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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기지 앞 아홉 살 전쟁고아, 주한미군의 30년 스승 되다
[아무튼, 주말] [정상혁 기자의 행각]
주한 미군에게 한국어 강의
메릴랜드大 이청자 선생
31년째 미군기지 출근
제자 1000여명 배출해
지난달 경기도 평택 ‘캠프 험프리스’ 교육동 강의실에서 한국어 수업 도중 이청자씨가 환히 웃고 있다
. 양옆으로 앞줄에 앉아 열심히 공부하는 주한미군 학생들의 팔이 보인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이청자(82)씨는 30년 넘게 주한미군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부모 없이 거리에 나앉은 아홉 살 꼬마에게 내밀어 준 손길”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군 장병에게 구조돼 영어를 익힌 이씨는 “페이백(pay back)하는 심정으로” 1992년부터 ‘캠프 롱’ ‘캠프 페이지’ ‘캠프 이글’ 등 전국의 미군 기지를 돌며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미국 메릴랜드대학 글로벌 캠퍼스(UMGC) 소속 객원 부교수로 지금은 경기도 평택과 오산의 미군 기지로 출근해 매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하루 3시간씩 강의한다. 강원도 원주 집을 출발해 왕복 250㎞, 흰색 소형차를 몰고 4시간 거리를 달린다.
이씨는 지난해 대학에서 30년 근속상을 받았다. 지난 2월에는 학생들이 선정하는 최고 영예의 ‘Stanley J. Drazek Teaching Excellence Award’를 수상했다. 이 소식이 미국 일간 ‘볼티모어 선’에 소개되며 이씨의 인생사(史)도 함께 세상에 알려졌다. 수강생 앤서니 콜린스(41) 대위는 “여러 나라에 주둔하면서 대학을 세 곳이나 다녔지만 이 선생님처럼 따뜻한 분은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달 27일 찾은 평택 ‘캠프 험프리스’ 교육동 강의실 분위기는 거의 할머니와 손주들이었다. 이씨가 한국말로 천천히 물었다. “불고기 맛있어요?” 이어진 학생의 대답. “그~져 그뢔요.” “그럼 무슨 음식 좋아요?” “삼겹살, 소주 맛있어요.” 웃음이 계속 터졌다.
◇“나는 황홀한 고아였다”
전쟁과 가난, 그 와중에도 따스했던 국적을 뛰어넘는 우정에 대해 이청자 선생은 회고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났다. 부잣집이었다. 8·15 광복 이후 남한으로 내려와 충북 제천에 터를 잡았다. 이윽고 전쟁이 났다. 인민군에게 부친을 잃었다. “총살됐다고 들었다. 북한 살 때 지주(地主)였다는 이유로. 엄마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땅 있는 게 무슨 죄라고….” 그해 피란길, 난리 통에 모친과 헤어졌다. “남동생 손을 붙잡고 어찌어찌 춘천까지 갔다. 차를 탔는지, 그냥 걸었는지, 왜 하필 거기였는지도 알 수가 없다.” 거지꼴로 미군 기지 ‘캠프 페이지’ 앞에 쓰러져 있었다. 그때 누군가 손을 내밀었다. 미군 병사였다. ‘쟌’이라고 했다.
–무섭지 않았나요?
“아뇨, 오히려 구세주 같았죠. 제 기억으로는 그 사람이 부대에 들어가서는 먹을 걸 가져왔을 거예요. 배고픈데 초콜릿 주니까 얼마나 좋던지요. 아마 나쁜 사람이었어도 따라갔을 거예요.”
–고아원에 데려간 거군요.
“부대 근처 애민보육원. 지금도 있어요. 미군들이 봉사활동 하러 자주 왔어요. 저는 미군 모두를 ‘쟌’이라고 부르면서 잘 따랐어요. 하도 ‘쟌’ ‘쟌’거리니까 당시 고아가 80명 정도였는데 다들 저를 ‘쟌’이라고 불렀죠. ‘쟌’들이 오면 항상 영어를 가르쳐줬어요. ‘유어 네임 이즈….” “세이 재킷!” 이렇게 하나씩 명사를 배웠어요. ‘잇’ ‘드링크’ ‘딜리셔스’ 같은 표현도 몸짓으로 익히고. 미국 50개 주(州) 이름은 지금도 외워요.”
