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칙 세존도솔世尊兜率
[본칙] 세존은 도솔천을 떠나기도 전에 이미 왕궁에 강림하였고, 모태에서 태 어나기도 전에 중생 제도를 벌써 마쳤다. 世尊, 未離兜率, 已降王宮;未出母胎, 度人已畢.
[설화] 이 공안은『화엄경』「이세간품(離世間品)」에 제시된 십종미세취(十種微 細趣)의 문장1)을 받아들여 화제(話題)로 삼은 것이다.2) 도솔(兜率)의 온 전한 음사어는 도솔타(兜率陁)3) 또는 도사타(覩史陁)이며, 한역하여 희족 (喜足) 또는 묘족(妙足)이라 한다. 희족이란 모든 욕락(欲樂)에 대하여 만 족할 줄 아는 마음4)을 일으키는 것, 또는 작은 희열을 얻고 기쁘게 여기며 더 이상 구하지 않는 상태를 만족하다고 여기는 것을 말한다. 대대로 부처 님들이 세상에 나타나실 때 모두 도솔천에서 염부(閻浮)5)로 강생하신 것 은 무슨 까닭일까? 도솔천은 육욕천(六欲天)6)의 중앙에 있는 천으로 항상 중도(中道)에 처하여 치우치거나 막히지 않고, 갖가지 욕망의 경계에 있 어도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최상의 묘족이라는 의미 이다. 1) 60권본『華嚴經』권42 大9 p.666c19 및 80권본『華嚴經』권59 大10 p.311b1에 나오는 십종미세취는 다음과 같다. 첫째 모태에 있으면서 처음으로 보리심(菩提 心)을 일으켜 관정지(灌頂地)까지 이르는 과정을 시현하고, 둘째 모태에 있으면 서 도솔천에 머무는 모습을 시현하며, 셋째 모태에 있으면서 초생(初生)을 시현 하고, 넷째 모태에 있으면서 동자지(童子地)를 시현하며, 다섯째 모태에 있으면 서 왕궁에 처하는 모습을 시현하고, 여섯째 모태에 있으면서 출가를 시현하며, 일곱째 모태에 있으면서 고행(苦行)을 거쳐 도량에 이르러 등정각(等正覺)을 이 루는 모습을 시현하고, 여덟째 모태에 있으면서 전법륜(轉法輪)을 시현하며, 아 홉째 모태에 있으면서 반열반(般涅槃)을 시현하고, 열째 모태에 있으면서 대미 세(大微細)를 시현한다. 2) 십종미세취의 개별적 내용이 가지는 공통점은 ‘모태에 있으면서’ 그 모든 것을 시 현하고 있다는 구절에 있다. 이 공안을 열 가지 중에 굳이 배대하면 두 번째와 여 덟 번째가 될 수 있지만, 그 전체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여[述] 활용한 것이다. 3) Tusita, Tusita, Dgah-ldan. 4) 희족심(喜足心). 희족소욕(喜足少欲) 또는 무욕지족(無欲知足)이라 한다. 곧 욕락 을 바라는 마음이 적고 만족할 줄 안다는 뜻이다. 바로 아래의 뜻풀이와 통한다. 5) 온전한 음사어는 염부제(閻浮提)이다. Jambu-dvīpa, Jambu-dīpa. 수미산(須 彌山)의 사대주(四大洲) 중 남주(南洲)에 해당되므로 남염부제(南閻浮提 Daksina-jambu-dvīpa)·남염부주(南閻浮洲)·남섬부주(南贍部洲) 등이라고 한다. 인도를 가리키는 한정적인 말이었으나 후대에 인간세계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 게 되었다. 6) 욕계(欲界)에 있는 여섯 개의 천. 사대왕천(四大王天)·도리천(忉利天)·야마천 (夜摩天)·도솔천·화자재천(化自在天)·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등이다. 여기에서 왕궁·도솔·도생(度生)7)·출태(出胎)는 팔상8) 가운데 네 가지 상(相)이다. 팔상이란, 주도솔(住兜率)·강왕궁(降王宮)·주태(住胎)·출태 (出胎)·출가(出家)·성도(成道)·항마군(降魔軍)·전법륜(轉法輪)·입열반 (入涅槃) 등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구상(九相)이 되는데, 무슨 이유에서 팔 상이라 한 것일까? 대승에는 항마군이 없으니 마구니는 곧 법계이기 때문 이고, 소승에는 주태가 없으니 태(胎)는 허공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승과 소승에서 각각 하나씩 제외하여 팔상이 된다. 또한『기신론』에서 “도솔천에서 왕궁으로 물러나”9)라고 운운하였다. 대대로 부처님들이 세상 에 나타나실 때 모두 팔상성도의 과정에 근거하는 법인데, “도솔천을 떠나 기도 전에 ~ 마쳤다”라고 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팔상성도의 차제는 성 문인(聲聞人)이 상세하게 분석한 견해[曲見]일 뿐이며, 화엄(華嚴)의 교설 에 따르면 팔상은 한순간에 성립되어 앞뒤의 차제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청량소』10)에 “부처님의 몸[佛身]은 장애가 없기 때문이며, 법이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이다”11)라고 하였다. 무진거사(無盡居士)의『소화원 기(昭化院記)』에 “화엄의 본체란 처음부터 끝까지 일념(一念)이며, 지금과 옛날도 하나의 동일한 순간[一時]이고, 시방(十方) 전체도 하나의 국토[一 刹]이며, 삼계(三界)가 모두 일체(一體)이다. 지금의 그 자리12)에 나타나 있기에 분별에 의지한 이해[情解]와 관계없다”13)라고 하였다. 이것은 10무 애(無礙) 중 시간과 공간에서 걸림이 없는 시처무애(時處無礙)14)에 해당 한다. ‘도솔천을 떠나기도 전에 이미 왕궁에 강림하였다’라는 말은 공간에 걸림이 없는 처무애이고, ‘모태에서 태어나기도 전에 중생 제도를 벌써 마 쳤다’라는 말은 시간에 걸림이 없는 시무애이다. 곧 ‘끝없는 불국토의 경 계에는 자신과 타자 사이에 조금의 간격도 없고, 10세15)의 고·금은 처음 부터 끝까지 현재의 찰나를 떠나지 않는다’16)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7) 중생 제도. 본칙에는 도인(度人)으로 되어 있다. 8) 八相. 도솔천에 머물던 시기부터 열반에 드실 때까지 부처님 일대기를 여덟 가 지의 차별상으로 나눈 것. 석가팔상(釋迦八相)·팔상성도(八相成道)·여래팔상 (如來八相)·팔상시현(八相示現)·팔상작불(八相作佛) 등이라고 한다. 80권본 『華嚴經』大10 p.364c25 등에 나온다. 9)『大乘起信論』大32 p.581a6에 나오는 팔상성도의 구절. 10) 청량징관(淸凉澄觀)의 『華嚴經疏』. 11) 정확히 일치하는 전거는 없다. 12) ‘當體’가 「決疑論後記」에는 ‘當處’로 되어 있다. 13) 무진거사 장상영(張商英)의 이 말은 「決疑論後記」 大36 p.1049a19에도 보이는 데, 전체적으로 대의만 취하여 간략히 정리한 인용이며 글자에 약간의 출입이 있다. 14) 법장(法藏)은 다음과 같이 푼다. “아홉 번째는 시처무애이다. 하나의 국토에서 삼세의 겁(劫)을 모두 나타내거나, 일념 중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국토를 나 타내는 것이니, 이와 같이 걸림이 없는 것을 말한다.”(『華嚴經探玄記』권3 大35 p.160b21. 九, 時處無礙. 謂或於一刹, 現三世劫, 或一念中, 現無量刹, 如是無礙.) 『華嚴經疏』권10 大35 p.576b13 참조. 10무애는 다음과 같다. 정사무애(情事無 礙), 이사무애(理事無礙), 상입무애(相入無礙), 상즉무애(相卽無礙), 중현무애(重 現無礙), 주반무애(主伴無礙), 체용무애(體用無礙), 은현무애(隱顯無礙), 시처무애 (時處無礙), 성괴무애(成壞無礙). 15) 十世. 과거·현재·미래의 3세에 각각 3세가 있어 모두 9세가 되고, 9세는 한 찰 나이므로 합하여 10세가 된다. 시간을 총괄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16) 이통현(李通玄)의 설이다.『新華嚴經論』권1 大36 p.721a18 참조. 조사선 계열의 선문헌에 폭넓게 나타난다.『雲門廣錄』권3 大47 p.570c26,『五祖法演語錄』권중 大47 p.658a21,『圜悟語錄』권1 大47 p.717c4,『大慧語錄』권3 大47 p.822b6, 『圓頓成佛論』韓4 p.728b17 등 참조.
