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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현숙한 여인을 얻겠느냐
말씀/잠언 30:1-31:31
요절/잠언 31:10, 찬송가/452장(내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잠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8장까지가 지혜를 소개하며 ‘와서 먹으라’ 지혜로의 초청이라고 할 수 있고, 9-29장까지가 지혜를 받아먹은 자의 신앙의 여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여정 속에서 겪을 문제들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지혜의 인도함을 잘 받아서 신앙의 여정을 잘 마칠 수 있는가를 말합니다. 오늘 나누고자 하는 30,31장은 잠언의 결론에 해당됩니다. 이 결론부분에서 잠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얻겠는가?” 이 현숙한 여인은 누구일까요? 이상적인 결혼상대일까요? 잠언의 스타일대로 이 표현이 비유라면 이 여인은 누구를 말할까요? 이 질문은 왜 우리에게 중요할까요?
1장, 나는 짐승이라(30:1-33)
1절.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그가 이디엘 곧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 이제까지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아굴의 잠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굴은 물론이고 야게, 이디엘, 우갈이 누구인지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이제까지는 왕이 자녀에게, 또 신앙의 대선배가 이제 막 시작하는 어린 사람에게 신앙의 길을 알려주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잠언은 구원의 여정을 다루는 일종의 복음서요, 순례길을 안내하는 가이드북이요, 영적인 네비게이션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2절을 읽겠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랑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모든 것을 다 이룬 승리자의 위치가 아니라, 자신에 대해 절망과 좌절 속에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더구나 원문에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이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누구와 비교해서 내가 너무 망가져있기 때문에 ‘나는 짐승’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자신을 보니 그렇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제까지 그렇게 지혜를 말하고 지혜의 능력을 말했는데 그리고 그 지혜의 인도함을 받으면 신앙의 문제들을 다 극복할 것으로 말했는데, 갑자기 꼬리를 팍 내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3절에서는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라고 합니다. 이제까지 그렇게 지혜를 말하고 심지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까지 했는데,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왜 이렇게 싹 달라졌을까요? 무슨 일이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배운 대로 지혜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신앙의 여정에서 부딪치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해 줍니다. 이런 지혜는 금보다 귀하고 진주보다 귀합니다. 그런데 정말 내가 지혜의 인도함을 잘 받아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의 지혜인 말씀을 잘 깨달아서, 순간순간 문제를 잘 극복하고, 마침내 영생에 이르는 그 길을 충분히 갈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어때요? 그럴 자신이 있습니까? 혹자는 자신은 40년이나 신앙생활 했지만, 자신이 없다고 합니다. 그럼 우리가 뭐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바울은 “무릇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가 조심하라.”(고전10:12)고 했습니다. 천하의 사도 바울도 넘어질 수 있기에 조심조심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짐승이라’는 이 고백은 지혜의 가르침 앞에 선 자의 탄식이요, 깊은 절망이요, 또 솔직한 고백입니다. 또 이런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4절에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손에 움켜쥐고 있을 사람이 누구인지? 물을 옷으로 싸고 있을 사람이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또 그의 이름은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은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누구도 하나님의 존재와 그 영광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고 하지만, 얼마나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점수를 매긴다면 백점 만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낙제만 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다 알 수가 없기에, 우리가 헤매는 것 아닙니까? 또 다 알 수 없으니까 겸손합니다. 또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더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존재 앞에서 우리는 나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과 이 짐승 같은 모습 때문에 탄식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길이 있습니다. 5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우리는 엉망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없습니다. 조심조심 한다고 하지만 언제 넘어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순전하여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은 의지하는 자의 방패이십니다. 문제는 이 말씀에 대한 자세입니다. 6절.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말씀에 더하기만 합니까? 더하기보다는 빼는 것이 더 많습니다. 저울을 속이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 수준으로 낮추고 싶은 것입니다. 말씀을 자기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말씀에 맞추고자 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좌절합니다. 나는 짐승이라는 고백이 안 나올 수 없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로다 하며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입니까? 