 못하는 백성이 됩니다. 중간기 약 200~250년 동안 예언자가 없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이 시대를 암흑기 시대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의 얼굴을 볼 수가 없고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지쳐있습니다. 언제나 예언자들이 또 우리에게 나타나서 하늘의 소리를 전달해 줄 것인가? 모두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지쳐있을 때 별안간 세례 요한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마침내 예언자의 소리를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온 백성들이 또다시 들려오는 예언자의 소리를 듣고 모두가 반가워 그에게 갔더니 지금까지 행하지 아니했던 새로운 하나님의 영적 사역을 그들에게 줍니다.
“너희들은 다 요단강에 가서 세례를 받으라.” 그때까지 이런 것을 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성경에 보면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이 다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오랫동안 우리 민족이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야입니까?” 바로 바라볼 수 있는 인물을 가진 백성은 희망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지금 영어부가 인도에 가서 사역하고 있으며 청년부서가 인도에 가서 얼마 전에 사역을 하고 왔고 저도 인도를 두 번이나 갔다 왔습니다. 인도 국민들에게 물어보세요. 인도 국민이 가장 암흑기 역사를 살 때 그들은 간디를 바라보고 살았답니다. “간디가 우리 주변에 있는 한 민족은 희망이 있고 불빛이 살아있다.” 그래서 그를 바라보며 살았더니 과연 바라본 대로 되었다는 겁니다.
캘커타의 빈민들을 보세요. 테레사의 수녀를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그녀가 우리 곁에 있는 한 우리는 외롭지 않고 가난이 슬프지 않습니다.”
왜? 그가 있으므로 날마다 그를 바라보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민중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소록도에 5번 갔었는데 일주일 동안 집회도 하고 나환자들과 생활도 같이 했었습니다. 거기 계신 분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천명의 소록도에 수용된 환자들은 한 사람을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다. 거기서 사역하는 김명환 목사님입니다. 그가 우리 곁에 다가온 지 벌써 15년이나 지났는데도 그는 우리를 버리고 떠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가 있는 한 행복하고 그가 있어주는 한 우리는 자신 있습니다.” 날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그만 바라보면서 하루에 예배당에 몇 번씩 모이면서 매일 예배를 드리면서 이런 말을 저에게 많이 하셨습니다.
새로 이 세계는 세계 모든 나라들이 자기들에게 바라보는 나라가 있도록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것이 모범적이고 도움이 될 수 있는 나라를 바라보면서 그 나라가 가는 길을 우리도 가기 위해서 정책을 모방하고 배워 가면서 ‘아! 그런 나라가 있었구나!’ 모두들 그렇게 따라가도록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과정에서 누구를 바라봤습니까?
그들은 모세만 바라봤습니다.
“그가 있는 한 우리의 갈 길은 정해져있다.” 어느 날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기도하러 갔을 때 모세가 보이지 않자 시내산 밑에 있던 군중들은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모세가 안보였기 때문에 일어난 겁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어디를 간 거야?” 그래서 “그가 있는 한 우리는 바라볼 것이 있었는데 없어지니까 이제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것을 어떻게 만들어야 될 거 아닌가?”
그래서 금송아지를 만들잖아요?
미국의 흑인 사회는 그들이 바라본 인물을 아브라함 링컨과 마틴 루터 킹 목사라고 말합니다.
세계 2차 대전 후에 제일 좌절에 빠진 나라는 독일이었습니다. 온 세계가 미워하는 나라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 그들은 세계를 지배하려다가 세계인이 무서워졌고 독일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좌절에 빠졌습니다.
‘이제 유럽 전역을 침략한 우리 독일을 침략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모두가 실의에 빠져 좌절에 암흑기 시대를 살게 되었습니다.
이때 국민의 영혼을 깨우는 조용한 설교 한마디가 울려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요한 피터 목사의 설교였습니다. 그는 “독일에게 고한다”는 설교를 했고 그 설교가 활자화해서 집집마다 돌려가면서 읽도록 했습니다.
