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가 함께 한 제주도 여행 / 정선례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을 지나 어느덧 내 나이도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지천명의 중반을 치닫고 있다. 뜨거운 차 한 잔에 마음을 적시면서 사는 동안 가장 즐거웠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떠올려 본다. 새 생명과 첫 만남의 기쁨이 어제 일처럼 또렷하다. 칠흑처럼 어두운 집 앞에 가로등이 설치되어 집 주변을 환하게 비출 때도 기뻤다. 또한 오랜 기간 소원하던 집 주변의 땅들을 매입해서 우리 소유로 이전등기했을 때도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대학 다니다 미국으로 유학 간 동생이 현지에서 취업하고 결혼하여 오랜만에 한국에 나와 시간을 함께해서 행복했다.
그중에서도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재작년 여름에 아버지 팔순 기념으로 부모님과 동생들, 바쁜 일정 뒤로 미루고 조카들까지 기꺼이 동행해준 제주도 가족여행이다. 우리 오 남매는 몇 년 전부터 형제들 계 모임을 만들어 회비를 매월 오만 원씩 회비를 모은다. 바쁘다는 이유로 총무 맡는 걸 다들 꺼려서 맏딸인 내가 총무가 되어 미납된 회비를 독촉하는 등 악역을 맡아 관리한다. 여동생이 부모님 모시고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자며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도착할 때까지 경비가 어느 정도 들어가고, 숙박시설은 어느 곳이 좋은지, 뭘 먹어야 하는지 알아보고, 비행기 표를 예매하고, 성수기에는 방을 잡기 어렵다는 휴양림 숙박 예약에도 성공했다. 서울에 사는 부모님, 여동생, 남동생 조카들은 비행기를 탔다. 나는 완도여객터미널에서 카페리호 쾌속선을 타고 두시간 사십 분만에 도착해서 가족들과 만났다.
제주시에 위치한 절물휴양림에서 짐을 풀고 내려오는데 길옆 숲에서 노루가 애 없이 거닐고 있다. 아프리카 밀림 지역을 연상하게 한 숲길을 걸으며 지친 몸과 마음을 힐링했다. 사려니 숲길은 ‘신성한 숲’이란 뜻으로 삼나무를 비롯하여 졸참나무, 때죽나무 등 각종 나무가 자연 그대로 빽빽하게 자라나 있다. 물안개가 나무 사이로 피어올라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어 신비로움을 체험하기도 했다. 한여름 무더위에도 숲 그늘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더위를 잊게 하고 울창한 숲길은 햇볕을 가려주어 무릉도원이라도 온 것처럼 여기저기서 좋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오후에는 협재해변, 용머리 해안을 걸었다. 해안가는 넓지 않아도 파도는 거세게 밀려와 하얗게 부서지는 모습에 어머니와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파도 따라 뒷걸음치며 신나게 놀았다.
둘째 날은 날씨가 좋아 우도를 들어갔다. 배에 차를 싣고 우도 선착장에 도착해 차로 섬 한 바퀴를 돌았다. 점심으로 해물 짬뽕을 먹었는데 싱싱한 자연산 해산물을 많이 넣어서인지 맛있었다. 성산 일출봉에 올라 내려다본 제주의 바다는 너무도 깨끗하여 물이 파랗게 보였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만장굴에 들어갔다. 어둡기는 했지만 더울 때 들어가서인지 동굴 안은 서늘하기까지 해서 더위를 싹 잊게 했다. 셋째 날은 서귀포에 있는 중문관광단지를 돌고 외돌개, 천지연폭포를 구경했다. 돌고래 쇼가 압권인 퍼시픽랜드를 관람했는데 아버지의 호응이 매우 좋아 우리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건강이 안 좋은 어머니도 평소에 집 주변을 매일 한두 세시간씩 걸었던 덕분인지 예상외로 잘 걸어서 너무나 감사했다. 제주도는 칠백만 년 전 화산이 폭발하면서 만들어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섬이다. 섬 전체가 관광지로서 어디를 가나 빼어난 해안 절경이 눈에 들어왔고 자연이 잘 보존되어 이국적으로 아름다웠다. 중국 관광객과 일본 관광객도 눈에 자주 보인다.
마지막 날인 넷째 날은 숙소가 있는 서귀포자연휴양림으로 이동하고 이른 아침 식사를 간단하게 해결한 후 세계 7대 자연유산인 한라산에 올랐다. 연로하신 부모님이 무리가 안 되게 경사가 완만한 성판악 탐방로를 택해 등반코스를 정했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신우대(조릿대)가 군락을 이뤄 분포되어 자라고 있었다. 신우대는 주로 산 중턱에 많이 자라고 번식력이 좋아 몇 년 후에는 한라산 전역에 뿌리 내려 자라게 될 것이다. 하산 시간이 정해져 있고 등산 초보인 우리는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고지를 눈앞에 둔 채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한 후 울퉁불퉁한 산길을 하산해야만 했다.
