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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우정(八友亭)의 유래와 교육적 공간의 고찰
교육학박사 김영호(金泳豪)
1. 들어가는 말
팔우정로타리에는 해장국식당이 즐비하여 ‘팔우정로타리’라는 말이 나오면 해장국이 먼저 떠오른다. 동기회 연례모임이 있을 때는 밤늦게까지 즐겁게 행사를 하다보면 이튼 날 아침은 주변 여관에서 늦게 기상을 하게 된다. 우정의 술잔을 서로 주고받으며 절주의식 없이 많이 마신 탓으로 자고 나면 수면부족과 구강에 남은 주향으로 입맛이 변하여 산해진미라도 반갑지 않다. 그러나 모두 둘러 앉아 간밤에 엮었던 줄거리를 스토리텔링하며 맛보는 팔우정 해장국은 일구난설의 경주별미이다.
다른 지역에서 맛볼 수 있는 해장국과는 대비할 수 없는 참맛이다. 요즈음도 그 앞을 지나가다보면 문간에서 초로(初老)의 아주머니가 정겨운 눈길을 주면서 해장국의 잠재된 역사적 미각을 각성시켜 준다. 그래서 인근 지역사회의 미식가들에게도 팔우정해장국은 경주의 대표적 음식으로 기억되고 있다.
팔우정해장국은 가도의 랜드 마크인가. 분명 팔우정은 정자정(亭)자(字)가 있는 것으로 보아 식당가로서의 팔우정이 아니라 유생과 청소년들이 서책을 읽고 명유(名儒)와 소객(騷客)이 글벗을 만나 시작(詩作) 시창(詩唱)을 하고 강론(講論)을 했던 교육과 여가의 공간이었다고 생각된다.
서책(書冊)을 보고 강론을 폈던 선비들은 떠났고 정자는 없어진지 오래지만 팔우정은 최초에 해장국식당가를 목표로 해서 세운 것은 아닐 것이다. 세월이 지나가면서 팔우정은 모습이 살아지고 실종(失踪) 흔적(痕迹)의 기억을 위해 ‘팔우정’이란 작은 표석(表石)이 풍우설상에 씻기더니 언젠가 주변 환경을 다듬어 소공원 속에 ‘팔우정휴허비’를 세워 영원히 환생(還生) 불가(不可)의 표적(表迹)으로 자리매김하는 듯하다.
경주최씨배반문중에서 팔우정복원을 포기한 것 같아 여기 팔우정의 건립유래와 그 교육적 의의를 밝혀 팔우정이 한 문중에만 국한되는 사적(事蹟)이 아니라 경주시민 모두를 위한 문화유산으로 인식될 수 있도록 경주시 주관으로 시재원(市財源)을 투입하여 복원되기를 바라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며 또한 복원된 팔우정에서 전래의 미풍양속의 하나인 향음주례가 재현되어 경주시민에게 도덕적 소양과 시정(詩情)을 함양할 수 있는 시민공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자 한다.
2. 팔우정 건립의 유래
팔우정은 현감 최계종(崔繼宗)공이 지은 정자이다. 최계종(崔繼宗公)공은 1570년 경오 7월에 경주 북쪽 현곡면 귀미리에 본가에서 출생하여 1647년에 졸하였으며 자는 경승(慶承)이고 본관은 경주, 성균관 사성을 역임하고 청백리로 녹선된 최예의 7세손이다.
공은 생후 한 달 만인 8월에 어머니가 별세하자 재종숙인 사헌부 감찰 최경천공이 강보에 쌓인 어린이로 대려다가 길렀다. 그래서 공은 감찰공의 후사(後嗣)로 입후(入後)하여 종가(宗家)를 이었다. 어머니는 숙인(淑人) 수원김씨이며 생원 휘 언신(言愼)의 따님이시다.
최경천공이 부인과 아들 최계종공에게 토지와 노비를 나누어주고 남겨 놓은 분재기(分財記)를 보면 부인 김씨에게 와가 10칸, 소실 김씨에게 와가 1채, 아들에게 와가 50칸과 노비 100구(口), 논 272두락, 밭 263두락을 나누어 준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 당시 경주의 최고의 부자였다고 짐작된다.
생부(生父)는 선교량 증가선대부병조참판(贈嘉善大夫兵曹參判)겸동지의금부사(兼同知義禁府事) 휘 최신보(崔臣輔)이고 생모(生母)는 증정부인(贈貞夫人) 평해황씨이며 사형제중 넷째로 태어났다. 맏형은 군자감봉사 휘 최진흥(崔震興), 둘째형은 군자감봉사 휘 최진망(崔震望), 셋째형은 공조참판 시(諡)정무 휘 최진립(崔震立)이다.
〔육의당 전경〕 〔석호정사 전경〕
공은 12세에 감찰공의 상을 당하여 전후 거상에 성인과 같이 하시니 남들이 모두 큰 인물이 될 것이라 했다. 당숙 구계공이 특별히 격려하여 글을 가르쳐서 공으로 하여금 성취가 있게 하였다. 선조 임진 여름에 왜적이 졸지에 침입하여 부산 동래가 연이어 함락되고 여러 고을이 모두 와해되어 격문과 첩보가 거듭 이르게 되자 부윤과 판관이 날로 군사를 불러 모았으나 성중의 백성들은 모두 달아나고 한사람도 이르는 자가 없었다. 공은 부성 근처에 살면서 조석으로 정탐해보니 재앙이 곧 임박 한 지라 드디어 분개하여 붓을 던지고 형정무공과 함께 칼을 잡고 일어나 관청에 들여 창의할 것을 청하였다.
노곡과 열박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고 문천회맹을 비롯한 구강, 팔공산 그리고 곽재우장군이 주관하는 화왕산회맹 등에 참가하였으며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왜적을 물리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선조 27년(1594년) 무과에 급제하고 전공으로 훈련원정이 제수되었으며, 예빈시 판관(判官)을 거쳐 서생포 첨사(僉使)에 올랐다. 광해 6년(1614년) 남포현감에 제수되었으나 광해의 난정에 항거하는 뜻으로 부임하지 않았다.
공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여러 간신들이 권세를 잡고 한고을 한등급 벼슬이라도 다 사문을 통해 나오고 마침내 폐모의 논의가 일어나자 조야가 흉흉하여 이를 아는 자는 겁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공은 이를 분개하여 뜻맞는 사람들로 더불어 발란반정(撥亂反正)을 도모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했다. 공(崔繼宗公)이 혼조(昏朝)에 관직을 사직하고 은사(隱士)의 관(冠)으로 귀한(歸閈)하여 외동읍 제내리에 육의당을 지었다. 이곳에서 대자연 속에서 글을 읽고 후학을 교도하며 종생(終生)하였다.
또한 공은 저택일우(邸宅昵偶)에 설단하고 정자를 건립한 것이 광해군 6년(甲寅)인 서기 1614년이다. 이 정자가 팔우정(八友亭)이다. 공은 오늘날 경주 외동(外東) 석호정사(石壕精舍)에서 제향(祭享)되고 있다. 공은 3남 4녀를 두었는데, 장자는 승훈랑(承訓郞) 휘(諱)동로(東老), 둘째는 현감(縣監) 백사공(白沙公) 휘(諱)동언(東彦), 셋째는 종사랑(從仕郞 )휘(諱)동신(東慎)이고, 서랑(壻郞)은 손항(孫沆), 조윤효(曺胤孝), 이상직(李尙直), 주섭(朱燮)이다.
