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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10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나고 활동한 한국의 시인, 소설가, 수필가, 건축가, 화가.
한국 문학사에서는 선구적인 1930년대 모더니즘 작가로서 약 6년간 다수의 시, 소설, 수필을 집필하며 인간 사회의 도구적 합리성을 극복하고 미적 자율성을 정립하고자 했다. 그의 작품활동은 한국 근대 문학이 국제적·선진적 사조에 합류[19]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의의가 있으며 초현실주의와 심리 소설의 개척자로도 높이 평가받는 한편, 인간의 인식가능성을 부정한 극단적인 관념론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생전에는 문학가로서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고 경제 사정도 불우했다. 그의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실험작인 오감도 등을 투고했을 때는 독자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때문에 생전에는 지인들 외엔 그에 대한 좋은 평가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사후 해방과 함께 그의 뛰어난 천재성이 발굴되어 재조명받았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1910년 아버지 김연창(金演昌)과 어머니 박세창(朴世昌)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이후 3년 후인 1913년에는 몰락한 양반인 백부 김연필의 집으로 입양되어 유교와 한문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러던 중, 백부는 아들이 있는 새 처를 데려왔고, 백모는 집을 나가게 된다. 백부의 새 처는 자신의 아들 문필만을 보살피며 이상을 홀대하였으며, 이상의 백부 또한 이를 알고 있었으나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이상을 가문을 일으킬 영재로만 여기며 엄격하게 대했다.
이러한 유년기를 지나 이상은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이후 1929년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사로 복무한다.
2.2. 문학가로서의 데뷔 및 활동
1930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하던 잡지 '조선'에서 필명 이상(李箱)으로 장편소설 '12월 12일'을 연재하며 문학계에 데뷔한다. 1932년에는 시 'AU MAGASIN DE NOUVEAUTES' 등을 발표하고, 필명 비구(比久)로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을, 필명 보산(甫山)으로 단편소설 '휴업과 사정'을 발표한다.
1931년 그는 갑작스럽게 폐결핵을 진단받고 병세는 갈수록 악화되어간다. 이는 1933년 새로 부임한 일본인 상사와의 마찰로 인한 스트레스로 더욱 짙어졌으며, 심한 각혈 증세까지 보인다. 더이상 건축기사 일을 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상은 퇴사 후 그 해 봄에 황해도 배천 온천으로 요양을 간다.
요양 후 다시 서울로 돌아온 이상은 온천에서 알게 된 기생 '금홍'을 불러 종로1가에 차린 다방 '제비'의 마담 자리에 앉히고 동거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이상은 문인 박태원, 정지용, 김기림, 이태준 등과 교류하고 이 중 정지용의 주선을 통해 '가톨닉청년'에서 '꽃나무', '이런시'를, 이듬해인 1934년에는 이태준의 도움으로 조선중앙일보에서 오감도를 연재한다. 동년에는 필명 하융(河戎)으로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삽화를 그리고 순수 문학 단체 구인회에 가입한다.
1935년 경영난으로 인해 다방 제비가 폐업하고 금홍과 결별하게 된 이상은 인사동에 '쓰루(つる, 학(鶴))', 종로1가에 '69'와 같은 다방을 차례로 운영했지만 곧 남에게 양도했고, 그러고도 다시 명동에 '무기(むぎ, 보리(麦))'라는 다방을 열었으나 이것 또한 망했다. 이 과정에서 부모의 집까지 담보로 한 탓에 결국 이상의 가족들은 빈민촌으로 이사가게 된다.
1936년 이상은 친구 구본웅의 알선으로 출판사 '창문사'에 근무하면서 구인회의 동인지 '시와 소설'을 편집 및 발간했으며, 조선일보에서 단편소설인 지주회시와 날개, 그리고 연작시인 역단과 위독 등을 발표한다. 같은 해 6월 수필가 변동림과 결혼한 이상은 경성 황금정에서 4개월 동안 신혼생활을 한다.
2.3. 일본에서의 사망
1936년 9월 점차 악화되는 폐결핵으로 인해 죽어가던 이상은 지인들에게 인사를 남기고는 새출발을 위해 도쿄로 떠난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도쿄는 실망스러웠다.
