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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례(李孝禮)
[문과] 세종(世宗) 1년(1419) 기해(己亥) 증광시(增廣試) 동진사(同進士) 8위(18/33)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C774D6A8B840U9999X0
본인본관 인천(仁川)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乙3‧丙7‧同進23]
전력 현감(縣監)
관직 예조판서(禮曹判書)
관직 이조좌랑(吏曹佐郞)
관직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주1)
문과시제 책문(策問)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문화(李文和)[麗文]
[조부(祖父)]
성명 : 이심(李深)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익세(李益歲)
[외조부(外祖父)]
성명 : 최렴(崔濂)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권숙(權肅)
본관 : 미상(未詳) 안동(安東)
[주 1] 관직 : 『강호선생실기(江湖先生實記)』(김숙자)와 『이준록(彛尊錄)』(김종직)을 참고하여 관직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최렴(崔濂)
최렴(崔濂) 미상∼ 1415년(태종 15) .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
부친은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 최원유(崔原儒) 이며, 모친은 우왕의 장인인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림(李琳) 의 딸이다. 충혜왕 때에 문과에 급제하였..
이문화(李文和)
[고려문과] 우왕(禑王) 6년(1380) 경신(庚申) 경신방(庚申榜) 을과(乙科) 1[壯元]위(1/33)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C774BB38D654B1358X0
자(字) 백중(伯中)(주1)
시호(諡號) 공도(恭度)
생년 무술(戊戌)(주2) 1358년 (공민왕 7)
졸년 갑오(甲午)【補】(주3) 1414년 (태종 14)
향년 57세
합격연령 23세
본인본관 인천(仁川)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참찬의정부사, 예문관대제학,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백중(伯中), 호는 오천(烏川).
평장사(平章事) 이지저(李之氐)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전공판서(典工判書) 이심(李深)이다.
1380년(우왕 6) 문과에 장원 급제해 우정언·우헌납·예문응교를 거쳐 경상도안렴사를 지내고, 공양왕 때 우사의를 역임하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좌간의대부에 등용되고, 1395년(태조 4) 검교시중직(檢校侍中職)의 혁파를 주장하였다.
1397년 좌승지를 거쳐 이듬 해 도승지 겸 상서윤을 지냈다.
1399년(정종 1) 생원시를 관장하고, 이듬 해 첨서의흥삼군부사(簽書義興三軍府事)가 되어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해 사평부우사로 등용되었으나 분경(奔競 :大官이나 권세가를 찾아다니면서 엽관이나 이권운동을 함)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취임하지 못하고 예문관대제학이 되었다.
1402년(태종 2) 경상도도관찰출척사로 외방에 나가고 이어 참찬의정부사·사평부우사를 거쳐 예문관대제학·대사헌을 지냈다.
1405년 예조판서를 거쳐 이듬 해 전라도도체찰사 임무를 대행하고 이어 명나라 황엄(黃儼)의 접반사가 되었다.
1408년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그 해 처녀진헌사(處女進獻使)로 명나라에 갔다.
1409년 형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민무질(閔無疾) 사건에 연루, 면직되었다.
1411년 개성유수로 있을 때 저화(楮貨)에 ‘삼사신판(三司申判)’이라는 글 대신 ‘호조신판(戶曹申判)’으로 바꿀 것을 주장, 시행하게 하였다.
1413년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 해 귀국해 참찬의정부사가 되었다.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 장흥의 금계사(金溪祠), 대구의 서계서원(西溪書院), 함안의 도천사(道川祠)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공도(恭度)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문화(李文和))]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乙3‧丙7‧同進23]
전력 낭장(郞將)
관직 예판(禮判)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심(李深)
[조부(祖父)]
성명 : 이익세(李益歲)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필(李泌)
[외조부(外祖父)]
성명 : 권육(權育)
[처부(妻父)]
성명 : 최렴(崔濂)
[주 1] 자 : 『목은고(牧隱藁)』 卷10, 說, [백중설 증이장원별(伯中說贈李狀元別)]을 참고하여 자를 "백중(伯仲)"에서 "백중(伯中)"으로 수정.
[주 2] 생년 : 「『태종실록』 27권, 태종 14년(1414) 6월 1일」 졸기 기사를 참고하여 생년을 계산함. 졸년(1414)에서 “56”을 역산하여 생년 “1358”을 추가.