손자는 동로(東老)의 자(子) 즉, 무공랑(務功郞) 휘(諱)국준(國俊), 통덕랑(通德郞) 휘(諱)국필(國弼), 통덕랑(通德郞) 휘(諱)국흠(國欽), 통덕랑(通德郞) 휘(諱)국장(國章), 선교랑(宣敎郞) 휘(諱)국빈(國賓), 무공랑(務功郞) 휘(諱)국첨(國瞻), 통덕랑(通德郞) 휘(諱)국시(國蓍) 팔형제와 동언(東彦)의 자(子) 휘(諱)국구(國耈) 및 동신(東愼)의 자(子) 선교랑(宣敎郞) 휘(諱)국상(國相), 선교랑(宣敎郞) 휘(諱)국우(國佑), 선교랑(宣敎郞) 휘(諱)국서(國瑞), 기자전참봉(箕子殿叅奉) 휘(諱)국좌(國佐), 통사랑(通仕郞) 휘(諱)국인(國仁) 오형제 등 모두 14명이다.
공은 장자 승훈랑 동로가 아들 팔형제를 낳을 때마다 한 그루의 괴목(槐木)을 단상(壇上)에 심어 모두 팔주(八株)심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팔우정(八友亭)이다. 여덟 그루의 나무가 무성하여 짙은 그늘을 드리웠으므로 그 나무그늘이 정자역할을 하였기에 팔우정이라 명명되었는 것 같다.
옛날 중국 한나라 시대에 순숙(筍淑)이란 사람이 아들 팔형제를 두고 살던 마을 이름이 고양리(高陽里)인데 그 팔형제를 닮았기 때문에 경주 사람들은 이 팔우정을 고양정(高陽亭)이라고 하였다.
할아버지가 나무를 심는 것은 심는 본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후대를 위해서 심는다. 묘목이 자라듯이 자손이 성장하여 우람한 거목이 되는 것은 할아버지의 소박한 소망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기 위해서는 시간적으로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고 햇볕과 공기와 영양분이 제공되어야 하는 장기 프로젝트이다. 인간 교육도 나무를 심어 키우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자손이나 후학들에게 동량적(棟樑的) 인재(人材)가 되라고 교육하는 것도 나무와 비유해서 하는 말이다. 쓸모 있는 사회인이 되라는 염원이 팔우정에 괴목(槐木)을 심은 육이당의 깊은 애손지심(愛孫之心)이 아닐까.
그 후 1614년에 건립된 팔우정은 세구년심(歲舊年深)에 풍우설상으로 퇴락(頹落)하여 순조 신미년 서기 1811년에 모암공(慕庵公) 최사진(崔思晋)의 갈력(竭力)으로 단과 정자를 개보수(改補修)하고 지족당(知足堂)의 휘호(揮毫)로 팔우정(八友亭)이라 세긴 단갈(短碣)을 세워 낙성 고유(告由)하였다. 또한 겸하여 향음주례(鄕飮酒禮)의 예석을 베풀었다. 이때가 순조 11년 윤삼월 11일이다.
광무 3년 서기 1899년에 팔가(八家)의 자손들이 함께 의논하여 단을 개축하고 수목을 보식(補植)하였다.
어지러운 한말을 맞이하여 국내외정세와 수욕(羞辱)의 국치 하에서 안타깝게도 정자는 도괴되고 단은 폐허되어 300여 평의 부지는 90여 평으로 축소되었다.
광복 후에는 90여 평의 노달(路達) 중앙에 흙을 쌓아 팔우정유허비만 세워두었다.
이승만대통령 정권 때 도시계획에 따라 도로를 확장하는 공사에 의해 평토를 하여 유허비 보존도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문중대표를 파견하여 탄소(歎訴)를 한 결과 대통령특명으로 원상 복구 되었다. 그래서 근근(僅僅)이 비(碑)는 보전되어 오늘에 이르렀던 것이다.
1960년에 이르러 경주시 도시계획에 따라 로터리가 축조되면서 비는 로터리 가운데 있다가 로터리가 철거되면서 도로변에 옮겨져 보존되어 왔다. 2009년에 팔우정공원이 조성되면서 비를 이곳으로 옮기고 같은 장소에 팔우정유허비를 세우게 되었다. 이 비문은 후손 최경춘(崔慶春)이 글을 쓰고 최상은(崔相恩)이 수갈(竪竭)하였다.
3. 팔우정의 교육적 기능과 향음주례 및 제영(題詠)
1) 팔우정의 교육적 기능
팔우정은 육의당의 손자들이 학업을 닥은 학당의 기능을 하였다. 육의당의 손자는 장자 동로가 팔형제를 낳았고, 둘째아들 동언은 아들 외동을 낳았으며 셋째 아들 동신은 오형제를 낳아서 손자가 모두 열네 명이나 되었으니, 팔우정에는 장자의 아들 팔형제만이 아니라 당시는 그들 열네 종반(從班)이 때로 함께 할아버지가 지은 정자에서 천자문, 사자소학, 명심보감 등을 배우고 익히면서 학문의 기초를 다졌고, 특히 인간생활에서 필요한 사회적 규범을 바르게 정착시켜서 올바른 행지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의 장이었다고 사료된다.
그리고 팔우정을 개방하여 향유(鄕儒)들이 이 정자에 모여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가지며 제영(題詠)을 하였다고 하니, 오직 술만 마시면서 즐기며 놀았던 유흥장이 아니었다. 제시한 운(韻)에 따라 시를 짓고 또한 시창(詩唱)을 하였다는 전래(傳來)의 기록으로 보아 팔우정은 한낱 유희공간이 아니고 향약(鄕約)을 지키고 시민정서를 바르게 가꾸며 민풍 교화(民風敎化)의 기능을 하였던 곳이었다.
2) 향음주례의 유래 및 절차
향음주례는 고을의 유생들이 모여 향약을 읽고 술을 마시며 잔치하던 옛 풍습으로 향음, 향음례로 약칭되기도 한다. 향음주례에는 술과 음식을 분에 넘치지 않도록 알맞게 조절하는 검소함의 정신과 윗사람에 대한 존경심과 아랫사람과 합의하는 화합의 정신 및 손님을 친절하게 맞이하는 예의범절의 깊은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고 한다.
이 향음주례는 고대 중국 주나라 때 비롯된 것으로 향학(鄕學)에서 소정의 교육과정을 마치면 그 덕행(德行)과 도예(陶藝)를 모아 현자(賢者)를 선발하여 군주(君主)에게 추천할 때 출향에 앞서 그 향당(鄕黨)의 향대부(鄕大夫)가 주인이 되어 축연을 베풀었던 전송의 의례로서 예속교육의 한 방편이라고 하며 이것이 시초이다.
우리나라는 고려 인종(1136)에 시작되었다고 하며 조선에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기재하고 권장하였던 것이다. 의식의 주관은 각도의 주(州)·부(府)·군(郡)·현(縣)이 하였고 향교(鄕校)에서 행하였다. 그 절차는 매년 10월에 좋은 날을 택일하여 그 고을의 덕망 있는 인사를 주빈(主賓)으로 택해서 고을의 수령이 출향할 빈에게 통지한다. 당일 주인인 수령은 주빈과 열손님을 맞아 당(堂) 위에 올라 먼저 주인과 빈이 서로 배례(拜禮)를 한다. 그 다음 술자리를 베풀고 술잔을 돌린다. 다섯 차례의 술잔을 돌리고 나면 일동은 기립하여 사정(司正)이 북향하여 고계(告戒)한다. 고계를 마치면 모두 재배례를 하고 빈이 당을 내려서면 주인이 전송을 한다. 주인의 전송이 종료되면 향음주례가 끝나게 된다.
