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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이재수의 난
이루 추천 0 조회 70 15.03.24 14: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유주희, '민란의 시대- 고종 때의 민란들', 고성훈 외, "민란의 시대"(가람기획, 2000) 에서 발췌했습니다.

자료 출처 : 카페 "제주 불교"


이재수의 난

 

 1901년 제주민란(일명: 이재수의 난)은 천주교의 교세 확장과 이에 따른 폐단, 정부의 조세 수탈에 의해 발생한 민란이다.

 

 

1. 시대적 배경

 

1898년 방성칠의 난을 통해 제주도민들은 민란 지도부의 한계와 토착 지배층의 실상을 제대로 인식하는 모순된 현실을 점차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천주교는 1886년 한불수호조약과 1896년 교민 조약 등을 통해 선교와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였다. 1900년 전후에는 고종이 지방 관리들에게 ‘신부를 나처럼 대하라’는 엄명을 내림으로써 위세가 등등하여 특권 세력화되었다. 천주교는 우리나라의 고유한 가치체계와 토착종교를 부정하였다.

 

제주도 천주교는 1899년 5월부터, 1901년 봄까지 2년간의 포교로 242명의 영세자와 6-7백 명의 예비신자를 배출하는 놀라는 성장을 보여준다. 이는 당시 제주도 전 인구의 2.5%에 달하는 숫자이다. 이렇게 놀라운 성장의 원인은 천주교 신자들이 ‘관리와 동등한 권한 행사’, ‘세금은 내지 않음’ ‘죄를 지어도 성당에 들어가면 못 잡아감’ 등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하고자 하는 토착 양반세력과 귀양 온 사람들이 입교하였다.

 

양적 팽창에 주력한 천주교의 선교활동은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였다. 천주교도들은 신부들의 보호아래 불법 행위를 자행하였으며 개인적으로 형벌을 가하고도 벌을 받지 않는 등 제주도는 무법천지가 되었으며, 신부들이 지방행정까지 간섭함으로써 통치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또한 이런한 특권의식을 가진 천주교인들은 봉세관과 결탁하여 제주도민의 생존권을 열악하게 만들었다.

 

1899년 봉세관 강봉헌은 전권을 행사하면서 세금징수가 가능한 거의 모든 토지와 산물을 조사하여 과중한 세금 부과하였다. 제주도민들은 봉세관을 적으로 간주하였다. 강봉헌은 자신의 신변보호와 업무수행을 위해 천주교인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천주교인들은 프랑스인 신부와 봉세관이라는 두 개의 절대 권력을 바탕으로 법적 경제적 특권을 누렸다. 결국 봉세관 천주교인, 유배인과 그에 대항하는 지방 세력과 민중의 대립관계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2. 민란의 발생


1901년 4월 9일 강우백을 중심으로 대정군민들은 소장을 올려 봉세관의 수탈 및 천주교도에 의한 폐단의 시정을 호소하였고, 12일에는 정의군에서도 같은 집단행동이 발생하였다.

대정에서는 천주교인들의 폐단을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대정군수 채구석, 향장 오대현 등이 상무사를 조직하였다. 상무사의 반천주교 운동으로 4월 29일 상무사원 송희수에 대한 천주교인들의 구타사건이 있었다. 5월 6일 천주교인과 상무사원들 간의 무력충돌이 있었는데, 천주교인인 이방 김옥돌이 향장 오대현의 기생첩을 간음하자 대정군수는 이 둘을 태형에 처하고 오대현은 석방하고 김옥돌은 수감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천주교인 진사 김병현이 50여명의 천주교인을 끌고 와서 옥문을 부수고 김옥돌을 빼내고 상무사원을 잡아갔다. 여기서 충돌이 발생하여 천주교인 2명이 빈사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렇게 천주교인과 상무사원 사이의 충돌이 생기자 상무사는 향촌조직을 통해 대정군민을 집결시키고 인접 지역에 통문을 돌려 민회를 개최하였다. 봉세관의 세폐와 천주교인들의 교폐를 성토하고 제주성으로 가서 목사와 봉세관에게 등소하기로 결정하여 장두 오대현 강우백을 선두로 제주성으로 향하였다. 제주도민의 적극 호응을 보여 봉세관 강봉헌은 서울로 피신하고, 제주목사 김창수는 폐단과 교폐를 정부에 보고하여 혁파할 것을 약속하고 해산을 종용하였다. 5월 16일 등소절차를 밟은 후 제주목사의 약속을 문서화하기로 하고 해산하였다.

