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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 11.) 나라얼 연구소에서 발표할 내용입니다.
그동안에 반복해서 하던 이야기를 조금 부드러운 형태로 재구성했습니다.
풍요로운 평등사회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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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풍요로운 평등사회를 꿈꿉니다. 즉 누구나 기본생존권을 위협받지 않는 가운데 의미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는 풍요로운 물적 조건과 아울러, 그 누구도 사회적 약자를 상대로 갑질할 수 없는 평등한 인간관계를 원합니다. 한국사회는 이를 위한 경제력을 어느 정도 마련해 놓았습니다. 국내총생산은 12위로 경제선진국 대열에 들어섰고, 1인당 국민소득도 3만 달러를 넘어 흔히들 이제 살 만하다는 환상을 누리기도 합니다. 예측하기 어려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과학기술의 힘으로, 또 비정규직과 외국인 노동자들이나 중국, 인도, 베트남 등 현지 노동자들의 값싼 노동력 덕분에 우리 눈앞에는 저렴한 최신상품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뿌리 깊은 경제양극화구조는 해소되기보다 심화되고 있으며, 수많은 노동자 서민 대중은 여전히 풍요나 평등과 동떨어진 채, 과로사⋅산재사⋅고독사로 내몰리면서 특히 자녀교육비⋅주거비로 가계부채를 쌓아가고 있습니다. 이미 시작되었고 곧 급속도로 확대될 생산 전반의 자동화는 대량해고의 재앙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지구온난화나 후쿠시마원전사고 같은 환경재앙과 국가 간 경제적 군사적 충돌로 인해 인류 문명이 총체적 파국의 길로 들어서는 문도 곳곳에 열려 있습니다. 지난해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일본과의 경제전쟁은 어느 정도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듯합니다만, 새해 벽두부터 이란과 미국 사이의 전쟁 위기가 새로운 긴장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적절한 선에서 봉합되는 듯한 분위기도 있지만, 우리는 벌써 파병 압박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란과 미국의 군사충돌이 시리아 내전, 중국과 미국의 주도권 다툼, 러시아와 미국의 중거리 핵전력 감축 협정(INFT) 탈퇴 등과 연쇄반응을 일으킬 경우, 예측불허의 파국이 닥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 욕구나 남북 및 북미 간의 불편한 관계 속에도 간과할 수 없는 폭발력이 담겨 있습니다.
한국 사회 내부의 갈등 역시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의 해묵은 대립은 사라질 기미가 없으며, 한동안 친조냐 반조냐로 온 나라가 들썩이기도 했습니다. 남혐이니 여혐이니 하는 말도 이제 일상적으로 쓰입니다. 제반 대립갈등의 밑바탕에서는 무엇보다 자본주의사회를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노동과 자본 사이의 경제적 적대관계가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는 적대관계라기보다 자본이 주도하는 일방적 지배관계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자본은 자본주의사회의 최대 권력입니다. 삼성공화국이라는 말도 그저 황당한 소리는 아닙니다. 삼성 X파일은 참여정부가 솔선해서 덮어 버렸고, ‘촛불정권’이 들어섰지만 재벌권력은 성역처럼 남아 있지 않습니까.
물론 해고나 산재 혹은 사측의 갑질 등으로 인해 자본권력의 쓴맛을 겪을 수밖에 없을 때마다 노동계는 자본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노동계가 얻어낸 전과는 그다지 내세울 만한 수준이 못 됩니다. 한국은 OECD국가들 가운데 최고의 산재사망율과 최장수준의 노동시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미 독일은 주 28시간, 즉 하루 4시간 노동제의 첫발을 떼었고, 핀란드는 주 24시간제를 도입할 예정인데, 한국 자본은 이제 겨우 시작한 52시간제조차 이런저런 조건을 달아 무효화할 기세입니다. ‘촛불정권’은 최저임금 1만원 공약도 일찌감치 포기했습니다. 우리는 헌법상 민주공화국일지라도 권력을 가진 1%가 99%의 국민을 개돼지라고 부르며 갑질할 수 있는 사회를 평등사회라고 보지 않습니다. 또 국민소득이 아무리 높아져도 불평등이 극심한 사회는 절대다수 국민에게, 나아가 누구에게도 풍요로운 사회가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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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자본주의적 불평등구조는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본권력의 적극적 효율적투쟁 결과입니다. 자본축적 과정에는 투자 대비 이윤의 전반적 저하 경향과(이윤율 저하 경향), 불균등한 기술발전 및 예측하기 어려운 과잉중복 투자 등에 따른 과잉생산으로 인해 수시로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때마다 자본권력이 위기를 노동자 대중에게 전가하려 드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1997년 금융위기를 맞았을 때 구조조정이라는 말이 나돌았고 우리는 재벌지배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구조조정은 대량해고를 달리 표현하는 말일 뿐이었습니다. 국민의 정부 시절 구조조정은 노동자들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어 임금을 삭감하고 대기업과 하청업체 간의 수익 격차를 벌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는 노동운동에 분열과 도덕적 타락이라는 결정타를 안겼습니다.