이렇게 행하여 왔던 향음주례가 온 고을의 유생들이 모여 향약(鄕約)을 읽고 술을 마시며 잔치하던 일로 널리 시행되었다. 향약은 조선시대에 권선징악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만든 일종의 지역사회 자치규약이다. 이 향약은 중국 송나라 때의 여시향약(呂氏鄕約)을 모방한 것으로 조선 중종 때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에서 주장하여 추진한 것으로 영·정조 때까지 전국 각지에서 실시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오고 있다.
향음주례의 절차는 손님을 초대해서 대접하고 전송하는 영빈례, 헌빈례, 악빈례, 여수례, 독률례, 빈출의 순차이다. 영빈례는 초대한 손님을 맞이하는 의식이고, 헌빈례는 주인이 초대한 손님에게 술을 대접하는 의식이다. 악빈례는 술을 대접하는 동안 악기를 연주하며 음악과 시를 들려주는 의식이고, 여수례는 여러 사람이 차레로 술잔을 올리는 의식이며, 독률례는 훈사와 향약을 읽는 의식이다. 빈출은 손님을 전송하는 의식이다.
향음주례의 절차를 자세히 살펴보면 영빈(迎賓), 헌빈(獻賓), 빈작주인(賓酌主人), 수빈(酬賓), 주인헌개(主人獻介), 개작주인(介酌主人), 주인헌중빈(主人獻衆賓), 일인거치(一人擧觶), 주인영준(主人迎僎), 주인헌준(主人獻僎), 준작주인(僎酌主人), 악빈(樂賓), 사정거치(司正擧觶), 여수(旅酬), 사정여수(司正旅酬), 이인거치(二人擧觶), 독률(讀律), 철조(徹俎), 승좌(升坐), 빈출(賓出), 예필(禮畢) 등과 같이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3) 팔우정의 향음주례
팔우정에서는 1614년 정자 건립 당시부터 향음주례를 행하였다. 1811년 정자를 중수하고 향음주례를 폈는데, 당시 생원 최남복(崔南復)이 찬한 서문, 향음주례집사기( 鄕飮酒禮執事記)는 다음과 같다.
팔우정향음주례 序
신미 윤삼월 십일일 팔우정비를 세우고 따라 향음주례를 폄
늦은 봄 증자는 기수에 즐기고 왕희지의 난정 모임은 봉이 나르는듯한 기상이라. 비록 현인들의 모임이나 오히려 뜻이 크고 활기 있는 자태로 회포를 달이고 세속을 벗어난 느낌이나 방랑의 뜻을 면치 못하고 혹 몇 사람의 군자가 예로서 겸약 하고 공경하는 행의로 증자의 유처럼 무(巫雩)에 소풍과 시와 술로 유상곡수에 음양과 현소는 관동들의 나아갈 바나 군현들의 관감이 빛난 문채를 이루고 마음으로 도를 즐김이다.
동방예의지국의 바른 맥으로 강우(江右)의 청담으로 패속을 바로잡음을 바라서 다하지 못함이 애석할까 성상 십일년 윤삼월 초에 사내에 거주하는 일가들이 팔우정의 끼친 터에 비석을 세우고 증자와 왕희지의 옛일을 닮은 늦은 봄놀이를 열었기에 내 여러 회중에 일러 외면한 모임은 군자가 할 바 아니다.
선조님들의 아름다움을 천양함은 진실로 하은주(夏殷周) 삼대의 예법을 인용하여 증거 함과 같지 않으며 하물며 선인들이 구축한 단에 엄연한 계급이 있고 심은 나무의 그늘이 가히 좋으니 이곳에서 예를 익히면 어찌 크게 어진 조상의 빛이 되지 않겠는가하니 모든 종인들이 승낙함으로서 이달 열하루날 팔우정에서 향음주례를 베풀었다.
이때에 위원(韋園)의 화수가 빛이고 사가(謝家)의 못 풀이 바야흐로 싹이 났다. 술병과 술잔은 용산서원에서 가져오고 제 집사를 모두 일문(一門)내에서 뽑으니 오르고 내림에 질서가 있고, 예절에 어긋남이 없으니 사방에서 모인 참관자들은 모두 말하기를 최씨들은 예(禮)로 흥(興)한다 하였다.
사정(司正)이 행사의 뜻과 질서에 관한 훈계를 한 뒤 남복(南復)은 두 기둥 사이에 남을 향해 서서 참석자들에게 말하기를 오래된 고목은 가문의 오랜 명성을 알 것이며, 감당(甘棠)나무는 선정에 대한 공경을 알 것이다.
우리 최씨는 사량부의 거족이며 세세로 시례를 이어 왕우(王祐)의 괴화나무와 같이 덕을 심고 가지가 열을 지어 잘 보호함은 실로 하늘이 내린 효도라. 오늘의 이 행사가 성대하지 않으면 어찌 나라에 충성하며 효도하고 제가(齊家) 신우(信友)를 하겠는가 하고 훈계의 말을 마쳤다. 다만 우리 종중에서 근년에 학문을 싫어하고 놀기를 좋아하니 진실로 이 마음을 고치지 않으면 말 잘하는 앵무새나 성성(猩猩)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비록 매일같이 시를 읊고 예를 행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무릇 모든 노소 종인들은 돌아가서 각자가 힘쓰라고 참석자들에게 훈계하니 모두 엄숙한 얼굴로 들었다.
