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부인의 역설적인 신앙 마 16:21~26
요즘 이슈중의 하나가 혜민스님이다. 무소유를 주장하는 스님이 자동차는 페라리(4억), 집(9억)은 남산이 보이는 풀소유(청담동), 미국 뉴욕에 8억짜리 건물 등 논란이 있다. 이 모습을 보면서 곡인무영스님이 이런 말을 했다. ‘노동탁발’(勞動拓拔, 삥), ‘탁발의 가장 중요한 배경은 솔직해지기 위해서’라며 “하지만 많은 이들이 어제 붙들고 있는 나를 오늘의 나로 착각하고 어제의 모습을 유지하려는 속성이 있는데, 그걸 정면으로 마주 보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출가(수행)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지점”이라고 했다. 양두구육(羊頭狗肉, 양 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다.) 솔직해진다는 것은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라는 것이다. 자기를 부정하라는 것이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 모습을 찾으라는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물질, 권력, 명예, 지식, 학식 등이 나의 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본문을 통해서 생각할 때 역설의 진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은 역설적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삶 자체가 역설적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피조물로 오신 것 자체가 역설적이고, 이 땅에서 고생하고 죄가 없는데도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받은 것도 역설적이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초기부터 역설적인 말씀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을 끌어 모으셨다. 예수님을 따르던 당시의 사람들은 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자존감을 잃고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역설적인 말씀에 귀가 번쩍 뜨였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환호했다. 그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도 ‘새 세상이 이 땅에 왔구나!’라는 놀라움을 경험 했다. 예수님의 무슨 말씀 때문일까?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천국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말씀을 잘 지키지 못했고 게으름과 연약함 속에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이런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의 삶에 깊이 들어왔다. 자신들도 복을 받아 새로운 삶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 배고픈 사람들, 슬픈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았다. 병들고 헐벗은 군중들이 가슴에 맺힌 아픔을 간직하며 예수님께 몰려들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치유사건과 이적들을 목격하면서 가슴이 벅차오른다. 오병이어의 사건을 보면서 예수님을 뒤따르는 것이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분의 기적과 능력을 보면서 머릿속에 꿈에 가득 차 있었다. 예수님과 함께 계속 가면 명예와 정치권력과 세상의 부귀영화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졌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장차 고난을 받고 죽게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인해 제자들은 오히려 당혹스러웠다. 제자들이 마음속에 어쩔 줄 몰라 하며 고통 받았던 말씀은 또 한 번의 역설의 말씀이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자아가 쉽게 깨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르면서도 탐욕과 미움과 이기심과 정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기적인 욕망이 잘 바꿔지지 않는다. 욕심많은 삶을 만들어 간다. 사람을 미워하고 잔인해지는 모습을 갖는다. 왜 그럴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자신을 부정하며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의 물욕, 권력욕, 명예욕, 탐심 등이 집착이 되면 믿음의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자신의 생각과 몰두하는 문제를 온전히 내려둘 때 평안이 찾아온다고 가르쳐주신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귀중히 여기는 가족과 사업까지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신다. 어떻게 보면 3년 동안 예수님을 뒤따랐던 제자들에게 자신을 부인하라는 말씀은 상당히 어렵게 들렸을 것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환호했다. 이제 메시아라고 선포만 하고, 왕으로 등극하면 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하니 제자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과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자신을 부인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 청천벽력 같은 말씀에 제자들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정말 축복받은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역설적인 말씀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내려가는 것을 싫어한다. 자신이 움켜지고 있는 것을 풀어놓으라고 하면 화를 내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낮은 곳은 무능한 사람, 실패한 사람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낮은 곳에 내려가 자신을 포기하라는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생각해보면 진리인 것 같지만 축복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내려놓으면 높아진다. 버리면 얻을 수 있다. 연약해지면 강해진다. 내려놓으면 쌓인다. 작아지면 커진다. 죽으면 살아난다. 목숨을 내놓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이 모든 것이 사실로 믿어지는가?