이 불평등구조는 SKY대를 정점으로 하는 대학간 서열 고착화와 맞물리면서, 아이들을 태어날 때부터 경쟁구도 속에 몰아넣어 왔습니다. 한 세대가 지나면서 함께 나누며 즐기는 체질⋅감각⋅욕구⋅의식은 점차 구시대 유물처럼 취급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대학은 자본권력이 만들어내는 근본문제들을 명확히 밝히고 극복하는 일, 예컨대 대학을 취업학원으로 만드는 경제구조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대안을 찾는 일을 포기했습니다. 대학가에는 이제 어찌하면 살아남을 수 있느냐 하는 생존본능만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주요언론이 자본권력⋅정치권력에 예속되어 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SNS나 인터넷 혹은 유투브 등을 장악한 여론의 주류는 ‘삼성 만세’와 ‘노동 적폐’를 수시로 외치고 있으며, 또 이러한 여론 흐름은 국가의 정책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습니다.
1세기 전 그람시는 유럽에서 혁명이 난관에 봉착하자 헤게모니와 진지전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오늘날 자본권력의 헤게모니에 맞선 진지전은 거의 전무한 상태입니다. 자본권력에 도전하는 사소한 움직임조차 가차 없이 진압되고 있는 것입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가들이 선진 자본주의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만든 개념, 즉 ‘관리되는 사회’ 혹은 ‘일차원적 사회’라는 개념에 우리 사회도 상당 정도 근접해 있는 상태입니다. 그들의 진단처럼 노동자들조차 자본주의적 지배관계를 자연상태 내지 인간의 조건으로 받아들일 뿐 근본적으로 바꾸기를 별로 원하지 않게 된 사회가 다가온 것입니다. 실로 오늘의 불평등구조는 매우 견고하게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부와 가난을 대물림하면서도 살아갈 만하다면 불평등 문제를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범세계적 성장둔화 현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자본주의는 어마어마한 기술발전과 생산력을 창출하고도 자본축적의 메커니즘 자체로 인해 수시로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자본축적을 절대상수로 설정하는 자본권력의 위기 타개책은 가능한 한 모든 고통을 노동자 서민 대중에게 전가하는 방식, 이들을 위해 혹은 인류 전체를 위해 지옥문을 열어놓는 방식, 즉 대량해고나 환경재앙 혹은 전쟁 등이 되기 일쑤입니다. 우리는 소수를 위한 낙원과 다수를 위한 지옥을 만들 것이냐, 아니면 풍요로운 평등사회를 향해 나아갈 것이냐 하는 선택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이라면 후자를 합리적 대안으로 보고 추구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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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안을 만드는 일은 자본주의를 절대 상수로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인류 역사 속의 짧은 기간 존재해온 역사적 산물로 받아들이고, 따라서 필요하다면 인류가 노력하기에 따라 자본주의도 넘어설 수 있다고 보는 근본적 관점 전환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때 대안 구성의 기본방향은 이제까지 인류가 이룩해낸 풍부한 문화유산, 특히 자본주의의 무궁무진한 생산력을 자본의 무한증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풍요롭고 평등한 삶의 물질적 조건을 마련하는 데에 활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환이 이루어지려면, 자본의 무한증식 본성을 사회 전체가 충분히 제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인류는 다양한 방식으로 자본의 무한증식 본성을 사회적으로 제어하고자 했습니다. 북구형 사민주의, 중국식 사회주의, 구소련 중심의 현실사회주의 등등이 나름으로 자본주의의 대안임을 자부했습니다. 우리는 현실사회주의 체제 붕괴 이후 한동안 독주해온 신자유주의체제가 어떤 문제를 초래하는지도 실감했습니다. 