아닙니다. 7절에 보면, 두 가지 일을 주님께 구하고 있습니다. 8,9절을 읽겠습니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너도나도 부자가 되는 것을 좋아하는 시대에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다면 그것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기도는 단지 적당히 먹고 살만하게만 해 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기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나도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고, 또 없으면 뭔 짓을 할지 모르는 악한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안 되어서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즉 나도 욕심이 있고, 나도 악한 놈인데, 너무 욕심을 채우다가 욕심에 빠지고, 너무 없어서 악한 짓을 할 수 있기에, 이런 자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오직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소원이 간절합니다. 그리고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다른 것을 내려놓고자 하는 분명한 마음의 중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욕심이 있고, 힘들면 뭔 일을 할지 모르는 악한 본성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이루고 싶은 일에 쉽게 빠지는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이런 저런 세상의 일에 빠지기보다 말씀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10절에 종을 그의 상전에게 비방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식당에 갔는데, 알바생이 물잔을 꽝 하고 내려놓습니다. 나는 기분이 나빠 식당 주인에게 이 사실을 말합니다. 그러면 식당 주인은 그 알바생을 자를 것입니다. 잘린 알바생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왠 꼰대 아저씨가 와서 ‘지랄’이야, 여기가 무슨 고급 호텔 레스토랑인줄 아나? 나에게 귀빈 대접을 요구해, 그리고 왜 주인에게 말해서 나를 잘리게 해 왜 왜 왜! 짤린 알바생이 나를 저주하면, 하나님이 나의 죄를 물으실 것이 두렵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자신의 영성을 지키는 것에 무엇보다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소일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는 이 영성을 해치는 일을 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사소한 손해를 보더라도 양보하고 참아서, 내 마음의 중심을 할 수 만 있으면 하나님께 받치고자 애쓰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까지 해야 할까요? 11절. 아비를 저주하고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부모공경은 인간관계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함부로 합니다. 망가진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12절.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도 자기의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노골적으로 부모를 저주하는 것과 같은 죄를 짓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남들보다 나은 행실로 자기를 스스로 깨끗하다고 여깁니다. 그러기에 더러운 것을 씻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자기 만족과 착각 속에 사는 자들입니다. 13절. “눈이 심히 높으며 눈꺼풀이 높이 들린 무리가 있느니라.” 이들은 눈을 치켜 뜨고 남을 깔보며 사는 아주 교만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14절. “앞니는 장검 같고 어금니는 군도 같아서 가난한 자를 땅에서 삼키며 궁핍한 자를 사람 중에서 삼키는 무리가 있느니라.” 날카로운 이로 다 씹어 먹는 멧돼지처럼 탐욕이 가득한 무리가 있습니다. 심지어 15절에,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다고 했습니다. 거머리의 양 끝에 난 입으로 사람의 몸에 붙어서 끝까지 피를 빨아대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온갖 부정과 부패와 탐욕이 가득합니다. 이런 세상의 모습은 아무리 물을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땅과 같고 아무리 태워도 끝나지 않는 불과 같습니다. 그만큼 탐욕이 가득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끝임 없이 일어납니다. 또 모순된 일도 가득합니다. 아굴은 세상을 진동키시며 견딜 수 없게 하는 일이 서넛이 있다고 했습니다(21). 종이 종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임금이 됩니다. 지도자로 전혀 준비가 안 된 자가 어쩌다가 지도자가 되면 혼란이 큽니다. 이런 모순된 세상에서 오히려 힘없는 곤충이나 짐승들이 더 지혜로워 보입니다. 개미는 힘이 없지만 먹을 것을 여름에 부지런히 준비합니다. 오소리는 독수리를 피해서 바위사이에 집을 짓고 살아갑니다. 메뚜기는 임금이 없지만 떼를 지어 다니므로 무시할 수 없는 대상이 됩니다. 또 이런 세상에서 잘 걸으면 위풍 있게 다니는 것도 있습니다. 짐승 중에 가장 강한 사자는 어떤 짐승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이렇게 힘없는 곤충이나 짐승은 그 지혜로 자기 살길을 찾아갑니다. 힘이 있는 짐승은 그 힘으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삽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러한 지혜가 없습니다. 힘도 없습니다. 심지어 모든 것을 다 알려주어서 이런 것들보다 더 지혜롭게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사자와 같이 당당하게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또 들어도 감당할 힘이 없기에 그렇지를 못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32절을 읽겠습니다. “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였거나 혹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 입을 막으라는 것은 자기를 자랑하거나 변명하지 말고, 자신에 대해서 반성해 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왜 그렇게 하나님이 지혜를 말씀해 주셨는데, 내가 왜 개미만 못하고 오소리만도 못하고, 사자만도 못하게 살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왜 짐승 같이 되었는지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젖을 저으면 엉긴 젖인 치즈가 되고, 코를 비틀면 코피가 나오듯이 자기가 한 일들이 원인이 되어서 반드시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반드시 심판을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짐승 같은 우리는 이것도 쉽지 않습니다. 저희 집에 세찌라는 강아지가 있습니다. 세찌가 잘못을 할 때가 있습니다. 세찌가 탐심이 많아, 아무것이나 먹고 아무데나 토할 때가 있습니다. 그럼 야단을 치지만 어떻습니까? 짐승이라 야단을 맞아도 다음에 똑같이 합니다. 그런데 우리도 그렇습니다. 내가 잘못을 했는데, 그래서 야단을 맞아도 다음에 똑같이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짐승이라 그렇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2장. 마땅하지 않은 일(31:1-9)