[주 3] 졸년 : 「『태종실록』 27권, 태종 14년(1414) 6월 1일」 졸기 기사를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至是卒, 年五十七.”을 참고.
[출전]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 4650-10])
이지저(李之氐)
[고려문과] 예종(睿宗) 15년(1120) 경자(庚子) 경자방(庚子榜) 을과(乙科) 1[壯元]위(1/38)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C774C9C0C800B1092X0
자(字) 종국(宗國)
시호(諡號) 문정(文正)
졸년 을축(乙丑)【補】(주1) 1145년 (인종 23)
본인본관 인천(仁川)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고려전기 정당문학판한림원사, 참지정사 판서경유수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본관은 인주(仁州)이다. 이예(李預)의 손자이며, 시중을 지낸 이공수(李公壽)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였고, 문장에 능하여 글을 지을 때에는 미리 지어둔 것과 같았다고 한다.
1120년(예종 15)에 장원으로 과거에 급제한 뒤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인종 초에는 우정언에 임명되어 지론(持論)이 공정하였으나, 재상의 비위를 거슬러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옮겨졌다가 서해도안찰사로 나갔다.
이자겸이 정권을 잡자 이를 노려 많은 무리들이 다투어 붙었으나, 이지저는 친족이면서도 상종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자겸의 사자들이 주군(州郡)에서 뇌물을 받아들이므로 이를 금하다가 미움을 받아 지평주군사(知平州郡事)로 좌천되었다.
이자겸이 물러나자 기거주(起居注)가 되었다. 또한, 묘청(妙淸)·백수한(白壽翰) 등과는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여 금나라에 대하여 신중론을 폈다. 왕이 이를 옳게 여겨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임명하였고, 1135년(인종 13)에 묘청 등이 난을 일으키자 인종에게 건의하여 문공인(文公仁)·임경청(林景淸) 등을 파면시켰다.
이듬해 좌승선으로 서경을 초유(招諭)하였다. 1138년 추밀원부사가 되고, 이어 어사대부 동지추밀원사(御史大夫同知樞密院事), 추밀원사로 승진되었으며, 동지공거가 되어 이대유(李大有) 등 29인을 뽑았다.
1140년 예부상서가 되었고, 1141년 정당문학 판한림원사(政堂文學判翰林院事)가 되었다. 1142년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 수사공 좌복야(守司空左僕射)에 오르고, 1143년에는 참지정사 판서경유수사(參知政事判西京留守事)를 지냈다.
1145년에 정당문학 참지정사로 재직할 때 죽었다. 중서시랑평장사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지저(李之氐))]
[이력사항]
선발인원 38명
관직 정당문학(政堂文學)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공수(李公壽)[麗文]
[조부(祖父)]
성명 : 이예(李預)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자상(李子祥)
[외조부(外祖父)]
성명 : ▣○○(▣○○)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
본관 : 미상(未詳)
[안항(鴈行)]
제(弟) : 이지간(李之幹)
제(弟) : 이지무(李之茂)
제(弟) : 이지혜(李之惠:승려)
제(弟) : 이지의(李之懿)
제(弟) : 이지철(李之喆)【補】(주2)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2]안항 : [이공수묘지명(李公壽墓誌銘)]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 4650-10])
이공수(李公壽)
[고려문과] 선종(宣宗) 3년(1086) 병인(丙寅) 병인방(丙寅榜) 을과(乙科) 2위(2/33)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C774ACF5C218D1137X0
초명(初名) 이수(李壽)
시호(諡號) 문충(文忠)【補】(주1)
졸년 정사(丁巳) 1137년 (인종 15)
본인본관 인천(仁川)(주2)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고려전기 검교사도수사공참지정사, 중서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한 관리.문신.
본관은 인주(仁州)이다. 초명은 이수(李壽), 자는 원로(元老)이다. 이예(李預)의 아들이며, 문하시중을 지낸 최유선(崔惟善)의 외손자이다.
1086년(선종 3) 5월 과거에 급제하여 궁전고판관(宮箭庫判官)이 되었고, 직한림원(直翰林院), 첨사부주부(詹事府主簿), 우습유 지제고(右拾遺知制誥)를 역임하고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서 서경유수판관이 되었다.