4박 5일 일정 동안 식사는 내 담당이었다. 여행은 보는 즐거움과 먹는 즐거움이라 했던가? 두 개의 커다란 여행용 가방과 아이스 가방에 가득 준비해간 쌀이며 잡곡, 각종 밑반찬과 불백, 돼지고기 주물럭, 간재미회무침, 멸치조림으로 아침 식사를 했고 점심으로 자연산 전복, 옥돔구이, 보말칼국수를 먹고 저녁으로는 흑돼지구이, 은갈치 조림과 구이, 갓 잡아 올린 한치 물회를 먹었다. 하우스에서 재배하여 출하한 조생종 감귤도 아이스박스에 넣어 차에 싣고 다니며 실컷 먹었다. 부모님 돌아가신 뒤에 두고두고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여행에서 남는 것은 사진밖에 없다는 말이 있다. 또래들과 여행하고 싶었을 조카들이 무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족들이 하나 된 모습을 사진으로 오롯이 남기려고 사진작가가 되어 우리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주로 찍어 주었고 다 같이 높이 팔짝 뛰는 포즈라든지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우수에 젖은 모습, 우도 바닷가에서 세 모녀가 한껏 멋을 부리며 찍은 사진은 어느 프로 모델 못지않게 우아하고 예뻤다. 평생 일만 하느라 멋이라고는 거리가 멀게 보인 어머니도 파도가 부서지는 갯바위에 앉아 나름 모자를 고쳐 쓰고 허리를 곧추세워 섹시한 표정을 연출했다. 엄지 척해드렸더니 기분이 좋으신지 소녀처럼 해맑게 웃으셨다.
십 대부터 팔십 대까지 삼대가 함께 여러 날 동안 종일 시간을 같이 보내다 보니 취향이 달라서 불편한 점도 있었을 것이다. 젊은애들은 더위를 못 참아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야 하는 반면에 어머니와 나, 여동생은 에어컨 바람을 싫어해서 옷을 껴입었다. 아버지의 거침없는 언행이 못마땅해 다혈질인 내가 아버지께 한마디 던져 일순 긴장이 흐르기도 했다. 그렇지만 모처럼 함께한 가족들의 효도 여행인 만큼 조금씩은 참고 즐거운 한때를 보내려고 다 같이 노력했다. 제주도 시계는 너무나 빨리 흘러가 4박5일이 1박 2일처럼 짧기만 했다. 제주도 여행이 오 남매 자식들 남부럽지 않게 먹이고 입히느라 허덕이며 살아오신 어머니 아버지께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을까? 모처럼 큰맘 먹고 함께한 이번 여행은 우리 가족에게 하나 된 추억으로 기억 속에 영원히 자리할 것이다. 우리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가족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헌신 덕분이다. 그 사랑이 우리 가정을 지켰다. 나는 지금 내 삶에 만족하고 행복하다. 무엇보다 부모님이 건강을 잘 지켜 우리의 염려를 덜어주니 얼마나 다행이며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다시 한 번 날 잡아 부모님 손 잡고 제주도 둘레길이나 서해랑길 걸으며 어머니의 지난날 굽이굽이 어려움 이겨낸 삶의 지혜를 배우는 시간을 갖고 싶다. 불현듯 공허해질 때면 어머니의 소중한 말씀 누름돌 되어 흔들리는 내 마음 붙잡아 주리라.
첫댓글 정말 멋진 여행이었네요. 삼 대가 함께해서 힘들기도 했겠지만,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부모님이 행복하고 뿌듯했을 겁니다. 4박 5일 동안 대식구가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대단한 가족이네요.
가족들의 화목한 모습이 좋습니다. 부모님의 헌신이 있어서 자식들이 잘 자랐고, 선생님의 섬김이 있어서 가족들이 맛있게 먹으며 더 즐거운 여행을 한 것 같습니다. 글에 가 볼만 곳, 먹어야 할 음식 등이 잘 나타나 있어서 제주도 여행 길잡이가 될 것 같습니다.
와, 팔순이 된 부모님이 한라산을 오르셨다고요? 아무리 쉬운 코스라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을 텐데요. 3대가 함께 이룬 가족여행이 아름답게 그려집니다. 솜씨 좋은 맏언니 덕분에 아침상이 풍요롭네요. 아침 식탁이 무슨 만찬회장 온 것 같아요. 요리 솜씨가 좋으신가 봅니다. 다음 여행지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