여러 경제체제들의 장점과 단점들을 경험할 만큼 경험한 오늘날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유일무이의 정답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등장한 여러 경제체제의 장단점들을 분석하여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면서, 그 명칭에 구애받지 않으며 오늘의 조건에 적합한 체제를 새로이 구성해가는 개방적 논의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이때 자본을 절대화하지 않는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본질적 작동방식과 경제사⋅정치사를 충분히 연구⋅토론⋅검증하고, 폭넓은 합의를 이루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개방적 논의가 바람직하다고 해서, 아무런 전제 없이 허공에서 대안을 구성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효율적 지속적 자본증식을 위한 부분적 개량 혹은 그람시가 비판하는 ‘수동혁명’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기업의 목표는 이윤추구’라는 해괴한 원리가 경제학 원론 교과서 첫머리를 차지하는 관성부터 깨버려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사적 이윤추구나 교환가치가 아니라 인류의 더 나은 삶 혹은 사용가치를 중심에 두는 경제체제로 전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에도 기술발전은 필요하겠지만, 그것은 예컨대 더 큰 수익이 아니라, 파괴된 환경을 복원하면서 더 효율적인 자연과 인간의 물질대사에 기여하는 기술이어야 할 것입니다. 개인들의 노력에 대한 사회적 보상은 필요하지만, 보상의 수단이 꼭 막대한 금전이나 권력이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추구할 만한 경제체제의 밑그림을 그려보자면, 현대의 기술발전과 생산력 증대에 부합되는 수준으로 노동시간을 획기적으로 축소하면서(예컨대 핀란드가 추진하는 4시간 노동제) 주택, 의료, 교육 등 기본적인 문화생활의 조건을 사회가 책임지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나 실업 문제를 해결하고 입시지옥이나 사교육 부담을 없애가며, 불평등구조를 대대손손 물려주게 만드는 대학서열체제도 해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가 이런 상태에 접근할수록 우리는 악착같이 벌어서 자식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 아니라, 생계 때문에 누군가의 갑질에 굴종해야 하는 인간관계도 불필요해질 것입니다. 그 반면에 이런저런 특권들을 이용해 남들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욕구도 소멸해갈 것입니다. 누구라도 오늘날보다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여러 영역에서 의미 있게 활동하는 데에 할애하며 자신의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발견하고 발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인류가 그 동안 쌓아온 문화유산들을 통해 다른 시대 다른 사회 속의 다른 인간들과 교감하며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법을 배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인간이 자연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서도 겸허히 돌아보고, 이웃과 타 생명체들을 존중하는 태도⋅감각⋅욕구⋅의식 등을 키워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분업과 자본주의적 착취에 불가피하게 따라다닌 소외된 노동의 비중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자기발전의 일환이 되는 활동과 필요노동을 점점 더 일치시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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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이 증식을 포기하면 이미 자본이 아닙니다. 따라서 자본권력은 그 무한증식 본성을 제어하려는 사회적 장치를 결코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런 장치가 만들어지지 않도록 총력전을 벌입니다. 최저생활을 위한 최저임금을 조금 올리는 일조차 전쟁 아니었습니까.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는 심지어 임금의 최고한도를 법으로 정하는 짓들도 했습니다. 즉 법으로 정한 한도 이상으로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주면 노동자만 아니라 자본가까지 처벌했습니다. 자본가들은 노동시간 역시 무한정 연장하고 싶어 했습니다. 8시간 노동제는 노동자들이 100 년 넘게 자본과 전쟁을 치르고 나서 러시아 혁명을 통해 국가 차원에서 확립되었습니다.
경제체제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은 개별 노동자나 조합 차원에서 불가능하며, 사회 전체, 특히 국가권력이 적극적으로 관여해야 가능해집니다. 만일 자본권력이 정치권력과 손잡고 국가를 좌우할 수 있다면 경제체제의 성격을 바꾸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경제체제의 근본적 성격 변화를 위해서는 국가가 충분히 민주적이어야 합니다. 즉 국민이 국가권력의 실제 주인이어야 합니다.