예종이 서경에 임하였을 때 백성을 잘 다스렸다 하여 칭찬을 받았고, 환도할 때 호종할 것을 명받았으나 사양하였다.
임기가 끝나자 중앙으로 돌아와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郎), 형부원외랑, 좌사낭중, 비서소감, 어사중승 등을 역임한 후 1110년(예종 5) 병부시랑이 되었는데, 이때 선군사(選軍司)의 일을 맡을 적임자로 재상들에 의해 추천되기도 하였다.
우간의대부, 국자감대사성 겸 직문하성, 우산기상시 동수국사 등을 역임 한 후 1117년(예종 12) 공부상서가 되었다.1124년(인종 2) 겨울 검교사도 수사공 참지정사(檢校司徒守司空參知政事)로 발탁된 뒤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다.
1126년(인종 4) 2월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진압된 뒤에 12월 판이부사 감수국사(判吏部事監修國史)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6월 문하시중으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왕좌재(王佐材) 등 33인을 뽑았다.
1126년 6월 이자겸의 난 때 세운 공으로 추충위사동덕공신(推忠衛社同德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개부의동삼사 문하시중 상주국(開府儀同三司門下侍中上柱國)이 되고, 1128년 3월 문하시중이 되자, 여러 차례 치사를 청하여 1131년 동덕공신(同德功臣)을 더하여 치사(致仕)하였고, 1137년(인종 15) 7월 세상을 떠났다.
1130년 4월 양부(兩府)의 대신들과 의논하여 관리들에게 쌀을 차등 있게 내게 하고 그 쌀로 현성사(賢聖寺)와 영통사(靈通寺) 두 절에서 재(齋)를 올려 나라를 위해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내려줄 것을 기도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공수(李公壽))]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예(李預)
[조부(祖父)]
성명 : 이자상(李子祥)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한(李翰)
[외조부(外祖父)]
성명 : 최유선(崔惟善)[麗文]【補】(주3)
본관 : 해주(海州)【補】
[처부(妻父)]
성명 : 김보위(金寶威)【補】(주4)
[주 1] 시호 : [이공수묘지명(李公壽墓誌銘)]을 참고하여 시호를 추가.
[주 2] 본관 : [이공수묘지명(李公壽墓誌銘)]과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 4650-10]) 내의 자 이지저(李之氐)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본관을 "인천(仁川)"으로 추가.
[주 3] 외조부 : [이공수묘지명(李公壽墓誌銘)]을 참고하여 외조부를 추가.
[주 4] 처부 : [이공수묘지명(李公壽墓誌銘)]을 참고하여 처부를 추가.
[출전]
『高麗時代 蔭叙制와 科擧制 硏究』(朴龍雲, 一志社, 1990.[355_167])
이예(李預)
[고려문과] 문종(文宗) 99년미상(未詳) 시년미상(未詳)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2C774C608FFFFU9999X0
시호(諡號) 문현(文顯)【補】(주1)
본인본관 인천(仁川)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고려전기 정당문학 형부상서, 중서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본관은 인주(仁州)이다.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를 지낸 이한(李翰)의 손자로, 이자상(李子祥)의 아들이다. 정신현비(貞信賢妃)의 아버지이다.
문종 때 급제하여 상서공부원외랑(尙書工部員外郎)이 되었고, 1085년(선종 2) 4월 상서예부시랑(尙書禮部侍郎)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1087년 12월에 한림학사가 되었고, 1092년 6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1093년 5월 지중추원사 한림학사 승지(知中樞院事翰林學事承旨)가 되고, 1094년 3월 지중추원사로 다시 지공거가 되어 진사를 뽑았다.
1095년(헌종 1) 5월 정당문학 형부상서(政堂文學刑部尙書)가 되었다.
이자의(李資義)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되었으나, 정신현비의 딸인 연화궁주(延和宮主)가 예종의 비가 되자 다시 부름을 받았다.