그러나저러나 동경 오기는 왔는데 나는 지금 누워 있소그려. 매일 오후면 똑 기동 못 할 정도로 열이 나서 성가셔서 죽겠소그려.
동경이란 참 치사스러운 도십디다. 예다 대면 경성이란 얼마나 인심 좋고 살기 좋은 '한적한 농촌'인지 모르겠습디다.
어디를 가도 구미가 당기는 것이 없소그려! 꼴사납게도 표피적인 서구적 악습의 말하자면 그나마도 그저 분자식(分子式)이 겨우 여기 수입이 되어서 진짜 행세를 하는 꼴이란 참 구역질이 날 일이오.
나는 참 동경이 이따위 비속(卑俗) 그것과 같은 물건인 줄은 그래도 몰랐소. 그래도 뭣이 있겠거니 했더니 과연 속 빈 강정 그것이오.
한화휴제(閑話休題)―나도 보아서 내달 중에 서울로 도로 갈까 하오. 여기 있댔자 몸이나 자꾸 축이 가고 겸하여 머리가 혼란하여 불시에 발광할 것 같소. 첫째 이 가솔린 냄새 미만(彌蔓) 넘쳐흐르는 것 같은 거리가 참 싫소.
김기림에게 쓴 편지 중 일부, 1936년 11월 29일자
이상은 다시 서울로 돌아가려 했으나, 앓고 있던 폐결핵의 악화와 새 출발의 기점으로 삼으려고 했던 도쿄에 대한 환멸감에 시달렸고, 결국엔 다른 이들을 볼 낯이 없어져 도쿄에서 살게 된다. 그러던 1937년 2월의 어느날, 그는 공원을 배회하다가 불령선인(사상불온혐의)으로 체포되어 도쿄 니시칸다(西神田) 경시청 경찰서[28]에 갇히고 만다. 그러나 병의 악화로 병보석으로 34일 만에 석방되고 동경제국대학 부속 병원에서 4월 17일 새벽 4시에 2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죽기 전 급히 도쿄로 온 아내 변동림에게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은 "센비키야의 메론이 먹고싶다."
나는 열두 시간 기차를 타고 여덟 시간 연락선을 타고 또 스물네 시간 기차를 타고 동경에 닿았다. 동대 병원 입원실로 직행하다. 이상의 입원실, 다다미가 깔린 방들, 그중의 한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이상이 거기 누워 있었다. 인기척에 눈을 크게 뜨다. 반가운 표정이 움직인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 옆에 앉아 손을 잡다. 안심하는 듯 눈을 다시 감는다. 나는 긴장해서 슬프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살릴 수 있나, 죽어간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상은 눈을 떠보다 다시 감는다. 떴다 감았다. 귀에 가까이 대고 "무엇이 먹고 싶어?", "셈비끼야의 메론." 이라고 하는 그 가느다란 목소리를 믿고 나는 철없이 천필옥에 메론을 사러 나갔다. 안 나갔으면 상은 몇 마디 더 낱말을 중얼거렸을지도 모르는데. 멜론을 들고 와 깎아서 대접했지만 상은 받아넘기지 못했다. 향취가 좋다고 미소 짓는 듯 표정이 한 번 더 움직였을 뿐 눈은 감겨진 채로. 나는 다시 손을 잡고 가끔 눈을 크게 뜨는 것을 지켜보고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김향안, 수필 ‘월하의 마음’ 397쪽 중
사후 이상은 조선으로 옮겨져 18일 전에 폐결핵 등으로 인해 숨진 절친 김유정과 합동 영결식을 해 화장되었다.
3. 평가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 이상, 단편소설 <날개>의 첫 구절
이상은 전문용어와 외국어, 그리고 숫자 및 기호의 남발, 문법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이상한 문장, 기존의 언어체계를 무시하는 기법 등 모더니즘에 입각한 아방가르드 문학의 대표적인 인물로, 그가 쓴 시는 그가 사망한 지 90여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까지도 여전히 '혁신적' 혹은 '난해'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상은 기존의 문법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에서 띄어쓰기를 전혀 하지 않는 다다 기법을 사용했다. 다만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와 달리 음절 단위의 문장으로 구성된 한국어와 애초부터 띄어쓰기가 없는 일본어는 다다이즘 기법에 한계가 있었고, 독자들 또한 이상의 시와 문법에 대해 납득하지 못했다. 반면 문학가들 사이에서 이상의 작품은 커다란 이슈로 떠오른 듯하다. 동료와 친구들은 그의 천재성에 주목해서 작품을 쓸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며, 심지어 그의 문체를 따라하는 동인까지 생겼는데 이를 삼사문학이라고 하였다.
