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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李花 원문보기 글쓴이: 이강석
조선 제 16 대왕 인조대왕 이 종은
1595 년 선조 28 년 을미년 ( 양띠 ) 11 월 7 일에
피난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아직 임진왜란이 진행 중 이라
왕실 가족들은 모두 한양에 입성하지 않고
일부는 해주등지에서 흩어져 살고 있었다
인조대왕의 부친은 정원군 이 부이다
정원군은 선조왕자로 후궁 인빈 김씨의 3 남이다
인조의 모친은 연주부부인으로 불렸는데
좌찬성 구사맹의 여식 능성 구씨이다
인조대왕은 보위에 오르고
부모를 원종과 인헌왕후로 각각 추승 하였다
당시 조정에 논란이 크게 일어나고 전국 유림이 극력 반대 하였었다
인조는 백부인 신성군 ( 인빈 소생 2 남 )의 양자였기 때문이다
전에 선조대왕이 중종왕자 복성군의 후사가 되었다가
파양하고 명종대왕의 양자로 급히 보위에 올랐었다
왕실에서 예와 법을 솔선수범해야 하는데 어겼음을 문제 삼았던 것이다
인조대왕은 친부모의 무덤을 이장하여 김포 풍무동에 모시니 장릉이다
또 동생 능성군은 능성대군으로 능창군을 능창대군으로 높였다
능양군은 인조대왕이 왕 위에 오르기 전 잠저 시절 군호이다
능양군은 모든 행동이 규범에 어긋나지 않고 말 수가 극히 적었다
음악 오락을 싫어하고 진기한 것에 관심 두지 않고 소박하고 검소하며 공손 하였다
그림에 소질이 뛰어 났었다고 한다
능양군은 주목 받을 만큼 뛰어난 왕족은 아니었다
능양군은 1610 년 광해군 2 년 경술년 16 세에
한성판윤 한 준겸의 4 녀 청주 한씨와 혼인 하였다
참고로 이 해 광해군 아들 왕세자도 가례 ( 혼인 )를 올렸다
당시 한양에 새문안동에 서기가 서려 있다는 무설이 있었다
인조의 부친 정원군의 집이 새문안동에 있었다
어느 새 그 말은 광해군의 귀에도 들어 갔다
광해군은 그 무설에 현혹되어 보위에 오르자
그 일대 땅과 민가를 대궐 신축 명목으로 사들여 세자궁을 지었다
그리고 장차 자신에게 위협세력이 될 친 형 임해군과
이복 동생 영창대군을 차례로 살해 하였다
그런데도 새문안동의 왕기설은 수그러들 줄 몰랐다
선조 후궁 인빈 ( 인조 친 할머니 )의 무덤자리가 좋아
그 후손이 임금이 될 꺼라는 설도 돌았다
그러나 누구나 생각 하기에 정원군은 행실이 난폭한 말썽장이
왕자중 하나 였고 주목 받을 만큼 뛰어 난 인재는 아니었고
그 보다 조금 자질이 특이한 아들 능양군은
결혼 하여 경행방 향교동에 살고 있었다
정원군이나 그 아들들이나 왕재감이라고 하기엔 무언가 부족한
그저 평범한 왕손이지 광해군이 크게 신경 쓸 인물들은 아니었다
선조대왕이 손자 능양군이 태어나자 천윤이란 이름을 붙여 주자
광해군이 듣고 어디 쓸 자가 없어
천윤 (하늘이 낸 대통을 잇는 후사를 잇는 그런 의미 ) 이란 이름을
쓴 단 말인가 하며 매우 언짢아 했었다는 일화가 있었다
아무튼 광해군이 집권 하자 일가 권속이 특히 왕손들이 모두 벌벌 떨고
눈에 뛰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지냈다
그런데 정원군의 막내 아들에 능창군이 있었다
그 때 사춘기 소년으로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
비범하고 준수한 용모를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되었다
말타기 활쏘기에 능하고 기상이 활달하고 씩씩 하여