한 첩자(帖子)를 만들어 모인 사람들의 성명과 연령과 본관을 열기하고 그 사실을 기술하여 서문을 부쳐 후일에 참고하고자 낭산서당학사루(狼山書堂學士樓)에 간직하니 그 첩자의 이름은 팔우정모춘향음주례다. 이날 족손인 생원 남복에 찬하다
鄕飮酒禮執事記
賓 | 生員 | 李憲錫 | 洪甫, 庚午 | |
賓 | 贊人 | 崔世秉 | 周彦, 己亥 | |
介 | 幼學 | 崔思儼 | 敬若, 癸酉 | |
介 | 贊人 | 李鼎學 | 溫卿, 壬寅 | |
僎 | 進士 | 李鼎益 | 仲謙, 癸酉 | |
僎 | 贊人 | 崔思浩 | 養吾, 丙申 | |
主人 | 生員 | 崔南復 | 景至, 己卯 | |
一賓長 |
| 崔柱範 | 翰如, 己巳 | |
守俎 |
| 崔世璞 | 敬琢, 戊申 | |
二賓長 |
| 崔濟樞 | 宿如, 癸酉 | |
守俎 |
| 崔世樞 | 機仲, 癸丑 | |
三賓長 |
| 任尙澤 | 仲若, 丁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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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世文 | 穉學, 乙卯 | |
進俎 |
| 崔世傑 | 文仲, 甲辰 | |
贊禮 |
| 崔思擎 | 景八, 丁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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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思彦 | 而彦, 乙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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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思衡 | 穉良, 癸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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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世銓 | 衡叔, 庚戌 | |
相者 |
| 李鼎說 | 梅卿, 己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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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珩祥 | , 乙卯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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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濟宏 | 景執, 己亥 | |
擧觶一人 |
| 崔柱普 | 天一, 戊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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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任 楷 | 元禮, 乙巳 | |
二人 |
| 崔世權 | 衡國, 己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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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世贊 | 襄伯, 丁未 | |
三人 |
| 崔世勳 | 勳甫, 辛丑 | |
樂正 |
| 崔思愼 | 五兼, 乙酉 | |
誦詩 |
| 崔世翰 | 士文, 庚戌 | |
司正 |
| 崔世枰 | 平仲, 庚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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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世奎 | 匡瑞, 乙卯 | |
司尊 |
| 鄭國休 | 同甫, 壬子 | |
撤俎 |
| 崔世興 | 讓之, 壬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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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世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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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世稹 | 君實, 乙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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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南鯉陽 | 震應, 乙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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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南有麟 | 祥彦, 乙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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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範祥 | 錫之, 丙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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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南有龜 | 壽彦, 庚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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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鼎樂 | 理兼, 戊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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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世尹 | 敬弼, 辛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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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鼎遠 | 通庸, 壬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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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南麟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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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賓 |
| 南景樞 | 伸瞻, 癸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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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柱玉 | 而岡, 癸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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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柱瓅 | 大元, 甲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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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任萬濟 | 持國, 丙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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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柱峻 | 乃極, 丁卯 | |
特平 |
| 南景羲 | 仲殷, 戊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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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鄭夏溝 | 有遂, 庚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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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柱鐸 | 幼甫, 癸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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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德健 | 聖極, 癸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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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鄭夏涉 | 汝楫, 辛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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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思伋 | 敬述, 丙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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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思集 | 聖振, 丁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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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鄭夏胤 | 有楫, 辛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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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思晉 | 退兼, 庚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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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思黙 | 夢弼, 辛巳 | |
正言 |
| 崔 璧 | 仲溫, 壬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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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鼎陽 | 應五, 壬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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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思駿 | 聲仲, 壬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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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任尙啓 | 仲活, 甲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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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思稷 | 文甫, 甲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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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思魯 | 愚兼, 乙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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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思九 | 聖有, 甲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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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柱炳 | 文叔, 癸未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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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柱建 | 君極, 甲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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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思道 | 聖貫, 乙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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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思立 | 興道, 丙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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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思燮 | 和兼, 丙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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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文翼 | 景叟, 丁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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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思遠 | 述初, 戊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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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鄭志道 | 五元, 戊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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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思明 | 德兼, 己丑 | |
進士 |
| 任 楘 | 質甫, 己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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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思喆 | 朋吉, 己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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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任 綎 | 心甫, 己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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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思迪 | 聖吉, 辛卯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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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權重鼎 | 安之, 壬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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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任 郁 | 郁如, 甲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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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奎爀 | 仲文, 戊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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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張錫樞 | 癸丑 |
이상의 향음주례집사기를 살펴보면 향음주례를 거행하는 데 모두 81명이라는 많은 사람이 업무를 맡은 것으로 보아 당일 참석한 인사들은 무수히 많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집사를 맡은 사람들은 정언, 생원, 진사를 비롯한 지역 저명인사들이었음을 볼 때 팔우정향음주례는 그 규모와 격이 크고 높은 행사로서 사회적 지지를 받은 주요 예속(禮俗)이었다고 짐작해 볼 수 있다.
4) 팔우정의 제영
『팔우정제영록(八友亭題詠錄)』에 나타난 제영에 관한 것을 살펴보면, 제영에 참가한 향유들은 모두가 저명인사 들이다.
최초의 향음주례에서의 제영의 운자(韻字)는 ‘지(枝)’, ‘기(奇)’, ‘지(之)’였다. 이 운자에 따라 읊은 시와 1811년 정자를 중수하고 낙성향음주례에서 유현들이 ‘신(新)’, ‘빈(彬’), ‘친(親)’, ‘춘(春)’, ‘인(人)’자(字)에 따라 지은 시를 합하여 『팔우정제영록(八友亭題詠錄)』이란 한 권의 책자가 편찬(編纂)되었다. 이 책자의 서(序)는 여강인(驪江人) 이헌락(李憲洛)이 찬(撰)하였다.
그 후 1899년 2월에 다시 정자중수 낙성 고유를 할 때 향유 제현(諸賢)이 지은 팔우정중수서(八友亭重修序)와 운자 ‘정(亭)’, ‘청(靑)’, ‘정(庭)’, ‘명(銘)’, ‘영(寧)’자(字)에 맞춰 지은 시 및 전래의 시(詩) 등 모두 140여 수(首)를 합하여 『팔우정제영록(八友亭題詠錄)』이 편찬되었다. 이 책자에 수록된 승지(承旨) 오천(烏川) 정간(鄭幹)과 참봉 서산 류의건(柳宜健), 진사 월성 손성악, 학성 이규현 등의 제영(題詠)한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八友亭韻(팔우정운)
승지(承旨) 오천(烏川) 정간(鄭幹)
老樹輪囷生八枝 노수윤균생팔지 늙은 나무 높이 얽혀 여덟 가지 뻗었으니
枝枝生葉葉新奇 지지생엽엽신기 가지가지 잎이 피어 잎이 싱그럽다
莫從枝葉閒分別 막종지엽한분별 가지와 잎 사이가 분별없으니
大抵其根一貫之 대저기근일관지 대저 그 뿌리는 하나로 통한다.
이 시에서 ‘늙은 나무’는 육의당을 뜻하고, ‘여덟 가지’는 그의 여덟 손자를 말하는 것 같다. ‘가지가지 잎이 피어 싱그럽다.’는 것은 여덟 손자가 모두 충실히 자라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가지와 잎 사이에 분별이 없다.’는 것은 우애의 돈독함을 상징하고 뿌리가 하나로 통한 것은 동일한 할아버지의 자손임을 말해 주고 있다.
한 할아버지의 손자임을 명심하고 우애 있는 형제로서 잎이 무성하듯이 충실하게 자라라는 염원이 담긴 시라 하겠다.
참봉(叅奉) 서산(瑞山) 류의건(柳宜健)
誰識高陽一樹枝 수식고양일수지 그 누가 알았으랴 고양나무 한 포기
一枝生八事尤奇 일지생팔사우기 한 포기 여덟 가지 더욱 신비하다.
春來滿業爭敷暢 춘래만업쟁부창 봄이 오면 많은 잎 다투어 활기 펴니
自是靈根鬼護之 자시영근귀호지 신령한 뿌리는 신의 보호 있으려니.
이 시는 훌륭한 한 할아버지 밑에 자라난 충실한 여덟 손자들이 때가 오면 서로가 이름을 날릴 수 있도록 육의당의 건재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고 보아진다.
‘고양나무 한 포기’와 ‘신비한 뿌리’는 훌륭한 육의당을 싱징하고, ‘여덟 가지’는 그의 손자 팔형제를 의미하고 있다.