1106년(예종 1) 12월 검교태위 형부상서 정당문학(檢校太尉刑部尙書政堂文學)이 되었으며, 판어서원사(判御書院事)로 치사(致仕)하였으며,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에 이르러 죽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예(李預))]
[이력사항]
관직 정당문학(政堂文學)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자상(李子祥)
[조부(祖父)]
성명 : 이한(李翰)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허겸(李許謙)
[외조부(外祖父)]
성명 : 유○○(柳○○)【補】(주2)
[처부(妻父)]
성명 : 최유선(崔惟善)[麗文]【補】(주3)
본관 : 해주(海州)【補】
[가족과거]
자(子) : 이공수(李公壽)[麗文]
손(孫) : ㅇ(ㅇ○ㅇ)
[주 1] 시호 : [이공수묘지명(李公壽墓誌銘)]을 참고하여 시호를 추가.
[주 2] 외조부 : [이공수묘지명(李公壽墓誌銘)]을 참고하여 외조부를 추가.
[주 3] 처부 : [이공수묘지명(李公壽墓誌銘)]을 참고하여 처부를 추가.
[출전]
『高麗時代 蔭叙制와 科擧制 硏究』(朴龍雲, 一志社, 1990.[349_135])
정신현비(貞信賢妃)
출생일 미상
사망일 미상
고려전기 제13대 선종의 왕비.
인주이씨(仁州李氏)로 이자연(李子淵)의 동생인 이자상(李子祥)의 손녀이며, 예종 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에 오른 이예(李預)의 딸이다.
예종의 비가 된 연화궁주(延和宮主, 敬和王后)를 낳았다. 선종이 국원공(國原公)으로 있을 때 납비(納妃)되었으나 곧 죽었다. 1107년(예종 2)에 예종이 선종의 묘정(廟廷)에 배향하려 하였으나 간관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신현비(貞信賢妃))]
이자상(李子祥)
이한(李翰)
이허겸(李許謙)
출생일 미상
사망일 미상
고려전기 상서우복야 상주국 소성현개국후 식읍일천구백오십호를 역임한 관리.문신.
본관은 인주(仁州)이다. 문하시중을 지낸 이자연(李子淵)의 할아버지이다. 문하시중을 지낸 김은부(金殷傅)의 장인이고, 현종의 비인 원성태후(元成太后)의 외할아버지이다.
1024년(현종 15) 상서우복야 상주국 소성현개국후 식읍일천구백오십호(尙書右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侯食邑一千九百五十戶)에 증직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허겸(李許謙))]
최유선(崔惟善)
[고려문과] 현종(顯宗) 21년(1030) 경오(庚午) 경오방(庚午榜) 을과(乙科) 1[壯元]위(1/18)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CD5CC720C120D1075X0
시호(諡號) 문화(文和)
졸년 을묘(乙卯) 1075년 (문종 29)
본인본관 해주(海州)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고려전기 지중추원사, 문하시중, 지공거 등을 역임한 관리.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중서령(中書令) 최충(崔冲)의 아들이다.
1030년(현종 21) 과거에 급제하여 7품으로 한림원에 들어갔다.
그 뒤 1047년(문종 1) 어사잡단(御史雜端)을 거쳐 1052년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역임했다.
1055년 지중추원사로 공부시랑 이득로(李得路)와 조상회장사(弔喪會葬使)가 되어 거란 흥종(興宗)의 장례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그 뒤, 1061년 판상서예부사(判尙書禮部事)를 거쳐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어 추충찬화강정수제공신(推忠贊化康靖綏濟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개부의동삼사 수태사 상주국(開府儀同三司守太師上柱國)을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대를 이은 유종(儒宗)으로 학문이 깊고 사리에 밝았으며 여러 차례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수태위 중서령(守太尉中書令)에 추증되었으며,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화(文和)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최유선(崔惟善))]
[이력사항]
선발인원 18명
전력 진사(進士)
공신 공신(功臣)
관직 시중(侍中)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최충(崔冲)[麗文]
[조부(祖父)]
성명 : 최온(崔溫)
[증조부(曾祖父)]
성명 : 최○○(崔○○)
[외조부(外祖父)]
성명 : ▣○○(▣○○)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
본관 : 미상(未詳)
[출전]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 4650-10])
최충(崔冲)
[고려문과] 목종(穆宗) 8년(1005) 을사(乙巳) 을사방(乙巳榜) 갑과(甲科) 1[壯元]위(1/20)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2CD5CCDA9FFFFB0984X0
자(字) 호연(浩然)
시호(諡號) 문헌(文憲)
생년 갑신(甲申) 984년 (성종 3)
졸년 무신(戊申) 1068년 (문종 22)
향년 85세
합격연령 22세
본인본관 해주(海州)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고려전기 문하시랑평장사, 문하시중, 도병마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최충은 고려전기 문하시랑평장사, 문하시중, 도병마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984년(성종 3)에 태어나 1068년(문종 22)에 사망했다.
