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족하지 않는 복음의 향연
시편121:1-3 2024/1/14 주현 후 제2주
121: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121: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121: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평안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우리 자녀와 이웃들에게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한 달 전일입니다.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면서 시멘트 바닥에서 제법 크게 엉덩방아를 찌었습니다. 얼마나 아프던지 이제야 멍도 사라지고, 몸도 좀 편해졌습니다.
이처럼 발을 잘못 디디는 실족失足은 아주 무서운 결과를 낳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자기 목숨까지 잃을 만큼, 아주 무서운 것이 실족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육신(몸)을 망가트리는 실족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영혼을 망가뜨리는 신앙의 실족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신앙의 실족과 관련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1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예수 그리스도)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1:10 밤(죄)에 다니면 빛(예수 그리스도)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따라서 우리의 영혼을 위협하는 신앙의 실족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머물고, 우리 또한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15:6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그는 쓸모 없는 가지처럼 버림을 받아서 말라 버린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서 태워 버린다.
15:7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15: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내 제자가 되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15:10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15:11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15:12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는 오늘 시편의 시인도 같은 고백을 합니다.
육신의 실족과 신앙의 실족
즉 죄의 실족으로부터, 불의의 실족으로부터, 사망의 실족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시기 위해 아주 오래전부터 머물러 계시는 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여호와(계시는 분)라는 이름을 가진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을 지켜주시기 위해 아주 오래전부터 머물러 계시는 하나님(임마누엘)을 이렇게 높여 찬양했던 것입니다.
시121: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121: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우리 가운데 머물러 계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121: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태초부터 임마누엘, 우리 가운데 머물러 계시는 분’
‘그렇게 실족, 헛발을 디디지 않게 나를 지켜 주시는 분’
‘심지어 나를 지켜주시기 위해서 졸지도 않으시는 분’
그분이 바로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드는 불편한 생각이 하나 있었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항상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다는 것이 우리의 핵심 신앙 고백인데, 왜 현실의 교회는 왜 현실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핵심 신앙을 보여주지 못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실족하게 하는가?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물음은 제가 처음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이 문제에 대해서 아주 심각하게 고민하시지요.
그래서 이렇게 까지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마18: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18:6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 가운데서 하나라도 걸려 넘어지게(실족) 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차라리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
18:7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실족) 하는 일 때문에 세상에는 화가 있다. 걸려 넘어지게(실족)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걸려 넘어지게(실족) 하는 일을 일으키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얼마 전에 황당한 뉴스를 보았습니다.
부친상을 당한 여자 친구가 화장장에서 눈물을 보였다는 이유로 그의 남자 친구로부터 폭행을 당했다는 뉴스였습니다.
여자를 때린 남자 친구, 다름 아닌 나이가 지긋한 목사였습니다.
여자 친구를 폭행 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버지가 지금 천국 가는데, 왜 믿음 없이 우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도대체 아버지 장례 때 울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요?
하나 더 이야기 할까요?
얼마 전 강남 어느 대형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중년의 어느 집사님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더니, 정말 열심히 신앙 생활했습니다. 새벽기도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헌금 생활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심지어 봉사 활동까지 늘 모범을 보이던 집사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500억 원 사기죄로 지금 재판에 넘어갔습니다.
이 분이 똑똑한 강남 교인들에게 고액의 투자 금을 뜯어내는데 사용했던 기술, 그 기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놀랍게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반드시 고수익을 보장하신다.'
'기도의 힘을 믿어라. 왜 우리를 부요케 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가?'라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실족하게 하는 헛발질하는 신앙을 볼 때 마다 마음이 무척 무겁고 착잡합니다.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말을 잠시 빌린다면, 애가 타지요.
고후11:29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넘어지면, 나도 애타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실족하게 하는 신앙의 헛발질, 과연 이것뿐일까요?
아니지요.
