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엄상익 변호사님이 겪는 삶의 이야기에 나오는 실버타운에서 만난 80대 오인의 이야기를 실어봅니다. 대화해보니 그분은 월남전에 해병대에 파병되어 사선을 넘은 퇴역장성이었답니다.
그런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피 흘린 댓가로 번영을 누리면서도 마치 내가 잘나 오늘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며 나이든 이들을 폄하하고 함부로 대하는 일이 없는 세상이기를 기도합니다.
‘실버타운의 80대 노인 이야기’
검은 밤바다가 넓게 드러누워 있었다. 허공에 뜬 붉은 달이 바다 위에 긴 빛의 띠를 이루고 있다. 파도가 몰려와서 물을 토해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밤바다에서 실버타운에 묵는 팔십대 노인의 얘기를 듣고 있다. 노인은 평생 군인으로 살아왔다고 했다.
몸을 혹사해서 그런지 허리가 많이 아프다고 했다. 그는 이십대 월남에 파병되어 죽을 고비를 겪었다고 했다. 내가 그때 얘기를 해달라고 했다. 그는 쑥스러운 듯 침묵했다가 느릿느릿 말하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해병대 소위였는데 우리 중대는 정규 월맹군이 캄보디아 국경을 넘어서 들어오는 목을 지키고 있었어요. 새벽 네 시에 정규군 복장을 한 월맹군이 개미떼같이 몰려오는 거야. 우리는 소수의 중대 병력이었는데 적은 수 천 명의 연대 병력인거야.
우리가 모두 죽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더라구. 우리가 진지를 빼앗기면, 미군은 월맹군 한국군 구별하지 않고 그곳에 집중포격을 해서 다 죽이게 되어 있었어. 중대원 모두 죽음을 의식했지. 짧은 순간이지만 살아온 세월이 주마등 같이 뇌리에서 흐르더라구.
내가 '우리 모두 살자'고 소리쳤어. 그리고 통신기로 미군에게 다 죽이는 포격을 늦추라고 했지. 이래저래 죽음이 삶보다 더 확실한 거야. 그러니까 신기하게 나뿐 아니라 중대원 전원이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더라구. 차츰 공포나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 같았어.
파도 같은 적의 첫 번 째 물결이 들어오고 다음, 그리고 그 다음 적의 부대가 계속 들어왔어. 우리는 계속 그들을 향해 총을 쐈지. 날이 밝을 무렵이 되니까 적이 물러가더라구. 우리는 살았어. 기뻤지.
박정희 대통령이 중대장과 함께 소대장이었던 나를 청와대로 부르더라구. 거기서 태극무공훈장을 받았지. 6.25 전쟁에서 백선엽 장군이 그 훈장을 타고 그 다음으로 중대장과 내가 탔지.''
그 노인은 죽음의 계곡을 걸어 나온 사람이었다. 내면의 오지에 붙어있던 노인의 또 다른 기억이 따라 나오는 것 같았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한번은 우리 해병대가 베트콩이 있다는 제보가 들어온 마을을 쳐들어 갔었어. 베트콩도 로컬이 있고 다양해. 작전을 하기 전에 마을에 먼저 전단을 뿌려. 피난을 하라고. 작전을 시작한 이후에 남아있는 사람은 적으로 간주하고 사살하겠다고 말이야.
텅 빈 마을을 들어갔는데 거기서 베트콩들의 작은 땅굴을 발견한 거야. 일단은 그 구멍 안에 최루탄을 까서 넣었어. 잠시 후 구멍 안에서 기침소리가 들리는 거야. 총을 입구에 겨누고 나오라고 소리쳤지.
그랬더니 할머니하고 젊은 임산부가 나오는데 애가 막 보이는 거야. 탯줄이 보였어. 어떻게 할까 하다가 일단 애를 받았어. 그리고 그 산모에게 우리 전투 식량인 레이션을 먹이고 중대 본부로 데리고 갔지.
이틀 후인가 그 여자 보러갔더니 가 버렸어. 그 여자는 베트콩 간부의 여자라는 거였어. 남편인 베트콩 쪽에서 고맙다는 메시지가 왔어.'' 그런 전장에서 인간성의 본질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는 괜찮은 사람 같았다.
그가 덧 붙였다. ''며칠 후인가 나한테로 뉴욕타임스 기자하고 조선일보 기자가 와서 그 내용을 묻더라구. 사실대로 말해줬더니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내는 거야. 별것도 아닌데 말이야. 하여간 전쟁을 해도 착해야 해. 그래서 하나님이 나나 우리 중대를 살려준 것 같아.
그때 보면 왜 전쟁을 해야 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더라구. 우리야 워낙 못 먹고 가난하던 시절이었으니까 나 같은 장교의 경우는 하루 삼십 몇 불 피 값을 받기 위해 간 거지. 그런데 미군 병사들도 딱한 것 같았어.
미국에서 평화롭게 잘 살다가 군대에 끌려와 할 수 없이 베트남까지 온 거 아닌가? 참호를 파고 그 속에서 무서워하는 걸 보면 안 됐더라구. 그때 난 깨달았어. 어떤 경우라도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돼. 전쟁을 결정하는 건 정치인이지만 가서 싸우다 죽는 건 힘없는 보통사람들의 자식들이니까.''
알고 보니 그 노인은 해병대 사단장을 지낸 유명한 장군이었다. 그가 회의적인 어조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
''뉴스를 보니까 야당의 혁신위원회에 영입된 여자 교수가 우리같이 나이 먹은 사람들은 투표권을 박탈하자고 하더라구. 그래도 우리들은 잘 살아보려고 나름대로 자기 몫의 일을 하고 살아왔는데 말이야.''
지금 이 나라의 젊은이들은 잘사는 현실 뒤에 있는 노인들의 피와 수고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 같다. 그들도 시간이 가면 노인이 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