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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야(蘭若)는 조그만 토굴을 의미한다. 격식을 갖춘 사찰이 아니고 독신 수행자가 비와 추위를 가릴 수 있도록 최소한의 시설만 갖춘 조용한 수행터를 가리킨다. 연암난야는 의신(義信)마을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있다. 난야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이 근방의 역사적·불교사적 의미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역사와 맥락을 알아야만 숨어 있던 의미가 비로소 드러난다.
경남 하동의 화개장터에서 지리산 계곡을 따라 대략 12㎞쯤 올라가면 의신마을이 나타난다. 지리산의 한복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신마을에서 북쪽으로 더 올라가면 벽소령이 나타나고 벽소령을 넘으면 함양이 나온다. 또한 벽소령에서는 남원으로도 통하는 길이 있다. 하동·광양 일대에서 바닷가의 생선과 소금을 배에 싣고 섬진강을 따라 화개장터에 도착하면, 여기에 기다리고 있던 함양과 남원의 봇짐장수들과 조우하게 된다. 남원·함양에서는 쌀을 비롯한 곡식을 가지고 온다. 바닷가의 해산물과 육지의 농산물이 맞교환되었다. 화개장터에서 말린 생선과 소금을 등짐으로 메고 지리산 고개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넘어가다 보면 꼭 거치게 되는 장소가 바로 의신마을이었다.
지금은 의신의 한자가 ‘義信’으로 되어 있지만 원래는 ‘義神’이었다. ‘의로운 신명(神明)’이라는 뜻이다. 이때의 神은 ‘귀신’이라는 부정적 의미보다는 ‘영혼’ 또는 ‘정신세계’를 의미한다. 긍정적인 의미이다. 의신마을에는 18세기까지 의신사(義神寺)라는 큰 절이 있었다. 의신사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곳에 당취(黨聚)들의 본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씨 조선왕조를 혐오했던 반체제 불교 승려들의 비밀결사가 바로 당취다. 의신사는 조선의 남쪽 지방의 당취를 총 지휘하는 본부사찰이었다는 게 필자가 그동안 조사한 결론이다. 북쪽 지방을 관할했던 당취 본부가 금강산에 있었다고 한다면 남쪽은 지리산이었고, 바로 지리산 중에서도 의신사였던 것이다. 의신사 주변으로는 현재도 고개 이름으로 내당재가 있고 외당재가 있다. 당취들이 그만큼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자취가 남아 있는 것이다. 의신사가 조선 후기에 폐사되면서 지금의 의신마을이 자리 잡게 되었다.
돈·권력보다 높은 곳에 있는 것
의신마을에서 바라다보면 잘생긴 유두봉(乳頭峰)이 하나 보인다. 꼭 사람의 젖꼭지 모양으로 생긴 봉우리다. 산꾼들은 이 유두봉을 단천 독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의신사에서 바라보면 이 유두봉이 바로 문필봉이자 신기를 불러일으키는 신령한 봉우리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 근처 지명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신(神) 자가 들어간다는 것이다. 영신대(靈神臺), 신흥사(神興寺), 의신사(義神寺)에 모두 신(神) 자가 들어간다고 해서 삼신동(三神洞)이다. 삼신동이라는 이름은 고운 최치원이 붙여놓았다. 사람이 신기(神氣)가 없으면 물질과 헛된 벼슬에 집착한다. 이 세상에는 돈과 권력이 전부인 것이다. 신기가 있는 사람은 이 대자연과 물아일체감(物我一體感)을 느낀다. 돈과 권력보다도 더 높은 곳에 있는 행복이 대자연과 합일하는 것이다. 대자연과 일체가 되어 있는데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그 물아일체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신기의 개발과 축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아무데서나 신기가 개발되는 게 아니다. 신령한 땅에서 가능하다. 그 땅이 이 삼신동이라고 우리 조상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지리산 깊숙한 곳, 의신사가 당취 본부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서산대사가 있었다. 서산대사가 머리 깎은 곳이 원통암이고, 이 원통암은 의신사에서 1시간 정도 산 위로 올라가면 도달하는 곳이다. 친구들과 지리산에 놀러왔다가 머리 깎은 인물이 서산 휴정이다. 그러니까 의신사 일대는 서산대사의 ‘나와바리’에 해당한다. 이 근방 일대에 서산대사의 자취가 남아 있다. 우선 신흥사에서 의신마을까지 계곡을 따라 올라오는 길이 현재 지리산 둘레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코스이기도 한 ‘서산대사길’이다. 그리고 의신마을 오기 전에 있는 동네가 단천이다. 단군 단(檀) 자를 써서 단천(檀川)이다.
