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 불망(忘,不忘)
함석헌
씨알 여러분 새해가 됐습니다. 잊을 것을 잊어버리시고 잊지 않을 것을 아니 잊고 다듬어 들어 새해의 호랑이를 잡아탔습니까? 어두운 우리 마음에 언제나 잊어야 할 것은 못 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잘 잊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잊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잊는 것이 있어야 하고, 잊기 위해서는 반드시 잊지 않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잊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와 나의 시비이해(是非利害)입니다.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전체 역사의 뜻입니다.
여러분의 속알을 역사의 제단 불에 붙여 기도로 태워 올리십시오. 그 빛 속에 나가는 앞길이 내다뵐 것입니다. 나는 지난해처럼 애타는 기도를 드려본 일이 없습니다. 이 해는 더할 것입니다. 나는 일제 말년에 역사를 내다보며 이 고난이 언제 끝나나 하고 한숨쉬었습니다마는 이제 와보니 고난은 정말 바로 이제부터입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요새는 사는 보람을 느낍니다. 역사의 움직이는 것 참 묘합니다.
여러분 지난 일 년의 모든 떨어진 잎을 거두어 그것을 한 줄로 꿰십시오. 그리하여 그것을 우리 수난의 여왕의 목에 걸어드리십시오. 영광이 될 것입니다. 한 잎 한 잎 뜯어보면 찢어지고 병들고 좀 먹은 것이지만 믿음과 사랑과 희망의 삼겹으로 꼬이는 의미의 한 줄에 꿰이면 이것도 저것도 하나도 버려서는 아니되는 귀하고 아름다운 진주가 됩니다.
새해의 아침빛에 보십시오. 미운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새 살림의 영감 속에 보십시오. 못 쓸 물건 하나도 없습니다. 이 언덕에서 돌아보니 우렁찬 음악입니다.
씨알 여러분께 간곡히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씨알의 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나 개인으로는 페스탈로찌의 이른바 “채 익지 못하고 버러지 먹고 병들어 여름철에 빨개 떨어지는 과일의” 심정이었습니다. 알차게 자라지는 못했지만 이것으로나마 썩어 나를 낳고 길러준 그 뿌리로 돌아가 거름이 돼보잔 생각이었습니다. 그후 몇몇 뜻있는 친구들이 마음을 모아 도와주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카네기의 스스로 쓴 그의 묘비의 글귀를 자주 생각합니다. “자기보다 위대한 많은 사람들을 자기 주위에 모았던 카네기”라고 했다는. 확실히 지금 씨알의 소리를 놓고 모인 한 줌만한 동지들은 우리나라에서는 다시없는 어진 마음들이라고 나는 고맙게 생각합니다. 내 분에는 넘치는 양심들이요 학식입니다. 그 들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이 어려운 상황에서 견디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말씀드리기 전에 여러분이 이미 잘 아시는 줄 압니다마는 이 소리의 목적은 지식을 전해드리자는 것도 아니요, 소위 말하는 교양도 아닙니다. 여러분 속에 스스로 가지고 계시는 뜻 하나를 키워가자는 것뿐입니다. 장작은 마주 대어야 불길이 서고, 눈은 마주 보아야 사랑이 생기고, 뜻은 마주 잡아야 위로 솟습니다. 우리 뜻을 길러 이 역사의 흐름을 돌려가야 합니다. 여러분 자중해야 합니다.
조 이삭 없이 조 알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로 돼야 합니다. 맨 첨 시작할 때 나는 아무 자금도 생각 아니 하고 주머니 돈으로 시작했습니다. 내 주머니는 엘리야의 항아리 모양으로 크게 넘치는 것은 아니지만 늘 목숨이 계속될 만큼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씨알의 소리가 자립해야 합니다. 어떤 난관에서도 견디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단 하나의 길은 직접 독자가 느는 일입니다. 약한 식물일수록 씨가 많습니다. 하나의 책으로 사보시지만 말고 씨알 자신을 아끼시는 마음에 한걸음을 내켜 내 아들로 키우시는 어버이의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이 아기는 살아납니다. 외양간의 구유 속에 났지만 거기 역사의 운명이 들어 있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지난 가을에 독자 배가 운동을 말했는데도 반응이 적습니다. 아마 사정이 어떻게 다급한 것을 모르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잡지 값도 될수록은 올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씨알을 상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치솟는 물가에 이 이상 더 갈 수가 없어져서 부득이 새해부터 올리기로 했습니다. 깊이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꿈은 있지, 없지 않습니다. 하늘 닿는 꿈입니다. 그러나 그 꿈을 꾸는 동안 차디찬 길가 돌이라도 베개를 주십시오! 전에 냈던 구호가 남아 있는 것이 많습니다. 본래 장사가 목적이 아니니 이용하실 분은 많이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3천 권이나 있으니 주실 만한 데가 있으시면 청구하십시오, 보내드리겠습니다. “물 위에 씨를 뿌려라, 네가 오랜 후에 거두리라!”