이것은 경전의 이치인데, 그것을 끌어들여 공안으로 삼은 까닭은 무엇 인가? 옛사람의 말17)에 “화엄의 교설이 아니면 이치를 남김없이 설할 수 없다. 다만 배우는 자들이 문자로 드러난 뜻과 이치에 골몰한 끝에 분별을 잊고 마음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달마대사가 인 도로부터 와서 인심을 곧바로 가리켜[直指人心], 본성을 보고 부처가 되도 록 한 것[見性成佛]이다. 곧 선가(禪家)에서는 사사무애(事事無礙)를 실행 하고, 교가(敎家)에서는 사사무애를 이론적으로 설한다. 교가에서는 설하 기만 하고 실행하지 못하나, 선가에서는 하나의 기틀과 하나의 경계에서 본분을 포착하는 순간 바로 활용한다. 가령 “대천세계를 우주 밖으로 내던 지고, 수미산을 개자 하나에 거두어들이는 것이 모두 우리들이 늘 할 수 있는 본분상의 능력이며 다른 수단을 빌리는 것이 아니다”18)라고 하거나, “대천세계를 우주 밖으로 내던지는 것은 하루에 세 번 문 밖으로 나서는 일상적인 일이며, 수미산을 개자 하나에 거두어들이는 것은 돌피와 쭉정 이를 창고에 들여놓는 것과 같이 쓸모없는 일이다”라고 한 말들이 그 예 이다. 어떤 고덕(古德)은 “만약 최상의 바른 이치로 말하자면 화엄이 어찌 원만한 이치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어찌하여 달마 가 인도로부터 와서 가지와 넝쿨에 다시 쓸모없이 가지와 넝쿨을 자라게 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달마가 인도로부터 온 뜻은 이러한 화엄의 도리에 있는 것이 아닌 줄 어찌 알겠는가!”19)라고 말했다. 곧 사사무애를 궁극적 인 법도로 삼아서 헤아리면 안 된다. 어떤 고덕의 게송에 “부처님은 세상 에 나타나지 않으시고도 49년 동안 설법하였고, 달마가 인도에서 오지 않 았어도 소림사에는 미묘한 비결이 있다”20)라고 하였다. 곧 낱낱의 사람은 누구나 천 길의 높이로 우뚝 솟은 절벽과 같아서,21) 진점겁(塵點劫)22) 이전 에 수행도 마쳤고 성불 또한 성취하였으니,23) 또 다시 연지 찍고 분을 바 를 얼굴은 없다는 뜻이다. 공안을 제기하여 이러한 이치를 본보기로 삼았 으니, 이는 최초구24)에 한정하여 설한 것이다. 이 교설의 의미는 비록 고상 하고 미묘하지만, 한편으로는 텅 비고 멀어서 기력을 펼칠 여지가 없고 다 른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광범위하여 분명하게 말할 실마리가 없으니, 종 사(宗師)가 교설을 인용하여 공안의 뜻으로 보여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 겠는가? 17) 누구의 말인지 알 수 없다. 18)『注華嚴法界觀門』「裴休序」大45 p.683c13,『大慧語錄』권18 大47 p.887a7 등에 나오는 구절. 19) 이 말을 한 고덕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20) 수산주(修山主)의 게송이다.『五祖法演語錄』권1 大47 p.649c7,『圜悟語錄』권3 大47 p.725a27,『山堂僧洵禪師語』續古尊宿語要4 卍119 p.9b16 등에 널리 인용 된다. 여러 문헌에서 ‘釋迦’는 ‘諸佛’, ‘達磨’는 ‘祖師’로 혼용한다. 21) 벽립천인(壁立千仞). 험하고 높아서 올라가기 어렵다는 뜻. 언어와 사유의 수 단으로 접근할 수 없는 경지를 비유적으로 나타낸 말로서 은산철벽(銀山鐵壁) 과 같은 뜻이다. 원오극근(圜悟克勤)은 <설화>와 같은 맥락에서 이 용어를 쓴다. “사람마다 본분에 천 길 높이의 절벽이 솟아 있고, 각각의 눈앞에 커다란 보배 광명이 비친다. 그렇다면 어떤 인연에도 떨어지지 않는 한 구절을 어떻게 말해 야 할까? 산기슭의 봉우리가 거꾸로 섰고, 석순에는 남몰래 가지가 돋아난다.” (『圜悟語錄』권9 大47 p.755a26. 人人分上, 壁立千仞, 各各面前, 飛大寶光. 且不落 夤緣一句, 作麽生道? 麓峰頭倒卓, 石笋暗抽枝.) 22) 헤아릴 수 없이 장구한 겁(劫)이 경과하는 시간. 진겁이라고도 하며, 하나하나 의 티끌을 모아놓은 것과 같은 수의 겁이라는 뜻이다. 23)『法華經』의 구원성불(久遠成佛) 사상과 통한다. 아득한 과거세[本地]에 이미 성불을 마쳤다는 뜻이며, 그렇게 성불한 부처님을 본불(本佛)이라 한다. “내가 성불한 이후 진실로 헤아릴 수도 없고 끝도 없는 백천만억나유타 겁의 세월이 지났다.”(『法華經』권5 「如來壽量品」大9 p.42b12. 我實成佛已來, 無量無邊, 百千萬億那由他劫故.);“내가 실로 성불한 때가 오래된 것이 이와 같다. 다만 방편으로써 중생을 교화하여 불도에 들게 하고자 이와 같이 설법하고 있을 뿐 이다. 선남자들이여, 여래께서 펼친 경전은 모두 중생을 고해에서 건져내어 해 탈케 하기 위한 것이다.”(같은 책 권5 p.42c8. 我實成佛已來, 久遠若斯. 但以方 便敎化衆生, 令入佛道, 作如是說. 諸善男子, 如來所演經典, 皆爲度脫衆生.) 24) 最初句. 말후구(末後句)가 상대적으로 최후에 궁극적으로 귀착되는 뜻이라면, 최초구는 어떤 조짐도 일어나기 이전의 소식을 나타내는 구절을 말한다. 