곳곳에 서산대사의 기운이
단천마을 계곡에는 집채만 한 커다란 바위가 있고, 거기에는 ‘全崔興命(전최흥명)’이라는 글자가 파자(破字) 형식으로 새겨져 있다. 매우 미스터리한 글씨인데, 서산대사는 전주 최씨였다. ‘전주 최씨가 새롭게 왕조를 세운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경상대학교 손병욱 교수는 이 바위에 새겨진 글씨를 풀어내기 위해 책 한 권을 썼을 정도이다. 그 요지는 서산대사가 이 글씨를 새겼을 거라는 추측이다. 서산대사가 새로운 왕조를 일으킬 운명이고, 자신이 한때는 그러한 야심을 품었다는 것이고, 이 일대의 당취들이 서산대사를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인물로 믿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서산대사는 조선 중기 임진왜란 이전에는 당취들의 전국 대장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지리산, 금강산, 변산, 묘향산, 계룡산 등 전국 곳곳의 골짜기 암자와 산봉우리 사찰에 있었던 비밀결사 승려들의 연락망이 존재했었고, 이 당취들의 최종 우두머리는 서산대사였다. 서산대사가 출가하고 도를 닦던 곳이 지리산 의신사 일대였다. 서산대사의 우주관과 불교적 깨달음의 공간은 지리산이었다. 지리산에서 뼈와 살이 형성된 셈이다. 따라서 서산이야말로 지리산파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신사가 임진왜란 이후에 당취들의 본부사찰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지리적 이점도 있었지만 서산대사의 유적지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국의 승려들이 의승군을 조직하여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산속에 있던 승려들이 어떻게 전쟁터에 바로 참여할 수 있었는가? 이것도 의문이다. 전쟁은 죽으러 가는 길이기도 하다. 피와 살이 튀는 현장이다. 누구나 무섭고 기피하는 현장이다. 죽기 좋아하고 목이 끊어지는 현장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승려들이 이 치열한 전쟁터에 대거 참여했는가? 이것이 조선 불교사에 커다란 미스터리다. 더군다나 승려는 유교사회에서 천민으로 취급받던 계층이었다. 국가에 대한 아무 책임도 없는 천민이 어찌 전쟁터에 나간단 말인가! 로마를 비롯한 세계 제국에서 전쟁은 귀족이 지휘하고 참여하는 것이었고 시민권자가 칼 들고 싸움하는 것이었지 노예나 천민은 전쟁에 참가할 자격이 없었다. 천민은 어느 쪽이 승자가 되든지 그 밑에서 복무하고 밥이나 먹을 수 있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군사훈련이 된 당취들이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비밀리에 조직되어 있었다. 철저한 비밀 조직이었다. 오로지 승려로만 구성된 전투 조직이기도 하였다. 서산대사가 이 비밀 조직의 수장이었는데, 갑자기 전쟁이 터져서 백성들이 일본군의 칼 아래 목이 날아가고 팔다리가 떨어져나가는 참상을 보다 못한 승군들이 전투에 참여한 것이다. 사명대사, 중봉 조헌과 같이 싸운 계룡산 갑사의 영규대사, 행주산성 싸움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뇌묵처영대사 같은 승장(僧將)들이 서산이 미리 양성해놓은 제자들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전에 이런 당취 조직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기에 난리가 터지자마자 바로 전투에 투입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전에 조직이 안 되어 있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 연암난야로 올라가는 돌계단 옆에 불그스름한 꽃무릇이 한창이다.