그때 독일인은 요한 피터 목사를 바라보며 살았고 독일의 재건은 바로 그 불빛 하나로부터 이루어졌음을 그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덴마크에 처음 갔을 때 그룬트비 목사 기념 교회를 제일 먼저 가봤습니다.
전쟁에 패하고 온 국민이 마치 거지 떼와 같이 굶주리며 초점 잃은 눈빛을 하고 있을 때 그룬트비 목사가 조용히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흙을 사랑합시다. 이것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온 국민이 그 조용한 음성에 귀를 기울여 마침내 그들은 지상 천국 소리를 듣는 삶의 희망을 창조하였습니다. 그때 그들은 세 가지를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회복!
두 번째로 흙으로 돌아가 나무를 심는 일을 열심히 했고
농촌 운동 중에 돼지를 기르는 일을 아주 열심히 해서 그것이 덴마크의 경제 부흥에 제일 큰 기초가 되었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이 침략으로 인해 폐허가 되어 잿더미가 되었을 때 예루살렘 거민은 실의 절망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잿더미 위에 한 누더기를 입은 젊은 청년이 나타납니다.
그 청년 예언자의 이름을 지금까지도 정확하게 알 수가 없어서 신약에서는 그를 제2이사야라고 말을 합니다. 그는 현실과 동떨어진 설교를 민중 앞에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광야에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할 것이며 그것들이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보시오! 당신이 누군데 잿더미가 된 이 폐허 위에서 그런 설교가 누구의 마음을 감동시킨다고 그렇게 로맨틱하게 설교를 하십니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때에 조는 사슴이 뛰게 될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의 시내가 흐를 것입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게 될 것이니 독수리의 날개같이 올라갈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입니다.”
결국 그 희망의 메시지 전달자 제2이사야 설교 때문에 그 사회는 다시 희망의 빛을 보고 새로운 역사를 쓰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 엘리야는 암흑기 역사의 초점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 아브라함의 후손 신앙 다 버렸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말씀대로 “나만 홀로 남았습니다. 나 혼자 이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해나가란 말입니까? 나마저 조금 있으면 죽을 것입니다. 하나님! 그들의 손에 비참한 죽음을 당하기 전에 빨리 나를 죽여주십시오.” 이런 암흑기 역사, 절대 좌절에 빠져있는 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다. 나는 지금이 시작이다. 빨리 엘리사에게 너의 사역을 넘겨주어라.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는 새롭게 이루어질 것이다.” 이렇게 일을 하고 계시잖아요?
호주에 가서 세미나 하는 도중에 산불 현장을 찾아갔습니다.
가보니까 지상의 낙원이라고 하는 그 아름다운 숲이 끝도 없이 새까맣게 재만 남아있고 이것이 원상대로 옛날 모습을 갖추려면 100년이 걸릴 거라고 합니다.
가보면 정말 황당합니다.
거기다가 섭씨 46도까지 올라가는 뜨거운 열이 몰아치니까 일주일만 더 계속되었어도 다 말라 죽었을 것 같은 이것은 천재지변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도 그 현장에 갔었으니까 한번 가보자고 해서 새까맣게 타들어간 숲 복판에 서서 바라보고 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셨습니다.” “뭐라고?” “김수환 추기경이 오늘 돌아가셨습니다.” 그 자리에 내가 주저앉을 것 같았습니다.
‘이건 또 뭐야?’ 그런 느낌이 왔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분명히 우리 국민이 바라보던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그렇게 바라다 보이는 존재가 우리 주변에 있을 때 민중은 행복합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다소 허탈감에 빠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이 바라보던 영적 지도자들이 이제 우리 주변에서 거의 사라지는 듯 한 분위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독교 사상가로서 씨알의 소리, 예언자적 삶의 모습을 항상 보여 주시던 하얀 솜, 회색 두루마리 차림의 함석헌 선생님도 가셨고, 예언자적 설교를 힘 있게 함으로 항상 젊은이들의 가슴을 울려주던 강원영 목사님도 가셨고, 청렴결백한 성직자로 듣는 이의 영혼을 깨우시던 한경직 목사님도 가셨고, 권위주의를 버리고 민중 속을 찾아와서 지팡이 역할을 하시던 김수환 추기경마저 이제 모두 가셨습니다. 이제 이 사회는 누구를 바라보게 될 것인가?
