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시에 대하여
1. 개관
‘신시’라고도 한다. 그 전의 창가(唱歌)와 이후의 자유시 사이에 위치하는 것으로, 종래의 고가(古歌)인 시조나 가사와는 달리 당대의 속어(俗語)를 사용하고, 서유럽의 근대시나 일본의 신체시의 영향을 받은 한국 근대시의 초기 형태이다.
일반적으로 신체시의 효시는 1908년 11월 《소년(少年)》 창간호에 실린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의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를 꼽으나, 이에 앞서 1905년 무렵 작자 미상의 신체시 《아양구첩(峨洋九疊)》 《원백설(怨白雪)》 《충혼소한(忠魂訴恨)》이 발표되었고, 1896년 이승만(李承晩)이 《협성회보(協成會報)》에 《고목가(枯木歌)》라는 신체시를 발표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육당의 일련의 신체시를 그 형태상으로 보면 대개 7 ·5조의 자수율(字數律)로서 이루어 놓은 정형시이다. 즉, 신체시는 창가적 정형성과 후렴이 있으나, 고전시가의 율문적(律文的) 표현을 지닌 준정형시(準定型詩)라고 볼 수 있다.
2. 정의
신체시란, 신시(新詩)라고도 하며, 고대 시가에 대해 갑오경장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형태의 시를 일컫는 말로, 창가의 정형적인 율조(律調)에서 벗어나 새로운 율조 속에 새로운 내용을 담은 시 형태를 말한다.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정형시의 잔재와 계몽성 때문에 완전한 자유시가 되기에는 미흡하지만, 우리 시문학사상 정형률(定型律)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3. 형성
개화 가사와 창가가 가지고 있던 정형적인 율조를 깨뜨리고, 근대적인 자유시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보이며, 1908년 <소년> 창간호에 발표된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최초의 작품이다.
4. 형식
3·4조가 기본이 되는 구형을 깨뜨리고 7·5조 내지 3·4·5조의 새로운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부분적 정형률은 가졌지만 전체가 일률적인 율조(律調)로 된 것이 아니란 점에서 자유시에 한 발 다가선 형태이다.
5. 내용
개화 의식, 자주 독립과 민족 정신, 신교육, 남녀 평등 등의 사상을 담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6. 특징
·신체시는 근대정신의 소산으로 전통적인 인습을 타파하고 서구문화를 수용하려는 근대화 운동의 표현이기 때문에 그 이전의 전통시가와는 다른 이질적인 것이다. 즉, 신체시는 이전까지의 가창을 전제로 한 고시가와 개화가사 혹은 창가의 율조에서 벗어나 산문화한 자유시에로 이행되는 과도기의 시적 형태의 하나이다.
·정형성(율문성)의 탈피, 구어체의 채용, 옛 시가와의 주제 의식의 변별 등은 이전 시가와 대비되는 신체시의 주요 특징들이다.
·개화 가사와 창가가 가지고 있던 정형적인 율조를 깨뜨리고, 근대적인 자유시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보인다. - 자유시 탄생의 모태가 되었다.
·민족 사상의 고양, 소년의 기개와 포부 등 민족주의의 선양과 계몽을 주된 내용으로 하였다.
·신체시는 창가(唱歌) 가사와 근대시의 과도기적 형태이다.
7. 주요 작품
①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 : 1908년 최남선. 1908년 《소년》지 창간호 권두에 실린 작품으로 순결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소년에 대한 찬양과 기대를 통해, 구시대의 잔재를 청산하고 새로운 질서와 창조를 열망하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최초의 신체시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신체시(新體詩)’ 또는 ‘신시(新詩)’라고 불렀다. 4 ·4조나 7 ·5조, 또는 6 ·5조 등의 창가 형식을 깨뜨리고 완전한 자유시의 형태로 등장했다는 데에 문학사적 의의가 크다. 한국 근대시의 최초의 모습으로 평가되는 그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② 구작 삼편 : 최남선 작
③ 꽃두고 : 최남선 작
④ 막은 물 : 최남선 작
⑤ 우리 영웅 : 이광수 작
8. 용어의 유래
'신체시(新體詩)' 라는 명칭은 일반적으로 일본의 명치 시대에 동경 대학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신체시초·新體詩抄」(外山正一·失田部良吉·井上哲次郞 공편, 丸善會社刊, 1883)에서 온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 책은 5편의 창작시와 14편의 영미시의 번역을 수록하고 있는데, 동경 대학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간행했던 《동양학예잡지·東洋學藝雜誌》(1881.10)에 이미 발표했던 작품들을 손질하고 몇 편을 더하여 서구의 우수한 시를 소개함으로써 재래의 진부한 시문학을 일신하자는 의도로 묶어 간행한 것이다.(시가혁신운동)
<신체시초>의 '신체'란, 편집책인 井上이 명명한 것으로 구체시(舊體詩), 즉 한시나 화가(和歌)를 의식해서 지은 명칭이라고 한다. 신체시가 'poetry'에 해당하는 개념에서 비롯된 것임은 <신체시초>의 권두 범례가 밝히고 있다.
주) 일본의 신체시가 형태상으로는 구태의연한 7·5조(일본 전통시가의 율조)를 답습하고 있으면서도 굳이 '신체'라 한 까닭은 일단 기본율조는 7·5조로 하되, 그 밖에 6·6조 같은 새로운 율격을 시험해 보겠다는 포부라든가, 혹은 옛체 장가(長歌) 가 5·7조의 줄글로 이어지는 데 비하여, 신체시는 7·5조로 하되 6구 1연으로 분절했다는 점, 새 시대의 서구 취향에 맞는 참신한 제재를 선택했다는 점, 박력있는 시풍을 건설하겠다는 취지 등에서 찾고 있다. (구본혁 외저, 『한국문학신강』, <7.신체시> 2.신체시의 용어의 유래, pp.130~135 참고.)
일본의 명치 시가는 <신체시초> 간행 이후 <新體詩歌>, <明治新體詩選>, <新體詩學必携>, <新體詩選> 등과 같이 '신체시'라는 명칭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우리의 경우 '신체시'라 하면 육당의 <해에게서 소년에게>(《소년》창간호) 로부터 <구작삼편>(《소년》제2권 4호), <꽃 두고>(동 제2권 5호), <막은 물>(동 제2권 6호) 및 춘원이 '孤舟(고주)'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우리 영웅>(동 제3권), 그리고 현상윤, 김여제 등 1910년대 초에 발표된 일련의 시편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 '신체시'라는 용어는 당시의 신문이나 잡지에서 1910년대는 물론, 1930년대까지도 간혹 '신체시' 또는 '신시', '신시가', '신체시가'라는 표제 아래 작품을 모집한다거나 싣고 있어 그 당시에 일정한 시가 장르를 의식하고 그렇게 불렀다기보다는 옛 시가형에 대한 새로운 시가라는 뜻의 범칭으로 사용했었던 듯싶다.
다만, 최남선 자신이 그 장르 규정을 위해서 '신체시가'라 했던 점을 참고한다면 지금에 와서 그 장르명은 '신체시'로 부르는 것이 좀더 타당하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