고통이 없을 리 없었겠지만, 그는 고아원에서의 나날을 ‘황홀했던 시절’이라 표현했다. “그때 다들 어려웠잖아요. 그 정도면 황제같이 살았다고 생각해요. 신기한 건요, 제가 한국어를 가르친 미군들이, 과거 제가 영어를 배운 애민보육원에 가서 또 영어를 가르친다는 거예요. 그들은 애민보육원을 ‘A-men’ 보육원이라고 부르더군요. 아멘.”
–슬프기도 했을 텐데요.
“나는 바보예요. 비참함이 뭔지 몰라요. 행운이죠. 보육원엔 보모, 식모, 옷 꿰매 주는 분도 계셨어요. 교육도 서구식이었는데, 우선 레이디 퍼스트였어요. 다들 까만 고무신 신고 다닐 때 우리는 샌들을 신었죠. 안남미로 지은 밥에 치즈를 비벼 먹던 기억. 어느 달밤에 한 흑인 장교가 포도 넝쿨 아래서 ‘그리운 켄터키 옛집’을 불러주기도 하고. 성탄절 파티도 했는걸요. 저는 정말 산타가 있다고 믿었어요.”
–거의 원어민 수업이었네요.
“제게는 고향이에요. 유년의 언어가 거기서 형성됐어요.”
◇학교 못 간 게 평생의 恨
그러나 정규 교육은 이어지지 못했다.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자 고아원 애들을 학교에 보냈어요. 저는 5학년 2학기에 입학해서 1년 뒤 졸업했는데 그게 제 마지막 학교 생활이었죠.” 이씨는 “교복 못 입어본 게 천추의 한”이라고 했다. 보육원에서 스무살을 맞았다.
–불안했겠군요.
“공부가 하고 싶었어요. 1961년에 ‘10만 어린이 부모 찾기 운동’이 있었어요. 아이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는데 제 이름은 안 불리더군요. 엄마가 보고 싶다기보다는, 엄마를 찾으면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있었죠. 직접 찾아나서기로 했어요.”
–찾으셨나요?
“버스 타고 예전 살던 제천으로 갔어요. 거기 주민들 붙잡고 묻다 보니 충주 어디로 가보라 하더군요. 결국 만나긴 했어요. 그런데 제가 생각한 그런 엄마의 모습이 아니더군요. 술에 취해 있었어요.”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당시 원장 부인이 운영하던 ‘춘천 서울산부인과’에서 병원 일을 도왔다. “청소도 하고 가끔 주사도 놓고 날라리 간호사였죠.” 1965년 결혼했고 1970년 아들을 낳았다. 등교는 언감생심, 집 앞에 문구점을 차렸다. “장사치고는 왠지 지적인 것 같았어요. 공부하는 학생들 드나드는 곳이잖아요.” 아들이 국민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됐다. “기록부에 부모 학력란이 있더군요. 거기에 ‘국졸’(國卒)을 쓰면서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죠. 다짐했습니다. 아들이 중학교 입학할 때는 결코 ‘국졸’을 안 쓰리라.” 그러나 시간은 물같이 흘렀다.
1982년 이씨의 고입 검정고시 합격 이후 한 잡지에 실린 기사. 주제가 '만학 여성 분투기'였다. /이청자 제공
–그래서 검정고시를 준비한 건가요?
“이러다간 계속 ‘국졸’ 엄마가 될 것 같았죠. 영어는 기초가 있으니 괜찮았어요. 덕분에 중학교 과정 시험은 한 번에 붙었습니다.”
1982년, 이씨의 고입 검정고시 합격은 꽤 화제가 됐다. 한 잡지에 ‘만학 여성 분투기’라는 문패로 대문짝만 한 글이 실리기도 했다. ‘고입 검정 시험 합격에 이어 내년의 대입 검정과 대학 입학을 꿈꾸고 있는 그녀는 토·일요일에는 예식장에서 피아노를 치는 것으로 아르바이트해 가며 학비와 교통비를 마련하고 있는 억척 주부이기도 하다….’ 이씨는 “따고 나니 그것도 초라해 안 되겠더라”며 “고졸 검정고시에도 도전했다”고 말했다. “물론 여러 번 미끄러졌지만요.”
–몇 번요?
“세 번요.”
–어떻게 하셨나요?