 

그러나 천주교인들은 이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이교도에 대한 성전을 선포하였다. 천주교측은 교인 천여 명을 소집, 제주목의 무기고에서 총기를 빼내어 무장하였다. 5월 14일 800여명 교인이 한림동 민회소에서 농민에게 발포하고 오대현 등 6인을 체포하였다. 대정현에서는 인명 살상이 생기자 비천주교 측도 무기고를 열어 중무장하기에 이르렀다. 천주교의 강경대응이 봉기를 무력투쟁으로 선회하게 만들었다.

 
유주희, ?민란의 시대- 고종 때의 민란들?, 고성훈 외, ??민란의 시대??(가람기획, 2000)

에서 발췌하였습니다.


 

 

3. 2차봉기

 

대정현에서 동진 서진의 두 개의 민군이 구성되었다. 지도체계도 개편되어 화전민 강우백과 관노 출신 이재수가 동 서진 대장이 되었고, 조총 300자루와 죽창으로 무장하였다. 3군에 통문을 발송하여 봉기를 촉구하였다.

 

 5월 17일 농민군은 천주교 신부가 지휘하는 제주성으로 진격하였다. 황사평에 집결한 농민군은 수만 명이었다. 천주교측은 성문을 굳게 닫고 대포를 성벽에 설치하였다. 17, 8일에는 천주교의 선제공격으로 농민군 18명이 살해되었다. 농민군 또한 일본인에게 양총 50자루를 구하여 전력을 증강하였다.

 

천주교 신부는 20일 유배 중이던 장윤선을 목포로 파견하여 프랑스 군함의 급파를 요청하였다. 20일 농민군은 동서남북진, 24일에는 동서남진, 27일에는 동서진으로 나누어 제주성 봉쇄 작전을 수행하였다. 제주성내로 식량 땔감 판매를 금지하고, 성내에 통문을 돌려 농민봉기를 촉구하였다.

 

5월 18일 21일 제주목사와 대정군수의 중재가 시도되었으나 세폐와 교폐의 근절, 민인을 살상한 천주교도 처단을 요구하며 화해 요청을 거부하였다. 천주교측은 시간을 벌기 위해 23일 장두 오대현 등 12명을 풀어주고 강화 중재를 요청하였다. 25일 제주성내 민인이 봉기하였다. 28일 옥문을 부수고 성내 천주교도 측과 충돌하여 천주교도 측 패배, 무혈 입성하게 되었다. 입성한 농민군은 서진대장 이재수의 주도로 천주교인 250명을 살해하였다.

 

 제주도민의 절대 지지를 받던 농민군은 정부군 파견소식으로 3군에 통문을 보내 15세 이상 60세 이하 남자를 징발, 방어전을 준비하였다. 방성칠난 진압군이었던 토착양반 유배인중 양반과 관리를 색출하여 처단하고 지방관아를 접수하였다. 동진대장 오대현은 이재수의 강경노선에 반대하고 농민군은 내분되었다.

 