. 류의건(柳宜健, 1687-1760)
자는 순겸(順兼)이고 호는 화계(花溪)이며 본관은 서산(瑞山)이다. 경주 신계리에 태어났고 십여 세에 경사에 통달하였고, 성력(星曆)과 잡가(雜家)의 글은 물론 역학에 깊은 연구를 하였다. 영조 6년(1730)에 하계서당을 개설하였다가 문도가 많아져 집을 확장하여 편액을 문회암이라 했다. 공은 영조 11년(1735)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출사할 뜻이 없었다. 사후인 영조 41년(1765년)에 일천으로 만녕전 참봉에 제수 되었으나 관찰사 정존겸은 공의 죽음을 알리고 포증(褒贈)을 청하니, 나라에서는 이미 제수한 참봉직을 행직에 의하게 하였다.
공은 『화계집』 5책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화계서당은 정조 16년(1792)에 화천상현사(花川象賢祠)라 이름하고 향사한 것이 화산사이다. 고종 6년(1869)에 방금으로 훼철되었던 것을 1949년에 수리하여 경주 사림에 의해 복원되었다. 그후 1963년 화곡저수지가 조성되어 화계고택과 서당 등 모든 건물과 천석은 수몰되었다. 서당은 저수지 동쪽 강당산 기슭으로 이건하여 화계정사(花溪精舍)라 하였으나 원래의 모습은 거의 잃었다.
. 참고문헌 : 경주유교문화유적(2010). 대구 : 대보사. pp. 398-399
■ 鄕飮酒禮時題詠(향음주례시제영, 1811년)
진사(進士) 월성(月城) 손성악(孫星岳)
八友亭名石面新 팔우정명석면신 팔우정 이름 비면에 새롭고
古城飮酒又彬彬 고성음주우빈빈 옛 성의 향음주가 또 문채난다.
遺墟宛在千年國 유허완재천년국 끼친 터는 완연히 천년 국에 있는데
某樹猶傳五世親 모수유전오세친 왠 나무가 오히려 5대친을 전한다.
始識靈根培厚地 시식영근배후지 알내라 영한 뿌리 살찐 땅에 심어짐을
旋看密看蔭長春 선간밀간음장춘 돌아보니 많은 잎 봄을 그늘 했다.
東都自此風聲樹 동도자차풍성수 이로부터 동도에서 명성을 세우니
勿拜周詩戒後人 물배주시계후인 주소백의 감당처럼 뽑지 마라 경계한다.
이 시는 팔우정이란 비석을 보니 육의당의 나무심고 향음주례를 열었던 의미가 어언 5대를 전하면서 자손이 번창 하여 일향에 명성이 자자하다고 나타내었다. 그 전래의 정신을 중단 없이 계승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 손성악(孫星岳)
자는 숙옥(肅玉), 손계돈의 후손으로 1801년(辛酉)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재주가 많고 행실이 뛰어났다. 성리서(性理書)에 깊이 침잠하여 외부와 단절하고 끊임없이 수련하였다. 『설파유고(雪坡遺稿)』가 있다.
. 참고문헌 : 國譯 金鰲勝覽(2010). 경주 : 세종인쇄・출판사. p.415
■ 八友亭重修韻(팔우정중수운, 1899)
학성(鶴城) 이규현(李奎現)
政家以友友名亭 정가이우우명정 우애로서 치가(治家)하고 정자이름 우애니
倫氣扶春葉葉靑 윤기부춘엽엽청 윤리의 기가 봄을 도와 잎잎이 푸르다
百子孫今謹護地 백자손금근호지 많은 자손 지금 왔어 삼가 보호하고
八兄弟昔共越庭 팔형제석공월정 여덟 형제 옛날 함께 시례(詩禮)를 배웠다.
盛繁門戶知何代 성번문호지하대 번영하는 문호는 몇 대 이던가
掃却莓笞見古銘 소각매태견고명 돌이끼 씻고 닦아 옛 비석이 보인다.
半月城南汶水北 반월성남문수북 반월성 남쪽 문천의 북쪽
行人說古指丁寧 행인설고지정영 길손들 손질하며 옛이야기 한다.
이 시에서 작자는 ‘정가이우(政家以友)’라 표현 것을 보면 육이당이 우애를 치가의 중요이념으로 삼았다고, 가정을 번성하게 하는 원력으로 보았다는 것이며, ‘기가 봄을 도와 잎마다 푸르다’ 함은 자손들이 예의바르게 잘 자라고 있음을 표현 것으로 보아진다. 여덟 형제들이 우애 있게 학업을 닦고 예절을 익힌 것이 누대를 번창 하게 하였다고 팔우정 앞을 지나는 길손들이 칭송한다고 대변하였다.
* 이규현(1855-1934)
자는 학여(學汝)이고 호는 소현(小現)이며 본관은 학성(學城)이다. 약관 때 경주부 남쪽 왕동(旺洞)에 가서 성암 최세학(崔世學) 문하에서 학문에 힘썼다. 성암은 그를 크게 칭찬하였으며, 이완집, 최주보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40세에 부곡천에 터를 잡고 정착하였다가 만년에 복안리로 이사하였다. 문인들이 지어준 ‘활천정(活川亭)’에서 장수(藏修)하였다. 만년에 더욱 증망이 두터워 유림이 모이면 항상 수반으로 추대되었다. 예학에 밝아서 상제 등 의변을 물 흐르듯 논리적으로 궁구(窮究)하였다. 공은 평생토록 남의 단점을 말하지 않았고, 아버지를 섬길 때는 한결같게 승순(承順)하였다. 부모상을 잇달아 당하였으나 모든 상제의 절차를 극진히 하며 5년 동안 다른 곳에는 출입하지 않고 오로지 성묘만 하였다.
. 참고문헌 : 경주유교문화유적(2010). 대구 : 대보사. pp. 404-405
4. 팔우정유허비
‘팔우정’비는 1960년에 이르러 경주시 도시계획에 따라 로터리가 축조되면서 비는 로터리 가운데로 옮겨 세웠다가 그 후 다시 도로확장 때문에 로터리가 철거되면서 도로변으로 옮겨져 보존되어 왔다.
2009년에 팔우정공원이 조성되면서 ‘팔우정’비를 현 위치로 옮기고 같은 장소에 팔우정유허비를 새로 만들어 나란히 세우게 되었다. 이 유허비는 후손 최상은(崔相恩)이 세우고 후손 최경춘(崔慶春)이 글을 썼다.
5. 경주의 정자(亭子)
정자는 정각(政閣) 혹은 사정(舍亭)이라고도 일컫는다. 정자는 효자나 퇴임관료 및 유현들이 대체로 산수가 좋은 곳에 아담하게 지어 어버이의 유덕을 기리고 혹은 조용히 서책을 읽으면서 여가를 보낼 목적으로 지은 집이다. 또한 현조의 유지를 받들어 자손들을 교육하는 곳이기도 한다. 정사(精舍)와 서당(書堂)도 정자와 유사한 교육적 기능을 하는 곳이다.
우리나라 정자는 신라 소지왕이 488년 정월에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처음 보인다. 천천정은 연못을 갖춘 정자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구전(口傳)이나 삼국사기의 다른 기록으로 볼 때 천천정 이전에 누정의 축조가 이뤄졌을 것으로 추측되나, 5세기 이전의 누정의 역사는 알기 어렵다. 누정은 이처럼 궁실을 위한 원림(園林)의 조성과 더불어 군신의 휴식처로 만들어지기 시작해 차츰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거나 강학(講學)하는 장소로 발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누정의 지역적 분포는 현재 문헌으로 전하는 자료 중에서 가장 최근인 1929년에 편찬된 『조선환여승람』에 따르면 경상도가 1,295개로 가장 많고, 전라도1,070개 충청도 219개, 강원도 174개, 제주도 6개 순이다.