“열심히 학원을 다녔습니다. 원주에서 매일 새벽 5시 10분 기차를 탔어요. 청량리에서 다시 종로 ‘고려검정고시학원’까지 왕복 6시간 여정이었어요. 기차가 공부방이었죠. (이혼한) 남편이 외항선을 탔어요. 국민학교 4학년짜리 아이 혼자 집에 두고 나오는데, 기차가 철다리 지날 때 덜컹덜컹 소리가 크거든요. 아이 깰까봐 마음이 깨지는 것 같았죠. 보온밥통이 없어서 밥을 보자기에 싸서 아랫목에 넣어두고, 난로에 국 올려 놓으면 다 태우고…. 애꿎은 애만 지르밟은 거죠.”
1986년에는 집 근처 상지대학병설전문대학 관광영어통역과에 입학했다. 주경야독이었다. 1988년 야간으로 상명여대 영문과를 갔다. “면접 보려고 줄 서 있는데 누가 부르더라고요. 아줌마, 아줌마는 거기 서는 거 아니라고. 학부모인 줄 알았나봐요. 천안까지 학교 다니면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버스 타면 얼마나 차가 막히던지…. 제 아들은 ‘어머니 있는 고아’였죠.” 1999년에는 상지대에서 영어 교육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군 앞에 강사로 서다
이씨가 한국어 수업 수강생인 주한 미군 앤서니 콜린스(왼쪽) 대위와 함께 환히 웃고 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알음알음 배운 피아노로 집앞 예식장에서 결혼행진곡을 연주하며 생활비 벌던 시절, 동네에서 알게 된 미군 장병들은 고마운 친구였다. “아들과 놀아주기도 하고 함께 포켓볼도 치고요.” 1991년이었다. “집 근처 ‘캠프 롱’ 성당 수녀님이 한국말을 배우고 싶어해서 미사 끝나고 혹은 가끔은 제 집에서 가르쳐주곤 했죠. 어느 날 그분이 지금 UMGC에 한국어 강사 자리가 났으니 지원해보라고 알려주더군요.” 이듬해 1월, 대학 시간강사가 됐다.
–첫 수업 기억 나나요?
“강의실이 흔들릴 만큼 떨었어요. 누가 장교인지 사병인지 모르지만 미군 10명 앞에 섰는데, 땀으로 겨울 내의가 다 젖었죠. 실수도 했겠지만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주로 뭘 가르치나요?
“먼저 숫자 발음을 가르쳐줘요. 1·2·3·4·5를 알면 일상 생활에서 전화번호 말할 수 있고, 년·월·일을 얘기할 수 있으니까요. 당시만 해도 한국말 하는 미군은 한 명도 없었어요. 30년 전과 지금의 교수법은 확연히 달라요. 지금은 ‘가나다’를 가르치지 않아요. 이미 가벼운 대화는 할 수 있는 상태로 오거든요. 언어의 위상이 달라진 거죠.
–수업에서 꼭 하는 말이 있나요?
“첫날 제 인생 이야기를 들려줘요. 나는 고아였고, 너희 선배들에게 빚을 졌고, 지금 이 수업은 일종의 페이백이라고. 뒤처진다고 느끼거나 결석을 했다면 언제든 보강 신청하라고. 나는 너네 컴퍼니(company·동료)라고.”
–기억에 남는 학생이 있다면요?
“따스한 순간이 많아요. ‘캠프 롱’에서 수업할 때 어느 군의관이 있었어요. 졸업할 때쯤, 병원에 한 번 들르라고 하더군요. 다이아몬드 반지라도 주려나(웃음) 기대하고 갔더니, 수업 잘 들었다면서, 의사로서 자기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인생 팁을 알려주겠다더군요. 병이 나면 의사도 답답할 때가 있다면서요. 기분이 안 좋으면 걸어라, 기분이 좋으면 걸어라, 할 일이 많으면 일단 걸어라…. 그 말이 지금도 잊히질 않아요. 지금도 하루에 7~8㎞는 걸어요. ‘저 할머니 용 삶아 먹었다’고 할 정도로.”
–한때 반미 감정이 거셌습니다.
