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암구호
야간 근무가 일상인 우리는 기상을 하면 산등성이로 은폐된 도로를 따라 잠시 아침 구보를 한다. 그리고 조식을 먹은 후 화기 손질을 한다든지, 취사용 잡목을 모아 온다든지, 초소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를 정비한다든지 하며, 간혹 취사장 앞에 마련된 영점 사격장에서 실탄 사격도 한다. 그러다가 일몰 후부터 해 뜰 시간까지의 중간 시간대를 기점으로 2교대 근무를 선다.
근무 투입 시에는 소대장이 거주하는 벙커 앞 조그만 연병에 모여 그날의 암구호를 전달받고, 간단한 무기 점검을 실시한다. 그리고 실탄을 넣은 탄창과 수류탄, 클레이모어 격발기 등을 지급 받아, 분대원끼리 2명씩 조를 꾸려 야간 근무에 들어간다.
한겨울에는 숨 쉬는 콧김이 얼어붙을 정도로 추워서, 온통 방한복으로 몸을 싸고 눈만 내놓은 채로 초소에 투입된다. 총을 어깨에 메고 수류탄 등이 담긴 통을 들고 어기적거리는 모습은 뒤에서 보면 영락없는 곰이다.
초소 투입 후 초반에는 다들 맑은 정신으로 근무를 하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교대로 잠시 가면(假眠)을 취한다. 물론 소대장이나 선임하사가 순찰을 도는 낌새가 보이면, 즉시 초소별로 연락을 취하여 지적을 당하지 않는 방책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혹독한 겨울 날씨의 가면은 바로 영면(永眠)의 길이 될지도 모른다.
추운 날씨에도 용감하게 초소 한쪽에서 쪼그리고 가면을 취한 적이 있었다. 깨어나니까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한기가 몰려들었다. 공포에 질려 살아보겠다고 깡충깡충 뛰고 별짓을 다 했지만, 괜히 졸았다는 자책은 피할 수가 없었다.
나보다 군대 생활도 늦고 계급이 일병인 분대원과 조를 짜서 근무할 때였다. 그날따라 유난히 달이 밝아 온천지가 새하얗게 보였다.
밤 세시쯤, 내가 초소에 거치해 놓은 소총을 잡고 얼굴을 묻은 자세로 잠시 가면을 취하다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깨어나 앞을 보니, 철책과 초소 사이의 공간에 웬 시커먼 그림자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소총의 노리쇠를 후퇴 전진하며, 암구호를 외쳤다. 그랬더니 그 그림자가 벌떡 일어서며 다급하게 소리 쳤다.
“김 병장님! 저, 접니다. 김 일병.”
그리고 부리나케 초소로 뛰어 들어오더니 담배꽁초 하나를 내민다. 요 며칠 보급품 차량이 오지 않아, 골초인 김 일병이 참지를 못하고 초소 앞에 던져 놓은 꽁초를 줍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예의는 있어 좀 큰 꽁초를 선임인 나에게 내밀었지만,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동그랗게 토끼 눈만 하고 있었다.
불야성
하루는 중대 본부에 다녀온 소대장이 급히 소대원들을 집합시켜놓고 지시사항을 하달한다. 열흘 후 중대 차원에서 대대장 등 높은 분들을 모시고, 진지 탈환 작전을 시범 보인다는 내용이다. 그 시범의 주축이 우리 소대라고 한다.
설명에 의하면 시범 장소는 중대 본부 앞,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산등성이 일대였다. 서쪽 산등성이는 높은 분들이 관전할 장소, 동쪽은 대항군의 참호가 위치하고, 계곡 으슥한 곳에는 돌격조들이 은폐하고 있다가 신호에 따라 적진을 점령한다는 시나리오였다.
