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년전 고등학교 다닐때 이상화 시인의 "배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라는 시를 열심히 외우던
기억이 난다. 그 이상화 시인의 고택이 대구시내 한복판에 복원되어 있고 골목투어 코스이다.
이상화시인
1901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시우이며, 어머니는 김해 김씨이다. 4형제 중 둘째 아들이다.
큰형 상정은 독립 운동가이며, 둘째형 이상백씨는 한국최초의 IOC위원이자 한국 사회학계의 선구자이다.
다섯 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1918년에 서울 중앙학교(지금의 중앙고등학교)를 수료했고, 열아홉 되던 1919년
대구에서 3·1 운동 거사를 모의하다 주요 인물이 잡혀가자 서울 박태원의 하숙으로 피신하였다. 1921년에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와 만나 〈백조〉 동인에 참여했고, 1922년 《백조》1~2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그해 프랑스에 유학할 기회를 얻으려고 일본으로 갔다. 1923년 관동 대지진이 나자 수난을 피해 귀국했다.
1925년에 작품 활동을 활발히 했다. 시뿐만 아니라 평론, 소설 번역에도 힘썼다. 8월에 카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7년 대구로 돌아왔다. 1933년 교남학교(지금의 대륜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담당 과목은 조선어와 영어,
작문이었다. 이듬해 사직했다. 1937년 큰형 이상정을 만나러 중국에 3개월간 다녀왔다. 교남학교에 복직하여 교가를
작사했다. 1943년 3월에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4월 25일 대구 자택에서 숨졌다.
1948년 3월 14일 김소운이 발의하고 이윤수, 구상 등이 참여하고 죽순시인구락부가 협찬하여 시인을 기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시비를 달성공원에 세웠다.[1]
계산동 성당에서 오른족으로 가다보면 이상화, 서상돈을 그린 모자이크화가 있다.
길과
벽에도 다양한 그림과
안내판이 있다.
이 골목기로 들어가면
이상화 서상돈 고택이 나온다.
이상화고택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해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들이 구름 뒤에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곱은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쁜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을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도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접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바로 옆에 서상돈 고택이 있다.
서상돈(徐相敦)은 보부상으로 출발하여 대구의 경제권을 좌우할 정도의 큰 재산을 모았으며 신사고와 근대의식을 가져 독립협회가 창설되자 적극 참여하였다. 독립협회의 재무담당 간부로 활동하는 한편, 1898년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외세의 내정간섭을 규탄하며 국권수호와 민권신장에 힘썼지만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대구로 내려와 김광제와 함께 광문사를 세워 부사장이 되었다. 광문사(廣文社) 부사장인 서상돈(徐相敦)은 외국의 선진 학문을 소개하고 실학 서적을 번역 편찬하여 근대사상을 전파하고, 자주자강의식을 고취하는 계몽운동을 펼쳤다. 서상돈(徐相敦)은 외세의 간섭으로 인한 국망의 위기가 과다한 국가의 빚, 즉 국채(國債)로 인한 것으로 인식하고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의 뜻을 갖게 되었다.1907년 1월 광문사(廣文社) 특별회의를 마친 뒤 서상돈의 발의와 김광제의 적극 찬동으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의 횃불을 올렸다. 금주·단연(斷煙)으로 의연금(義捐金)을 모아 국채 1,300만원을 상환함으로써 자주독립국가를 이루자는 국채보상운동의 물결은 이후 전국 각지로 파급되어 거족적인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유면한 서예가 회산 바기돈 선생의 고택은 식당으로 변해서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자료를 찾다보니 이 계산동 골목이 우리나라 근대의 저명한 사람들이 태어났거나 살던곳이라는 대구 매일신문 김재경 기자의 글이 있어 인용해 본다.
계산동은 종로와 약전골목, 서문시장의 가운데에 자리한 데다 영남대로가 지나는 중요한 길이었다. 부유층들이 밀집한 동네는 인물들을 속속 배출했고, 이들과 어울리거나 배움을 구하는 사람들이 몰리면서 문화의 터전으로 떠올랐다. 독립운동가와 문학인, 예술가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활동하면서 계산동은 근대 대구뿐만 아니라 전국의 중심이 됐다. 계산오거리에서 발길을 시작해 보자. 근대의 물결과 함께 떠올라 별처럼 빛났던 인물들의 면면이 쉴 새 없이 이어진다. 그들의 삶을 떠올리며 걷는 길은 더없이 풍성할 것이다.
우선 계산성당으로 향하는 계산오거리 모퉁이는 이효상의 고택이 있던 자리다. 시인이자 교육자, 정치가로 널리 알려진 그는 학자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가톨릭에 입교했으며 해성학교에 입학해 서동균, 서동진 등과 함께 다녔다. 서화의 대가 서동균이 “그림은 나를 따를 이가 없었으나 재주는 한솔을 따를 이가 없었다”고 회고할 정도로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이상화, 서동진 등과 함께 교남학교(대륜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던 그는 1939년 일제가 재단이 부실하다는 이유로 폐교 처분을 내리자 수성동에 새 부지를 마련해 서상돈의 아들인 서병조를 이사장으로 대륜중학교를 인가받아 교장에 취임했다. 1951년에는 경북대 문리과대학 초대학장으로 취임, 4`19 때 경북대 교수단과 민주화투쟁의 전면에 나섰던 그는 이후 정치에 입문해 국회의장까지 지냈다.