선조대왕을 닮고 그 후손중 가장 뛰어 났다는 소문이 자자 했다
한편 광해군은 왕비와 열 넷의 정식 후궁 외에 여러 궁인으로 부터
많은 자식을 얻으려고 애를 썼으나 끝내 1 남 1 녀를 키웠다
다시는 더 아들을 두지 못하니 몹시 초조해 하고 있던 참 이었다
그러다 1615 년 광해군 7 년 인조의 막내동생 능창군이 17 세 때
광해군의 충복들이 신경희 일당이 능창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고
모함하여 결국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강화 교동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능창군은 얼마 후 그 곳에서 위리에 불을 질러 살해 하려는 낌새를 알고
부모에 편지를 써서 시비에게 건네 주고 목을 매 자결 하고 말았다
막내아들을 그렇게 잃은 선조왕자 정원군 ( 인조대왕 아버지 )은
홧병을 얻어 4 년 후 40 세로 죽고 말았다
이 에 능양군도 동생 능창군의 원수를 갚을 일을 궁리하면서
이리 저리 떠 돌며 지내게 되었다
그러는 중 또 3 년이 흘러 갔고
광해군은 전쟁으로 궁핍한 재정을 메꾸려는 방책으로
벼슬과 옥사를 돈으로 사고 파는 등
난정을 계속하여 나라가 어지러워 지자 크게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능양군은 광해군에 핍박 받고 있던 이종사촌 외사촌 장인 동서등과 이 귀 김 유 김 자점 이 괄등의 호응받고 반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거사에 앞서 반정공신들은 점을 쳤고
모두 귀하게 될 팔자라 하여 거사에 착수 했다고 전한다
아무튼 능양군은 계해년 1623 년 3 월 3 일 반정하여
큰아버지 광해군을 축출하고 그 날 인목대비의 지지를 얻어 경운궁 별궁에서
조선 제 16 대 왕으로 즉위 하였다 그가 바로 인조대왕이다
인조가 반정하고 전적으로 백성들에게 호응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우선 평소에 광해군 보다 자질이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지 못했고
임금의 아들이 아니고 손자라는 점 때문에 백성들의 실망이 더 컸다
또 그도 어차피 후궁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선조부터 광해군 인조 모두 후궁계열이 왕위를 이으니 백성들의 더 실망 했다
또 즉위 한 다음 해 공신 이 괄이 자신이 공이 큰 데도
변방으로 전출되고 2 등공신에 책록 되고
그 보다 공이 적은 임금의 친인척은 크게 받고
공을 세운 자신의 동생 아들에게도 적게 보상 하자
크게 화가 나 난을 일으키니 임금이 공주로 피난을 가
위신이 크게 손상 되고 말았다
이 때 한양이 3 일만에 어이 없게 함락 되었을 때
시민들은 대문을 열고 반란군을 환영 했다고 한다
또 외교정책 실패로 두 번에 걸친 호란에 죄 없는 백성들이 몹쓸 고생을 했고
당시 서민 경제는 조선 역사상 최악이라 원성이 자자 했고
선조대왕 처럼 말년으로 갈 수록 인조 또한
후궁에 의해 성총이 흐려져 지탄 받았다
인조대왕도 반정 공신들 즉 서인세력에 눌려 재위기간 내내 자유롭지 못했다
인조대왕은 기축년 인조 27 년 1649 년 5 월 8 일 병인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55 세로 승하하니 재위는 27 년이다