경주 구향(舊鄕)의 각 지역에 소재하는 정자, 정사, 서당은 모두 174개소이나 현 경주시 행정구역내에는 148개소로 파악되고 있다. 『慶州儒敎文化遺蹟』과 『月城文化遺蹟誌』에 수록된 그 현황과 몇 개의 정자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NO | 구분 | 명 칭 | 소재지 | NO | 구분 | 명 칭 | 소재지 |
1 | 정자 | 감천정(甘泉亭) | 산내면 | 75 | 정자 | 연천정(淵泉亭) | 강동면 |
2 | // | 감화정(甘華亭) | 외동읍 | 76 | // | 영귀정(詠歸亭) | 강동면 |
3 | // | 강구정(康衢亭) | 안강읍 | 77 | // | 영모정(永慕亭) | 서 면 |
4 | // | 경모정(敬慕亭) | 다산리 | 78 | // | 영모정(永慕亭) | 안강읍 |
5 | // | 경모정(敬慕亭) | 단구리 | 79 | // | 영사정(永思亭) | 내남면 |
6 | // | 경모정(景慕亭) | 강동면 | 80 | // | 영오정(影烏亭) | 감포읍 |
7 | // | 경암정(敬庵亭) | 외동읍 | 81 | // | 영풍정(詠風亭) | 외동읍 |
8 | // | 경지정(敬止亭) | 강동면 | 82 | // | 오은정(鰲隱亭) | 남산동 |
9 | // | 계봉정(桂峯亭) | 강동면 | 83 | // | 옥서정(玉西亭) | 안강읍 |
10 | // | 계은정(溪隱亭) | 서 면 | 84 | // | 옥화정(玉華亭) | 건천읍 |
11 | // | 계 정(溪 亭) | 안강읍 | 85 | // | 요수정(樂水亭) | 손곡리 |
12 | // | 관가정(觀稼亭) | 강동면 | 86 | // | 용담정(龍潭亭) | 현곡면 |
13 | // | 관률정(寬栗亭) | 서 면 | 87 | // | 용림정(龍林亭) | 건천읍 |
14 | // | 관수정(觀水亭) | 안강읍 | 88 | // | 우암정(寓庵亭) | 내남면 |
15 | // | 구일정(九一亭) | 건천읍 | 89 | // | 우인정(友仁亭) | 현곡면 |
16 | // | 귀래정(歸來亭) | 강동면 | 90 | // | 원모정(遠慕亭) | 건천읍 |
17 | // | 근암정(近庵亭) | 강동면 | 91 | // | 월천정(月川亭) | 안강읍 |
18 | // | 금오정(琴塢亭) | 강동면 | 92 | // | 유곡정(柳谷亭) | 강동면 |
19 | // | 낙화정(樂花亭) | 산내면 | 93 | // | 유연정(悠然亭) | 강동면 |
20 | // | 남계정(南溪亭) | 외동읍 | 94 | // | 육우정(六友亭) | 양북면 |
21 | // | 내곡정(內谷亭) | 강동면 | 95 | // | 육의정(六韡亭) | 강동면 |
22 | // | 내 정(來 亭) | 외동읍 | 96 | // | 이우정(二友亭) | 양북면 |
23 | // | 농수정(農叟亭) | 양북면 | 97 | // | 이의정(二宜亭) | 안강읍 |
24 | // | 덕계정(德溪亭) | 남산동 | 98 | // | 이향정(二香亭) | 강동면 |
25 | // | 도봉정(道峯亭) | 서 면 | 99 | // | 일파정(一波亭) | 안강읍 |
26 | // | 도천정(桃川亭) | 건천읍 | 100 | // | 일호정(一湖亭) | 천북면 |
27 | // | 동강정(東岡亭) | 천북면 | 101 | // | 임천정(臨川亭) | 내남면 |
28 | // | 동계정(東溪亭) | 양북면 | 102 | // | 제극정(制克亭) | 건천읍 |
29 | // | 동은정(東隱亭) | 강동면 | 103 | // | 졸암정(拙庵亭) | 강동면 |
30 | // | 동은정(東隱亭) | 양북면 | 104 | // | 종오정(從吾亭) | 손곡동 |
31 | // | 동호정(東湖亭) | 강동면 | 105 | // | 죽오정(竹塢亭) | 안강읍 |
32 | // | 둔수정(遯叟亭) | 외동읍 | 106 | // | 천산정(天山亭) | 내남면 |
33 | // | 만귀정(萬歸亭) | 강동면 | 107 | // | 청암정(靑巖亭) | 천군동 |
34 | // | 만송정(晩松亭) | 손곡동 | 108 | // | 학림정(鶴林亭) | 외동읍 |
35 | // | 만취정(晩翠亭) | 건천읍 | 109 | // | 해강정(海岡亭) | 양북면 |
36 | // | 만향정(晩香亭) | 덕동리 | 110 | // | 호림정(虎林亭) | 황성동 |
37 | // | 매호정(梅湖亭) | 안강읍 | 111 | // | 화석정(花石亭) | 건천읍 |
38 | // | 모선정(慕先亭) | 양북면 | 112 | // | 화수정(花樹亭) | 남산동 |
39 | // | 모신정(慕愼亭) | 천북면 | 113 | // | 화음정(華蔭亭) | 양북면 |
40 | // | 모안정(慕安亭) | 강동면 | 114 | // | 활수정(活水亭) | 양북면 |
41 | // | 모암정(慕庵亭) | 내남면 | 115 | // | 회암정(晦巖亭) | 감포읍 |
42 | // | 모양정(慕楊亭) | 내남면 | 116 | // | 효은정(孝隱亭) | 양북면 |
43 | // | 몽암정(蒙庵亭) | 강동면 | 117 | 정사 | 광암정사(廣巖精舍) | 강동면 |
44 | // | 무구정(無求亭) | 안강읍 | 118 | // | 귀봉정사(龜峯精舍) | 안강읍 |
45 | // | 무금정(無禁亭) | 안강읍 | 119 | // | 남계정사(南溪精舍) | 현곡면 |
46 | // | 백원정(百源亭) | 안강읍 | 120 | // | 덕봉정사(德峯精舍) | 마동 |
47 | // | 벽송정(碧松亭) | 서 면 | 121 | // | 용강정사(龍岡精舍) | 건천읍 |
48 | // | 봉서정(鳳棲亭) | 외동읍 | 122 | // | 지연정사(止淵精舍) | 암곡동 |
59 | // | 사미정(思美亭) | 강동면 | 123 | // | 질암정사(質庵精舍) | 내남면 |
60 | // | 사우정(四友亭) | 건천읍 | 124 | // | 창은정사(蒼隱精舍) | 강동면 |
51 | // | 사일정(事一亭) | 양북면 | 125 | // | 추봉정사(秋峯精舍) | 덕동 |
52 | // | 삼괴정(三槐亭) | 강동면 | 126 | // | 호정정사(昊亭精舍) | 천북면 |
53 | // | 삼백정(三栢亭) | 외동읍 | 127 | // | 화계정사(花溪精舍) | 내남면 |
54 | // | 삼우정(三友亭) | 감포읍 | 128 | 서당 | 남강서당지 (南岡書堂址) | 내남면 |
55 | // | 삼우정(三友亭) | 안강읍 | 129 | // | 단계서당(丹溪書堂) | 강동면 |
56 | // | 상모정(尙慕亭) | 안강읍 | 130 | // | 덕산서당(德山書堂) | 건천읍 |