아래 에서 ‘어떤 조짐도 일어나기 이전의 시기’라고 한 경계가 그것이다. 최초구와 말 후구는 처음과 끝으로 대칭되기는 하지만, 언어로 설명되거나 분별로 포착되는 구절이 아니라는 점에서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원통선(圓通善)은 ‘도솔천을 떠나기도 전에’라는 구절에 대하여 ‘하나의 달이 하늘에 있다’라고 착어했고, ‘이미 왕궁에 강림했다’라는 구절에 대 하여 ‘달그림자가 모든 물을 머금었다’라고 착어했으며, ‘모태에서 태어나 기도 전에’라는 구절에 대하여 ‘하늘과 땅까지 단단히 붙들었다’라고 착 어했고, ‘중생 제도를 벌써 마쳤다’라는 구절에 대하여 ‘누가 은혜를 입지 않겠는가?’라고 착어했다. 이 팔상을 증득(證得)과 교화(敎化)에 배대하 는데, 넓게 펼치면 팔상이 된다. ‘도솔천을 떠나기도 전에’라는 구절은 증 득, ‘이미 왕궁에 강림했다’라는 구절은 교화와 짝이 된다. 이 교화의 문 자체에도 증득과 교화가 있다. 모태에 머무는 것[住胎]은 증득이고, 모태 에서 나옴[出胎]·출가·성도·마구니를 항복시킴[降魔軍]·법륜을 굴림[轉 法輪] 등은 교화에 해당한다. 열반에 드는 것[入涅槃]도 증득이니, 중생 제 도를 벌써 마쳤다는 것이 열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원오(圜悟)의 게송 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다”라고 한 구절의 뜻이다. 간략하게 말하면 사상(四相)이 된다. 도솔천을 떠난 다음 왕궁에 강림하여 증득한 뒤 교화 를 일으키고, 모태에서 태어나기도 전에 중생 제도를 마치고 난 다음 교화 를 거두어 증득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오고 가는 현상으로 앞뒤의 맥락을 다 통하게 하는 방법이니, 이 모든 것을 법도[規矩]라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도솔천을 떠나기도 전에 ~ 마쳤다’라고 하였으니, 처음부터 끝 까지 한결같이 오고 간 자취 전혀 없고, 증득과 교화를 곧바로 사라지게 하였다. 이처럼 법도에 얽매이지 말고 말을 들었으면 그 종지를 이해해야 된다.
대혜(大慧)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25) “궁극적인 한 구절26)은 말로 표현하 기 이전에 벌거벗은 알몸을 모조리 드러내었으니, 하늘과 땅 그 어디에나 있고 소리와 색이 모두 그것이다. 황면노자27)는 이 결정적인 하나의 소식 을 얻고서 ‘도솔천을 떠나기도 전에 이미 왕궁에 강림하였고, 모태에서 태 어나기도 전에 중생 제도를 벌써 마쳤다’라고 했던 것이다.” ‘중생 제도를 벌써 마쳤다’라는 말은 곧 이것이니, 그것은 말후구를 나타내는 한 수인 것이다. 곧 이것을 가리켜 말후구를 나타내는 한 수라고 하면 옳지만, 말 후구 자체라고 하면 옳지 않다. 산을 가리키며 ‘산인가?’라고 물었을 경우 산이라 대답하면 옳다. 산에 있는 풀과 나무와 흙과 돌을 모두 들어서 산 이라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속의 돌 하나를 가리키며 ‘산인가?’라 고 물었을 경우 산이라 대답하면 옳지 않다. 어떻게 산의 돌 하나를 들어 서 산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송원(松源)이 상 당법문에서 그러한 취지로 말한 것이다. 또한 장령(長靈)은 ‘도솔천을 떠 나기도 전에~’라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공(空)에서 나와 유(有)로 들어가 며 무궁하게 변화하는 경지에서 몸을 바꾸고28) 막힌 숨통을 토해내어 곧 바로 말후구를 이해했던 것 또한 여전히 결정적인 한 수가 모자라는 이해 인 것이다! 25) 이하의 인용은 본서 2則「世尊周行」에 나오므로 자세한 주석은 생략한다. 26) 말후일구자(末後一句子). 궁극적인 구절. 모든 구절에 걸리지 않고 자유자재하 게 당사자의 본분을 발휘하는 속박 없는 말, 또는 궁극적인 화두 자체를 나타내 는 구절을 말한다. 27) 黃面老子. 부처님을 가리킨다. 황면구담(黃面瞿曇)·황면노(黃面老)·황두대사 (黃頭大士)·황두노(黃頭老)·황두(黃頭) 등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몸은 황금색 의 금색신(金色身)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칭호이다. 불상을 황금색으로 도색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한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가비라위성 (迦毘羅衛城 Kapilavastu)이라는 말에서 Kapila는 황색 또는 황적색(黃赤色)이 라는 뜻이며, vastu는 머무는 곳 또는 성(城)이라는 뜻이므로 가비라위성은 ‘가 비라선(迦毘羅仙) 또는 황두선인(黃頭仙人)이 머무는 곳’이라는 말이 된다. 28) 전득신(轉得身). 속박된 몸에서 해탈의 몸으로 바꾸는 획기적인 반전(反轉)을 가리킨다.