국가권력의 실제 주인이 국민인지 아닌지는 헌법 조문이나 정부의 공식 입장에 따라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주요 정책결정⋅의사결정에 얼마나 직접⋅간접으로 참여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대의제 민주주의를 전제한다면, 압도적 다수를 이루는 노동자 서민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정당과 국회의원, 자치단체장,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요원 등이 그 정도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여 활동하느냐도 민주주의의 척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 대표들이 국민의 권한을 위임받은 심부름꾼에서 지배자로 둔갑할 수 없도록 하는 제어장치를 충분히 만들어 놓고 있느냐도 그 척도가 될 것입니다. 반대로 그렇지 못하다면 그만큼 민주주의와는 멀어져 있는 셈입니다. 이런 척도에 비추어 본다면 삼성공화국에는 민주국가라는 말보다 자본독재 국가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 것입니다.
따라서 경제체제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풍요로운 평등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데에는 실질적 민주국가를 만드는 것이 일차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한국의 민주시민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촛불혁명’을 통해 민주국가를 세우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 ‘촛불정권’은 친노동 정책으로 이미 자본을, 특히 군소 자영업을 충분히 괴롭히지 않았느냐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계는 ‘촛불정권’도 여전히 친재벌 정권이라고 반발하고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노동계와 자영업 내지 중소기업 간의 갈등이 첨예화된 가운데 실질적 자본권력, 즉 재벌과 국제자본은 그 전쟁터를 굽어보며 정치권력에 이런저런 요구사항들을 주문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경총의 요구를 법안으로 상정하거나(‘부당노동행위 처벌 조항 완화’, ‘작업장 내 파업 금지’ 등), 사회적 합의의 이름으로 노동계의 양보를 강요하기도 합니다. 그 와중에 다국적 자본을 대변하는 국제통화기금(IMF)은 최저임금 인상을 제한하라고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친노동 ‘촛불정권’인 현 정부마저 국제노동기구가 제시하는 기본규약조차 아직 제대로 비준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4시간 노동제나 기본적 문화생활의 조건을 사회적으로 보장하는 정책을 진지하게 고려할 수 있는 수준과는 아직 거리가 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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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적 민주국가는 국민들의 적극적 노력 혹은 운동 없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기 위해서는, 오늘의 견고한 불평등구조도 인간의 노력을 통해 바뀔 수 있다는 사고방식, 즉 현실을 변화 가능성에 비추어 점점 더 폭넓게 더 깊이 이해해 가고, 나아가 자신의 주체적 역할이 현실변화에 끼칠 영향도 이해하려 노력하는 변증법적 사고방식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정치문화, 예컨대 흔히들 현실의 근본 모순이나 위기 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보다 작은 즐거움에 매달리는 현상, 혹은 가파른 생존사다리에 매달려 한 칸이라도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 옆도 뒤도 보지 않는 삶의 모습도 제반 역사적 사회적 조건의 산물이라고 받아들여, 새로운 조건을 만듦으로써 바꿔가고자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러한 현상을 근거로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일 뿐이라고 단정하여 미리부터 체념하여 개인주의나 가족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습니다.
실질적 민주국가와 풍요로운 평등사회를 향한 운동에서는, 인간을 원칙상 평등한 존재로 보는 평등주의적 인간관이 그 출발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만인은 모두 소중하며 각자가 존엄한 존재로서 적합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역할을 해낼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불평등한 지배관계 속에서 주인은 주인대로, 노예는 노예대로 각자 자기 역할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므로 각자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고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실질적 민주국가나 풍요로운 평등사회를 추구하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물론 현재 각 개인이 지닌 능력⋅자질⋅품성 등의 차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 근거해 차별을 정당화하고 고착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변증법적 관점에서는 인간의 현재 상태 역시 제반 조건들의 산물이며 변할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풍요로운 평등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개인 차원에서 현재의 불평등한 인간관계를 불변적인 것처럼 절대화하는 온갖 사유방식들을 거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자본과 