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 24(월)
마태 12,22-50
루카 11,14-36
루카 8,19-21
(마태 12,22-23)
마귀 들려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 주시자 말을
못하던 사람이 말도
하고 보게도 되었다.
묵상ㅡ
영화 한 장면이 생각난다.
민주화운동을 하는 대학생을
잡아다 고문을 해서 죽이고,
그러면서도 할일을 다 했단
표정으로 악독하게 굴었던
모기관 처장, 바늘로 찔러도
피한방울 안 나올것 같은
냉혈한 인간, 그럴수밖에
없었던 그의 뿌리엔, 어릴적
겪은 무서운 트라우마가 있다.
어릴적 북한군이 집에 쳐들어와
가족을 모두 죽였는데 자기는
아버지가 마루밑으로 밀어넣어
숨기는 바람에 살 수 있었다.
그런데 두 눈으로 부모님이
총맞아 죽는 장면을 목격한 거다.
어린 눈엔 공포였고, 내내
트라우마로 자리잡았다.
그는 커서 모 기관의 처장이 되어,
민주화운동을 하는 학생들을 잡아다
고문해서 빨갱이라는 거짓 자백을
받아 감금시키는 일을 한다.
아무죄없는 귀한 아들이 누명을 쓰고
고문받다 죽는 것을 목도한 어머니의
피눈물이 쏟아지는데 그 처장은
잔인할뿐이다. 그는 어릴적 부모가
인민군에게 총맞고 죽은 그때를
기억하며, 그 대학생을 인민군으로
투사하여 대신 복수를 하는 것이다.
그는 공적인 수사가 아닌, 트라우마를
과도하게 섬겼던 거다.
'인민군은 우리부모를 죽였어.
그러니 빨갱이는 다 죽여도 돼.'라는
신념을 말이다.
그에게 트라우마의 기억은, 악마에게
밥을 주는 죄의 씨앗이 되었던 거다
오늘 마태오 복음에 등장한,
'마귀 들려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치유로 말하고 듣게 되었다는
구절이 의미있게 다가온다.
눈이 멀고 말을 못한다는 건 소경이나
벙어리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정서적, 심리적, 정신적 차원의 손상을
입어서 눈을 떴어도 제대로 볼 줄
모른다거나, 입이 있어도 할말을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경우도 있겠다.
상담 현장에서 주로 경험하는 것이
말을 해야 할 때 말을 하지 못해
굵은 매듭이 되었거나 홧병이 나서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거다. 나 역시도 그랬고 배우자와
딸들도 그런 경향이 있다.
하여 나는 마귀 들려 말을 못하는 이가
예수님으로 인해 말을 하게 되었다는
대목에서 머물기로 했다.
나 역시 어릴적 트라우마가 있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나 너무 힘들고 무서워'
라고 말로 표현한 적이 없었다.
아빠는 무서웠고 엄마는 늘 아프고
바빴기 때문이다. 이때 나의 신념은,
'말해봐야 소용없어.
결국 내가 다 감당해야 해.
나는 씩씩한 사람이
되어야만 해, 그래야 인정받고
좋은사람이 될 수 있어'
이 부정적인 신념은 곧 트라우마가 되어,
모든 관계에서 좋고 긍정적인 말만 하며
나의 힘든점을 솔직히 표현하지 못하고
꾸역꾸역 억누르고 참다가 마음의 병이 되고
상대를 더 미워하게 되는, 그래서 죄책감을
갖고 고해성사를 봐야 하는 죄로 규정해
놓은 것이다.
회사에서 팀장인 큰딸은 아랫사람에게
해야 할 말이 있음에도, 어릴적부터 자기
힘든 것을 솔직히 드러내는 환경이 아니다 보니,
자꾸 억누르게 되어 혼자 화가 나고 우울할
때가 있단다. 딸 역시 부모가 맞벌이였고
집안에 힘든 일들이 많았던 터라,
'엄마, 나 너무 무서워. 안 나가면 안 돼?
아빠, 친구들이 괴롭혀서 학교 가기 싫어 도와줘.'
라고 말로 표현해본 적이 없다.
그 아이 역시,
'엄마는 바쁘고 늘 아프니까 나라도
잘해야 해. 절대 폐를 끼치면 안 돼.
말해봐야 소용없어. 결국 나 혼자 남겨질거야.
아무리 힘들어도 징징대면 안 돼.'라는
잘못된 믿음(신념)을 갖고 있었던 건데,
이런 기억들이 결국 혼자 모든 것을 끌어안고
감당하려는 트라우마가 된 거다.
배우자 역시 진솔한 마음으로 가족에게
'나 힘들어'라고 말한 것은 불과 얼마되지
않는다.
우리가 할말을 한다고 해서 꼭 나쁜 사람이
되고 약해지는 건 아니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때문에
진실을 묻고, 말해봐야 뭐해 보나마나
또 저럴텐데 라고 지레 차단해버리는거다.
또 신앙인들은 상대에게 불편한 얘기를 하거나
화를 내면 꼭 죄를 짓는 듯한 죄책감이
원 프러스 원, 셋트처럼 올라와서 그게 싫고
불편해서 억울하고 부당해도 할말을 못하게
된단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이런 신념과 트라우마에 매여 자신의 내면을
어두운 동굴속에 갇히게 하는 것이다.
(루카 11,34-36)
네 눈이 성하지 못할 땐
몸도 어둡다.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
보아라.
주님께서는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때처럼 네 몸이 온통 환할 거라고 하신다.
하고싶은 말이 목까지 차올랐는데, 그걸
스스로 읽어주고 공감해주지 않고,
'너 이러면 큰일 나. 참아. 그러면 언젠가는
다 알아주게 될거야' 라고 달래면서
그 말을 무지막지하게 다시 동굴속으로
삼켜 버린다면, 내면을 어둡게 하는
억울함과 두려움, 슬픔, 우울감, 불안,
외로움, 분노 등 거친 풍랑이 일거다.
그럼 또 자신을 탓하고 다그치며
가혹하게 굴면서 내면은 금세 마귀의
운동장이 될터다.
나는 마태복음 12,22에서
마귀 들려.. 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과거
기억과 트라우마에 매여서.. 라고 바꿔 보았다.
그런것들을 우상처럼 믿고 섬기며 꼭 해야
할 말과 해도 될 말을 건강하게 표현하지
않아 매듭을 묶은 상처가 있다면
잘 인식해서, 주님께 이젠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으니, 저를 고쳐주시고
치유해달라고 청해야 할 것이다.
올해 희년엔 더욱 그래야 할 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백성들을
구해내신건데, 그 값이 헛되지 않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께서 고쳐주시자 말을 못하던
그 사람이 말을 하게 되었다.'
(마태 12,22-23)
첫댓글 박지현 요셉피나님
좋은 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