기축년 9 월 20 일 파주 운천리에 장사하고
영조 7 년 신해년 8 월 30 일 현 위치로 이장 하였다
장릉
조선 제 16 대왕 인조대왕과 첫 배위 인렬왕후 청주 한씨의 무덤으로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에 있다
인조는 두 번 혼인 하였다
첫 배위가 인렬왕후 청주 한씨다
영의정 왕실호위청대장 지낸 서평부원군 한 준겸의 4 녀로
원주목사 시절에 낳은 딸이다
인조는 왕 위에 오르자 왕실호위청을 신설 하여
그 때 부터 국구가 그 자리를 겸 하여
역대 국구 중 권세가 막강 했으나 세도 부리지 않았다
인렬왕후는 임진왜란중 갑오 ( 말띠 )년
1594 년 선조 27 년 7 월 1 일 정축일에
원주에서 태어났다
17 세에 부친이 한성판윤 ( 서울시장 )으로 있을 때
16 세 된 왕손 능양군과 가례를 올리고 청성현부인이 되었다
한씨는 인조와 사이가 좋았고 효성이 지극하고 성품이 조용하고 어질었다
반정 후 중궁에 한보향이라는 나이 많은 궁녀가 남 몰래 때때로
눈물을 훔치니 왕비의 시녀 하나가 옛 상전을 그리워함이라고 고발 하였다
이 에 왕비가 오히려 의로운 사람이라 칭송하고
보모 상궁으로 임명하고 상으로 후추 한 말을 주었다
또 고발한 궁녀는 꾸짖고 회초리를 쳤다
인렬왕후는 왕자만 6 명을 낳았다
끝으로 둘은 낳자마자 죽었다
왕후는 막내를 낳고 출혈이 멈추지 않아 숨지고 말았다
인조 13 년 1635 년 12 월 9 일 을유일에
창경궁 여휘당에서 42 세로 세상을 떠났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꼭 일년전이다
이듬 해 4 월 11 일 파주에 장사 했다
이 때 청나라에서 조문사절을 보냈는데 조문 보다는 조선을 염탐하고
무리한 조건을 내세우고 사대를 강요하여 임금의 심기를 건드렸다
임금은 화가나 8 도에 격문을 돌려 전쟁 불사 의지를 밝혔고
결과는 몇 달 후 12 월 병자호란으로 나타났다
인렬왕후 청주 한씨 소생
장남 소현세자 이 조 ( 왕 )
임자년 1612년 광해군 4 년 5 월 22 일 갑진일에
한양 경행방 향교동에서 왕손 능양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소현세자는 1625 년 인조 3 년 14 세 때 세자에 책봉 되고
16 세에 우의정 강석기의 여식인 금천 강씨와 결혼하여 그 후 3 남 4 녀를 두었다
26 세 때 1637 년 정축년 2 월에 병자호란이 끝나고
소현세자 내외와 봉림대군 내외 일가는 인질로 청나라 수도 심양에 끌려갔다
만 8 년 만에 잠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옮긴 청나라 수도 북경에 가서 몇 달 체류 할 때
선교사 아담 샬과 접촉하고 서양 문물에 관심을 가졌다
( 참고로 소현세자는 8 년 동안 두 번 일시 귀국하였었다 또 소현세자 일행은 명나라를 멸망 시킨 청나라 군대를 따라 북경에 입성 하였다 )
그 해 인조대왕의 지극한 요청으로 인질 생활을 청산 하고 귀국 하게 되자
심양관 시절 강빈 ( 세자빈 민회빈 강씨 )과 함께 농사와
무역으로 벌어드린 수만냥의 돈으로
서적과 기계등 우리나라에 없는 물건을 대량 사 가지고
1645 년 2 월 18 일 귀국 하였다
서양 문물에 크게 눈을 뜬 소현세자 내외는
귀국 후 부왕에게 건의 하여 실용정책을 펼 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645 년 인조 23 년 4 월 23 일 병이나 26 일
귀국 2 개월 만에 의문의 죽음으로 세상을 떠나니 34 세 였다
