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다리가 어떻게든 나를 옮기고 있었을 뿐, 내가 다리를 끈 것이 아니었다."
혼자서 지팡이에 의지하며 슬리퍼를 끌어 10㎞ 가까이를 걸어 러시아군으로부터 벗어난 뒤 헤어진 가족과도 무사히 재회한 우크라이나의 98세 할머니는 대단한 고집쟁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국내 언론에서는 할머니가 탈출 도중 가족들과 헤어지게 됐다고만 보도했다. 그런데 1일 할머니를 인터뷰한 영국 BBC 기사를 보면 할머니는 아들, 두 며느리 등과 탈출 경로를 놓고 다툰 것으로 보인다.
아들, 두 며느리는 우회로를 택하자고 한 반면, 할머니는 주 도로를 탈출로로 삼자고 고집했다. 할머니는 "내 직감을 믿기로 했다"고 털어놓았다. 이런 맥락을 보면 할머니는 제 갈 길을 걸었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젊은 가족들은 이를 어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혼자가 된 로미코우스카 할머니는 한 손에 지팡이, 다른 손에는 쪼개진 나뭇조각을 들고서 몸을 지탱한 할머니는 음식과 물 없이 온종일 걸어 탈출에 성공했다. 두 차례나 넘어져 쉬어야 했고, 한 번은 잠을 자고서야 걸을 수 있었다. 할머니는 “한 번은 균형을 잃고 잡초 속으로 넘어졌는데 잠이 들었고 잠시 후 계속 걸었다. 그리고서 다시 넘어졌다”며 “하지만 일어나서 조금씩 계속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돌아봤다.
우회로를 택한 한 며느리는 포탄에 맞아 다쳤고, 할머니는 저녁 무렵 군인들에게 무사히 구조됐으니 할머니 직감이 옳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포탄이 쏟아지는 중에 탈출을 감행한 것이라 어느 쪽이든 위험하긴 했다.
군인들은 다음날 최전방 지역 시민을 대피시키는 경찰부대 ‘화이트 앤젤스’에 할머니를 인계했고, 화이트 앤젤스는 할머니를 피난민 대피소로 데려간 뒤 가족들에게 연락했다고 파블로 디아첸코 도네츠크 경찰 대변인이 전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도 살아남았다는 할머니는 “나도 이 전쟁을 겪고 있으며,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번 전쟁은 그때(2차 대전)와 다르다. (당시에는) 불에 탄 집이 한 채도 없었는데, 이번에는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우크라이나 병사가 나이를 묻더라며 "나는 48세 아니면 49세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믿지 않더라!"고 농담하는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피난민대피소에서 손녀 스비틀라나와 재회했다. 할머니 옆에 바짝 붙어앉아 영상 통화를 한 스비틀라나는 "할머니가 여기 계셔서 아주 기쁘다. 우리는 오래 할머니를 찾았다!"고 감격에 겨워했다. 할머니의 여정은 특별했지만 손녀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피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고, 손녀는 "아 안돼요. 두 번 다시 그러지 마세요!"라고 단단히 못박았다.
할머니는 뜻하지 않은 행운도 얻게 됐다. 우크라이나 최대 규모 은행 중 하나인 모노뱅크의 올레 호로코우스키 최고 경영자는 지난 30일 텔레그램 계정을 통해 할머니에게 집을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호로코우스키 최고 경영자는 “모노뱅크는 리디아 스테파니우나(할머니)에게 집을 사줄 것이며, 그녀는 이 가증스러운 것(러시아)이 우리 땅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집에 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