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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서대장
사랑으로 예수를 맞이하라. 마22:36-39
주신 말씀 마22:36-39을 중심으로 대림절 4주차에 [사랑으로 예수를 맞이하라]는 제목으로 메시지가 선포될 때 큰 은혜 받으시기 원합니다.
지난 한 주 동안 평안 하셨는지요?
이제 한해를 결산하며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기 위해 분주한 연말연시가 다가오듯 교회도 예수님의 오심을 바라며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벌이는 유명한 일명 {가장 큰 계명 논쟁} 중의 일부입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가라고 묻습니다.
이 당시 랍비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613개의 계명 중에서 더 중요한 계명 248개 그리고 덜 중요한 것 365개로 구분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다 지키지 못한다면 그 중에서 중요한 율법을 지키되 가장 크고 중요한 계명은 반드시 지키겠다는 속셈과 예수님을 시험하는 이중적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 이웃을 사랑하라고 제시하셨는데, 이는 성경의 어느 특정부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 성경을 관통하는 율법의 근본정신을 밝혀 주신 것입니다.
즉 이 두 계명 즉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맞이하는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 맞을 채비를 해야 될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으로 예수를 맞이하라는 말인가요?
첫째로 열린 마음으로 예수님을 맞이해야 합니다.(36)
36절을 보면 한 율법사가 ‘선생님,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하고 묻습니다. 질문을 위한 질문 즉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시험입니다.
대학교 철학교수가 학위도 없이 시골 서당에서 학동들을 가르치는 훈장에게 와서 [인간은 무엇인가?] 묻고 있는 것 같은 경우입니다.
틀림없이 올무에 걸릴 것이란 기대를 가지고 말입니다.
당시 율법사들은 율법에 능통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줄줄 암기했고 역사와 본질을 구분할 능력을 가지고 있어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던 자들이었기에 당연히 예수님 앞에 나와 경배할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핵심인 메시야가 오실줄 알고 있었고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하며 많은 이적과 치유를 행하시며 하나님의 아들인 증거들을 전파하므로 충분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임을 알았습니다.
이들은 당연히 그리스도 예수님을 알아보고 겸손히 경배하며 영접해야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유대주의 편견과 고정관념에 근거해서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기까지 패역한 일을 서슴지 않고 감행했던 것입니다.
즉 그들은 장로들의 유전이 최고의 가치인 것으로 여기고 , 장로들의 유전에 반하여 행동하는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에 올가미를 씌우고, 족쇄를 걸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적대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수 천 년을 메시야 오심을 기다렸고 성경에 정통했고 많이 기도했고 일생을 온전히 말씀에 헌신했지만 이들의 이 많은 지식과 경험이 열린 마음이 없어 전통에 휘말려 고정관념으로 인해 진리를 벗어나 버리고 만 것입니다.
열린 마음이 없는 지식은 편견과 고정 관념에 사로잡히게 되어 교조적 이데올로기가 되고 맙니다.
욥기서에서 이미 지구가 우주 공간에 매달려 있는 항성임을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16세기까지 사람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움직이지 않고 항성을 포함한 여러 천체가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는 천동설을 신봉했었습니다.
이에 대해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정지한 태양주위를 지구가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로마 교황청이 사람을 미혹케 하는 사설을 퍼뜨리는 자라 하여 종교재판에 회복하였던 것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한 것입니다.
현대인들도 아무리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하지 못하는 진화론을 아무 근거도 제시 못하는 가설을 마치 그것이 진짜인양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누구든지 진리에 대해 열린 마음이 없이 지식을 갖게 되면 그 지식은 교조적 이데올로기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대명천지에 김일성 김정일 세습을 감행하고 이도 못해 3대째 족벌 세습을 벌이다 지구상에 가장 폐쇄적인 독재체제이며 가장 빈국으로 추락한 북한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웃기는 일입니다.
우리 장충체육관은 필리핀의 원조로 필리핀의 기술로 건설했는데 이제 필리핀에 무상원조를 하게 된 대한민국과 이 나라 저 나라 기웃 기웃 전쟁무기나 팔고 동냥이나 하는 북한체제와 비교가 되냐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요? 열린 마음입니다.
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무한 경쟁에 뛰어든 것입니다.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식으로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온 우리 기성세대들의 공로 때문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열심히 구국 기도하는 기도의 용사들이 있어 하나님께서 복주심 때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를 흔들림 없이 변함없이 보수해야 하지만, 그 외의 지식적인 것이나 나라의 문은 열린 마음으로 활짝 열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오바마가 서명했다하니 쫓기듯 아무런 준비도 없이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날치기 통과시키는 것도 잘못입니다.
더군다나 자기들이 집권하면 한미 FTA를 무효화 시키겠다는 것은 닫힌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 무역규모가 1조 달러를 달성했습니다.
한 사람당 2천 만 원씩 돌아가는 엄청난 규모입니다.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가 무역제제를 가할 수 없습니다.
더 좋은 제품을 더 싸게 더 빠르게 더 많이 공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인권이 유린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아기 예수 오심을 축하하고 맞이하기 위해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성경에 비추어 성경적인 메시야를 맞이해야 될 줄 믿습니다.
어떻게 사랑으로 예수를 맞이하라는 말인가요?
둘째로 전인격적 절대 헌신적 사랑으로 맞이하라.(37)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님이 신6:5 말씀으로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이 첫째되는 계명이라 대답하신 것입니다.
신6:5 말씀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규정한 말씀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가 하나님께 취할 합당한 태도가 어떤 것인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전인격적으로 그리고 절대헌신의 자세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도가 직장을 팽개치고 성전에 엎드려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일5:3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합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너무 피곤하다 합니다.
주일 새벽기도에 다녀와서 후딱 밥해먹고 성가대 연습해야 합니다.