문장에 능하여 1013년(현종 4) 국사수찬관으로서 태조에서 목종에 이르는 『칠대 실록』을 편찬했다. 문종 즉위 후 문하시중이 되어 율령을 정리했고 서북 주·진의 공역 금지를 청하고 동여진에 대한 대비책을 건의하는 등 뛰어난 행정 능력을 보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후 한국 사립학교의 원조 격인 구재학당을 세워 교육과 인재양성에 힘썼다. 교육을 통해 국가의 대계를 세움으로써 해동공자로 칭송되었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성재(惺齋)·월포(月圃)·방회재(放晦齋).
아버지는 최온(崔溫)이다. 사학십이도(私學十二徒)의 하나인 문헌공도(文憲公徒)의 창시자이다.
1005년(목종 8)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우습유(右拾遺)에 올랐고, 1013년(현종 4)에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된 역대의 문적을 재편수하는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을 겸해 태조에서 목종에 이르는 『칠대실록(七代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우보궐(右輔闕)·기거사인(起居舍人)·중추직학사(中樞直學事)를 역임하고, 1025년에 한림학사 내사사인 지제고(翰林學士內史舍人知制誥)를 거쳐 예부시랑 간의대부(禮部侍郎諫議大夫)에 올랐다.
1033년(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이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어 『설원(說苑)』 육정(六正)·육사(六邪)의 글과 한(漢)나라에서 자사(刺史)에게 준 6조(六條)의 글을 각 관청에 붙이게 하여 좋은 정치를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 뒤 형부상서 중추사(刑部尙書中樞使)로 전임되었다.정종 초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1037년(정종 3) 참지정사수국사(參知政事修國史)로 『현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판서북로병마사(尙書左僕射參知政事判西北路兵馬使)로 영원(寧遠)·평로(平虜) 등에 진(鎭)을 설치하였다.
변경에서 돌아와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에 올랐고, 수사도 수국사 상주국(守司徒修國史上柱國)이 더해졌다가 곧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로 옮겼다.
문종이 즉위하자 문하시중이 되어 율령서산(律令書算)을 정했고, 곧 수태보(守太保)가 더해졌다.
1050년(문종 4)에 개부의동삼사 수태부(開府儀同三司守太傅)가 더해지고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의 호가 내려졌다. 또한, 시중으로 도병마사를 겸하자 서북 주(州)·진(鎭)의 공역(工役) 금지를 청해 시행하게 했으며, 동여진(東女眞)에 대한 대비책을 건의하였다.
1053년 나이가 많은 것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자, 이를 만류하는 조서와 함께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恊謀同德治理功臣)의 호와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 문하시중(開府儀同三司守太師兼門下侍中)이라는 벼슬과 상주국(上柱國)이라는 훈작을 받았다.
1055년 내사령(內史令)이 되었는데, 이후 관제 개정으로 인하여 내사문하성을 중서문하성으로 개칭하였으므로 중서령으로 임명하였다. 다시 추충찬도좌리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推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이라는 호를 받았다.
이렇게 관인으로 현달했을 뿐만 아니라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 교육과 인재양성에도 힘썼다. 당시 개경에는 사학십이도라는 이름난 사숙(私塾)이 있었는데, 최충의 구재학당(九齋學堂)은 그 가운데서도 성황을 이루어 과거에 급제하는 생도가 많았다.
『고려사』 열전에, “동방학교의 일어남이 최충에서 비롯해 그를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일컬었다.”라고 하였다.
문종 초는 거란 침입의 전화가 아문 뒤, 세상은 태평해졌지만 아직 국학(國學)은 유명무실이고, 향학(鄕學)도 갖추어지지 못한 때였으므로 문교(文敎)의 새바람이 점차 요구되었다. 특히, 문반(文班) 현직자를 우대하면서 그들 중심의 국가질서가 정착되고 있었으며, 또 왕실·외척이 세력을 부리게 됨에 따라 이들과 대결하려면 과거에 급제해야만 하였다.