한국교회가 그리고 한국교회 성도들이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신앙의 헛발질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①탐욕에 찌든 번영신앙
②독선으로 가득한 율법신앙
③광기어린 맹신
이것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 드리지 않겠습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제 생각엔, 왜곡된 기도 생활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자기 욕망을 채우는 기도 생활과 하나님을 채우는 기도 생활을 잘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는 교회들(신천지/만민중앙/성락)이 끊임없이 양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곡되지 않은 참된 기도란, 어떤 것을 두고 하는 말일까요?
기도에 대한 여러 정의가 있겠지만, 오늘은 4세기 사막 교부 에바그리우스의 기도의 정의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겠습니다. 에바그리우스는 자신의 저술 ‘기도론 On Prayer’에서 기도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① 기도란?
‘복음의 향연’(an evangelical feast)이라고 정의합니다.
곧 구원의 축제라는 것입니다.
그의 책 서문에 나오는 글입니다.
나는 기도에 관한 이 글을 153개의 문장으로 나눴습니다.
당신께 복음의 향연을 보냅니다.
에바그리우스가 이 한 문장에서 우리에게 강력하게 제안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의 기도가 ‘복음의 향연’이자 ‘구원의 축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한 마디로 기도가 즐거운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율법)이 아니라 ‘복음의 향연’ ‘구원의 축제’라는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를 대하는 바른 태도(자세)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복음의 향연’ 곧 ‘구원의 축제’로 기도 생활을 즐겼던 분, 누가 있을까요?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향연’이자 ‘구원의 축제’인 기도 생활이 전혀 부담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쁨이자 감사였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설교했던 것입니다.
살전5:16 항상 기뻐하십시오.
5:17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5:18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② 에바그리우스 말한 기도의 정의는 하나님과의 사귐이었습니다.
기도는 영혼이 하나님과 사귀는 것입니다.(3)
다시 말해 사귐을 통해 하나님을 끊임없이 사랑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에바그리우스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 외에 무슨 다른 좋은 것이 있겠습니까?(33)
그래서 에바그리우스에게 있어서 기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계명이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첫째 계명, 기도 생활을 늘 기쁨으로 그리고 감사함으로 꾸준히 이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도 생활 속에서 ‘복음의 향연’ ‘구원의 축제’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③ 특히 우리 한국교회가 꼭 귀담아 들어야할 기도의 정의인데,
에바그리우스 말한 기도의 세 번째 정의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하려면, 아무도 슬프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기도를 온유의 꽃(재단 꽃 장식)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슬픔(분노)로부터의 자유 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기도의 힘뿐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치료해주면서 자신을 치료하지 않으면 진정한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25)
욕망은 분노의 연료입니다. 분노는 영적인 장님이 되게 하여 기도를 어지럽힙니다. 따라서 분노하지 않게 자신을 잘 지키면 어떤 종류의 욕망에도 굴복하지 않습니다.(26)
그러니 여러분
타인(이웃)을 존엄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힘
바로 기도의 힘을 기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④ 에바그리우스가 제시한 기도의 정의는?
세속적이며 자기중심적인 기도를 경계, 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소원성취를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대의 소원이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여 주십시오’(눅 22:42)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대가 구하는 것이 모두 그대에게 선하고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31)
물론 에바그리우스가 우리의 소원을 구하는 간구의 기도를 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반드시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간구의 기도가 있는데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이렇게 간구하십시오.
첫째, 정념을 정화시켜 달라고.
둘째, 무지와 망각에서 구해달라고.
셋째, 유혹과 시련과 게으름에서 구해달라고.(38)
이는 남을 위한 중보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대의 정화만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지인들이 정화되어 천사를 닮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39)
말씀을 마칩니다.
첫째 기도의 헛발질을 멈추십시오.
소원성취만을 바라는 마술적 기도 그리고 혐오와 저주를 부추기는 주술적 기도를 당장 멈추십시오.
둘째 우리의 기도가 무엇보다도 복음의 향연 구원의 축제가 되게 하십시오.
그러면 시편 66편 시인의 고백처럼 이런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시66:9 우리의 생명을 붙들어 주셔서, 우리가 실족하여 넘어지지 않게 살펴 주신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