이상이 가진 천재성은 그가 쓴 수필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예를 들어 '산촌여정'과 '권태'에서는 현대화되고 서구화된 일상에 익숙해진 도시인이 서구의 문물이 들어오기 전의 전통적인 자국의 모습을 간직한 시골에서의 일상에 적응을 못 하고 권태에 빠진 모습을 뛰어나게 묘사하였고 간결한 문체를 바탕으로 쓰여진 '조춘점묘'에서는 쉴 틈 없이 꽉 막힌 답답한 현대인의 일상을 콘크리트로 사방이 둘러싸여 어디로 가든 같은 모습을 한 빌딩에 비유하면서 그 빌딩의 소유자는 보험회사라는 거대한 집단이라는 점을 들어 개인이 무엇인가를 소유하는 주체가 되지 못하는 부조리한 현대인의 삶을 비판하였다.
이런 재능은 이상 본인도 인지하고 있었기에 그는 스스로를 다방면에서 재능있는 천재라고 표현했다. 실제로 이상은 당시 경쟁률이 치열하고 엘리트 학교로 평가받는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로 학업이 탁월하였고, 거기다가 주요 공부 분야였던 건축과 문학 뿐만이 아니라 그림과 외국어에도 어느 정도 조예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등교육의 성취와 스스로의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익힌 공부와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고 경제적, 가정적으로도 무너졌으며 설상가상으로 당시 불치병이었던 폐결핵을 앓는 등 많은 고통을 겪었다.
또한 이상은 어릴적 백부로부터 유학과 한문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에 당시 선진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계산적이고 자연 파괴적인 서양의 가치관들에 대해서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때문에 그는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삶에 대한 고뇌가 깊었다. 이는 앞서 언급된 수필들의 주제와도 관련이 깊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현실을 문학과 예술로 극복하고자 노력했으며 도쿄에서까지도 글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 속에서 나온 작품들은 그의 사후 현대에 이르러서도 많은 이들에게 읽혀지며 영감을 주고 있다.
4. 대중매체에서
2013년 11월 28일 방영된 MBC의 '드라마 페스티벌 - 이상 그 이상'은 그를 다룬 작품이다. 이상을 중심으로 그가 전 총독부 동료의 살인사건에 휘말리는 내용이 전개되며 이상 역은 조승우, 구본웅은 정경호, 이상을 사모한 여인은 박하선이 연기하여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한다.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이라는 소설과 동명의 영화는 이상의 시 건축무한육면각체의 해석과 그 뒤에 숨은 비밀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었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의 5절에 '날자꾸나 이상'이라는 구절로 언급된다.
팬레터는 이상과 김유정, 그리고 그들이 속해있던 문학 단체 구인회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극 중에는 이상이 모티브인 것으로 추정되는 '이윤'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극의 대사와 가사에 그의 작품 구절 중 일부가 인용되었다.
스모크는 이상의 오감도 시제 15호와 거울, 날개를 모티브로 제작되었다.
'훈민정음 암살사건' 등을 쓴 김재희 작가는 이상을 주인공으로 한 추리소설인 '경성 탐정 이상'을 쓰기도 했다. 이상이 작품의 삽화가가 되어 주었던 동료 작가인 '구보' 박태원과 함께 찍은 사진에서 시작된 작품으로, 서양과 일본을 통해 들어온 진보된 근대사상과 문명, 그리고 근대화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남아있는 조선의 전통적인 모습과 보수적인 사상이 섞인 모습이 된 일제강점기의 조선을 배경으로, 셜록 홈즈 포지션인 이상과 왓슨 포지션인 구보가 실존했던 순수문학 작가 단체인 구인회의 입단 시험으로서 그곳에 속한 선배 작가인 염상섭이 의뢰한 사건을 함께 해결한 것을 시작으로 그들의 베이커가라고 할 수 있는 이상이 만든 그의 다방 '제비'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다. 주로 가상의 사건에 대해 다루는 만큼 가상 인물이 많이 등장하는 편이지만, 전술한 염상섭이나 이상의 연인이었던 금홍, 같은 구인회에 속한 김유정이나 전형필, 석주명, 엄복동, 권기옥 등 실존 인물들도 적지 않게 등장한다. 2020년 11월 5권으로 완결되었다.