궁극적인 뜻은 무엇일까? ‘이치가 극치에 이르러 분별과 말을 잊었는데, 어떻게 가지런한 비유를 들어 말할까? 결국 가을밤의 달은 움직이는 그대 로 눈앞의 시냇물에 떨어진다.’29) 비록 결정적인 한 수를 벗어나서 별도로 말후구를 찾더라도 도리어 옛 성인의 뜻을 완전히 등지는 결과가 되지 않 겠는가! 옛사람이 “말후구를 그대에게 설하노니, 밝음과 어둠이 서로 짝 이 되는 소식이라네”30)라고 한 말을 모르는가? 그렇다면 최초구와 말후구 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은 어떤 것일까? 종사인 선지식이 최초구 속에서 학 인의 근기를 점검하려면 도리로는 전혀 통하지 않는 한 구절을 말해 줄 수밖에 없다. 이미 도리로는 전혀 통하지 않는 이상 분명하게 밝힐 여지가 없으므로 배우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제한된 인식으로 무위(無爲)·무사 (無事)라 이해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종문(宗門)의 향상된 경지에서 높이 착안하여 그것을 내세울 것으로 여기기도 하니, 대혜(大慧)가 한 수[一著] 라고 한 말이 그것이다. 그 나머지 중근기와 하근기의 무리들은 다만 모 든 것을 법신(法身)이라 오인할 뿐이고, 또는 대상 세계로 내려와 그것이 하나의 색(色)으로 통일된 현상이라 착각하지만 타당하지 않다. 그러므 로 말후구를 가지고서 얕은 곳에서 시작하여 깊은 곳에 이르는 방식으로 깊고 또 더 깊은 곳에 이르러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법에 대한 미세한 속 박까지 쓸어 없애고 법인(法印)을 짊어지도록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 은 없다. 29) 법안문익(法眼文益)의 게송에 나오는 구절. 두 번째 구절은 ‘如何有喻齊’로 되어 있다.『法眼語錄』大47 p.591a8 참조. ‘情謂’는 ‘情慮言謂’를 줄인 말이다. 30) 설두중현(雪竇重顯)의 게송이다.『碧巖錄』51則「頌」大48 p.186c17.
암두(巖頭)는 “덕산이 말후구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고, 대혜는 “세존 께서 말후구의 한 수를 터득했다”라고 말했으나, 세존과 덕산이 제시한 한 순간의 방편을 진실이라 여긴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것에 잘못을 돌린 이 유는 말후구를 원만하게 완성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궁극적인 도리[末後] 가 원만하게 완성되므로 말후구라 하지만 원만함의 극치에 이르면 최초 구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후구를 알고자 한다면 어떤 조 짐도 일어나기 이전의 시기를 살펴라”라고 한다. 곤산(崑山)은 묘용〈본분 (本分)〉과 신통〈금시(今時)〉31)을 말했고, 원오는 말후〈도솔천을 떠나기도 전에 이미 왕궁에 강림했다거나[已降], 모태에서 태어나기도 전에 중생 제도를 벌써 마쳤다[度人]는 말〉를 언급했으며, 해인(海印)은 한 소리 내질렀고〈부처와 조사의 의중을 모두 꿰뚫었다〉, 송원은 ‘처음부터[末上]’〈최초구를 나타낸다〉라고 말했다. 31) 본분은 개별적 현상의 차별이 사라진 무차별의 본질을 가리키고, 금시는 현재 의 차별되고 다양한 현상을 나타낸다.
此話, 華嚴經離世間品, 十種微細趣散文, 述而爲詮32)也. 兜率, 具云兜率陁, 亦云覩史陁. 此云喜足, 亦云妙足. 喜足者, 謂於 諸欲樂, 生喜足之心, 又得小喜悅爲喜, 更不求餘爲足. 佛佛 出世, 皆從兜率天, 降生閻浮者, 何也? 兜率天, 六欲天中中 央天, 常處中道, 而不偏滯, 於諸欲境, 而不染着故. 此上妙足 之義也. 此中王宮兜率, 度生出胎, 八相中四相. 八相者, 住兜 率·降王宮·住胎·出胎·出家·成道·降魔軍·轉法輪·入涅 槃. 此則九相, 所謂八相者, 何也? 大無降魔, 魔則法界故;小 無住胎, 胎若虛空故. 然則大小乘, 互奪爲八相也. 又起信論 云, 從兜率退王宮云云也, 佛佛出世, 皆以八相成道, 未離兜率 云云者, 何也? 八相成道次第, 聲聞人曲見, 若約華嚴, 八相一 時, 無前後次第. 故淸凉疏云, “佛身無礙故, 法自爾故.” 無盡 居士, 昭化院記云,“ 夫華嚴之爲體也, 始終一念也, 今昔一時 也, 十方一刹也, 三界一體也. 當體現前, 不涉情解.” 則十無 礙中, 時處無礙也. 未離云云, 處無礙;未出云云, 時無礙. 則 無邊刹境, 自他不隔於毫端;十世古今, 始終不離於當念也. 此是經義, 引以爲話者, 何也? 古人云, “非是華嚴, 說理未盡. 但學者汨沒文字義理, 不能忘意了心.” 所以達磨西來, 直指人 心, 見性成佛. 則禪行事事無礙, 敎說事事無礙也. 敎家但說 而行不得, 禪家一機一境上, 把得便用. 如云, “擲大千於方外, 納須彌於芥中, 皆吾輩之常分, 非假於他術.” 又云,“ 擲大千於 方外, 一日三出門外, 納須彌於芥中, 稊稗納於倉廩也.” 古德 云,“ 若談無上正理, 華嚴, 豈不圓極哉! 若然者, 何必達磨西 來, 枝蔓上更生枝蔓! 達磨西來, 焉知不是這箇道理!” 則不可 以事事無礙爲極則商量也. 古德頌云, “釋迦不出世, 四十九年 說. 達磨不西來, 少林有妙訣.” 則人人箇箇, 壁立千仞, 塵點 劫前, 修行亦竟, 成佛亦竟, 更無添脂着粉地面目. 擧唱則此, 約最初句說也. 此說義雖高妙, 虛遠而無氣力, 汎濫而無辨白, 非宗師引敎爲話之義, 則如何? 圓通善, 未離兜率, 着語云, ‘一月在天.’ 已降王宮, 着語云,“ 影含衆水.” 未出母胎, 云, “乾坤把定.” 度人已畢, 云,“ 誰不蒙恩.” 將此八相, 以配證化, 廣而爲八相. 未離兜率, 證也;已降王宮, 化也. 就此化門, 亦 有證化. 住胎, 證也, 出胎·出家·成道·降魔軍·轉法輪, 化 也. 入涅槃, 亦證, 度人已畢, 是涅槃也. 