작은 목재집에서 25년 수행
여기까지가 필자가 이미 파악하고 있던 정보이다. 우연히 지리산에 등산 갔다가 지리산을 수백 번 오른 바 있는 산꾼을 만났다. ‘유목민’ 김중호(59)라는 인물이다. 건축 감리하는 일이 직업이지만 틈만 나면 지리산 골짜기들을 훑고 다녔다. 어느 봉우리, 어느 등산 루트, 어디에 가면 뭐가 있고 누가 사는지 훤하게 안다. 이 김중호 산악대장이 자주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는 스님이 있다. 이 스님이 사는 데를 한번 가보자고 나를 데려간 곳이 연암난야이다. 의신마을에서 빗점골로 조금 더 올라가는 계곡 옆의 산자락에 있다. 빗점골 계곡의 물소리가 길에서 생생하게 들리는 지점이다. 도로에 차를 세워놓고 돌계단을 150m 정도 걸어 올라간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까 불그스름하고 가느다란 꽃무릇이 계단 사이로 피어 있다. 요즘이 꽃무릇이 필 때다. 옛날 절터 옆에는 꽃무릇을 많이 심어놓았다. 꽃무릇의 뿌리에서 나오는 물감이 탱화나 벽화의 물감 소재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계단을 갈짓자로 올라가 보니까 20㎡ 정도 되어 보이는 자그마한 목재집이 나타난다. 연암난야이다. 난야에서 수행하고 있는 분은 도현(道玄·71)스님이다. 출가한 지 45년 되었다. “이 난야에서 사신 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25년째입니다. 터가 편안하다 보니까 어디 다른 데서 살고 싶은 마음이 안 드네요.” “왜 난야라고 편액을 붙여놓았습니까?” “저는 사찰과 같은 건물 형식을 싫어합니다. 그냥 개인의 조용한 수도처인 난야를 좋아합니다.” “그러면 퀘이커파(무교회주의자)인 셈입니까?” “그렇다고 말할 수 있네요.” “이 근방에 서산대사 수행터가 곳곳에 있는데요. 서산대사는 어떤 수행법으로 도를 닦았을까요?” “화두를 잡았을 겁니다. 그 당시는 화두선(話頭禪)이 유행할 때니까요.” “저는 대학교 다닐 때 ‘이 뭐꼬’ 화두를 무리하게 잡았다가 머리로 열이 오르는 상기증에 걸려서 몇 년 고생했습니다. 화두를 섣불리 붙들고 있다가는 부작용이 많은 것 아닌가요?” “화두를 잡을 때 반드시 도를 깨쳐야겠다는 굳은 각오를 하고 잡으면 대개 상기증이 옵니다. 도를 깨치겠다는 마음 없이 화두를 잡아야 부작용이 없습니다. 살면서 저절로 화두가 잡혀야 합니다. 자연스럽게 화두를 잡아야만 합니다. 자기 내면에서 화두가 올라와야죠.”
도현스님은 태국에서 5년간 위파사나 수행을 하기도 하였다. 남방불교의 실상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남방불교와 북방불교, 그러니까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를 뭐로 보십니까?” “남방불교는 아주 세밀하고 분석적입니다. 불교 교리에 집중합니다. 날씨가 덥고 산이 별로 없는 평지에 사원이 있으니까 자기의 육신, 마음의 움직임에 대해 집중합니다. 주변 환경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요. 그러나 중국을 비롯한 한국은 주변에 산이 좋습니다. 신록이 우거지고 계곡 물소리와 바위, 그리고 새소리가 들리죠. 이런 환경은 신선들이 배출될 만한 자연환경입니다. 북방불교는 이런 자연환경을 감상하고 즐기는 멋이 있습니다. 이런 멋이 있는 게 북방의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방은 다분히 건조하게 자기 마음의 움직임에만 집중하는 데 반해서 북방은 사계절의 순환이 있고 아름다운 산이 많으니까 자연환경과 일체가 되는 성향이 있죠. 도가적인 취향과 섞여 있는 게 북방불교의 특징이라고 봅니다.”