노동 간의 지배관계만 아니라 그로부터 파생되는 다양한 형태의 억압들, 예컨대 성적, 지역적, 민족적, 인종적, 종교적 차이들을 차별의 근거로 삼는 억압논리와 그에 따르는 야만적 폭력들을 비판하고, 그러한 차별과 억압에 맞서는 제반 부문별 해방운동들을 지지하고 능력 닿는 만큼 적극적으로 운동에 참여하거나 운동을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본주의 경제의 작동방식으로 인해 구조적으로 자본권력과 대립할 수밖에 없는 노동운동의 객관적 가능성 혹은 잠재력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변증법적인 사유방식으로, 현재의 노동운동이 보여주는 조합주의나 계급이기주의 역시 극복될 수 있다고 보고 노동운동의 질적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으면 좋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어떤 새로운 인식을 얻거나 사고방식을 바꾼다고 해서, 그러한 변화를 곧바로 행동에 옮기지 않습니다. 또 다른 인식들이나 기존 사고방식과 경쟁하는 과도단계를 거쳐야 하고, 검증을 통과해 확신의 단계에 도달해도 욕구와 결합되지 않으면 지식을 조금 늘이고 조금 더 현명해지는 데에 머물 뿐입니다. 또한 새로운 욕구를 갖게 되더라도 실행하는 방식을 찾지 못하거나, 실행에 개인적 손해와 위험이 따르면 행동으로까지 나아가기 어렵습니다. 이 점에서 개인적인 차원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를 넘어서는 데에는, 생각과 뜻을 공유하는 동료를 늘여가고 또 이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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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뜻을 공유하는 동료를 늘여가기 위해서는 이론적인 훈련과 현실에 대한 역동적 통찰을 통해 자신의 사고를 풍부하게 발전시키는 것이 우선입니다.(‘연구가 희망이다!’) 이 경우 치열한 토론과 현실검증 과정에서 기존의 인식들을 부단히 보완하거나 수정할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이 또한 변증법적 사유의 중요한 요구사항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뜻을 함께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데에는 올바른 생각을 공유하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동료들과의 깊은 신뢰관계도 형성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오랜 기간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이때 헌신의 이름으로 유형무형의 자산이나 권력을 독점할 위험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실질적 민주국가와 풍요로운 평등사회를 추구하는 운동에 뜻을 모으기 위해서는, 운동 과정 내부에서부터 민주주의 내지 평등한 관계가 부단히 구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변증법적 사유는 사물들을 복합적 연관관계 속에서 파악할 것도 요구합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오늘날 다양한 부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야만적 파괴적 억압과 착취에 맞선 부문운동들, 예컨대 성평등운동⋅민족해방운동⋅인권운동⋅환경운동 등과 자본주의적 지배관계의 본질적 연관을 밝히고, 이러한 부문운동들을 실질적 민주국가와 풍요로운 평등사회 건설을 위한 운동과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불가피합니다. 이 유기적 결합은 한때 유행했던, 운동들의 상대적 자율성과 느슨한 연대의 수준을 넘어서 좀 더 견고한 피억압자들의 단결방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거대 독점자본은 국가권력 속에 깊이 손을 집어넣고 있을 뿐 아니라, 다국적 자본연합을 형성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만일 재벌의 횡포나 오판을 이윤증식의 관점이 아닌 범인류적 삶의 질 개선이라는 사용가치의 관점에서 제어할 수 있는 실질적 민주국가가 등장한다면, 이는 다국적 자본권력 내지 제국주의에 대한 도전이 될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제국주의에 맞서는 세력을 묶어내는 이념은 노동자 국제주의였습니다. 오늘날 국제주의운동은 거의 사멸했습니다. 그러나 풍요로운 평등사회를 추구하는 한, 노동자 국제주의의 부활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호혜와 평등을 원칙으로 하는 국제주의는 제국주의 세력들의 파괴적 패권주의 혹은 승자독식을 당연시하는 경쟁력 절대주의에 대한 궁극적 대안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인류 문명을 총체적 파국의 길로 몰아갈 수 있는 현재의 불평등한 자본주의적 지배구조에 가능한 한 잘 적응하고 불평등 사다리의 한 칸이라도 위쪽으로 올라서기 위해 영혼을 바칠 것이냐, 아니면 자본의 무한증식본성을 이성적으로 제어하여 풍요로운 평등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이를 위해 가능한 일을 하나씩 해나갈 것이냐를 놓고 지금이라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후자를 택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듯한데, 오늘의 현실에서는 아마 미친 짓으로 보일 수도 있고, 여차하면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위험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후자를 택하는 현명한 사람들을 곳곳에서 종종 만날 수 있어 인류의 미래는 아직 밝아 보입니다.
2020. 1. 11.
첫댓글 와! 2020년 새해부터 강행군입니다.
응원합니다.
함께하고 싶습니다.
몇 시인가요? 오늘, 혹 토요세미나 이후 입니까?
감사합니다. 하양에 있는 연구소인데 11시쯤 시작입니다.
끝나면 곧장 우리 연구소로 날아갈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