此圓悟所謂始終. 略 而爲四相. 離兜率而降王宮, 從證起化, 出母胎而度人已畢, 收 化歸證. 此所謂去來通前後, 皆名規矩. 今旣未離至已畢, 則 始終一貫, 初無去來, 證化斯亡. 須是不立規矩, 承言會宗, 始 得. 大慧云,“ 末後一句子, 聲前露倮倮, 盖天盖地, 盖聲盖色. 黃面老子, 得箇一著子, 便道云云.” 已畢則此, 是末後句之一 著子也. 謂是末後句之一著則可, 謂是末後句則不可. 指山而 問焉曰山乎, 曰山則可. 山有草木土石, 皆擧之也. 指山中之一 石, 而問焉曰山乎, 曰山則不可. 何得擧山之一石稱山云者哉! 故松源上堂云云. 又長靈云云, 未離兜率云云. 然則向出空入 有變化無方處, 轉得身, 吐得氣, 便會得末後句, 亦是一著猶欠 會哉! 畢竟如何? ‘理極忘情謂, 如何話諭齊? 到頭霜夜月, 任 運落前溪.’ 雖然離一著外, 別討末後句, 又却不是大辜負先聖 哉! 不見古人道,“ 末後句爲君說, 明暗雙雙的時節.” 且如最 初句末後句, 同別如何? 宗師善知識, 若向最初句中對機, 則 不過下得沒道理的一句. 旣沒道理, 而無辨白故, 學者以己之 局量, 或有作無爲無事會, 或有高著眼, 向宗門向上, 作主宰 者, 大慧所謂一著也. 其餘中下之流, 只認得箇法身, 又下而悟 得一色邊事, 亦未可定. 則不如末後句, 從淺至深, 以至於深之 又深, 使學者, 蕩盡微細法縛, 荷擔法印之爲愈也. 巖頭謂德山 不會末後句, 大慧謂世尊得末後句之一著, 非以世尊德山一期 方便爲實. 然而歸咎, 只要圓成末後句也. 以末後圓成, 故曰末 後句, 至於圓極, 則與最初句, 何以異哉! 故曰, “要識末後句, 看取未生時.” 崑山妙用〈本也〉神通〈今也〉, 圓悟末後〈已降度人〉, 海印一喝〈透佛祖也〉, 松源末上〈最初也〉 32) ‘詮’은 ‘話’로 되어 있는 이본의 글자가 맞다.
곤산찬원(崑山贊元)의 송
도솔천의 경계를 떠나기도 전에, 벌써 부왕의 궁전에 강림하였고, 비록 중생 제도를 마쳤지만, 여전히 어머니 배 속에 있다네. 묘한 작용에 따른 것도 아니요, 신통력도 아니었다네. 스스로 법도를 세우지 말고, 말을 듣고는 그 근본을 알아야 하리라. 崑山元頌, “未離兜率境, 已降父王宮;雖度衆生畢, 猶居母腹 中. 良由非妙用, 亦不是神通. 勿自立規矩, 承言須會宗.”
[설화] 도솔천의 경계를 떠나기도 전에 ~ 어머니 배 속에 있다네: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그대로 이미 일어난 일과 같고, 이미 일어난 일 그대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과 같다는 말인가? 공안의 글을 거듭 제기한 것이다. ‘신묘한 작용’이란 본래 있는 그대로이며, ‘신통력’이란 바로 지금 성취 하고 있는 것들이다. 신묘한 작용도 아니고 신통력도 아니라면, 법도를 세 울 필요도 없이 말을 듣고는 반드시 그 근본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앞 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 이미 일어난 것이며, 이미 일어난 일이 아 직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한 뜻과 가깝게 된다. 崑山33):未離至腹中者, 未然卽已然, 已然卽未然耶? 話文重擧 也. 妙用者, 本自如然也. 神通者, 今日成就也. 旣非妙用, 亦 非神通, 則須是不立規矩, 承言會宗始得. 然則前云, 已然卽未 然未然卽已然之義, 近是. 33) <설화>의 첫 부분에는 염과 송의 작자 법명이 붙어 있다. 본래『禪門拈頌說話』는 독립된 책이고『禪門拈頌』의 본문은 수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어느 부분에 대한 <설화>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며, 번역할 필요는 없다. 이 책에서는 각 송과 염 뒤에 그에 해당하는 <설화>를 바로 붙인다.
원오극근( 悟克勤)의 송
대상은 본래 형상이 없고,34) 지허35)는 만물을 감싸 안노라. 뒤늦게 떠났으나 지나쳤으니,36) 남쪽 향하여 북두칠성 보네. 왕궁과 도솔천에서, 중생을 제도하고 태어났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오고 간 자취 전혀 없노라. 흔적을 쓸어 없애고 뿌리를 제거하면, 불 속의 연꽃이 곳곳에서 피어나리라. 圜悟勤頌,“ 大象本無形, 至虛包萬有. 末後已太過, 面南看北 斗. 王宮兜率, 度生出胎, 始終一貫, 初無去來. 掃蹤滅迹除根 蔕, 火裏蓮花處處開.” 34)『老子』 41장 “大象無形”과 같다. 대상(大象)은 도(道)를 묘사하는 용어 중 하나 로, 대방(大方)·대기(大器)·대음(大音) 등과 더불어 쓰였다. ‘大’는 더 이상이 없 는 완성태로서의 극대(極大)를 나타낸다. 35) 至虛. 아무것도 걸친 것이 없는 지극히 텅 빈 허공. 천공(天空)과 같은 말. 36) 말후이태과(末後已太過). 선행부도(先行不到)의 뒤에 따라 붙는 구절로 쓰인다. “먼저 출발했으나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고, 뒤에 떠났으나 목적지를 지나쳐 버렸다”라는 뜻이다.『楊岐語錄』大47 p.645a3,『大慧語錄』권8 大47 p.843c 11 등에 나온다. 한편, 굉지정각(宏智正覺)은 이 구절을 바둑의 착수(著手)에 비유하였다. “법좌에 올라앉자 어떤 학인이 석상경저(石霜慶諸)에게 물었다. ‘화상의 깊고 깊은 경지는 어떤 것입니까?’ ‘수염 없는 자물쇠의 양 끝을 부질 없이 흔드는구나.’ 이 문답을 들고 평가했다. ‘먼저 둔 수는 약했고, 나중에 둔 수는 지나치게 강했다. 딱 들어맞는 한 수가 그 사이에 있는데, 보았는가? 흑돌 과 백돌이 나타나고 산 돌과 죽은 돌이 나누어지자마자 나무꾼까지 연루시켜 도낏자루를 썩게 만드는구나.’”(『宏智廣錄』권4 大48 p.41c14. 上堂, 擧, 僧 問石霜, ‘如何是和尙深深處?’ 