바로 그 문제를 오늘 말씀이 해결하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기도가 바로 엘리사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이여! 엘리야에게 주셨던 영감의 갑절을 내게 주시옵소서. 먼저 가신 그 위대한 지도자들의 영감의 갑절을 우리 후계자들에게 주시옵소서.”
우리는 이러한 위대한 영적 지도자의 공백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되는데 예수님의 직계 제자 12사도는 큰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과 함께 계셨을 때에도 마귀의 세력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데 성공을 했는데 그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기들만 내버려두고 하나님 우편으로 가신 후라면 우리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와 함께 계셔도 우리가 힘이 드는데….”
그래서 그들은 숨는 일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문을 잠그고 노출을 두려워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무서워졌기 때문에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슨 방법을 그들에게 선물하시고 가셨는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게 될 것이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 말씀대로 예수님이 안 계신 상태에서 성령 충만을 체험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당대에 땅 끝 선교를 성취하지 않았습니까?
그 다음에 12사도들이 그렇게 굳건하게 영적 지도자의 자리를 지키다가 하나씩, 둘씩 순교를 당할 때 성도들은 또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예수님의 직계 제자 12사도가 다 이렇게 순교를 당하면 이제 하나님의 사역은 끝이다! 누가 12사도와 같이 일을 해줄 것인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떠난 후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더 크고 더 넓게 중단하지 아니하고 계속 성취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해답이 있습니다.
모세가 죽으면 가나안 약속의 땅 성취는 어려울 것이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더 큰 힘을 제공하심으로 가나안 정책은 훌륭하게 이루어졌고 기독교 2천년의 역사는 지금까지 생명을 활발하게 발전시켜온 것입니다.
지도자론 공부에서 훌륭한 지도자란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리는 지도자라고 합니다.
“내가 물러가면 더 훌륭한 지도자가 준비되어 있다고 믿는 지도자가 훌륭한 지도자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잖아요?
하나님의 역사는 중단되지 않고 계속됩니다. 엘리야가 자기만 남았다고 생각했을 때 자기가 죽으면 다 끝이라고 생각했으나 하나님은 “아니다. 나는 계획이 있고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내가 이렇게 엘리야의 후계자를 맡았는데 능력이 없는 내가 어떻게 하겠습니까?방법은 한 가지! 엘리야 영감의 갑절을 주옵소서! 그러면 내가 할 수 있겠나이다.” 그래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제가 예언하기는 앞으로 한국 가톨릭교회는 김수환 추기경 이후에 더 크게 발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한국 교회는 역사가 짧은 것이 특징이죠?
유럽의 교회들은 2천년인데 비해서 우리들은 10분의 1인 200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세는 세계 제일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영적 지도자 1세들이 훌륭한 영적 지도자가 되었고 그 길을 후계자들이 갑절의 영감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세워진 이 당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해서 하나님께 충성하고 우리가 물러간 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후대들을 통해서 더 크게 역사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사역을 해나가야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으며 또 역사가 그렇게 지금까지 되어져 왔습니다.
이번을 계기로 우리 한국 교회가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가톨릭교회나 개신교 교회가 김 추기경 이후에 한경직 목사님 이후에 갑절의 영감을 받는 영적 축복의 한국 교회가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위대한 지도자 한 사람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없어진 후에도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계획을 그대로 성취시킨 것을 저희들이 믿사오니 이렇게 위대한 지도자들이 보여준 교육과 그 교훈을 본받아서 영감의 갑절을 통해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역사가 이 세대에 더 크게 이루어지는 한국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