“부대 앞에 텐트 치고 ‘물러가라’ 외치고, 대학 캠퍼스에서도 ‘양키 고 홈’이 떠들썩했죠. 저도 숨어다녔어요. 죄지은 사람처럼. 부대에 강의하러 갈 때 차를 끌고 통과해야 하는데, 안 보이려고 운전석에서 몸을 얼마나 굽혔는지요. 가슴이 아팠습니다. 문구점 할 때도 가끔 ‘외국인들 좀 안 오면 좋겠어’ 그러는 주민들이 있었어요. 풍기문란이라고. 근데 저는 서로 어울리는 게 재밌고 좋았어요.”
◇군대는 사라져도 학생은 남는다
‘캠프 페이지’ 마지막 수업 당시 미군 학생들이 건넨 롤링 페이퍼. /이청자 제공
주한 미군은 속속 철수했다. ‘캠프 페이지’는 2005년, ‘캠프 이글’은 2009년, ‘캠프 롱’은 2010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가 30년간 가르친 1000여 명의 학생은 지금도 생활이라는 새 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다. “한국 회사에 취업했다며 명함을 보내오기도 해요. 한국이 살기 좋아지면서 최근엔 여기에 제대로 자리 잡으려는 군인이 많이 늘었어요. 뿌듯하죠.”
–‘캠프 페이지’ 마지막 수업 기억나세요?
“그럼요. 학생들 10명 있었는데, 거의 다 A 학점 줬을 거예요. 저한테는 너무 특별한 곳이니까. 거기 갈 때마다 제가 거지였을 당시의 장면이 떠올랐어요. 그 기억이 너무 싫어서 강의를 거절하기도 했는데…. 학생들에게 늘 말했죠. 공부해라. 내가 너희를 이렇게 좋아해도 내가 공부 안 했으면 하느님도 날 여기 못 보내줬을 거다. 사는 데 학위는 쓸모없을 수 있다. 그러나 네 삶의 자부심은 공부만이 줄 수 있다.”
마지막 날, 학생들이 롤링 페이퍼를 써서 이씨에게 건넸다. “Thank you, you’ve been the best teacher ever”(고마워요, 당신은 최고의 선생님이었어요).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선물”이라고 그는 말했다.
–개인 과외도 하신다고요?
“예전의 저 같은 무학자들, 아직 청춘의 몸인 주부들. 1995년부터 20년간 원주 여성회관 등에서 영어를 가르쳤는데, 제가 대학 보낸 사람만 수백 명 돼요. ‘젊게 살려면 공부해야 한다’고 서로 용기를 냈죠. 작년에는 77세 여성 분이 늦깎이 대학생 됐어요. 영어학원 원장이 된 주부도 있고요.”
–수업마다 ‘5분 교양’ 강의를 하셨다고요.
“동기 부여가 필요하잖아요. 우리가 왜 공부해야 하는가, 책임감을 주는 거죠. 신문에서 읽은 거나 주로 제 이야기 했어요. 제 과거사가 그리 흔한 편은 아니니까요. 애들 보고 ‘공부 좀 해라’ 말하지 말고, 조금 거짓을 보태더라도 ‘엄마 도서관에서 책 읽다가 늦었다’고 말하라고. 그럼 공부로 아이와 파트너십이 생긴다고. 이런 식이었는데 나름 입소문이 났는지 서울에서 수업 들으러 오는 부부도 있었죠.”
공부에는 정년이 없다는 사실을 그는 몸소 보여주고 있다. 2002년에는 미국 하버드대학교 서머스쿨을 수료했다. “어학연수라는 걸 한번 다녀오고 싶었는데 당시에 미국에서 일하던 아들이 등록을 해줬다”며 “에세이 써서 상도 받았다”고 말했다. 에세이 주제는 ‘나는 왜 영어를 배우는가’였다. “책을 읽든 글을 쓰든 하루도 영어를 거르지 않습니다. 학생들에게 말하곤 하죠. 그래도 이렇게 내 영어 실력이 형편없으니, 너네도 한국어 서툰 걸 안타까워 말라고요.”
2002년 어학연수했던 미국 하버드대에서 에세이로 받은 상장. /이청자 제공
–영어 잘하려면 어떻게 하나요?
“몰라도 매일 부딪쳐라. 그게 기본이에요. 발을 씻으려면 물에 담그는 수밖에 없지요.”
–여든둘, 힘에 부치지 않으세요?
“나이 좀 세지 마세요(웃음). 아직은 괜찮아요.”