또 하나 여러분께 말씀드릴 것은 천안, 온양 둘 사이에 있는 모산이라는 곳에 학교를 하나 경영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아시는 분들은 이미 아시지만 전에 천안에 씨알농장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6·25 전쟁 후 정만수 님이 자기 30년 동안 이발업해서 벌어 얻은 재산의 전부인 만평 땅을 내놔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는 공부한 것이 하나도 없으면서 가난해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가르쳐주잔 것이 그 일생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피난 중에 나와 부산서 서로 알게 된 후로 서로 뜻이 통하게 됐는데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오자 그 땅을 내놀 터이니 그것을 가지고 일을 시작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내 자격이 부족함을 알아서 여러 번 사양했지만 굳이 간청하기 때문에 못 견디어 1957년에 여섯 사람을 데리고 농장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첫째는 나의 잘못이요, 그다음 또 여러 가지 원인이 합해서 농장이 뜻같이 되지 않았고, 최근 올라가는 빚이 점점 늘어가서 그대로 가다가는 밑천도 놓치게 되었습니다. 그래 지난여름 그것을 팔기로 하여서 팔아 가지고 빚을 청산하고 그 남은 것으로 다시 새로운 어떤 경영을 하려 했는데 때마침 모산에 누가 17년 동안 경영해오던 고등공민학교를 경영난으로 팔아넘기겠다고 한다는 소문을 듣고 만나서 흥정한 결과 우리가 넘겨받게 됐습니다.
이름은 귀화(龜化)고등공민학교라고 합니다. 전 사람이 붙인 이름인데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그 사당이 있는 충무공의 정신을 배우자는 의미에서 그렇게 붙였다고 하는데 아직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한때는 여러 백 명 학생이 있었는데, 중학교가 지역제로 된 이후 학생을 천안 온양에 대부분 뺏기고 지금은 130명가량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맡은 이후 교사 진영을 새로이 했고 건축하다 말고 내버려두었던 교사를 수리하고 변소를 새로 짓고 하나씩 정돈을 하여 자라나는 생명에 맞는 환경을 만들려 노력하는 중입니다.
우리 하는 일이 다 그렇듯이 무슨 자금이 넉넉히 있어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도 해야 할 일이니 손을 댄 것입니다. 나는 맡아놓기는 하고도 “왜 내게는 되지 않을 일만이 오느냐”고 몇 번이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 동안 계(桂)선생이 교장으로 가 계셨고, 나는 이따금 밖에 못 갔습니다. 그러나 장차로는 이것을 직업학교로 충실시켜 가자는 계획입니다. 생활교육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함으로써 씨교육의 터를 닦자는 생각입니다.
그러니 이것도 여러분의 일입니다. 아무래도 교육이 제일입니다. 일이 꿈대로 잘된다면 여기 약간한 방과 책을 갖추어 각 곳의 씨들이 마음대로 와서 일하고 쉬고 생각할 수 있는 한 동산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기회 있는대로 오셔서 들여다보아주시기도 하고 마음에 두시고 키워주셔야 하겠습니다.
이제 씨알이 정말 알이 든 여문 씨알이냐 쭉정이냐가 판명이 되는 때가 왔습니다. 알든 씨알은 불감체입니다. 불에 들어도 타지 않고 물에 빠져도 녹지 않고 바람에 내놔도 마르지 않으며 칼로 쪼개도 쪼개지지 않는 것이 씨알입니다. 모든 악은 폭력을 등대고 서는데, 폭력을 이기는 것은 오직 씨알뿐입니다. 씨알이란 다른 것 아니고 우주에 사무친 정신이 뭉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석가도 이거요 예수도 이거요 소크라테스도 이거였습니다. 이것이 신라에 있은즉 박제상이요, 고구려에 있은즉 양만춘이요, 백제에 있은즉 계백이요, 고려에 있은즉 정몽주요, 이조에 있은즉 사육신 생육신입니다.
이름은 귀합니다. 제 이름 석 자를 어디다 쓰느냐가 문제입니다. 평소에 길렀던 내 마음을 한번 어엿이 증거할 만한 때입니다.
그러면 이 나라는 살아나고 이 역사는 앞으로 비약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다음은 어디서 만날지 모르겠습니다. 여물었으면 하나님 앞에서 반짝반짝하는 금강석으로 만날 것입니다. 여물지 못했으면 어느 썩어진 진창 속에 뒹굴 것입니다.
그럼 부디 일체를 다 잊으십시오.
다 잊음으로 하나만을 잊지 마십시오
씨알의 소리 1974. 1,2 30호
전작집; 8- 155
전집; 8- 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