5월 31일 두 척의 프랑스 군함이 제주도에 입항하여 270명의 프랑스 해군과 신임 제주목사 이재호가 들어왔다. 6월 2일에는 정부군인 강화도 진위대 100명과 궁내부 고문관 미국인 W.F. Sands가 급파되고, 일본 군함도 출동하였다. 프랑스 군함의 제독은 6월 1일 신임 제주목사에게 대정군수 채구석을 포함한 난민 지도자를 체포할 것을 위협하고, 미국인 고문관 샌즈도 무력진압을 희망했으나 정부의 정책에 의해 프랑스 군함 철수를 주선하였다. 정부군과 제주목사는 난민들에게 선 해산, 후 민폐 혁파 조건으로 해산을 종용하였다. 6월 2일 동진대장 오대현과 제주목사 정부군 대장의 화해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제주도민들은 미봉책으로 간주하였다. 왜냐하면 봉세관 강봉헌이 대정군수로 부임하여 제주도민을 자극하였다. 농민군은 통문을 돌려 어찌 山砲 4-500명이 농민군 수백 명을 당할 수 있겠느냐며 제주도민의 궐기를 촉구하였다. 6월 9일 재 입항한 프랑스 군함의 무력시위는 제주도민들의 강한 반발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민란의 지도부는 노선 통일이 안되고, 정부군 파견으로 내부 갈등이 심화되었다.

 

동진은 중앙정부와 협상을 전개하고 합법적인 등소를 통해 목표 실현하고자 한 반면, 서진은 천주교인을 색출 모두 처단하는 강경노선을 취했다. 6월 7일까지 600여 명의 천주교도가 살해되었다. 민폐 혁파와 천주교도 처단, 도민의 죄를 묻지 않는다는 조건을 요구하였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6월 10일 신식무기로 무장한 정부군 200명과 13명의 순검이 급파되었다. 정부군 대장 윤철규는 서진대장 이재수와 면담하고, 서진의 요구사항 수용을 약속하며 농민군의 제주성내 입성을 요구하였다.

 

6월 11일 봉세관 강봉헌과 폐단 천주교도들을 체포하는 시늉에 속아 농민군은 제주성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정부군은 농민군 지도자 40여명을 체포하고, 농민군을 강제 해산시켰다. 제주도민들은 이들의 석방 요구와 제주도에서의 공개재판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7월 18일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 등 40여명의 민란 지도부는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은 영사재판으로 10월 9일 교수형, 이외는 징역 곤장형과 무죄 석방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정부의 요구로 배상금 6315원이 제주도민에게 부과되었고 1904년 6월 제주도민 1인당 15전 6리씩 갹출하여 배상하였다. 프랑스측의 요구로 황사평이 천주교도 묘지로 정해졌으며 이재수는 서대문 밖의 형장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1901년 제주항쟁은 내부의 봉건적 모순을 계기로 제기되었으나 천주교 문제와 관련하여 확대되었다. 1차봉기는 봉건적 수탈구조 타파를 위한 반봉건 농민운동이었으나, 프랑스 신부들의 오판으로 사건이 확대되면서, 천주교세력을 침탈적인 외세로 간주하여 무력항쟁으로 번졌다. 천주교인을 법국놈이라하여 프랑스인으로 간주하였는데, 천주교인들이 프랑스인으로 자처한 결과이다.

 

5월 28일 무혈입성 후 ‘洋人을 토멸하고 제주성을 회복하였다’는 기치가 내세워지기도 하였다. 6월 17일 세폐 혁파에 대한 17조항이 관철되었고, 7월 2일 12조의 교민화의약정이 체결되어 교폐문제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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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이재수의 난...


답변자 : secret850119     l    2004-06-14 14:48 작성  
 

 


들어가는 말

 

조선시대 말 외세의 침입과 간섭속에 이땅엔 수많은 외국의 문물과 문화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과학기술, 근대식 신식제도 등등 그러나 그 중에 종교만큼 수많은 사건을 야기시켰던 일도 드물었습니다. 이미 영, 정조시대부터 외국의 문물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조선은 나름대로 외국의 선진문물에 대한 이해를 높였습니다. 일상생활의 실용적인 측면에서 그 기술을 도입하는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서양의 종교는 결국 탄압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미신을 믿지 말고, 제사를 지내지 말며 유일신인 하느님을 섬기라는 서양종교의 교리는 결코 쉽게 이땅의 사람들에게 다가올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이곳 제주에는 더더욱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섬이라는 환경으로 문물과 문화의 전래가 한반도 보다 상대적으로 늦었으며, 제주 토착적인 무속신앙이 강한 분위기에서 천주교의 전래는 언젠가는 터질 화약고였습니다. 그리고 그 폭발은 천주교의 내도와 동시에 곧 이재수의 난, 혹은 신축 성교난(辛丑 聖敎亂), 신축교난으로 불리우는 사건을 낳았습니다.