코로나로 멈췄던 대면 강의가 올해 재개됐다. 이날 수업에는 세 명이 출석했다. 2040 장병들은 교재에서 생소한 표현이 나오면 머리를 긁적이다가도 이씨와 대화하며 이내 쾌활해졌다. 오후 6시 시작된 수업이 9시쯤 끝났다. “많이 파세요!” 전날 배운 표현을 응용(?)해 한 장병이 작별 인사를 건넸다. 강의실을 빠져나온 이씨가 웃으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안 피곤해요. 젊은 장병들이 그저 ‘우리 선배들이 좋은 일 했구나’ 생각한다면 그걸로 족해요. 굿나잇!”
정상혁 기자 편집국 주말뉴스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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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자평 61
찬성순반대순관심순최신순
2023.05.13 06:37:43
이청자 선생님의 고난과 영광은 대한민국이 걸어온 고난의 역사이며, 발전의 역사입니다. 감동 깊게 읽었습니다.
답글4
895
1
2023.05.14 20:27:38
건강하십시오 많이걸으시고 크게 감동입니다
2023.05.13 11:00:21
문재인 읽고있나 ??? 이게 대한 민국 역사다.. 북한편을 들어서는 안되는 이유.. 때린 사람편드는 병시니 어딘냐??
2023.05.13 10:47:06
건투....
2023.05.13 08:39:41
은혜를 잊지않는 진정한 표현법을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2023.05.13 07:02:10
이분이 바로 대한민국의 여장부입니다. 많이많이 응원드리며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답글작성
735
0
2023.05.13 06:46:01
감동 입니다 .
답글작성
665
0
2023.05.13 07:43:55
진심으로 존경 스럽습니다.
답글작성
146
1
2023.05.13 08:22:42
일단, 무조건 걸어라. 육신에 기분 좋은 세레토닌 호르몬은 선물이다. 이청자선생님, 건강하시어 더 많은 제자를 양성하시길...
답글작성
139
0
2023.05.13 08:24:44
이분이 진정한 애국자이심.. 건강하세요...
답글작성
130
1
2023.05.13 07:40:23
대단하십니다!!감동 했습니다
답글작성
129
1
2023.05.13 08:49:29
영화로 만들어도 되겠네. 문색이 입니다 라는 영화장르의 막장 보다 250배 낫겠다
답글1
121
0
2023.05.13 08:10:50
멋져요~!!응원합니다~^^
답글작성
109
1
2023.05.13 08:19:41
참으로 훌륭한 분이십니다.
2023.05.13 08:32:50
70년대 대구 대명동 동네에 고아원이 있었다 흔한게 고아원... 가난한 나라였다
답글작성
89
1
2023.05.13 07:38:39
울트라 수퍼 킹왕짱 이십니다!
답글작성
87
1
2023.05.13 08:36:48
이 선생님 그렇게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면서 아둔한 후학들을 깨우쳐 주세요. 감사합니다~~
답글작성
86
0
2023.05.13 09:20:42
과거를 뒤돌아다 보면 미국은 세계에서 제일 가난했던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아주고 부강하게 만들어준 은인들의 나라다.
답글작성
75
0
2023.05.13 09:22:28
굴곡진 긴 여정이었지만 황량한 들판위에 이름 모를 한 송이 들꽃이 만개하여 아름다운 향기로 우리들의 가슴에 와 닿는군요...
답글작성
67
0
2023.05.13 09:25:59
대한민국의 역사이며, 이것이 한국인이다..를 느끼게 해줍니다...
답글작성
59
0
2023.05.13 10:32:16
이 기사는 다시 읽어도 감동적이다. 배우고 가르침은 인류애의 상징이다. 이를 이청자여사가 역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사연은 미군 아메리칸 밀리터리 뉴스를 통해서 세계 전미군들에게도 전해져서 그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안기기도 했었다.
답글작성
50
0
2023.05.13 09:50:12
진정한 애국자 이십니다.
