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포엔(八芳園)
핫포엔(八芳園)은 도쿄도 미나토구(港区) 시로카네다이(白金台)에 있는 12,000 평 넓이의 부지의 정원 및 식당, 결혼식장이다. 이름은, '사방 팔방 어디를 봐도 아름답다.'는 말에서 유래했다.
에도(江戸) 시대 전기, 막부 측근이자 하타모토(旗本) 오쿠보 타다타카(大久保忠教, 1560-1639)의 야시키(屋敷, 정원의 일부가 포함됨.)였다가, 사츠마번(薩摩藩)의 카카에야시키(抱屋敷), 시마즈 가문(島津家, 마츠다이라 사츠마노카미(松平薩摩守))의 시모야시키(下屋敷)였다가, 메이지(明治) 연간에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불렸던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 1840-1931)의 사촌 시부사와 사사쿠(渋沢喜作, 1838-1912)의 소유가 되었다가, 1915년, 훗날 히타치 제작소(日立製作所)를 비롯한 히타치(日立)그룹과 닛산자동차(日産自動車)로 이어지는 히타치 동광산의 창업자이자, 구하라재벌(久原財閥)의 구하라 후사노스케(久原房之助, 1869-1965)에게 양도되었다.
후사노스케(房之助)는 사사쿠(喜作)의 쇼인(書院)을 양식 거실(지금의 란노마(蘭の間))로 꾸몄고, 시로카네다이(白金台)의 고저차가 있는 구릉지를 활용한 현재의 지천회유식 정원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코츄안(壺中庵)으로 이용되고 있는 야시키(屋敷)의 잔디 마당 등 여러곳에 천년 전의 불탑, 가마쿠라 시대의 십삼층탑 등 유서깊은 고탑들도 이 때 이축되었다. 부지 내에는 오쿠보 타다타카(大久保忠教)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로부터 하사받았다고 하는 산수유나무가 아직 남아 있다.
2차대전 후, 당시 공직에서 추방되었던 구하라(久原)는, 당시 긴자(銀座), 츠키치(築地)에서 요정(料亭) 등을 경영하고 있던 하세 사토시(長谷敏司, 1903-1991)에게, 해외 여행자를 상대로 일본정원을 살린 본격적인 요정(料亭)을 공동경영해볼 것을 제안하였고, 그 이름을 '핫포엔(八芳園)'이라 명명하여 1950년 개업하였고, 수년 후 하세(長谷)에게 소유를 넘겼다.
2022년, 미국 바이든(Joe Biden, 1942-) 대통령과 일본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1957-) 간에 미일정상회담이 개최되었을 때, 양국 정상이 핫포엔(八芳園)을 방문하여 부지 내 요정(料亭), '코츄안(壺中庵)'에서 만찬이 개최되기도 했다.
정원 입구 근처의 로쿠카쿠테이(六角亭), 연못가에 지어진 초가지붕의 아즈마야(四阿), 스이테이(水亭) 등이 일본정원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고, 언덕에 있는 마루테이(丸亭), 카쿠테이(角亭), 로쿠카쿠테이(六角亭) 등에서 정원을 조망할 수 있고, 스이테이(水亭)에서는 올려다 볼 수 있다. 정원 내에는 요코하마에서 생사(生糸) 무역상을 하던 다나카 헤이하치(田中平八, 1834-1884)가 지은 다실(茶室)무안(夢庵)이 이축되어 있다.
코츄안(壺中庵)은 원래 니혼칸(日本館)이라 불렸는데, 부지 내 남북으로 3동의 건물이 연이어 지어져 바라보는 경관의 변화가 빼어나, 젊은 시절 이 곳을 방문했던 소설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는 중국 고사 '호중지천(壺中の天)을 연상했다고 하여, 1994년, 항아리 속에 이상향과도 같은 별천지가 있었더라는 고사에서 유래한 코츄안(壺中庵)으로 명명되었다.
정재계의 유명인사였던 구하라 후사노스케(久原房之助)의 별장(別邸)에는 국내외 정재계 명사들이 수없이 드나들었는데, 그 중 중국 신해혁명의 아버지, 손문(孫文, 1866-1925)이 있었다. 1915년 구하라(久原)는 일본에 망명중인 손문(孫文)을 초대하여, 막 완공되었던 란노마(蘭の間)에 머물도록 하여 이국에서 온 친구를 위로하였다. 란노마(蘭の間)에는 '손문(孫文)의 탈출구(抜け穴)'라 불리는 뒷길(抜け道)이 있었다고 하며, 위험이 닥쳤을 때 빠져나갈 수 있도록 배려하였고, 벽에는 난로 뒤로 빠져나갈 수 있는 뒷문이 있어, 지하터널을 통해 빠져나갈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