토리코믹스에서 연재 중인 모던 뱀파이어 슬레이어라는 웹툰에서 뱀파이어들을 물리치는 슬레이어로 등장한다. 일본의 비밀조직 흑룡회가 군과 연계해 경성에 뱀파이어들을 들여와 지옥문을 열 계획을 꾸미고 그것을 막기 위해 이상이 활약하는 것이 주 내용이다.
박규영 주연의 단편영화 이상에서는 그의 소설 '종생기'가 등장한다.
2022년 개막한 뮤지컬 라흐헤스트는 이상의 아내 변동림을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으로 그의 인생, 작품 등이 등장한다.
Project Moon의 게임 Limbus Company에 등장하는 수감자 이상이 이상을 모티브로 하였다. 문학 작품을 모티브로 한 다른 수감자들과 달리 유일하게 작가를 모티브로 삼은 인물이며 특히 이상의 작품인 날개와 거울이 핵심이 되었다.
5. 여담
조선총독부에서 일한 건축기사 출신이다. 현재의 건축직 혹은 토목직의 선배 공무원 격(?)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총독부에서 일했다는 점 때문에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는 전체주의와 군국주의를 매우 혐오했으므로 절대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아니며 안정적인 일자리를 갖기를 원했던 집안의 뜻과 생계 문제로 인해 근무했을 뿐이다. 애초에 말단급 사무직이나 기술직으로만 일했던 사람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법률상의 정의에도 부합하지 않고 친일인명사전의 기준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전술한 사항과 관련하여 이상 사후인 1960년대에 이뤄진 그의 여동생 김옥희의 잡지 인터뷰에 따르면 이상은 전체주의이면서 군국주의였던 일본을 국가적인 관점에서는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일본 사람이나 일본 문화를 특별히 싫어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이상은 평소 일본어를 모국어처럼 자주 사용했으며 조선총독부에 근무했을 때도 한 일본인 상사와 코드가 잘 맞아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또한 동시대를 살았던 일본인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동경했으며 작품 내에도 일본 문화가 많이 담겨 있다.
돈에 큰 관심이 없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업에 재능이 없었다. 처음으로 차린 다방 '제비'는 약 2년 만에 경영난으로 폐업했고, 이후 운영한 세 개의 다방들도 전부 폐업하거나 다른 이에게 양도했다.
평소 이상은 폐결핵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담배 50개피를 피는 것을 자신의 일과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엄청난 골초였다. 이상의 담당의가 "어쩌면 젊은 사람을 이렇게까지 되도록 내버려 두었을까? 폐가 형체도 없으니..." 라며 혀를 내두를 정도로 폐가 심각하게 망가져있었다고.
이상이 죽기 전 서양화가 길진섭이 이상의 데드 마스크를 떴다는 소문이 있지만 길진섭이 1948년 월북해 버려 그 진위는 불투명하다. 김연수의 장편소설 "꾿빠이 이상"에도 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화가이자 친구인 구본웅과 같이 다니는 것을 그린 만평에서는 옷 잘입는 멋쟁이로 평가됐다. 지금 기준으로도 옷 맵시나 헤어스타일이 꽤 멋있는 편이다. 다만 몇몇 사람들은 창백한 피부의 퀭한 남자가 꼽추와 함께 다니는 모습을 보고 서커스단이 들어왔나 착각했다고.
구본웅은 '친구의 초상'이란 제목으로 이상의 초상화를 그렸다.
친구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65 x 53cm, 1935년.