1절. “르무엘 왕이 말씀한 바 곧 그의 어머니가 그를 훈계한 잠언이라.” 르무엘 왕이 누군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솔로몬왕의 별칭으로 이해합니다. 중요한 점은 왕의 어머니가 왕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자들인 왕입니다.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부분을 30장과 연결해서 보면, 왕인 우리가 “나는 짐승이야!” 나는 어쩔 수 없어. 나는 망했어. 이렇게 좌절하고 절망만 하지 말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가를 격려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3절에, 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왕은 술과 여자에 빠져서 지내는 것이 당연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다 나라가 망하는 일이 역사에 종종 나타납니다. 그래서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고, 독주를 찾는 일이 주권자들에게 마땅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사실 왕이 포도주나 독주로 잔치를 벌이는 것이 심각한 죄는 아닙니다. 즐거운 일이 있으면 당연히 잔치를 해야 합니다. 또 잔치가 아니더라도 기분전환을 위해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5절을 읽겠습니다.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곤고한 자들의 송사를 굽게 할까 두려우니라.” 술을 마시다가 정작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더 심각한 문제의 이유가 있습니다. 7절. “그는 마시고 자기의 빈궁한 것을 잊어버리겠고 다시 자기의 고통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술에 취하면 자기를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술기운으로 평소에 못하던 말도 함부로 막하고, 큰소리를 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포도주는 세상이 주는 이런 저런 잔재미, 쾌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삶의 윤활유와 같습니다. 그런데 너무 여기에 빠지다보면,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짐승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순전한 말씀을 듣고자 했습니다. 모순과 부조리가 가득한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고자 긴장하며 애를 썼습니다. 너무 부자도 되지 말고, 너무 가난한 자도 되지 말아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붙잡고 사는 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포도주와 독주와 같은 세상 재미에 취해버리게 되면 자기 자신을 잊어버립니다. 또 자기가 해야 할 일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짐승 같은 자신을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짐승 같은 일을 해버립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아는 우리는 왕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왕답게 제사장답게 살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는 짐승의 모습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해서는 이런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왕같은 제사장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고통하는 자들을 돌보고 간구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나도 지키고 해야 할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3장,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겠느냐(10-31)
10절을 읽겠습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새번역은 “누가 유능한 아내를 맞겠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유능한 아내의 조건으로 생각합니다. 얼마나 유능한 아내일까요? 11절. 그런 자의 남편은 진심으로 그를 믿고 산업이 핍절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아내 덕에 가난을 모르고 산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보면 남편이 유능한지 무능한지 나오지 않습니다. 아내가 유능합니다. 아내가 유능해서 남편은 가난을 모르고 삽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도박과 같은 악을 행하지 아니합니다. 남편에게 행하는 선이 무엇이겠습니까? 남편이 아내에게 가장 바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인정입니다. 남편을 남편으로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즉 남편이 유능하든 무능하든, 아내 맘에 들든 안 들든, 남편을 잘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는데, 아내의 칭찬은 남편을 춤추게 합니다. 그런데 현숙한 아내는 선을 행해서 남편을 춤추게 합니다. 또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기를 즐거워합니다. 상인의 배와 같이 먼 곳에서 양식을 가져오고,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며 여종들에게 일을 정하여 맡깁니다. 또 밭을 살펴보고 밭도 사들입니다. 자기가 직접 번 돈으로 포도원도 사서 가꿉니다. 이를테면 부동산 투자도 잘하는 것입니다. 힘 있게 허리를 묶으며 자기의 억센 팔로 직접 일을 합니다. 자기의 장사가 잘 되는 줄을 깨닫고 밤에 등불을 끄지 않고 계속 일합니다. 손으로 솜뭉치를 들고 손가락으로 가락을 잡습니다. 이는 물레질을 해서 실을 타고 또 천을 짜는 것을 말합니다. 여자가 이렇게 하니 집안이 풍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계속 모으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20절. “그는 곤고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 어렵고 힘든 사람도 도울 줄도 압니다. 그러면서 자기 집 사람들도 잘 챙겨줍니다. 21절. “자기 집 사람들은 다 홍색 옷을 입었으므로 눈이 와도 그는 자기 집 사람들을 위하여 염려하지 아니하며.” 부지런하게 일한 아내 때문에 집 사람들은 당시 명품 옷인 다 홍색 옷을 입었습니다. 눈이 와도 무슨 일을 겪어도 걱정하는 일이 없습니다. 또 자기를 위하여 아름다운 이불을 지으며 세마포와 자색 옷을 지어 입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23절. “그의 남편은 그 땅의 장로들과 함께 성문에 앉으며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당시 성문은 일종의 동네 집회장입니다. 또 중요 일을 결정하는 장소였습니다. 아내가 모든 것을 다 맡아서 하니 남편은 나가서 이런 일을 하며 인정을 받습니다.
