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렁청한 들판에 내려앉은 황금빛 가을이 눈부시다. 싹을 틔워 하늘을 향해 자라던 벼가 이삭을 달고 속이 차니 땅이 그리운지 모두 고개를 숙였다. 결국 황혼에 이르러서야 자기가 난 땅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찬바람머리의 백아산 어귀, 주차장에서 내리자 노랗게 물들어 가는 은행잎들이 코앞에서 반긴다. 옆자리에서 가을바람에 한닥이는 느티나무 잎사귀들도 수줍은 새색시 얼굴빛마냥 발그레하다. 근처 묵정밭에 흐드러진 억새는 탐스런 흰머리를 날리며 황혼의 아쉬움을 달래는데 이웃한 뙈기밭의 단수수가 머리를 꼿꼿이 세워 그 모습을 지켜본다. 참새들이 한눈파는 단수수의 알갱이를 눈독 들이며 부산하고 풀벌레 소리가 은은한 그곳에는 두메의 정취가 물씬하다.
골짜기로 들어서자 산록의 쌀쌀함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산꼭대기까지 2.7킬로미터라는 등산로 입구의 표지판을 보며 산에 올랐다. 소나무보다는 참나무와 단풍나무 등 갈잎나무들이 더 많은 산이었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의 감나무에 앉은 까치는 전해 줄 희소식이 없는지 한갓지게 홍시만 쪼고 있다. 희소식이 없더라도 까치가 시치미 떼고 낭랑한 목소리로 울어 줬더라면 발걸음이 훨씬 가벼웠으리라. 앙증맞은 다람쥐 한 마리도 상수리를 찾아 헤매는지 낙엽 위를 날쌔게 오간다. 등산길 군데군데 상수리 아람이 눈에 띠는데 불청객들 때문에 엉뚱한 곳을 누비는 듯하여 죄스럽고 안타깝다. 바위로 사부랑삽작 기어올라 두리번거리는 다람쥐에게 다가가 알려 주고 싶은 마음이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할 즈음 덤부렁듬쑥한 곳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보니 비바람에 사위어 가는 아름드리나무 등걸에서 이름 모를 버섯이 자란다. 사물기생 버섯 균사가 잘려 죽은 나무 등걸에 자리를 잡았으리라. 그토록 옹골찬 생명력을 지닌 곳이 숲 말고 또 어디에 있으랴.
숨을 헐떡이며 백아산꼭대기에 도착하여 무뭉스름한 바위에 앉자마자 시원한 골바람이 이마의 땀을 씻으며 노그라진 몸을 달랜다. 사방이 탁 트여 어디를 둘러봐도 짙푸른 솔버덩이 끝없이 이어지고 골짜기 사이사이의 넓지 않은 들판들만 황금빛 양탄자가 깔린 듯이 샛노랗다. 하얀 거위를 닮은 산이라더니 과연 주위에는 푸나무서리에 하얗게 박힌 바위들이 장관이다. 인근 활엽수 군락지의 붉거나 노란 단풍잎들은 엄동설한에도 지지 않고 도도한 소나무의 바늘잎들조차 기죽을 만큼 아름답다. 하지만 이파리들이 생명의 끈을 놓기에 앞서 마지막 치장이 단풍일지니 멧기슭에 어느덧 황혼이 드리우고 있음이 아니랴. 아래뜸 들녘의 황혼은 샛노랗고 산 어귀 억새밭의 황혼은 새하얗더니 그곳에 내려앉고 있는 황혼은 울긋불긋하다.
푸나무를 키우고 열매를 살찌우는 것은 오로지 이파리의 몫이다. 봄에 싹을 틔우고 자란 이파리는 햇빛을 받아 부지런히 양분을 만들어 나무와 열매에 아낌없이 준다. 다람쥐가 기를 쓰고 찾는 상수리 아람도 잎에서 만들어진 양분을 먹고 커서 땅에 떨어진 것이다. 어디 그 뿐이랴. 갈잎나무 잎사귀들은 가을날에 고운 빛깔로 단장하고 아름다움을 뽐내다가 이내 떨어지고 썩어서 거름이 된다. 나뭇가지들이 안간힘을 쓰며 잎사귀들을 붙잡겠지만 머지않아 불어 올 소슬바람이 기어코 둘을 떼어 놓을 것이다. 그때는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가지와 잎사귀들의 신음이 바람결에 실어오리라.
잎사귀들은 자식들을 위해 평생 애쓰며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주는 부모들과도 닮았기에 단풍을 보며 인생의 황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 부모들의 황혼은 대개 자식들을 위해 헌신한 보람도 없이 쓸쓸하다. 부모와 자식의 차이에 관한 다음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을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느 날, 팔십대의 노인과 오십대의 아들이 거실에 있었는데 까마귀 한 마리가 창가에 앉았다. 노인이 ‘저게 뭐냐?’라고 묻자 아들은 ‘까마귀에요.’라고 대답했다. 그래도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질문을 하는 노인에게 아들이 재차 ‘까마귀라니까요.’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노인은 한참 후에 또 물었는데 기억력이 흐린 탓이었다. 아들이 화를 내며 ‘글쎄 까마귀라고요. 왜 자꾸만 같은 질문을 하세요?’라고 소리쳤다. 수일 후 아들이 아버지가 쓰시던 물건들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낡은 일기장을 발견했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일기도 있었다. ‘오늘 까마귀 한 마리가 창가에 앉았다. 저게 뭐냐고 묻는 어린 아들에게 까마귀라고 말해주었는데 아들은 까마귀가 날아갈 때까지 연거푸 열 번을 물었다. 나는 같은 대답을 열 번이나 하면서도 즐거웠다. 새로운 것에 관심이 있는 아들이 기특했기 때문이다.’ 자기가 세 살배기 아이였을 때의 일기였던 것이다.”
아름다움과 황혼 이미지의 두 얼굴을 가진 가을날의 단풍, 과연 백아산기슭을 나서며 단풍을 보니 여태 보이던 아름다움은 간데없고 황혼만이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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