우선 높은 분들이 관전할 본부석부터 만들었다. 8부 능선쯤에 조금 경사진 곳을, 깎아 평평하게 만들고, 바닥에는 흙먼지가 날리지 않도록 작은 자갈을 깔았다. 그리고 뗏장 작업을 하여 긴 의자처럼 앉을 자리를 만들고, 시범 당일엔 그 자리에 깔개를 놓기로 했다. 본부석에서 우측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M60 기관총을 거치할 참호를 만들어 사수인 나와 부사수, 탄약 수가 위치하고, 본부석 좌측에는 화기 소대 기관총이 한 정 더 배치되었다. 공격이 시작되면 적의 진지에 집중사격을 가해 기선을 제압하는 것이 우리들 몫이었다. 그리고 돌격조는 계곡에 2개 분대가 대기하고 있다가, 적이 위치한 참호 두 개를 낮은 포복으로 접근하여 수류탄을 투척하고, 착검한 M16 소총을 들고 일제히 ‘돌격 앞으로’를 감행하여 작진을 점령하는 것이 임무였다.
거의 1주일을 죽자고 연습했다. 소대장이 메가폰을 입에 대고 시나리오를 읽고, 우리는 정해진 줄거리대로 사격하는 자세만 취했다. 돌격조에 비하면 세상 편한 백성들이었다. 시범을 보일 때도 대항군으로 나오는 병사들의 안전을 위해 실사격 대신 총만 굳게 잡고 있으면 되었다.
그렇다고 실탄 사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적의 진지 앞에 총유탄을 터트리는 장면에서는 .상사 계급인 중대 선임하사가 MI 소총에 훈령용 총유탄을 꽂고, 이 산에서 저쪽 산으로 실제 사격을 가하게 되어 있었다. 실질적으로는 그 장면이 시범 훈련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겠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가을의 막바지임에도 유난히 포근한 날씨였다. 소대장이 메가폰 성능을 점검하며 목청을 가다듬고, 총유탄을 쏠 중대 선임하사는 입술이 타는지 연신 참을 바르며 엄폐물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지프차가 여러 대 올라오고, 높은 분들이 관람석에 자리하자 소대장이 본부석을 향해 거수경례를, 하는 것으로 시범 훈련의 막이 올랐다.
우리는 주어진 역할대로 전방을 향해 기관총을 겨누었고, 메가폰에서는 상기된 목소리로 기관총 두 정이 교차 사격으로 적의 진지를 초토화시키고 있다고 내레이션 한다. 연이어 메가폰에서 “우왜앵”하는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중대 선임하사가 마주 보이는 적의 참호를 향해 총유탄을 날렸다. 골프로 치면 목표한 위치에 정확히 떨어진 굿 샷이었다. 총유탄이 터지며 노란 연막과 함께 벌건 불꽃이 잠시 일었다 사그라진다.
잠시 후 돌격조들이 적진을 향해 FM 수준의 낮은 포복으로 접근하더니, 모의 수류탄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참호 안으로 투척했다. 이때 벌써 적진 앞에는 누런 잡초를 불쏘시개로 하여 심상치 않은 불길이 일어나고 있었다. 돌격조가 그 불길을 황급히 우회하며 우렁찬 목소리로 “돌격 앞으로!”를 외쳐댔다.
그렇게 적의 진지를 점령하고 태극기를 꽂으면서 승리의 함성을 지르는 순간, 누가 갈라진 목소리로 다급하게 불을 끄라고 지시한다. 돌격조, 대항군 할 것 없이 모두 불길을 잡는데 합류하고, 이제 불길을 잡는 건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처음 불이 붙었을 때는 모두들 대수롭잖게 여겼다. 우선 시범에 동원된 병사의 숫자를 믿었고, 그 산등성이에는 불이 크게 번질 나무가 없다는 것에 방심했다. 그냥 무릎 정도 오는 잡목과 빛바랜 억새 정도만 타면 꺼질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높은 분들은 병사들이 불 앞으로 달려들자 곧 중대 본부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었다. 그런데 운이 없게도 때마침 세찬 돌풍이 몰아쳐 초기 진화에 실패한 것이다.