1635 년 12 월 모친 인렬왕후 한씨졸
1636 년 12 월 병자호란 발발
1637 년 2 월 인질되어 청나라 수도 심양을 향해 출발하다
1644 년 3 월 명나라가 멸망하자 임시 귀국하였다
다시 새 수도 북경으로 갔다 고국으로 출발 했다
1645 년 2 월 28 일 귀국 했다 4 월 23 일 귀국 2 개월 만에 소현세자는 죽었다
온 몸이 검푸르게 변 해 있었다고 증언 한 사람이 있었다
1646 년 강빈과 장남 석철도 죽었다
병자호란 후 조선은 청나라 요청으로 대청 외교를
소현세자가 전적으로 담당 하였고
그 과정에서 인조의 오해와 노여움과 질투를 샀다
청나라는 계획적으로 인조를 배제 하고 소현세자만 상대 하였고
미숙한 왕자들은 시행 착오로 국고를 축내는 일이 빈번 하여 부왕으로
부터 마침내 신뢰를 잃었다 그리하여 세자들은 한 방편으로
현지 자금 조달을 위해 무역에 손을 댔다
2 남 봉림대군 ___조선 제 17 대왕 효종대왕이다
심양에서 인질 생활 할 때 장차 서구 문물을 받아 들여
조선을 크게 개혁 하려던 형 소현세자와 달리
청나라에 적대적 감정을 품고 북벌의 의지를 가지고 있어
당시 대부분이던 척화신 들로 부터 지지와 신뢰를 받았다
언제나 형을 보호 하는데 앞장 섰다
3 남 인평대군 이 요
1 년 동안 심양에서 인질 생활 하고 돌아왔다
복천 오씨 우의정 오 단의 여식과 혼인 하였다
인평대군은 억울하게 죽은 숙부 능창대군의 후사를 이었고
흥선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이 인평대군의 6 대손으로 훗날 사도세자의
둘째 서자인 은신군의 후사를 잇기 위해 출가 하였다
4 남 용성대군 이 곤 ____정묘년에 나서 병자년 10 세로 죽었다
나머지 5 남 6 남 두 대군은 낳자 마자 죽었다
인조 계비 장렬왕후 양주 조씨
소생을 하나도 낳지 못하였다
인천부사 지낸 한원부원군 조 창원의 여식으로 개국공신 조말생의 8 대손이다
인조 2 년 1624 년 갑자년 ( 쥐띠 ) 11 월 7 일 정사일
직산 관아에서 현감의 딸로 태어났다
15 세 때 1638 년 무인년 인조 16 년 29 살 연상의 44 세된 홀아비 인조대왕과
가례를 올리고 왕비에 책봉 되었다
인조대왕은 1635 년 41 세에 상처 하였다
장렬왕후 양주 조씨는 1649 년 인조대왕이 승하하자
26 세로 과부되어 자의대비가 되었고
36 세에는 아들 효종대왕이 죽었고
51 세 때 며느리 인선왕후 장씨가 죽어
두 번 다 복상 문제로 남인과 서인이 시비가 일어났다
그 해 51 세에 또 손자 즉 효종의 아들 현종이 재위 15 년 만에 승하 하고
그 왕비 명성왕후 김씨도 9 년 뒤 죽어 아들 손자내외가 먼저
세상을 떠나 조대비는 복 없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숙종 14 년 1688 년 무진년 8 월 28 일 병인일
창경궁 내반원에서 65 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렬왕후 양주 조씨 집안은 조선중 후기에 크게 번창 하였다
능은 휘릉이니 죽어서도 홀로 묻혔고 건원릉 서쪽에 있다
인조의 후궁 소생
후궁으로 소용 조씨와 소의 장씨 숙의 박씨 숙의 나씨가 있었으나
소용 조씨만 자식을 낳았다
인조는 여색을 멀리 하고 궐 밖에 사는 자식들이 매일 문안 들 때
민망하다 하여 곁에 후궁들을 물리치고 맞이 하곤 했다
소용 조씨는 궁인 출신으로 왕비 사후 인조의 총애를 독 차지해
새로 들어온 어린 왕비 장렬왕후 조씨는 독수공방으로 지냈다