답글작성
48
0
2023.05.13 09:52:47
신문기사에 난 이청자할머님의 외모를 본 첫 소감이 강계미인 이시구나 이다. 한국 여성의 가장 대표적인 미인형이 평북 강계지역의 미인 얼굴을 꼽는다. 현대 한국화 김은호 화백의 미인도를 보면 강계미인형으로 많이 그렸다고 한다. 이할머님의 공부를 향한 향학열은 한국인들이 근원적으로 지니고 있는 지식탐구에 대한 엄청난 열정의 DNA 표본인것 같다
답글작성
46
0
2023.05.13 10:43:27
가족사중 동생분은 어떻게 되셨는지,왜 고아원에서 학교를 안 보냈는지 궁금하네요.저는 전쟁발발시 5살로 7살누나 1살아기동생 그리고 엄마랑 피난다니며 아사,동사직전 경험 다 겪으며 전후 학교 갔는데 고아원 아이들 3시세끼 다 먹는게 부러웠고 중학교 다니는게 넘,부러워서 고아원 보내달라 떼써서 엄마 울린 기억이 나는데요.그렇게 3남매 다 커서 세상을 잘 살아 노년이지만 공부 못한 한은 지금까지도 남습니다.
답글작성
42
1
2023.05.13 10:54:27
존경스럽다. 오래 건강하게 강의하시기를.
답글작성
36
0
2023.05.13 10:21:18
감동의 기사 잘 보았습니다
답글작성
35
0
2023.05.13 11:22:19
감동적인 기사 잘읽었습니다.
2023.05.13 12:07:54
이청자 선생님 삶 자체가 보람입니다 그리고 지금 하시는 교육은 훌륭한 민간 외교이기도 합니다 건강하시고 하시는 교육 계속 되길 기원합니다
답글작성
24
0
2023.05.13 12:05:48
대한 민국의 역사이십니다. 긍적적이면 성공을 합니다. 성공이란 자기 만족 즐기는 것이다. 건강하세요.
답글작성
24
0
2023.05.13 10:58:11
감동적인 스토리입니다~!
답글작성
24
0
2023.05.13 13:50:40
일본야구의 전설 장훈 선생님 기사에 이어 이청자 선생님 기사까지 정말 감동깊게 잘 읽었습니다.
답글작성
23
0
2023.05.13 13:17:49
60,70,80의 어른신들 정말 힘들고 배고프고 어렵게 사셨지만. 선진국 대한민국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답글작성
22
0
2023.05.13 12:00:52
아침에 조선일보 열었을때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가 제일 먼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답글작성
22
0
2023.05.13 13:56:48
지금은 배불리 먹고 있으나, 나의 어린시절도 애틋하다. 보리죽 쑤어 먹고, 2십리 신작로길 구비구비 걸어서 학교 가고, 점심은 걸러고, 비 오면 그 비 다 맞고 학교가서 화장실에서 젖은 옷 쥐어 짜 입고 교실로 들어 가고, 점심시간에는 달콤한 강냉이죽 냄새 구판부에서 다른 애들이 먹고 있는 노란 크림빵 냄새가 코를 후벼서 멀리 구석으로 숨었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아련히 머언 1967년 전후의 기억이다.
답글작성
21
0
2023.05.13 12:42:46
의지의 한국인입니다. 멋집니다.
답글작성
20
0
2023.05.13 10:28:48
글중에 지금은 언어의 위상으로 미군들이 기본대화를 할줄 아는 수준으로 온다고 했는데 소수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미군들은 한국오기전에 미국방언어대학( DEDENSE LANGUAGE INSTITUTE)에서 한국어를 일년과정수료후 옵니다 즉 한국주둔전에 쓰기,듣기,말하기등 배우고 옵니다 학생에 따라 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답글2
20
1
2023.05.13 12:13:01
장하고 자랑스럽습니다. 샬롬!
답글작성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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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3 13:57:35
우리 모두 이청자 여사와 같은 정신으로 산다면 이 사회가 더욱 사랑과 이해가 넘치는 세상으로 변할 것이다. 우리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을 미워한고 욕하는 반미주의자 좌파들은 인간도 아니다. 부디 이청자 여사가 건강하게 오래 사시기를 기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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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3 13:07:51
훈장은 이런분에게 주라고 있는 거다 이런분에게 훈장안주고 뭐하나... 쓸데없는 짓 한자들에게 쓸데없이 훈장 많이 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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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3 14:25:35
What a wonderful Lady! 존경스럽네요. 인생에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개척하셨으니 참 귀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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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3 13:52:10
기사 재밌게 읽었습니다. 공부 힘들어 하는 아이들에게 기사 읽힐 생각입니다.