법정스님과 도현스님
도현스님은 30대에 법정스님을 따라다닌 적이 있다. 같이 어떤 절에 가면 도현은 무심코 지나가는데, 법정스님은 입구의 절 소개 간판을 유심히 들여다보면서 뭔가를 기록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게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필자는 원고마감 직전에는 전화도 받지 않고 사람들 면회도 모두 사절한다. 그러다가 원고의 줄거리가 잡히면 그때는 일사천리로 글을 써내려간다. “글을 쓸 때 저는 제목이 생각나면 그 원고의 80%는 다 쓴 셈입니다. 나머지는 살만 갖다 붙이면 됩니다. 제목이 가장 문제이죠.” “그런 정도이면 불교에서는 무공능(無功能)이라고 합니다. 특별하게 애를 쓰지 않더라도 수월하게 이루어지는 경지입니다. 조 선생도 무공능의 경지에는 도달한 것 같네요.” “저는 그저 먹고살려고 글을 썼을 뿐입니다. 도는 못 닦고 글만 쓰다가 좋은 시절 다 보낸 것 같습니다.” “도가 따로 있나요. 한곳에 집중하면 그것도 도입니다. 글을 쓰는 작업도 객관적으로 자기를 들여다봐야 하니까 일종의 수행이지요. 수행했다 생각하세요.”
연암난야를 가만히 살펴보니까 명당이다. 도현스님 말로는 조선시대 부용영관(芙蓉靈觀·1485~1571)스님이 이 터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부용영관은 고려 말 태고보우의 법통을 서산대사에게 전한 인물이다. 말하자면 서산대사의 스승이다. 난야의 뒤편에 약간 네모진 형태의 집채만 한 바위가 서 있다. 덕평봉의 남쪽으로 내려온 줄기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수행터 뒤에 이런 육중한 바위가 있으면 상서로운 증거이다. 이 바위에서 에너지가 들어온다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개인 주택이면 너무 센 기운이 들어오는 상황이지만, 도를 닦는 수행자에게는 에너지가 셀수록 좋다. 대기권을 벗어나려면 에너지가 강해야 한다. 난야의 앞으로 보이는 지리산 영봉들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앞이 터진 것 같으면서도 멀리서 1000m급 지리산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도열해 있으니까 기운을 저장해주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난야로 올라오는 계단에서 보니 이 난야 터의 밑바탕에 거대한 바위가 떠받치고 있다. 마당 끝자락에 떠받치는 바위들이 있다는 것도 역시 수행터의 조건이다. 기운이 밖으로 밀려 나가지 않고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빗점골 계곡의 물소리도 은은하게 들린다. 물소리는 잡념을 사라지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계곡 물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면 부담이 된다. 적당히 은은하게 들려야 좋은 것인데 이 난야 터는 적당하게 들린다. 해발 400m 높이에 있어 여름에는 화개읍내와 온도 차가 3~4도 정도 난다. 삼복 더위에도 에어컨 없이 살 수 있는 터이다. 터를 적당하게 감아도는 계곡물, 바위가 밑에서 받쳐주고 있다는 점, 그리고 건물 뒤의 입수맥(入首脈) 자리에 서 있는 큰 바위, 정갈한 도량, 붉은색의 꽃무릇, 깔끔한 스님이 어우러진 난야는 지리산의 영지임에 틀림없다.
출처: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9&nNewsNumb=002626100016
첫댓글 낮시간에 찬찬히 읽어 볼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