57 | // | 서림정(西林亭) | 안강읍 | 131 | // | 성산서당(聖山書堂) | 안강읍 |
58 | // | 서은정(西隱亭) | 산내면 | 132 | // | 심강서당(心岡書堂) | 외동읍 |
59 | // | 석문정(石門亭) | 건천읍 | 133 | // | 어련서당지 (魚淵書堂址) | 내남면 |
60 | // | 설천정(雪川亭) | 강동면 | 134 | // | 옥연서당(玉淵書堂) | 내남면 |
61 | // | 세효정(世孝亭) | 천북면 | 135 | // | 월산서당(月山書堂) | 내남면 |
62 | // | 소석정(素石亭) | 양남면 | 136 | // | 이남서당(伊南書堂) | 외동읍 |
63 | // | 송계정(松溪亭) | 양북면 | 137 | // | 하곡서당(霞谷書堂) | 안강읍 |
64 | // | 수봉정(秀峯亭) | 외동읍 | 138 | // | 화강서당(花岡書堂) | 건천읍 |
65 | // | 수산정(壽山亭) | 내남면 | 139 | 학당 | 강학당(講學堂) | 강동면 |
66 | // | 수운정(水雲亭) | 강동면 | 140 | 서사 | 남애서사(南厓書社) | 건천읍 |
67 | // | 수재정(水哉亭) | 안강읍 | 141 | // | 야은서사(野隱書社) | 서 면 |
68 | // | 심수정(心水亭) | 강동면 | 142 | // | 하곡서당(霞谷書堂) | 안강읍 |
69 | // | 안락정(安樂亭) | 강동면 | 143 | // | 봉암정지(鳳巖亭址) | 내남면 |
70 | // | 야은정(野隱亭) | 양북면 | 144 | // | 쌍옥당(雙玉堂) | 내남면 |
71 | // | 양호정(養浩亭) | 외동읍 | 145 | // | 우애당(友愛堂) | 강동면 |
72 | // | 어련정(魚淵亭) | 내남면 | 146 | // | 이견대(利見臺) | 양북면 |
73 | // | 어은정(漁隱亭) | 강동면 | 147 | // | 의모당(宜慕堂) | 천북면 |
74 | // | 어은정(漁隱亭) | 안강읍 | 148 | // | 이요당(二樂堂) | 남산동 |
■ 어련정(魚淵亭)
어련정은 경주시 내남면 화곡리 어련(魚淵)마을에 소재하는 정자이다. 이 정자는 조선 명종 16년(1561)에 효행으로 효자 정려(旌閭)를 받은 삼효자공 선무원종공신2등 가선대부 금군별장(禁軍別將) 김응벽(金應璧), 통례원 좌통례(左通禮) 김응규(金應奎), 통례원 인의(引儀) 응정(金應井) 삼형제가 어버이 훈도공(訓導公) 김신종(金愼宗)의 상을 당하여 삼년간 시묘하고 복결(服闋) 후 1565년경에 지은 우모(寓慕)의 정자(亭子)이다.
⟦魚淵亭 全景⟧
공의 조부는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도사를 역임하고 이시애란에 창의 유공하여 가선대부행밀양도호부사(嘉善大夫행密陽都護府使)를 제수 받았으며, 사후에 자헌대부병조판서(資憲大夫兵曹判書)를 증직 받고 요광원 사방 십리를 사패(賜牌) 받은 충암공 김귀일(金貴一)이다.
최초의 어련정은 세구연심에 병선(兵燹)을 입어 전소되었고, 1918년에 중건 하였으며 이때의 기문은 이중업이 찬하였다. 그 후 1974년에 터와 규모를 확장하여 다시 중건(重建)하였다. 이때의 중건기는 류석우가 찬하였다. 2011년에 번와(翻瓦)하고 대폭 수즙(修葺)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술년(壬戌,1921) 3월 15일에 삼효자공의 효행을 기리고자 어련정계(魚淵亭稧)가 창계(創稧) 되었고, 창계회원은 130명으로 각 문중대표와 향유들이 참여 하였으며 그 후 회원이 증가하여 모두 330명이 입계되어 거대한 모임이 되었다. 그 후 매년 3월 15일에 어련정에서 계회를 열어 향음주례(鄕飮酒禮)와 시작(詩作), 시창(詩唱)을 하면서 의미 깊은 모임을 가졌다. 오늘날은 후손들이 이 정자에서 조상을 추원 숭모하는 향화(香火)를 받들고 모임과 교육의 공간으로 이용해 오고 있다.
1922년에 간행한 『어련정계안서(魚淵亭稧案序)』가 전해오고 있으며, 이 책자의 서(序)는 오천인 정석하(鄭錫夏)가 찬(撰)하였고, 지암(止巖) 김봉주(金奉周)가 후지(後識)를 찬하였다. 지암 김봉주는 향민의 자손들에게 삼효자공의 효행을 전수하고문해교육을 동해 당시 일제의 황국신민교육으로 사라져가는 충효교육을 강화하고자 어련서당(魚淵書堂)을 창시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의 제자 한진준, 최현천, 김철주 등이 학계를 조직하여 은사 지암을 숭모하였으며 상석을 헌증(獻贈)하였다.
■ 매호정(梅湖亭)
매호정은 경주시 안강읍 대동리 1번지에 소재하는 정자이다. 사헌부 지평을 역임한 매호 손덕승(孫德升, 1659-1725)이 귀향하여 대동리에 매호초당을 지어서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며 후진을 교육하여 증가선대부호조참판(贈嘉善大夫戶曹參判) 최치덕(崔致德, 1699-1770) 을 비롯한 출중한 제자를 많이 양성하였다.
공은 25세 때 숙종 10년(1684)에 향시에 합격하고, 그해 9월에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여 전시 병과에 급제하였다. 별과에 두 번이나 장원급제한 수제이며, 승문원정자로 출사하여 의금부도사, 예조좌랑, 병조좌랑, 사헌부지평, 고산도 찰방에 겸하여 본도의 어사가 되었다가 1706년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 후 성균관 직강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매호초당은 화재로 소실(燒失)되었고, 1944년에 중건되어 ‘매호정(梅湖亭)’이라 현액(懸額)하였다. 2004년에 국고 보조로 크게 수즙(修葺)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梅湖亭 全景⟧ ⟦鳳捿亭 全景⟧
■ 봉서정(鳳棲亭)
봉서정은 경주시 외동읍 입실리 181번지에 소재하는 정자이다. 이 정자는 문충공 권근의 8세손이며 강정공의 권철의 증손인 잠재(潛齋) 권영(權嶸, 1592-1664)이 세란(世亂)을 겪은 후 경기도 강화에서 경주 입곡으로 이사하여 집 곁에 잠재서당을 지어 학동을 모아 교육하였던 건물에서 비롯되었다.
공은 본래 문장과 덕행이 탁월하여 증망의 인사였다. 인조의 소명을 받았으나 출사하지 않고 초야에서 유유자적하며 오직 후진 교육으로 여생을 보냈다. 통정대부에 증직되었다. 후손들이 공을 추모하기 위해 잠계서당이 있었던 구지(舊址)에 정자를 지어 봉서산 아래 복거(卜居)했다하여 봉서정(鳳捿亭)이라 불렀다.