예배참석하고 성가연습 후에 점심 먹습니다. 오후 주일학교 교사하며 혼이 빠진 다음 남녀 전도회 모임이나 선교회 모임 있습니다.
저녁예배 참석해야 합니다.
주일날 쉬기는커녕 파김치가 됩니다.
월요일부터 새벽기도, 그리고 수요예배, 구역예배, 권찰 구역장예배, 금요철야예배 제자훈련 참석해야 합니다.
이렇게 광신도가 아니면 소화하기 힘든 스케줄에 지쳐 점점 편한 곳을 찾게 됩니다.
이렇게 살인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 점점 더 획일화되고 습관화되고 반복적인 일들이 새롭거나 흥미를 돋우지 못해 성숙한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시험당하는 성도만 양산하고 늘어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무리 살인적인 일정이라도 기쁨으로 감사하며 감당하는 충성스런 많은 성도들이 그래도 많이 있기에 한국교회가 견고히 서있고, 대한민국이 유럽의 재정위기 일본의 만성적 경제침체, 미국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건전한 성장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일부 성도들은 술 담배 제사규제가 너그럽고 자유롭고 그렇게 심하게 돌리지 않는 천주교로 떠나갑니다.
한결 같이 성도가 줄어든다고 말하면서 원인을 솔직하게 해부해서 발표하지 못합니다. 스스로 불똥 맞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에둘러 둘러댑니다.
이처럼 과도하게 교회에 시간을 빼앗기고 물질을 빼앗기고 전적으로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며 생활한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신앙생활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신앙생활은 바로 삶이 예배가 되는 신앙생활자세입니다.
도가니에 한국교회가 빠져 헤매는 때에 좋은 예화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어린이 집에서 구인광고를 냅니다. 특별한 조건을 통과하게 되면 다른 사람과 다른 특별한 대우를 보장하겠다는 것입니다. 벌떼처럼 응시자들이 몰려왔습니다. 박사학위, 출신, 외모, 여러 가지 장점과 경험을 자랑하며 면접을 치루고 난 다음 합격자는 평범한 처녀입니다.
합격한 이유를 듣고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면접을 하러 가는 도중에 한 아이가 울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면접 시간에 쫓겨 본채만채 면접실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합격한 처녀는 면접하러 가다가 우는 아이를 보고 달래주고 내가 면접보고 와서 같이 엄마를 찾아주겠다고 하며 눈물을 닦아 주고 갑니다.
그리고 면접이 끝난 다음 그 아이와 함께 엄마를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면접장은 바로 우는 아이가 서 있는 현장이었고 면접실은 통과의례였던 것입니다.
우는 아이를 진정으로 가슴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채용한 것입니다.
날마다 성전에 올라와 살다 싶이 한다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계명들을 충실히 지켜야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형식이나 틀에 매인 종교행위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가장 완전한 사랑 고백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며,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요14:21“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힘써 지키고 있다면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율법의 행위로 구원 받을 수 없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그의 계명들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일을 마다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나타내는 외적 표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명에 대한 충실지수로 하나님께 대한 성도의 사랑의 무게를 달고 계신 줄 믿으시기 원합니다.
어떻게 사랑으로 예수를 맞이하라는 말인가요?
셋째로 이웃을 사랑함으로 예수를 맞이하라.(39)
39절에 두 번째 큰 계명 즉 레19:18 말씀을 인용합니다.
십계명 1-4까지 대신 계명을 요약한 것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라면 5-10계명을 요약한 것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소홀히 하는 것은 잘못이며 거짓인 것입니다.
요일4:21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합니다.
이웃 사랑은 거룩한 명령이므로 회피하지 못할 의무입니다.
보통 사람의 명령이나 요청이라면 형편 따라 ‘예’ ‘아니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이나 장군의 명령이라면 함부로‘예’ ‘ 아니오’ 할 수 없습니다.
아차 잘못하면 목이 잘리거나 아니면 자리가 위험하거나 신분상의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명령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것이어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가부간의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서울역 우동할머니 김복순 할머니는 자신의 전재산을 대학에 기부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시신조차 실습용으로 기증했습니다.
입양한 딸들이 왜 우리는 보리밥 먹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쌀을 사다 주냐고 투정을 하면 “너희들은 내 사랑을 먹고 살잖아...”하며 소녀가장들을 돌보았다고 합니다. 집도 현금도 그리고 몸까지 온전히 기부하는 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이웃 사랑인줄 믿습니다.
무조건적인 순종만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생명의 주인이시며 역사의 주권자이시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면 반드시 망하고 죽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경건한 것처럼 자신을 가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경건해지기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계획까지도 알고 계시는 분이시므로 진심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경건의 최고봉은 방언을 말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보조수단이 되긴 하지만 본질은 아닙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헐벗고 굶주리고 인권을 유린당하며 소외당하고 핍박당하는 사람들을 외면한채 종교적 열광주의에 빠져 주여 주여 부르며 찬송하며 금식한다고 경건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알지 못하고 기억하는 법이 없으십니다.
요13:35 “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하신 말씀처럼 우리는 언제든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기를 힘써야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신 것입니다.
그 말씀은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마귀를 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웃을 사랑하는 성도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경배하기를 원하시는 줄 믿으시기 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떻게 사랑으로 예수를 맞이하라는 말인가요?
첫째로 열린 마음으로 예수님을 맞이해야 합니다.(36)
둘째로 전인격적 절대 헌신적 하나님 사랑으로 맞이하라.(37)
셋째로 이웃을 사랑함으로 예수를 맞이하라.(39)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형식과 틀에 매이지 않는 열린 마음오로 전인격적 절대 헌신적 하나님사랑과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따뜻하게 오실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기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