소용 조씨는 심양에서 돌아온 소현세자 일가를 헐 뜯어
임금에 고하는 등 인조와 소현세자 사이를 이간 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인조대왕은 두 번의 대란과 여러 난리를 겪고 수습하는 동안
늙고 지쳐 의심이 많았는데 여기에 조씨가 거들어 임금의 성총을 흐리게 했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청나라를 등에 업고 돌아와
자신을 폐위 하려 한다는 망상에 걸려 소현세자를 몹시 의심하고 미워 했다
청태종은 귀국 하는 조선 왕자들에게 받고 싶은 선물을 말하라 하니
소현세자는 황제의 용연을 달라고 했다
그의 아우 봉림대군은 인질로 잡혀 온 조선 백성들을 풀어 달라고 했다
훗 날 그 일이 인조대왕의 귀에 들어 가 소현세자는
인조가 던진 용연에 맞아 죽을 뻔 했다
아무튼 소현세자는 귀국 후 날마다
인조대왕에게 불려가 곁에 있는 시신들이 민망할 정도로 크게 꾸지람을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약물 중독증세로 느닷없이 죽은 것이다
소현세자는 원래 얌전하고 병약 했다고 한다
학질에 걸려 나흘 만에 죽었다
그 때 새 주치의는 소용 조씨 일가라 의심 받았다
소용 조씨는 세자빈과도 사이가 극도로 나빴다
급기야 소현세자 독살범으로 세자빈인 강빈을 지목하여 누명을 씌웠다
강빈은 시아버지 인조대왕으로 부터 지독한 미움을 받았다
강빈의 시녀들은 거짓 자백을 강요 당하였으나
끝내 상전에 대한 의리를 저버릴 수 없어 버티다 타살 되었다
이 에 인조는 심양서 별 짓 다하며 억만금을 벌어와 환심을 사니
시녀고 백성들이고 강빈을 두둔 한다고 신료들 앞에서 말하였다
듣는 사람이 귀를 의심할 정도의 말을 많이 할 정도로 인조대왕의 성총은 흐려졌다
아무도 강빈 옥사에 임금의 교지를 쓰려고 하지 않자 대제학 채 유후가 쓰고
집에 가 통곡하고 서책을 불사르고 평생 괴로워 했다
얼마 뒤 끝내 강빈을 폐빈 시켜 사사 시키고
세손 또 한 제주 유배 후 죽이니 인조는 인심을 크게 잃고 말았다
훗날 효종이 즉위 하자마자 강빈 옥사를 재 조사 하여
형수인 강빈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고 조씨는 사사 시켰다
소용 조씨 소생
승선군 이 징___1639 년생이다 참판 신익전의 여식 평산 신씨와 혼인 했다
신익성은 그의 형으로 선조대왕 부마 동양위고
상촌 신 흠이 그의 부친으로 상촌집 저자로 인조때 영의정 지낸 당시 4 대 문장가이다
신 흠의 여식 하나가 장렬왕후 조씨의 숙부인 조계원에게 시집 갔다
낙선군 이 숙 ___1641 년생이다 강릉 김씨와 결혼 했다 김득원의 여식이다
낙선군은 선조왕자 의창군의 대를 이엇다
의창군은 허균의 조카사위이다
즉 허 성의 사위이다
효명옹주____낙선위 김세룡에게 시집 갔다
대궐에 출입하며 모친과 더불어 모사를 꾸몄다 처벌 받았다
김 세룡은 김 자점의 손자이다 훗 날 효종이 너그러히 용서 하였다
효명 옹주는 총명하여 인조대왕이 애지중지 하였다
11 세에 결혼 하고 며칠 후 대궐 잔치에
인조의 세 째 며느리 즉 인평대군의 처 오씨와 효명옹주는 서로 자리 배치로 다투었다
효명옹주가 임금의 핏줄을 말하며 위전의 자리에 앉자
오씨가 자급이야 옹주보다 낮지만 적서의 구별을 말하였다
이에 인조대왕이 듣고 옹주를 윗 전에 앉히니
그 때 부터 골육간의 정에 금이 갔다
인조대왕은 말년으로 갈 수록 성총이 흐려져
지지도가 바닥으로 추락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