■ 송계정(松溪亭)
송계정은 둔재(遯齋) 김몽량(金夢良, 1571-1596)을 추모하기 위해 1957년에 긍구하고 2007년에 다시 보수한 정자이다.
공의 자는 성필(聖弼)이고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임란공신 김석견의 차자로 태어났다. 임란을 당하여 어버지와 삼형제 및 집안의 종 10여명과 창의하여, 문천회맹, 구강회맹에 참여하고 서명하였다. 선조 29년(1596) 6월 황희안 김윤복 등 의병장이 열박재를 수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들을 도우라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삼형제가 내남 노곡 곽천으로 달려갔다.
공은 군량미를 수합하여 운송하던 도중에 언양에서 북상하는 수 백 명의 왜적들에게 포위되어 장렬히 순절하였다. 그 후 공은 돈령부 도정에 증직되었다. 1957년에 후손들이 공의 보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송계정을 지었다. 이 정자의 소재지는 경주시 양북면 송전리 116번지이다.
⟦松溪亭 全景⟧
이상 4개소의 정자들은 경주의 정자 중에서 그 일부에 지나지 않으나 창건자와 후손들이 추원 숭모의 지극한 위선지심으로 지어서 조상의 음덕을 기리고 자손과 후진을 교육하면서 지역의 문화센터로서의 기능을 하였고, 또한 향민들이 모여 올바른 도덕적 실천을 위한 행의를 숙의하면서 친교의 장으로 선린우회의 도장이 되었던 곳이다.
오늘날도 친족들이 모여 퇴락해가는 정자를 깨끗하게 정비하여 조상의 명복을 비는 향화를 받들고 화합과 친목 및 교육의 공간으로 활용하는가 하면, 혹은 휴가철에 고향을 찾아 정자에 숙박하면서 자녀들에게 조상의 유덕과 유업을 깨우쳐 주고 있어서 정자는 평생교육을 위한 사립교육시설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이 발견된다. 그래서 정자에 대한 시민의식이 새롭게 제고 될 수 있도록 지방자치단체의 비중 있는 관심이 필요 되고 있다.
5. 팔우정의 확장 복원과 도심경제 활성화 관계 제언
팔우정은 1614년에 창건되고 1811년과 1899년에 중건되어 현감 최계종공의 설립목적을 구현(俱現)하여 왔으나, 한말(韓末) 수욕(羞辱)의 국치(國恥) 하에 안타깝게도 정자는 도괴되고 단은 폐허되고 말았다.
근년에 팔우정 유허지에 일개 유허비를 세워 조상이 남겨준 정자건립의 뜻을 되새기고 있으나, 그 유래를 알고 있는 일부 시민들은 무척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경주시 일원에 세워진 많은 정자들은 조상의 덕업을 기리고자 건립되었기에 모두가 교훈적 의미를 가졌으나 대부분 시의 외각지대에 산재하고 있어서 접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팔우정 옛터는 오늘날 소공원으로 조성되어 도심의 교통 요지에 위치하고 있어서 접근하기가 용이하다. 그래서 시재원(市財源)을 과감하게 투입해서 경주의 대표정자(代表亭子)로 복원하고 서원 규모로 확장하여 환경을 매력 있게 다듬어 도심의 시민공원으로 개방해 주었으면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현감 육의당 최계종(崔繼宗)의 의미 깊은 팔우정 건립목적을 구현(俱現)하는 것이라고 보며, 또한 복원된 팔우정은 경주최씨배반문중에 한정된 건물이 아니라, 학생과 유림 및 시민들의 교육적 공간으로 활용되고 또한 경주역 광장의 의자에 기대어 여생을 외롭게 보내는 한로(寒老)들에게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친교(親交)의 공용향정(共用鄕亭)으로 ‘팔우정공원(八友亭公園)’이 되었으면 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옛 향약(鄕約)과 새로운 경주시향약(慶州市鄕約)을 창안하여 암송하고 경주시민헌장의 제창(齊唱) 및 시작(詩作) 시창(詩唱)을 하는 경주시 주관의 향음주례(鄕飮酒禮)가 재현(再現) 되었으면 한다. 그렇게 한다면 아마도 우리 경주시가 신라 천년의 자랑만이 아니라 이 시대의 우뚝한 예향(禮鄕)의 왕도(王都)로 거듭날 수 있다고 보며, 팔우정은 또한 수많은 관광객이 경주를 찾는 새로운 유인명소(誘引名所)가 되어 주변의 팔우정해장국 식당을 비롯한 여러 상가에 소득을 증대시킬 수 있어서 도심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6. 맺는 말
팔우정(八友亭)에 관하여 그 유래와 설립목적과 현황 및 복원의 필요성을 위와 같이 고찰한 것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팔우정은 현감(縣監) 최계종(崔繼宗)공이 관직을 사직하고 귀한(歸閈)하여 지은 정자이다.
둘째 팔우정은 현감 최계종공이 손자들의 교육을 위해 설립한 정자로서 조상(祖上)의 애손(愛孫)의 정신과 손 자들의 우애(友愛)의 온정(溫情)이 깃든 정자이다.
셋째, 팔우정은 현감 최계종공이 사회지도급 지식인인 향유(鄕儒)들로 하여금 향약(鄕約)을 읽고 명념(銘念)하여 권선징악(勸善懲惡)과 상부상조의 올바른 도덕적 생활을 실천할 수 있도록 민풍교화의 공간으로 개방된 일종의 사회교육의 센터이다.
넷째, 팔우정은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하면서 향유(鄕儒)와 소객(騷客)들이 술을 마시면서 음주(飮酒)의 예법(禮法)을 익히고 선린우호(善隣友好)의 정신을 함양(涵養)하며 제시한 운(韻)에 따라 시작(詩作)을 하였던 교육의 장(場)이다.
다섯째, 팔우정을 확장 복원하는 것은 도시 공동화를 극복하여 침체된 도심의 경기를 활성화 할 수 있는 방안이라 하겠다.
이상과 같이 팔우정은 할아버지의 자손에 대한 지극한 애손(愛孫)의 정신이 담겨있는 교육의 공간이며, 향민들로 하여금 올바른 도덕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향약(鄕約)을 실천한 문화적 가치가 있는 도심의 시범공간이었다는 것과 그의 복원 확장은 도시 경제를 윤택하게 하는 데 중요한 정책적 과제라 하겠다.
* 參考資料提供: 崔太植(六宜堂 14世, 경주시 행정공무원 정년퇴임),
崔長植(六宜堂 14世, 白沙公 冑孫, 必有齋宗門會長)
참고문헌
慶州崔氏培盤派門中(1994). 『八友亭題詠錄』. 大田 : 譜文編輯社
慶州崔氏大同譜重刊委員會(1997).『慶州崔氏大同司譜』. 대전 : 回想社
慶州崔氏培盤派門(2003). 『石壕精舍誌』. 慶州 : 圖書出版 源譜社
慶州崔氏司成公派譜中(1998).『慶州崔氏司成公派譜』. 서울 : 한국신문사
李相弼譯(2010).『國譯 金鰲勝覽』. 경주 : 세종인쇄・출판사.
李周德(2010). 『慶州儒敎文化遺蹟』. 大邱 : 大譜社.
貞武公崔震立先生紀念館 忠義堂(2013). 『정무공 최진립과 용산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