민음사에서 출간한 이상 단편소설 전집의 표지가 이 그림이다. 그리 크지 않은 그림이지만 당시의 다른 그림들과는 다르게 음울하면서 묘한 색기가 보는 이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일각에서는 이 그림을 두고 이상과 구본웅의 동성애적 관계를 암시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미술에 관심이 많았다. 어렸을 때부터 길바닥에 버려져 있던 목단 열 끗을 똑같이 그려내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도 하고 자 없이도 반듯한 직선을 긋는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성인이 된 이후엔 1931년 6월에 개회한 제 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그가 직접 그린 서양화 '자상'이 입선하기도 했으며, 친구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나 자신의 소설 날개의 표지를 그리기도 했다. 이상이 디자인한 표지 중 세 가지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전시되어있다.
기독교에 부정적이었다. 그의 시 BOITEUX BOITEUSE 등 여러 곳에서 기독교에 부정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다만 예수라는 인물 자체는 긍정적으로 본 듯 한데 연작시 조감도의 '2인····1····"과 '2인····2····'라는 시에서 악의 상징격으로 언급되는 알 카포네가 부와 권력으로 가난한 예수를 조롱하는 듯한 행동을 하지만 예수는 그의 신념을 끝까지 지켰다는 내용이 나온다. 수필 산촌여정에 따르면 누가복음을 좋아했다는 것으로 보아 복잡한 종교관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구인회의 일원으로 소설가 박태원, 김유정 등과 절친했다. 이 중 김유정과는 형제처럼 친밀했으며 이상은 도쿄로 떠나기 전 그에게 동반자살을 제의하기도 했으나 김유정은 이를 거부했다. 둘의 사후에 합동 영결식이 치러지기도 했다.
상당히 괴짜스러운 인물이었으나 주변인들을 챙기는 등 마음 한 편엔 무척 따뜻한 구석이 있었다. 그것이 특히 잘 드러나는 것이 본인의 여동생 옥희에게 보냈던 편지인 동생 옥희 보아라로, 자신에게 제대로 된 말도 없이 연인과 이국으로 떠난 여동생의 선택을 존중하고 격려하는 내용이다. 특히 편지 마지막 즈음의 "이해 없는 세상에서 나만은 언제라도 네 편인 것을 잊지 마라"라는 구절은 이상이 생전에 여동생을 얼마나 아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생전 2000여편의 작품을 남겼다는 이야기가 퍼져있는데 이는 이상 본인이 오감도 연재가 중단된 후에 남긴 작가의 글에서 "이천점에서 삼십점을 고르는 데 땀을 흘렸다"는 대목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만 사후 발견된 글들을 모두 합해도 그 숫자에는 크게 못 미치는 것을 미루어본다면 조금의 과장이 섞인 발언일수도 있다.
죽기 전 남긴 유언이 "레몬 냄새를 맡고 싶다"였다는 루머가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생애 문단에서 적힌 것처럼 실제 유언은 "메론이 먹고 싶다"였다.
숫자를 사용한 성적인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편이었다. 날개에서 언급되는 '33번지 18가구'[42] 다방 '69' 등이 대표적인 예.
그의 생애를 다룬 평전 중 가장 유명한 것 중에는 시인 고은이 쓴 '이상 평전'이 있다. 다만 악의적인 평가를 베베 꼬아 기술한 저질스런 물건인지라 현재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1977년에는 이상의 업적을 기리고자 문학상 이상문학상이 제정되었다. 1년에 한 번 시상되며,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과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 중 하나로 평가받았으나, 2020년에 대두된 저작권 논란으로 인해 현재는 인지도와 위상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의 생가는 종로구 통인동(서촌)에 있다. '이상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현대적으로 복원하여 현재 생가에서 이상의 생애와 작품들을 알리고 있다. 이상이 살아생전 지은 시들과 소설, 삽화의 스캔본을 열람할 수 있다. 2018년 12월에 라이엇 게임즈의 후원으로 새롭게 재개관하였다.
그가 디자인한 작품은 건축잡지 '조선과 건축' 1929년판 표지와 날개의 표지 등이 있으며 조선과 건축 1929년 판 표지는 공모전에서 1위로 입상한 것으로 잡지에서 1월부터 12월까지 1년간 사용되었다.
