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 [마르크스의 착취 이론−사적 소유의 폐해](대니얼 챈들러)를 읽고 생각난 것이 있어 몇 글자 남긴다.
1.사적 재산을 폐지하지 않고도 민주주의를 수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첫째, 조세 제도를 통해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직접적으로 줄이고 둘째, 정치 과정을 광범한 경제적 불평등으로부터 차단할 수 있는 조처를 취하는 것이다. 후자의 예로는 개인이 정당에 고액의 정치 자금을 기부할 수 있는 제도를 없애고, 그 대신 공적 자금 지원 체계를 세심하게 설계하는 것을 들 수 있다.(챈들러 142-143)
----->챈들러의 주장처럼 하루빨리 모든 국가가 그러한 조세 제도와 정치 과정에서의 조처를 취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나는 소수의 엘리트에 집중된 사적 재산도 문제이지만 그보다 아래에 서술되고 있듯이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더 문제라고 보는 입장이다. 나아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소수에게 집중된 ‘사적 재산’의 원인이며 ‘빈부 양극화’의 원인이라고도 보는 입장이기도 하다.
2.마르크스에게 사적 소유는 생산수단, 곧 ‘자본’을 소유한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 착취로 이어지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정의롭지 않다. 이러한 형태의 착취에 대한 전통적인 사회주의의 해법은 생산수단을 ‘사회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유권을 노동자나 국가로 이전하여 자본가들에게 돌아갔을 가치를 노동자들 사이에서, 혹은 사회 전체와 공유하도록 만드는 것이다.(챈들러 143)
----->나 역시 마르크스의 입장이다.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노동자들이 국가의 주인이 되는 노동자국가의 ‘국유화’ 양자 모두에 관심이 있다. 사회화든 국유화든 그 이전에 만국의 노동자들이 스스로 국가와 사회의 주인이라는 주인의식을 갖는 것이 중하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3.모든 기업을 노동자나 국가가 소유하고, 노동자가 생산에 기여한 가치만큼 정확히 보수를 받게 된다면, 이 사회에서 마르크스가 규정한 착취는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회는 여전히 노동자마다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가 서로 다르다는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가령 저숙련 판매원과 고숙련 변호사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불평등도 시장 경제에서 해결하지 못한다.(챈들러 144)
----->위에서 제기하는 문제보다 착취가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위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착취의 문제라기보다는 이것이 바로 롤스가 주장하는 불평등 아닌 ‘차등의 원칙’을 인정해주면 되는 문제로 보인다. 평등이라는 것이 균등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필연적으로 인정해야 할 ‘차등’은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착취와 별개의 문제라는 생각이다.
4.마르크스의 착취 이론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활동까지도 잘못으로 선언한다는 의미에서 ‘너무 강하다’. 이 이론은 다른 누군가를 고용해서 이윤을 얻는 행위가 언제나 잘못된 일임을 함축하는데, 그러한 행위가 필연적으로 피고용인의 노동 일부를 전유하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사적 소유를 폐지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타인을 고용하고 거기에서 이윤을 내는 것이 과연 ‘본질적으로’ 부당한 것일까? 노동을 통해 번 돈으로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해서 간접적으로 이윤을 거두는 사람은 어떻게 봐야 할까? 상당한 교섭력을 행사하는 고액 연봉의 경영진이나 전문직도 불공정한 착취를 당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까?(챈들러 144-145)
----->저자가 사적 소유를 폐지해야 할 이유라고 밝히고 있듯이 착취라는 것이 노동자들이 받아야 함에도 받지 못하고 자본가가 취하는 부당한 이윤에 대해서 문제 삼는 것이지 문제없는 활동까지 문제 삼는 것은 아니라고, 적어도 마르크스에게서는 그렇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착취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5.마르크스 이론의 힘은 노동자들이 노동을 팔지 못하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전제에 기대고 있지만, 복지 국가의 존재로 인해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사실이 아니게 되었다.(챈들러 145)
----->복지 국가의 존재의 이유이지만 그 한계에 대해서 비판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삶을 바라며 복지에 기대어 사는 이들도 있겠지만 노동자들이 착취 없는 소외된 노동이 아닌 자신의 노동과 정당한 대가를 통해 삶을 영위하기를 그럼으로써 자아 실현하는 삶을 살기를 바랄 수 있다. 다시 말해, 사적 재산의 집중을 막고 조세 제도를 통한 복지정책이 노동을 팔지 못해 굶주리는 노동자들에 대한 보완책이 될 수는 있겠지만 소수의 사적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복지국가 자본주의’ 그 이상을 계획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겠다. 챈들러가 바라는 사회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6.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임금 관계(wage relationship)는 노동자들이 자신이 생산한 가치의 일부를 타인에게 내주도록 강제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정의롭지 않다. 그런데 이 논리에 따르면, 실업자와 돌봄이를 돕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 역시 일종의 착취가 아닐까? 결국 이러한 세금은 노동자들이 생산한 가치 일부를 그 생산과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전하는 것이니까 말이다.(챈들러 145)
----->실업자와 돌봄이를 위해 노동자들의 세금을 사용하지 않고 챈들러가 주장하는 조세 제도를 통해 거둔 소수의 재산가들의 세금을 사용하면 해결될 문제로 보인다.
7.철학자 코언이나 경제학자 존 로머(John Roemer) 같은 일부 ‘수정주의’ 사회주의 사상가들은 정의와 공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사회주의적 이론들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사회주의를 평등에 관한 윤리적 신념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며, 소유권에 대해서도 좀 더 실용주의적 접근을 주장한다. 예를 들어 사적 재산 자체를 잘못으로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물이 지나치게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다는 사실이나 폭력과 강제를 통해 재산이 축적되어 온 방식에 초점을 맞춘다. 이 이론들에 대해 더 많은 논의가 가능하겠지만 이 책에서 다 다룰 수는 없으며, 분명하게 말하고 싶은 점은 이러한 견해가 롤스의 관점과 대단히 유사하다는 사실이다.(챈들러 145)
----->수정주의 사회주의 사상가들 및 그들과 대단히 유사한 롤스의 관점으로 정의와 공정에 대해 발전시킨 사회주의 이론으로 ‘차등의 원칙’ 혹은 ‘복지 국가 자본주의’ 그 이상의 어떤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에 이를 수 있을지 좀 더 읽어봐야 하겠다.
소외에 관해서 덧붙인다면 소외의 원인은 여럿일 수 있다. 사회적 차별이나 불평등에 따른 것일 수 있다. 노동에 의한 소외에 관해서 챈들러가 주장하는 ‘작업장 민주주의’는 의미있어 보인다. 챈들러만 아니라 레닌이나 그람시를 비롯해 많은 이론가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했고 실제로 지구 곳곳에 작업장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는 기업들도 있다고 알고 있다. 작업장 민주주의에서부터 소외의 문제를 넘어 생산수단의 사회화나 국유화에까지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챈들러가 마르크스의 착취 이론에 동의하면서도 생산수단의 사회화보다 소수 엘리트 집단에 집중된 사적 재산에 따른 자본주의의 불평등 문제 해소를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다. 구소련이라는 현실 사회주의 실패 이후 ‘수정주의’라는 이름으로 무수히 봐온 이론들이고 자본 독재의 가속화가 가져온 결과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수정주의든 그 무엇이든 그 이론이 말하는 내용이 중하다는 입장이다. 그들의 이론으로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이룰 수 있는가 검증해야 할 것이고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위해서 생산수단의 사회화든 국유화든 민주적 관리든 작업장 민주주의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문제를 어떻게든 해소해 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026. 5.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