최충이 사숙을 열자, 문전성시를 이룬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연유한 것이다. 그리하여 송악산(松岳山) 아래에 공부하는 내용에 따라 방의 이름을 낙성재(樂聖齋)·대중재(大中齋)·성명재(誠明齋)·경업재(敬業齋)·조도재(造道齋)·솔성재(率性齋)·진덕재(進德齋)·대화재(大和齋)·대빙재(待聘齋) 등으로 지어 구재학당을 마련, 본격적인 사립학교를 시작하였다.
최충은 질서와 법도를 갖춘 교육사업을 전개해, 당시 이곳의 학생은 시중(侍中) 최공도(崔公徒) 또는 최충도(崔冲徒), 뒤에는 시호를 따서 문헌공도라 불렸다.
구재(九齋)에서는 구경(九經: 周易·尙書·毛詩·儀禮·周禮·禮記·春秋左氏傳·春秋公羊傳·春秋穀梁傳)·삼사(三史: 史記·漢書·後漢書)를 중심으로 시부(詩賦)와 사장(詞章), 즉 문학이나 유교 교육의 일방적인 요청에 따라 문장공부도 많이 시켰다. 그러나 과거를 위한 교육에 그치지 않고, 조직적이며 함축성 있는 인격도야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최충의 교육방침은 하과(夏課)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즉, 여름에는 피서를 겸해 개경 탄현(炭峴) 밖에 있는 귀법사(歸法寺) 등의 산사(山寺)·승방을 빌려 공부하였다. 특히 과거에 합격한 제자 중 아직 관리가 되지 못한 자를 선정해 함께 생도들을 가르쳤다.
간혹 저명한 학자나 대관들이 들르면, 생도들과 함께 초에 금을 긋고 시간 내에 시를 지어 읊는 각촉부시회(刻燭賦詩會)를 개최하였다. 이 때 성적을 발표해 차례로 불러앉히고 소작(小酌)을 베푸는데 진퇴의 절도와 장유(長幼)의 서열이 분명해 종일토록 서로 수창(酬唱)하는 것이 볼만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감탄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최충의 교육사업은 큰 반향을 일으켜 과거를 볼 사람은 최충의 도중(徒中)에 속하기를 원하였다.
또 이것을 모방해 개경에 11개소, 합하여 12도의 사학이 다투어 세워지게 되었다. 이들 도의 설립자는 모두가 학식과 명망이 있고 벼슬과 지체가 높았으며, 대체로 과거시험관을 지내고 유학에 힘쓴 선비들이었다. 따라서 사학은 관학을 압도해 널리 오래도록 번창해나갔다.
그 중에서도 최충의 도가 제일 먼저 이루어지고 가장 권위가 있었으며, 성황을 이루어, 최충은 한국사립학교의 원조가 되었으며, 해동공자로 칭송되었던 것이다. 그 뒤 최충의 사업은 자손에게 계승되어 자손들이 문행(文行)으로 출세했을 뿐 아니라, 후진교육에 힘써 문헌공도는 연면히 학계의 중심체가 되었다.
최충의 문장은 시구 몇 절과 약간의 금석문자가 전해질 뿐인데, 이것은 무인의 난으로 문신이 살해되고 그들의 문집도 불태워질 때 함께 없어진 탓이라 한다.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원주 거돈사(居頓寺)의 원공국사승묘지탑비문(圓空國師勝妙之塔碑文)과 직산 홍경사(弘慶寺)의 갈기(碣記)가 남아 있다.정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가 뒤에 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문헌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최충(崔沖))]
[이력사항]
선발인원 20명
전력 진사(進士)
관직 상서(尙書)
관직 태사(太師)
관직 중서령(中書令)
기타 시칭해동공자(時稱海東孔子) 건문헌당사지(建文憲堂祀之)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최온(崔溫)
[조부(祖父)]
성명 : 최○○(崔○○)
[증조부(曾祖父)]
성명 : 최○○(崔○○)
[외조부(外祖父)]
성명 : ▣○○(▣○○)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
본관 : 미상(未詳)
[가족과거]
자(子) : 최유선(崔惟善)[麗文]
손(孫) : 최사추(崔思諏)[麗文]
[출전]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465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