霜云, ‘無鬚鎖子兩頭搖.’ 師云, ‘先行不 到, 末後 太過. 一著中間, 見也麽? 纔形黑白分生殺, 帶累樵人爛斧柯.’) 수염 없는 자물쇠 [無鬚鎖子]는 열쇠가 없는 자물쇠를 말한다. 열쇠가 자물쇠에 끼워졌을 때 그 양 끝이 아래로 늘어진 모양이 수염과 같으므로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흔들어 도 열 수 있는 실마리가 없는 자물쇠처럼 인식의 수단이 통하지 않는 경계를 나 타낸다. [설화] 대상은 ~ 감싸 안노라:유가 곧 무이고, 무가 곧 유이다. 뒤늦게 ~ 북두칠성 보네:전·후와 남·북의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왕궁에 서 ~ 오고 간 자취 전혀 없노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흔적을 쓸어 없애고 뿌리를 제거한다’라고 한 뜻이다. 불 속의 연꽃이 곳곳에서 피어나리라:상서로운 현상을 말한다. 원통(圓通)이 말했다. “만약 파정37)의 방법을 시행하면, 자취를 쓸어 없 애고 흔적을 소멸시키며 뿌리를 제거하고 보금자리를 깨끗이 파괴할 것 이니, 모든 부처님과 중생 그리고 보리와 열반도 전혀 남아 있지 못하게 된다. 방행의 방법을 시행하면, 불 속의 연꽃이 곳곳에서 활짝 피어 상서 로운 현상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흔적을 쓸어 없애고 뿌리를 제거한다’ 라는 말은 (아래 제시된) 대혜(大慧)의 게송이 나타낸 뜻이고, ‘불 속의 연 꽃이 곳곳에서 피어나리라’고 한 말은 죽암(竹庵)의 게송이 전하는 뜻이 니, 이 어찌 장령(長靈)이 ‘공(空)에서 나와 유(有)로 들어가며 무궁하게 변화한다’라고 말한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평생 분별로 천착한들 본질과 관련이 없다’라고 한 죽암의 말은 ‘일정한 법도에 얽매이지 않는 다’38)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圜悟:大象至萬有者, 有卽無, 無卽有也. 末後至北斗者, 無前 後南北也. 故云,‘ 王宮至去來’, 則‘掃蹤滅迹除根蔕’也. 火裏 至開者, 爲祥爲瑞也. 圓通云,“ 若把定, 則掃其蹤滅其迹, 除 其根蔕, 蕩其窠窟, 諸佛衆生, 菩提涅槃, 了不可得也;若放行, 則火裡蓮花, 處處開敷, 爲祥爲瑞.” 然則掃蹤至蔕者, 大慧頌 義也;火裡至開者, 竹庵頌義也, 豈非長靈出空入有變化無方 之義耶! 然平生穿鑿不相關, 則不存軌則之義, 可知也. 37) 把定. 파주(把住)라고도 하며, 방행(放行)과 대칭된다. 파정은 ‘꼼짝 못하도록 붙 든다’는 말로서 모든 언어와 분별의 가지를 허용하지 않는 부정의 방법이다. 반 면 방행은 ‘하는 그대로 놓아둔다’는 말로서 모든 언행과 분별을 개방하여 막지 않는 긍정의 방법이다. 38) 부존궤칙(不存軌則).『信心銘』大48 p.376c26 등에 나오는 구절. 보통은 “자유로 운 본분의 작용이 눈앞에 실현되면, 일정한 법도에 얽매이지 않는다(大用現前, 不存軌則)”라는 구절을 상용구로 쓴다.『雲門廣錄』권중 大47 p.554c2,『大慧語 錄』권19 大47 p.891a8,『景德傳燈錄』권9「大安傳」大51 p.267c23 등에 보인다.
대혜종고(大慧宗)의 송
날카로운 칼날에 묻어 있는 꿀은 핥지 말고,39) 독이 퍼진 장소에서 물맛을 보지 마라.40) 핥지도 맛보지도 않아 모두 범하지 않으면, 반듯하게 비단옷 입고 고향에 돌아가리라. 大慧杲頌, “利刃有蜜不須舐, 蠱毒之家水莫嘗. 不舐不嘗俱不 犯, 端然衣錦自還鄕.” 39)『佛本行集經』권14 大3 p.717c23에 나오는 “利刃蜜塗將舌舐”라는 구절과 통하 며, 선가에서 많이 활용한다. 꿀과 물은 모두 화두의 표면적인 말을 나타낸다. 그것이 달콤하고 시원하다고 생각하여 먹으려 하면 칼날에 혀를 잘리고 독기가 몸에 퍼지듯이 피해를 입는다. 이 화두뿐만 아니라 모든 선어(禪語)는 그러한 꿀과 물 뒤에 파놓은 함정과 같으므로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뜻이다. 40) 조산본적(曹山本寂)의 말에 근거한다. “어떤 학인이 조산에게 물었다. ‘제가 하 루 종일 지내는 중에 어떻게 보임(保任)해야 합니까?’ ‘독이 퍼진 장소를 지나 갈 때 물 한 방울이라도 묻으면 안 되는 것처럼 하라.’”(『曹山語錄』 권상 大47 p.539b23. 僧問, ‘學人十二時中, 如何保任?’ 師云, ‘如經蠱毒之鄕, 水也不得沾著 一滴.’) 죽암사규(竹庵士珪)의 송 시비의 바다 속에 마음껏 몸을 던지고, 맹수의 무리 속에서 자유롭게 사노라. 시비를 따지는 마음을 가지고 내 뜻을 분별하지 마라! 평생 분별로 천착41)한들 본질과 관련 없다네.42) 竹庵珪頌, “是非海裏橫身入, 豺虎群中自在行. 莫把是非來辨 我! 平生穿鑿不相關.” 41) 穿鑿. 진실이 없는 곳에서 분별의 틀을 가지고 파고들어 억지로 꿰맞추는 것. 42) 3~4구는 담주용산(潭州龍山)의 게송에 나오는 구절이다. ‘平生’은 ‘浮生’으로 되어 있다. “동산이 다시 용산에게 물었다. ‘화상께서는 어떤 도리를 보셨기에 이 산에 주석하고 계십니까?’ ‘진흙 소 두 마리가 싸우면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구나.’ 용산이 게송으로 다시 말했다. ‘이제껏 초가삼간에 사노라니, 한 줄기 신령한 빛에 모든 경계가 한가롭구나. 시비를 따지며 나를 분변하려 들지 마라! 덧없는 일생 동안 분별로 천착한들 본질과는 관련 없다네.’”(『景德傳燈錄』권8「潭州龍山傳」 大51 p.263a27. 洞山又問, ‘和尙見箇什麽道理, 便住此山?’ 師云, ‘我見兩箇泥牛鬪入海, 直至如 今無消息.’ 師因有頌云, ‘三間茅屋從來住, 一道神光萬境閑. 莫作是非來辨我! 浮生穿鑿不相關.’)