2003년 수능 언어영역 문제의 경우 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시의 내용과는 전혀 관계없는 문제로 출제되어 난이도가 높지 않았다. 본 시는 오감도의 제 4호다. 문제에서 말하는 '윗글'은 '예술의 본질은 무엇인가' 라는 내용이다.
5.1. 필명에 대해
그의 필명인 이상의 유래에 대해서는 많은 추측이 있다. 첫째로는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사로 일했을 당시 인부가 그의 성을 김씨가 아닌 이씨로 착각하여 '이상'이라고 불렀다는 설로, 친구 김기림 등의 주장이다.
두번째로는 친구 구본웅이 선물한 미술도구 상자에서 설로, 경성고등공학교에 입학했을 당시 선물받은 오얏나무(李)로 만들어진 상자(箱)를 받고 이에 감동해 이상(李箱)으로 지었다는 것이다. 그가 디자인한 졸업 앨범에서도 이상이라고 서명했기에 첫번째 설보다 설득력이 있다.
5.2. 연인 관계
알려진 이상의 첫번째 연인은 그가 운영했던 다방 '제비'의 마담인 금홍이였다. 금홍은 이상이 요양을 위해 갔던 배천 온천에서 만난 기생으로, 이상은 그녀를 사랑해서 다방 '제비'를 차려 그녀를 데려와 함께 운영했다. 그러나 다방은 인기가 없어 경영난에 시달렸고 이 때문에 이상과 금홍은 자주 다퉜다. 결국 1935년에 둘은 결별하고 다방 '제비' 또한 폐업하게 된다.
이후 이상은 부모의 집을 담보삼아 인사동에 위치한 카페 '쓰루(つる, 학(鶴))'를 인수하여 운영했는데, 이때 카페 '엔젤'에서 근무하던 권순옥을 여급으로 데려온다. 권순옥은 이상이 4년 전에 만났던 여성으로, 이상에게 'D. H. 로렌스의 모조품이라는 별명을 지어주기도 했다. 이상은 그녀가 붙여준 별명을 마음에 들어하며 친구들에게 자랑하였기도 하고, 서로 사랑하여 곧 연인 관계로 발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의 친구인 소설가 정인택 또한 권순옥을 사랑했다. 그는 어느날 권순옥의 사랑을 얻지 못하는 자신을 비관하며 자살기도를 하기에 이르렀는데, 이상은 그런 정인택을 위해 권순옥과 헤어져 둘이 결혼할 수 있게 도와줬다.
카페 '쓰루'의 폐업 이후 다시 카페 '69'를 차린 이상은 이번엔 카페의 손님이자 친구 구본웅의 이모인 수필가 변동림에게 빠지게 되었다. 둘은 종종 문학에 대해 토론하다가 어느날 이상이 "우리 함께 죽을까? 아니면 먼 데 갈까?"라고 고백한 것을 계기로 1936년 6월에 결혼한다. 그러나 이상은 결혼 4개월 만에 새출발을 하겠다며 도쿄로 떠났고, 죽기 전에서야 다시 만나게 된다. 이후 변동림은 7년 후인 1944년에 화가 김환기와 재혼했고 남편 김환기의 이전 호를 따서 김향안(金鄕岸)으로 이름을 바꾸어 프랑스의 소르본 대학교와 에콜 드 루브르 등에서 미술을 공부해 미술평론을 쓰기도 했다. 그녀는 수필을 쓰며 이상의 자취를 정리하는 데 큰 공헌을 했으며, 2004년에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를 다룬 창작물로는 소설 '천재들의 초상', 라흐헤스트가 있다.
6. 가계도
김병복(金秉福)
김연필(金演弼, 1883~1932) / 後妻 김영숙
김문경(金汶卿)
김영창(金永昌, ?~1937) / 妻 박세창(朴世昌, 1887~1979)
장남 김해경(金海卿, 1910~1937): 이상
차남 김운경(金雲卿, 1913~?): 월북
장녀 김옥희(金玉姬, 1916~2008) / 夫 문병준(文炳俊, 1913~1990)
장남 문완성(文完成)
문재호(文宰皓)
차남 문유성(文有成) / 妻 박영분(朴榮分)
문진호(文辰皓)
문도희(文度嬉)
3남 문창성(文昌成)
4남 문내성(文來成)
장녀 문미성(文美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