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롬 !!
23.9.27(수) 경항공기 지역 신우회 예배말씀
전래동화를 통해, 오늘에 말씀을 살펴봅니다. 여기서 우리는 돌아온 탕자를 부각시키지만, 오히려 큰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전래동화 : 토끼의 재판
깊은 산중을 지나던 나그네 선비의 귀에 호랑이가 신음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상하다 여긴 그는 그만 깊은 구덩이에 빠진 호랑이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그 호랑이가 자신을 잡아먹으려 할 것이라 생각해 그냥 지나가려 합니다. 호랑이가 애원을 합니다. 나를 구해주면 잡아먹지 않고 은혜를 갚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긴 나무를 가져와 구덩이에 던져주어 호랑이를 구해줍니다. 그런데 위기를 모면한 호랑이는 배가 고프다고 선비를 잡아먹겠다고 합니다. 어굴한 마음에 선비는 그 때 지나가는 황소에게 물어봅니다. “내가 구덩이에 빠진 호랑이를 구해주었는데 나를 잡아먹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황소는 말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일을 부려먹고는 또 나를 죽여 고기를 먹으니 약속은 안 지켜도 된다.” 나그네 선비는 다시 큰 나무에게 물어봅니다. 나무가 대답합니다. “ 사람들은 나를 베어서 집을 짓고 가구를 만들고 하니 약속은 안지켜도 된다고 합니다. 그 때 토끼가 깡충깡충 뛰어 옵니다. 그래서 토끼에게 물어봅니다. 그러자 토끼는 고개를 가웃거리더니, 호랑이가 빠졌던 곳이 어디냐고 묻습니다. 그러니 호랑이가 급한 마음에 여기 웅덩이에 이렇게 내가 빠졌다고 하며 웅덩이로 다시 빠져버립니다. 그러자 토끼는 말합니다. 선비님 이제는 걱정하지 말고 갈길을 가십시오.
본문 말씀 : 누가복음15:25-32 새번역
큰 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오는데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음악소리와 춤추면서 노는 소리를 듣고 종 하나를 불러서 무슨 일인지를 물어 보았습니다. 종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아우님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돌아온 것을 반겨서, 주인어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나와서 그를 달랬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저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 아버지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그런데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 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말씀 선포 : 은혜, 언약 그리고 토끼의 재판
The Mercy, Covenant and the judgement of Rabbit
사람이 세상을 살며 하기 어려워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대다수 사람들이 용서를 말하지 않을까요? 나의 영혼과 육체에 해를 끼친 사람을 그대로 되갚아주거나 벌하는 일 없이 없던 상태로 만드는 용서는 사람이 행동하기 참 어려운 일입니다.
왜 용서를 해야 하나요? 비그리스도인들은 용서하는 일이 용서하는 당사자의 영혼과 육체의 건강을 지키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비그리스도인들은 해를 끼친 가해자를 향한 미움과 분노가 피해자의 인생을 갉아먹기에,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용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비그리스도인들은 이 같은 바탕 위에서 ‘용서는 하되 가해자가 한 행동을 잊지 말자’라고 종종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용서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주님의 제자로서 그 말씀을 따라 용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도는 나같은 죄인도 주님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은혜로 용서하셨고 자기 백성 삼으셨던 것처럼 다른 사람도 용서하고자 하시기에 주님의 뜻을 따라 순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언뜻 봐서는 교회의 용서에 대한 가르침에는 피해자의 행복에 대한 보살핌이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용서하셨으니 나도 용서해야 한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감히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을 당한 피해 성도의 인생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이 땅에서 주님 백성으로 살며 어려운 일을 당한 성도의 삶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누군가는 ‘나에게 죄지은 사람을 얼마나 용서해야 합니까?’ 라고 질문했던 수제자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냐고, 그 이후에 비유로 말씀하신 부분에서도 결국 전적인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은 무조건적으로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목소리를 높일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일견 타당합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 말씀은 공생애 기간 유대인에게 가장 많이 읽힌 다니엘서 9장과 공명합니다. 다니엘에게 나타난 천사 가브리엘은 언제 포로생활이 끝나고 야웨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귀환하십니까, 자기들 죄를 용서하시고 돌아오소서 기도했던 그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기간을 제시하며 주님이 절대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셨음을 알렸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유대인이 제국의 오랜 통치를 거치며 비유대인을 향한 적대감이 최고로 고조되었던 것을 목격하셨습니다. 유대인의 이 적대감은 온 세상을 구속하신다는 야웨 하나님의 뜻과 공명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자신 안에서 유대인에게 약속되었던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며, 그들이 주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 포로생활 기간만큼 비유대인에게 당한 일들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말씀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태 사도는 예수님이 그 앞에 죄를 짓거든 한 사람, 그 다음 몇 사람, 마침내는 공동체를 통해 죄를 지은 가해자의 범죄 사실을 지적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무조건적인 가해자에 대한 용서를 말씀하신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예수님은 피해자가 고통받는 일을 공동체가 같이 부담해야 하며, 주님의 몸된 공동체가 죄를 고발하는 데도 가해자가 듣지 않으면 더 이상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분명 피해자의 행복을 주님이 중요히 여기심을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피해자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죄를 지적하는 일을 하는 주님의 몸된 공동체가 하는 어떤 일에도 주님이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시며 교회 공동체에 힘을 실어줍니다. 이 주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모든 사람을 구속하시기 위해 스가랴서 예언대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평화의 왕이셨습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은 스가랴 예언자의 말대로 온 세상에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왕은 자기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과 백성 간에 피로 맺은 언약이 있기에 그 백성을 특별히 건져낼 것이라고 예언자가 전한 대로 예수님은 고통 속에 신음하는 자기 백성의 편에 서셨고 지금도 함께 하십니다. 이 은혜의 왕이 피해자의 모든 아픔을 반드시 살피십니다. 바울 사도는 이 바탕 위에서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를 통해 비유대인 성도가 유대인 성도를 미워해 적대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 원 백성인 유대인을 언제든지 다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실 수 있는 분임을 밝힙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주님이 온 세상을 구속하신다는 일을 위해 주체하지 못하는 미운 감정으로 자신이 행하는 일을 거부한 유대인을 잠시 밀어내고 비유대인 성도를 구속하신 일을 언급하며, 전적인 주님의 은혜로 구속받은 이들이라면 그분을 이해하고 주님과 맺은 언약에 신실히 살아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주님의 백성을 환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에 관한 비유는 결국 온 세상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그분 백성이 잊지 않고 끊임없이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분노가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피해자인 자기 백성을 위로하시고 행복하게 하십니다. 망나니 둘째 아들을 받아준 것에 화가 난 첫째 아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달래는 아버지처럼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위로하시고 회복하시는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