천의의회(天衣義懷)의 상당
이 공안을 제기하고 말했다. “이렇게 꺼낸 이야기 자체가 벌써 아무 일 도 없는 경계에서 남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짓이다. 그렇거늘 이어서 녹원43) 에서 설법을 시작하여 학수44)에서 열반에 들 때까지, 그 사이에 49년 동안 교설의 그물을 널리 펼쳤으니45) 가지와 넝쿨에 다시 가지와 넝쿨이 자란 격이다.” 天衣懷, 上堂, 擧此話云, “恁麽說話, 早是平地陷人, 其次鹿 園, 終乎鶴樹, 於其中間, 四十九年, 張羅布綱, 枝蔓上更生 枝蔓.” 43) 鹿園. 녹야원(鹿野苑 Mr3 gadāva)을 말한다. 부처님이 성도(成道)한 다음 다섯 제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한[初轉法輪] 곳이다. 44) 鶴樹. 곡림(鵠林)과 같은 말이며, 부처님이 열반에 들었던 사라쌍수(娑羅雙樹)를 가리킨다. 열반하는 순간 쌍수(雙樹)가 전부 백색이었는데 그것이 마치 백학(白 鶴)과 같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45) 교설의 그물을 펼쳐 중생이라는 물고기를 고통의 바다[苦海]에서 건져 올린다 는 뜻에서 나온 비유. 이것을 교망(敎網)이라 한다.
[설화] 이 상당법문의 대의는 ‘무슨 결정적인 통로46)가 있겠는가?’라고 반문한 것이다. 이전에 ‘이치가 극치에 이르러 분별과 말을 잊었거늘, 어찌 일정 한 설명이 있겠는가?’47)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天衣上堂云云, 是什麽孔竅? 前不云乎, 理極忘情謂, 如何 云云? 46) 공규(孔竅). 눈·코·귀·입 등의 구멍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선문헌에서는 향상 하는 결정적인 통로 또는 막힌 숨통이 트여 자유롭게 되는 본분의 핵심 등을 나 타내는 말로 쓰인다. 47) 주석29) 참조.
취암문열(翠文悅)의 상당
이 공안을 제기하고 말했다. “법륜48)은 이 공안을 마주하고 입이 있어도 쓸모없게 되었다. 여러분은 자세히 알겠는가? 만약 자세히 안다면 천하 노화상의 본분49)은 모두 그 사람의 손안에 들어 있을 것이다. 만약 알아차 리지 못한다면 목에 피가 나도록 울어보아도 소용없는 노릇이니, 차라리 입을 다물고 남은 봄을 지내느니만 못할 것이다.50)” 翠嵓悅, 上堂, 擧此話云, “法輪, 到這裏, 有口無用處. 你等諸 人, 還相委悉麽? 若相委悉, 天下老和尙鼻孔, 總在你手裏; 若也不會, 啼得血流無用處, 不如緘口過殘春.” 48) 法輪. 남악(南岳:湖南省)에 있던 절. 취암문열이 이곳에 주석할 당시의 법문이 므로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 49) 비공(鼻孔). 코 또는 콧구멍. 코가 얼굴의 중심에 있으므로 자기 자신의 핵심인 본분을 나타낸다. 50) 두순학(杜荀鶴)의 시「문자규(聞子規)」에 나오는 마지막 두 구절. 자규가 목에 피가 나도록 지저귀며 봄소식을 전해도 봄이 온 줄 아는 사람이 없다면 그만두 는 것이 나은 것처럼, 종지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 친절하게 많은 말 을 늘어놓는다 해도 전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설화] 이 공안을 마주하고 ~ 쓸모없게 되었다:말을 할 수 없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하여 말하겠다는 뜻이다. 여러분은 자세히 알겠는가?:남에게 가르쳐 주려면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니,51) 그 아래 내용으로 알 수 있다. 翠巖:到這至用處者, 非但道不得之義, 盡力道得也. 你等至 悉麽者, 爲人須爲徹, 下從可知也. 51) 보통 “사람을 죽이려면 반드시 피를 보아야 한다(殺人須見血)”라는 구절을 수 반한다. 친절한 방편을 이것저것 늘어놓지 않고 오로지 본분에 입각하여 가르 쳐야 한다는 의미이다.『圜悟語錄』권4 大47 p.765a4,『碧巖錄』31則「著語」 大48 p.170b4 등 참조.
해인초신(海印超信)의 상당
이 공안을 제기하고 말했다. “여러분, 말해 보라! 석가노자52)는 49년 동 안 무슨 일을 도모했을까? 시험 삼아 분명히 알아맞혀 보라. 그럴 사람 있 는가?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타나 교설을 펼쳤다고 해도 20 방을 때려주어야 할 잘못이고, 달마대사가 인도로부터 종지를 전하러 왔 다고 해도 20방을 때려주어야 할 잘못이다’53)라고 말한다. 20방이 더 남아 있으니 결코 다른 생각에 따라 움직이지 마라!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대 의 허리를 때려서 부러뜨리리라.” 한 소리 크게 내질렀다. 海印信, 上堂, 擧此話云,“ 諸仁者, 且道! 釋迦老子, 四十九 年, 當爲何事? 請試明辨看. 還有麽? 所以道,‘ 諸佛出世, 好 與二十棒;達磨西來, 好與二十捧.’ 更有二十棒, 切忌動着! 動着則打折你腰.” 喝一喝. 52) 釋迦老子. 석가모니(釋迦牟尼)와 노자를 합친 말로, ‘노자’는 존칭이다. 53) 부처님의 교설이나 달마의 종지는 시험 장치가 걸려 있는 화두이므로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모두 허물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벌을 내린다는 뜻이다. 철 두철미하게 부정하는 입장에 서는 살(殺)의 방(棒)이다. 20방은 형법상 죄인을 다스리는 일돈방(一頓棒)이다.