믿음이 이와 같이 되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용기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자신의 전체를 거는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 앞에 자신의 믿음과 신뢰를 드리는 것이다. 아니면 믿음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이 없어 의혹에 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생사람을 잡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생명을 준다고 희생을 강요하는 잘못된 종교가 아니다. 십일조를 내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어준다고 돈을 뜯어가는 하나님이 아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은 성경의 말과 다른 말을 한다. 세상은 강한 자가 권력과 명예를 얻는다고 한다. 자기 몫을 잘 챙겨야 돈이 들어온다고 말한다. 잘 먹고 마셔야 삶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고 가르쳐 준다. 그러나 주님은 거꾸로 말씀하신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라. 자신을 부정해라. 움켜잡고 있는 모든 것을 펴서 맡겨라.”
역설의 진리는 우리가 원하는 축복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을까? 이 말씀을 깨달으려면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무아지경에 들어가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 믿는 것은 철저히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내가 없어지는 신앙이란 없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부정한 존재인지, 얼마나 거짓과 미움, 시기와 탐욕이 있는 지을 깨달을 때 주님께서 뒤엎으라고 말씀하신다. 성령께서 우리 자아에게 성령의 열매를 주시겠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더불어 새로운 자아를 갖는 것이 자기 부정이다. 자기 부정은 자기 비하나 자기 연민 속에서 탄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자신의 한계성을 알지만 동시에 용서받은 자로서의 기쁨을 깨닫는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존감을 가진다.
기독교는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다. 자기 부정이란 자기 개성을 없애라는 뜻이 아니다. 예수를 믿으면 오히려 자신의 개성이 더 뚜렷해진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갖고 빛을 낸다. 자아를 부인하는 것은 맥 빠진 인간이 되라는 것이나, 갈망과 열정을 땅속에 파묻고 살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더 큰 꿈을 꾸라는 것이다. 이제는 자신의 꿈과 비전에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의 꿈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열정을 하나님의 열정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부정적이고 삐뚤어진 성격을 주님의 넉넉한 사랑의 성품으로 바꿔가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자아를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모습이다.
진정한 자아를 발견한 나의 마음 그릇에 예수 그리스도를 채워 넣는 것이 자기 부정이고 믿음이다. 그럴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다. 낮아지면 높아지는 것, 연약할 때 강해지는 것, 내려놓으면 풍성해지는 하나님의 법칙을 새롭게 알 수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내 삶을 내놓으면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가르쳐주시는 비밀을 보여주신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하나님은 자기를 부정해서 우리와 함께 영점에서 다시 시작하시겠다는 것이다. 비록 내가 아무 것도 없어도 예수님과 더불어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 자기 부정의 시작이다. 내가 그동안 자랑하던 것, 뽐내던 것을 다 내려놓고 예수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럴 때 세상이 나를 보며 ‘너 세상에서 자랑할 것도 없고, 가진 것이 없고, 배운 것이 없잖아!’라고 조롱해도 위축되지 않고, 스스로 탄식하지 않는다. 이제는 나를 부정하고 예수님과 더불어 출발하기 때문이다. 또 세상이 ‘넌 가진 것도 많고, 배운 것이 많잖아!’라고 말할 때도 교만해지거나 남을 무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를 부정할 때 얻는 것이 있다. 내가 집착했던 것, 삶을 걸려고 했던 것에서부터 자유함을 얻는다. 돈과 재물이 귀한 것이지만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가족이 소중하기는 하지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 아내와 남편이 소중하기는 하지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 내게 주신 아들과 내 딸이 귀하지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가족도 사랑하면서 살 수 있다. 우리 자신이 오랫동안 스스로를 못 살게 했던 혐오함과 열등감과 우월감에서부터 해방될 수 있게 하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여러분의 인생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위협했던 장애물이 무엇인가? 바로 자신이다. 나를 열등감에 빠뜨리고 상처를 준 가장 위험한 인물이 바로 나 자신이다. 내 속에 있는 시기와 미움과 분노가 하나님의 축복을 방해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끊임없이 방해한다. 하나님의 주신 놀라운 역사를 방해하는 주범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래서 나 자신을 부인하면 내가 갖고 있던 모든 소유물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때 없어서 불편했던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건강, 생명, 가족, 직업, 삶의 모든 여건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깨닫고 감사하며 살 수 있다. 인생을 억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 기쁜 마음, 찬양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살아갈 수 있다.
자신을 부정할 때 예수님이 주시는 축복도, 능력도, 열정도 사랑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 자신을 부정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면서 주님 앞에 나갈 때 큰 믿음과 사랑의 열매를 누리는 복된 사람들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