아내는 베로 옷을 지어 팔며 띠를 만들어 상인들에게 넘깁니다. 이렇게 해서 또 돈을 법니다. 이렇게 아내는 “능력과 존귀로 옷을 삼고 후일을 웃으며.”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자신감과 위엄이 몸에 배어 있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또한 입만 열면 지혜가 저절로 나오고 혀만 움직이면 상냥한 교훈이 쏟아져 나옵니다. 집안일을 두루 살펴보고 일하지 않고 얻은 양식은 먹는 법이 없습니다. 이런 아내에 대해서 “그의 자식들은 일어나 감사하며 그의 남편은 칭찬”한다고 합니다. 29절.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모든 여자보다 뛰어나다 하느니라.” 덕을 끼치는 여자들은 많이 있으나 당신이 모든 여자 가운데 으뜸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한 칭찬입니다. 그리고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또 “그의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로 말미암아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30,31)고 했습니다. 최고의 극찬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여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중에도 부지런하고 겸손하고, 신앙 있고, 또 남편을 잘 세워주는 현숙한 여인의 모습은 조금씩 다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로 완벽한 현숙한 여인이라고 하기에는 죄송하지만 부족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이 분들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위대한 여성을 다 합쳐도 부족합니다. 혹자는 심지어 이런 아내와 결혼하면 남편은 힘들고 답답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내가 이렇게 모든 것을 다 해버리면 남편은 무슨 재미로 인생을 사느냐?고 합니다. 또 다른 혹자는 자존심을 아내가 세워준다고 해도 힘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아는 분은 아내 분이 소화과 의사입니다. 즉 아내가 가정 경제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는 아내를 상전으로 모시고 삽니다. 아내가 출퇴근할 때, 자동차로 모셔도 드리고 모셔옵니다. 아내에게 큰 소리 치는 것, 그런 것 없습니다. 본문의 아내는 능력이 많아 부동산 투자도 잘하고, 돈도 잘 법니다. 그러나 남편의 기를 죽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편을 위로하고 인정해 주고 기를 팍팍 세워줍니다. 이런 여자가 어디 있을까요? 사실 이 정도의 아내, 이런 현숙한 여인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니 아내에게 이런 여인이 되라고 요구하지 마시고, 또 찾으려고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 왜 이 이야기를 했을까요? 그 전에 잠언 기자는 지혜의 요구 앞에서 도저히 이를 이룰 수 없는 자신을 짐승이라고 했습니다. 순전한 말씀을 듣기 원하지만 세상의 온갖 모순된 모습을 말하며 탄식하기도 했습니다. 마땅하지 않은 일을 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나온 말씀이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숙한 여인이 어떤 여인인가를 말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짐승과 같은 나 자신의 절망적인 모습, 온갖 모순되고 힘든 세상에서 내가 살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내게 주어진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결혼을 잘 해서 능력 있는 아내 덕을 보고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현숙한 여인, 이 대단한 여인은 바로 잠언에 계속 등장했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에 담긴 지혜야말로 능력의 원천이요, 내 삶을 가장 풍요롭게 나를 존중하며 나를 인도해주는 현숙한 아내입니다. 그런데 이 현숙한 아내인 지혜가 신약에 가서 누구로 등장합니까? 사도 요한은 이 지혜를 로고스,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라고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나를 구원하고 나를 제대로 하나님 앞에 살도록 하기 위해 내가 찾아야 할 현숙한 아내는 바로 말씀이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비슷한 패턴이 히브리서 11장, 12장에 있습니다. 11장에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믿음으로 승리한 믿음의 용사들을 쫙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이 믿음의 위대함에 도전을 받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나는 저 믿음의 선배들과 같이 살 수 있을까? 좌절을 합니다. 톱으로 켜는데도 믿음을 지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나에게 요구하면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과연 할 수 있을까? 불안감이 듭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의 믿음의 승리를 말한 후, 12장에 12:2절은 말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잠언의 결론은 우리에게 지혜를 찾고 또 지혜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과 같은 예수님을 찾아서 제대로 자신의 삶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것인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묻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고 예수를 찾는 사람이 제대로 자신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어렵고 힘든 자들을 돕는 그 일도 예수님을 구하고 찾는 사람이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현숙한 여인인 지혜의 말씀을 찾고, 예수를 찾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짐승과 같은 자신에 대한 절망에서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 나아가서 왕같은 제사장의 모습으로 제대로 사는 영적인 풍성함을 누리며 사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