큰길을 따라가다 계산성당 못 미쳐 새로 뚫린 골목으로 들어가면 이상화 고택이 나온다. 중구청의 근대골목디자인개선사업 구간으로 동산에서 내려오는 3`1만세운동길에서 이상화 고택을 바로 잇기 위해 계산성당의 협조를 받아 막혔던 골목을 뚫었다. 시민들의 뜻과 힘을 모아 새로 단장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상화 고택 바로 못 미쳐 작곡가 김진균의 생가 터가 있고, 그 옆으로 영남대의 전신인 청구대학 설립자 야청 최해청 선생 고택이 있었다. 최해청은 대구고보 시절부터 항일운동에 나섰으며 조선아나키스트동맹에 가입하기도 했다. 해방 후 대중학술강좌를 열어 사람들의 교육에 대한 열기를 확인한 그는 대구문화과전문학원을 개설, 청구대학으로 발전시켰다.
##‘문화수도 대구’간직한 추억의 골목
상화 고택 앞에 새로 지은 서상돈 고택도 들러볼 만하다. 당시 유지였던 서상돈이 40대 들어 옮겨온 옛 집에는 많은 이들이 묵어갔다고 한다.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던 그였지만 당시 일본인들도 그를 존경하는 분위기였다.
‘서상돈 옹은 독실하고 덕이 높은 사람으로 생전에 많은 음덕을 베풀었다. 그 당시 풍습으로 출입시에 5, 6명의 하인배를 거느리고 흰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의젓하게 길을 걷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서상돈 옹을 서시찰(視察)이라 높여 부르며 마주하는 사람마다 최고의 예의를 갖추었다.’(대구이야기, 가와이 아사오)
포장된 길을 따라가면 왼쪽으로 처음 만나는 집이 이상정 고택이다. 이상화의 맏형으로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항일투쟁을 하다 만주로 망명했다. 이상화는 이상정을 만나기 위해 만주를 다녀온 것이 발각돼 옥고를 치렀다. 식당으로 쓰이는 이 집은 ㄱ자형 한옥으로 넓은 마당을 갖춰 근대 한옥의 변화과정을 볼 수 있는 가치 있는 고택이란 평가다. 이상정의 부인 권기옥은 중국에서 교육받아 중국 공군에 입대한 한국 최초의 비행사로 유명하다.
그 옆집은 대구상업회의소 초대 회장을 지냈던 서예가 회산 박기돈의 집이었다. 미술평론가 권원순씨는 “근대 초 대구 사람들의 생활 기반이 되는 상업 분야를 일으킨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동촌에 얼음창고를 만들어 얼음을 보관했는가 하면 서울서 이발사를 불러내려 이발소를 열었고, 목재상과 신약상도 영업을 하게 했다. 후손의 증언으로는 “국채보상운동 당시 한 번 외출하면 곰방대 30~40개를 빼앗아와 불태웠을 정도로 열심”이었으나 뒤에 친일 행적을 했다는 불분명한 이유로 조명이 잘 되지 않고 있다.
##이웃해 살며 다방면 근대사상 이끌어
대구 서화의 대가로 알려진 죽농 서동균은 향촌동에서 태어났지만 계산동에 화실을 열었다. 구한말 시`서`화를 비롯해 팔방미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서병오에게 서화를 배운 서동균은 평생 대나무 그림만 그리겠다는 뜻으로 ‘죽농’(竹農)이란 호를 썼다. 사군자에서 경지에 오른 그의 죽음을 두고 ‘한국 문인화의 종언’이라는 평가까지 내려질 정도로 한국 미술에 큰 공헌을 했다. 이문열의 소설 ‘금시조’는 서병오와 서동균의 사제 관계를 이야기로 만든 것인데 여기에 대해 옳으니 그르니 이야기가 분분하다. 대구 문화의 큰 축을 형성한 인물들인 만큼 정리가 필요해 보인다.
계산동에서 남성로로 이어지는 곳에 음악가 박태원, 박태준 형제의 생가 터가 있다. 서양음악을 한국에 도입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 형 박태원은 1917년 제일교회에서 대구 최초의 혼성합창단을 구성, 발표회를 갖기도 했으나 스물넷의 나이로 요절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동무생각’의 작곡가 박태준은 계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빼어난 동요들을 작곡해 홍난파, 윤극영과 함께 당대 3대 동요 작가로 꼽혔다.
이들 외에도 소설가 현진건, 시인 백기만과 신동집, 서양화가 이쾌대 등이 계산동에서 활동하면서 일대를 문화 향기로 가득하게 만들었다. 대구에서 근대 문화지도를 가장 먼저 그려야 할 곳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예술가들의 생가나 작업실 등의 위치조차 정확히 짚어내지 못하고 있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의 스토리만 담아 내도 대구를 전국 최고의 문화도시 반열에 올릴 수 있을 텐데 행정기관과 문화계의 관심은 여전히 일부에만 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