 

 


1. 천주교의 전래

 

제주도에 천주교가 처음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광무 2년(1898)에 다른 지방에서 입교(入敎)한 양베드루(梁베드루), 신아오스딩(申아오스딩), 강도비아(姜도비아)가 당시 조선교구장 무텔 주교에게 제주에도 선교사를 파견하여 주도록 요청하여, 1899년 프랑스 사람 배가록 신부와 우리 나라 신부 김원영이 오게 되었다. 배가록 신부는 곧 건강상의 이유로 다른 지방으로 전출되고 그 후임으로 프랑스 신부 구마슬(具瑪瑟)이 1900년에 오게 되었고, 그 이듬해 프랑스 신부 문제만(文濟萬)도 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주에는 이 세 신부가 제주 성내와 서흥리에 교회당을 세우고 마을에는 공소(公所)를 두어 포교를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입교하는 자가 적었지만, 당시 고종은 프랑스 신부에 대해 "나와같이 대하라(如我待)"는 교서를 내렸고, 신부들은 치외법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순수하게 천주교에 입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제주 군수도 어찌할 수 없는 신부들의 권력에 적지 않은 숫자의 불량배들도 천주교에 입교하여 천주교도라는 이름아래 수많은 교폐(敎弊)를 저지르게 된다.

 

 


2. 이재수의 난(혹은 신축 성교난)의 발생 원인

 

난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지금도 천주교측에서의 입장과 향토사가들간에 이견이 존재하고 있다.


향토사가 입장은 그 원인을 천주교에 입교한 수백명의 교도들이 천주교 권세를 등에 업고 저지른 교회당의 폐단이다. 애초 입교한 자들이 불량자들이 많았으므로 이들은 교회를 등에 업고 이미 팔았던 토지와 가옥을 원가(元價)로 물려받고, 다시 고가(高價)로 파는 일, 무리를 지어 민간인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고, 범법한 자를 교인이라 하여 석방시키며, 그들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등 제주 민중들에게 많은 반감을 사게 되었던 것이 이재수 난의 주된 원인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제주 탐관오리들의 횡포와 경성에서 보낸 봉세관(세금을 거두는 사람) 강봉헌이 교인들과 결탁하여 수많은 세금을 강제로 거두며, 특히 수백년 묵은 신당의 수목을 함부로 베어버리고, 도민들의 전통적 신앙활동마저 강제로 금지시키며, 도민들을 억지로 천주교에 입교시키는 등 제주민의 오랜 전통과 정서에 반하는 행동을 저지르게 되어 결국 제주민중은 천주교에 대한 직접적인 봉기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천주교 입장에서는 당시 정치가 부패한 상황에서 천주교가 제주에서 크게 발전하여 도민들의 온갖 미신행위를 없애며, 복음을 전하던중 일부 불량교도의 문제를 빌미삼아 대정군수 채구석과 이재수가 자위단인 상무단을 조직하여 천주교도 전체를 박해한 것으로 그 큰 틀을 잡고 있다. 이외 천주교의 포교에 따라 도민들이 떼지어 교회당으로 나오게 되어 무당들이 그들을 따르던 도민들을 잃어버리게 되자,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려 천주교를 비난한 것이 교난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으로 연결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입장은 김옥희 수녀에게서 다음과 같이 정리 되었다. 이런 대학살은 단순히 교인이나 민간인들과의 충돌 사건이라기보다는 제주도민들에게 오랫동안 잠재되었던 외부세력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며, 한편 토착세력들이나 지방 관리들은 도민들로부터 경제적인 수취를 독점하기 위하여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경래(京來) 봉세관에 대한 극단적인 저항감과 반감을 노출하게 되었던데서 근본원인이 있었다. 또한 전통적인 민간신앙을 고집하는 도민들의 반감 등이 천주교에 대한 증오로 노출되었으며, 바로 이런 도민들의 천주교에 대한 반감을 이용하여 지방토착관리들이 외부세력에 대하여 무력을 행사했던 민요(民擾)-포악한 정치에 반대하여 백성이 일으킨 소요 -의 성격을 지닌 사건이었다.