2023.05.13 13:46:11
고난을 이기며 열심히 사신 삶이 부럽습니다. 앞으로도 건승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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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3 13:18:08
동갑내군요. 그 때 그 시절을 새롭게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 역경을 이기고 세운 이 나라! 후손들이 잘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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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3 13:16:58
여기 또 존경할 만한 분 한분 계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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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3 16:58:48
미군을 만났으니 망정이지 쏘련군놈들 만났으면 꿈도 못꿀 일이다. 벌겅이들아, 허구헌 날 돼지 삼김씨나 칭송하는 아이큐가 동네 개만도 못한 허접한 쓰레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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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3 16:20:41
나와 비슷한 면이 좀 있다. 선천 전씨인 나의 원 고향은 평북 강계이고, 월남했고, 동란 중 부친을 여의고 고1에 가장이 되었고, 그러나 대학을 나와 평생 전기 업계에 종사하였다. 나는 겨우 75세까지 현역이었으나 이분은 검정고시 출신으로 82세까지 그것도 영어/한국어 현역으로 뛴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한국에 이런 본받을만한 분들이 있어 희망을 준다. 대딘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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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3 13:34:25
이 분 삶을 영화로 만들면 엄청 대박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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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3 13:05:45
한일정상이 다시 만난 시기인지라, 일본과의 한일합방 조선의 노비를 해방시켜준 전환점이었고, 6.25전쟁은 땅부자들을 혁명적인 투사 공산당이 대신 학살시켜준 대전환점이었다는 해석도 가능한거니, 가난하고 힘이 없으면 사기를 치고 도둑질을해도 대한민국 40%가 사기잘치는 거대악당을 지지하는 이유가 되는거고 정치적으로 불리하면 친일타령을 이용해먹어도 개의치않고 지지할 수 있는 오락가락 이증적인 위선을 떠는 비양심적인 편리가 최고의 우선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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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3 20:00:54
I admire her life with the God rewarding and being joy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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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3 17:09:58
고난의 길도 꿈을 가지고 이겨 내시고 삶을 아름답게 일궈 오신 그 발자취가 가슴 뭉클 감동이 됩니다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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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3 15:48:38
좋은 기사네요 이런 일들이 더 많이 드러났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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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3 16:49:31
여사님.격하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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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3 15:37:17
시련과 고난 속에서 꽃피운 아름다운 인생의 향기가 가슴 뭉클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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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3 15:35:00
항상 강녕하세요 선생님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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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3 23:50:54
이 청자 선생님이 삶에 역사 우리나라 역사 입니다 존경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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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4 07:52:15
대한민국의 현대사의 시련을 몸으로 받아 내며 살아 오신분,, 그 시련에서도 생의 바른면만을 보고 살아 오시면서, 오늘 같은 한미동맹의 형성에 큰 역할을 해 오셨군요. 참으로 존경 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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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4 02:52:55
애국은 내 언어,문화를 전하는 것이 최고다.
2023.05.13 14:29:53
누군가가 지어낸 소설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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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4 16:21:00
소인이 3살 적 의주군 옥강동에서 남하했다고 들었는데 상황이 비슷하고 두 살 터 울 누님이 되는군요. 아직은 건강해 운전을 하고 있는데 고령자 운전면허 갱신이 아주 어려워졌습니다. 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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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4 06:21:54
민간 외교관의 참모습으로 칭송해야 할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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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4 05:28:31
give=기부=寄付=돈이나 물건을 무료로 줌,Pay=패=貝(조개 화패=지불),Back=바꿔=빠꾸 기사 속 영어 단어 에 보듯..대부분 영어 단어는 우리말에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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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4 11:55:38
무병장수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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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5 02:09:55
태어난 환경과 상관없이 대체로 사람은 자기의 지능과 능력을 갖고 태어난다. 높은 지능과 본인의 의지 ,친화력이 있다면 어떠한 환경에서도 성공 한다는 것을 이청자씨가 보여 주는 것이다. 부모가 돈 많이쓰고 애들 과외 보내고 닥달해도 그러게 안한것과 결과는 별로 다르지 않다. 부모 마음의 위로를 받기위해 사교육비를 낭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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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6 10:54:47
고려청자보다 더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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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4 21:53:52
용기있고 ?륭한 분이시네요. 매일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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