동남쪽으로 계속 번져간 불은 그나마 다행스러워 보였다. 그 방향의 후방지역은 수확이 끝난 논, 밭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불이 지나가면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에 야전삽으로 흙을 끼얹어 잔불 정리만 하면 끝날 상황이었다. 그래서 후방 도로를 기점으로 방어벽을 느슨하게 치고 있었다.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생각할 즈음, 작업을 지휘하던 소대장이 무전기의 호출을 받더니 다급하게 소리친다.
“김 병장, 빨리 가자!” 중대장에게서 중대 탄약고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단다. 그때부터 소대장과 무전기를 맨 최 일병, 나까지 3명은 평소의 작업화 대신 시범을 보이느라 신은 군하 발로, 길도없는 들판을 쏜살같이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들판의 초입에 선 나무에는 붉은 글씨로 뚜렷하게 ‘지뢰 조심, 길이 아니면 다니지 말 것!’이라는 팻말이 떡하니 붙어 있었다. 살얼음이 녹은 곳을, 냅다 뛸 때는 한발 한발마다 정말 머리끝이 쭈뼛거렸다. 소대장이 앞을 서는 데는 달리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렇게 숨 가쁘게 뛰어서 완만한 산자락으로 접어들었다. 또 얼만가를 허리가 고꾸라질 듯이 오르니 한 길이 넘는 억새밭 사이로 조그만 오솔길이 나타난다. 이것은 필시 탄약고가 가까이 있다는 징조이리라.
오솔길로 들어서자마자 밑에서 큰불이 무서운 속도로 올리오는 게 보였다. 뒤로 물러서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내 왼쪽 어깨로 확 치고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몸을 둥글게 웅크리니, 불이 순식간에 머리 위를 타 넘고 오른쪽으로 휑하니 사라진다. 다행이 눈썹만 약간 그을렸다. 정신을 수습하니 높은 담을 두껍게 쌓고, 콘크리트 지붕으로 된 탄약고가 눈앞에 탄탄하게 버티고 있다. 근접거리까지 화마가 스쳤어도 끄떡도 없다. 초병들만 뜬금없다는 표정이다. 순간 맥이 탁 풀려 왔다.
소대장 말로는 거기에 폭발물들이 잔뜩 보관되어 있어 터졌다면 주변이 초토화되고도 남았단다. 듣고 보니 참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무리 명령에 죽고 사는 군대라지만 지뢰 의심지역과 불 속을 무작정 내달리게 한 것은, 좀 지나쳤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서풍이 동쪽에서 불어오는 샛바람으로 바뀌었다. 이리저리 굴레 벗은 망아지처럼 날뛰던 불길은 짚으로 된 초소 지붕을 깡그리 태우고, 철책을 훌쩍 넘어서 기어이 무단 월북하고 말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불을 피해 철책선 가까이 로 다가선 노루의 슬픈 눈을 마주하는 것과 다급하고 와글거리는 짐승들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참 안됐다는 생각을 하는 것뿐이다.
저녁에는 초소에 판초 우의로 지붕을 씌우고 근무에 들어갔다. 초소에 짙게 배인 탄내와 함께 비무장지대에서 넘어온 매캐한 연기로 눈물, 콧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밤이 깊어갈수록 점점 서북 방향으로 번져간 불길은, 북측 지역의 진지로 추정되는 곳 앞에 일렬횡대로 멈춰 서서 휘황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남의 집 불이라서 그런지 더 장관이었다.
나중에 들려온 이야기로는, 우리 쪽은 지뢰 매설 지대 주변의 억새를 미리 베어냈기 때문에 별 피해가 없었는데, 북측은 제때 작업을 하지 않아 지뢰가 엄청 터져서 책임자가 문책을 받았다고 한다. 아무튼, 우리도 자질구레한 피해는 입었지만, 문책받은 사람은 없었다.

첫댓글 너무나 상세하게 써 주셔서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서 있었나 싶어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김 선생님의 나아가는 길이 창창 하기를 기원합니다.
데이빗 남 께서도 글을 많이 읽으시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글을 읽음으로 얻어지는 것이 많지요. 계속 정진 하시길 바랍니다.
참! 추석은 잘 보내셨습니까? 늦게 안부를 물어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