 

또한 김옥희 수녀는 숨겨진 원인으로 일본 식민주의의 한국진출과 이 사건이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주장하는데, 신축년 교난의 성격을 일본인들의 조종을 받은 일부 도민들이 새로 들어온 천주교인을 시기하여 일어난 참살사건이라고 규명한다. 그리고 향토사가들의 주장인 봉세관과 천주교 교폐에 대해서는 그 당시 선교사들의 증언과 기록을 근거로 토착인들의 중상과 모략으로 그와같은 고정관념과 인식을 가지게끔 책동되었고, 그 선동의 결과 사실보다 왜곡되고 과장된 내용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하여 향토사가들과는 상이한 입장에서 이 난 의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정리하면, 천주교 입장에서는 교도들의 희생을 강조하여 신축교란(辛丑敎難), 성교난(聖敎亂)등의 명칭을 사용하며, 난의 원인이 제주도내 토착세력들이 그들의 안위를 위해 교세가 확장하는 천주교에 위협을 느껴 대규모 박해를 일으켰다는 주장이며, 향토사가들 입장에서는 프랑스 신부의 세력과 교회권력을 이용하여, 혹은 봉세관의 주구가 되어 갖은 횡포를 부린 불량한 교도들의 소행으로 인하여 발생한 사건이며, 주동자인 이재수등은 정의에 입각하여 도민의 민생을 위해 싸운 것으로 귀결된다.

 

 


3. 이재수 난의 전개와 결말.

 

난의 발단은 1901년 오신낙이라는 사람이 정의교당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함으로서 시작되었다. 천주교측과, 오신낙 유족들 양측의 주장이 달라 쌍방간의 감정은 격화일로로 치달았고, 이때 대정현에서도 교폐를 막기 위해 채구석, 오대현, 강우백, 이성교, 송희수 등이 주동이 되어 상무사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교회측에서 송희수를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전 도민적으로 교회에 대한 봉기로 이어지게 되었다.

 

민병들은 이재수를 중심으로 황사평에 진을 치고 제주성을 에워싸 봉세관과 천주교도에 대한 처단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무력으로 성을 공략하게 되었다. 곧 성내의 호응에 힘입어 제주성을 점령하고 천주교도에 대한 색출과 처단을 하게 된다. 관덕정 앞에서 수백명의 천주교도가 처형되었고, 프랑스 신부는 외국과의 상황을 고려하여 처형되지 않았다. 이미 서울로 사태의 심각성을 보고한 천주교 신부에 의해 프랑스 군함과 정부 진압군이 제주에 도달하였고 파견된 정부 관리에 의해 사태는 수습되게 된다.

 

민중들의 의견을 받아들인 정부는 주동자만 처벌하고 참여자는 그 일에 대해 불문에 부치는 사후대책을 보장하였고, 프랑스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 천주교들의 시신은 사라봉 아래 황사평에 묻는 것으로 사건은 결말을 짓는다. 그후 이 묘지는 당시 피살자의 분묘뿐 아니라 점차 제주도 천주교인의 공동묘지로 변해갔고, 현재 천주교 공동묘지로 계속 사용되고 있다. 이재수등 세 장두는 서울로 압송되어 효수됨으로서 제주민란- 이재수의 난, 천주교난은 천주교의 전래와 동시에 3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미증유의 사건을 남기고 마무리를 지었다.

 

답변참고 >> http://www.chejudream.co.kr/study/역사/이재수.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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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인가

최근에 제주 이재수의 난에 가담했던 인사들의 봉기 거사의 연판장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당시 지도부를 포함 600명이 넘는 명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제주 지역의 정서는 육지와 또 다른 특별한 부분이 있으며 한맺힌 숙원 과제가 있다.

이러한 민중봉기는 4.3까지 면밀히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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