[설화] 말해 보라 ~ 달마대사가 인도로부터 종지를 전하러 왔다고 해도 20방을 때려주어야 할 잘못이다:부처님은 49년 동안 설법하면서도 한 글자도 설한 적이 없 다.54) 부처님의 교설이나 조사의 가르침에 허물이 없지 않다는 것이 이 공 안의 취지라는 뜻이다. 20방이 더 남아 있으니 ~ 한 소리 크게 내질렀다:이 하나의 통로55)가 더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海印:且道至達磨西來好與二十棒者, 當四十九年說法, 未曾 說一字也. 佛敎祖敎, 未得無過, 卽此話義也. 更有二十棒至喝 一喝者, 須知有這一竅, 始得. 54) 궁극적인 진리는 문자를 벗어나 있다는 경전의 뜻을 선종의 관점에서 수용한 구절이다.『白雲守端語錄』권1 卍120 p.415a3,『大慧語錄』권15 大47 p.873 a16,『開福道寧語錄』 卍120 p451b7,『兀菴普寧語錄』 권상 卍123 p.12b11 등에 널리 활용되고 있다. “법은 문자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혜야, 부처님과 모든 보살은 한 글자도 설하지 않고 한 글자도 답하지 않는다. 왜 그런 가? 법은 문자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요익한 뜻을 설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언설은 중생의 망상이기 때문이다.”(『楞伽經』 권4 大16 p.506c4. 法離文字故. 是故, 大慧, 我等諸佛, 及諸菩薩, 不說一字, 不答一字. 所以者何? 法離文字故. 非 不饒益義說, 言說者, 衆生妄想故.);“나는 일찍이 이 깊고 깊은 반야바라밀다와 상응하는 도리에 대해서는 한 글자도 설한 적이 없고, 그대도 듣지 않았으니, 이 해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大般若經』권499 大7 p.540b29. 我嘗 於此甚深般若波羅蜜多, 相應義中, 不說一字, 汝亦不聞, 當何所解?) 55) 저일규(這一竅). 지금까지 한 말에 한정되지 않고 드러나지 않은 근본적인 한 수 가 더 남아 있다는 뜻.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방과 할을 시행하는 파주(把住)의 극치를 나타낸다.
승천회의 상당 이 공안을 제기하고 말했다. “여러분! 도솔천을 떠나기도 전에 이미 왕 궁에 강림했다는 사실은 없지 않다고 하자. 그렇다면 말해 보라! 모태에 서 태어나기도 전에 어떻게 중생을 제도하겠는가? 만약 이 질문에 대하 여 제대로 대답을 엮어낸다면,56) ‘한눈에 삼구(三句)57) 밖으로 넘어서고 나니, 갈대꽃은 바로 달빛 안에 있구나’라고 말할 경지가 될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피부를 얻었거나 골수를 얻었거나 무슨 소용이 있겠는 가? 조계의 길58)에서 8천 리나 멀어질 것이다.” 법문을 마치고 선상(禪床) 을 쳤다. 承天懷, 上堂, 擧此話云, “諸仁者! 未離兜率, 已降王宮, 卽不 無. 且道! 未出母胎, 如何度人? 若向這裏搆得去, 可謂一見能 超三句外, 蘆花只在月明中. 若也未然, 得皮得髓將安用? 蹉 過曹溪路八千.” 擊禪床. 56) 구득(搆得). 물건을 얼기설기 엮어내듯이 이것저것 고려하여 분별로 모색해낸 다는 말. 57) 종지를 드러내는 구절. 세 구절로 종지를 간략하게 나타내는 관습에 따라 종지 를 표현하는 언어의 형식을 일반적으로 삼구라 한다. 운문삼구(雲門三句)·동 산삼구(洞山三句)·덕산삼구(德山三句)·임제삼구(臨濟三句)·분양삼구(汾陽三 句)·사비삼구(師備三句)·수산삼구(首山三句)·대양삼구(大陽三句) 등 각 선사 들의 서로 다른 삼구가 있다. 58) 조계(曹溪)는 본래 6조 혜능(慧能)을 가리키며, 조계의 길이란 6조가 걸었던 정 도(正道)를 말하지만, 선종의 종지를 상징하는 말로 쓰인다.
[설화] 도솔천을 떠나기도 전에 ~ 모태에서 태어나기도 전에 어떻게 중생을 제도하겠는가: 중생 제도라는 뜻을 집어낸 말이며, 또한 공에서 나와 유로 들어가는 뜻이 기도 하다. 한눈에 ~ 달빛 안에 있구나:‘한 발의 화살로 세 관문을 무너뜨리니, 화살 날아간 자취가 분명하도다’59)라는 구절과 같다. 피부를 얻었거나 ~ 8천 리나 멀어질 것이다:달마가 문인들에게 각자 얻은 경 계를 말해보도록 하였는데, 피부를 얻은 문인에서 시작하여 혜가(慧可)가 골수를 얻은 것에 이르러 조사의 자리를 이었으니60) 이것이 선문 안의 일 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조계의 문 밖에서 8천 리 길이나 멀어진 격이 니 결코 이 길에서 8천 리 거리로 멀어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길이 8천 리라는 말은 중국에서 인도까지의 거리가 10만 8천 리라는 뜻이기도 하다. 承天:未離至母胎如何度人者, 度人之義, 拈出也, 亦出空入 有之義也. 一見至月明中者, 一鏃破三關, 分明箭後路也. 得皮 至八千者, 達磨命門人, 各說所得, 自得皮至慧可得髓, 紹續祖 位, 是門內事. 雖然如是, 曹溪門外, 蹉過路八千, 須是不蹉過 此路八千, 始得. 路八千者, 亦指西天十萬八千之意. 59) ‘한 발의 화살’은 과녁에 적중하는 화살처럼 핵심을 찌르는 한마디 말이다. 곧 ‘한 구절에 도에 빈틈없이 딱 들어맞는 것’과 같다. 세 선사의 말에 제기된 관문 을 모두 타파하는 한마디 말을 가리킨다. ‘화살 날아간 자취’라는 말은 종사들이 제기한 말의 단서를 말한다. 그것이 분명하므로 모든 화두가 날아가 맞히려는 목표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두 구절은 본래 귀종지상(歸宗智常)의 게송에 나온다.『景德傳燈錄』 권29 大51 p.452a2 참조. 60) 달마가 인도로 떠나기 전에 자신의 후계자를 선정하고자 도부(道副)·니총지 (尼總持)·도육(道育)·혜가(慧可) 등 네 명의 제자에게 각기 자신의 견해를 말하 라 하고, 그 각각의 견해에 대하여 자신의 피(皮)·육(肉)·골(骨)·수(髓)를 얻었 다고 평가하여 결국 혜가를 법제자로 인가한 인연이다.『禪門拈頌說話』101則, 『景德傳燈錄』권3「菩提達磨傳」大51 p.219b27 참조.
장령수탁(長靈守卓)의 상당
“도솔천을 떠나기도 전에 이미 왕궁에 강림하였다고 하지만, 석가노자 는 이 대목에서 자신의 귀를 틀어막고 방울을 훔친 격이다.61) 모태에서 태 어나기도 전에 중생 제도를 벌써 마쳤다고 하지만, 설령 그렇게 했더라도 여전히 재빠르게 알아차리는 본성으로 모든 속박을 끊어 없앤 사람의 경 지는 못 된다. 하물며 또 다시 일곱 걸음을 내딛고 사방을 둘러보았다고 하니, 도대체 어디로 가려 했던 것일까? 할아버지 당시에 이미 온몸으로 넘어졌으니, 오늘날 후손들이 어떻게 일으켜 세울 것인가?62) 후손을 번성 시키고자 한다면 별도로 청규를 나타내야 할 것이니, 시험 삼아 공(空)에 서 나와 유(有)로 들어가며 무궁하게 변화하는 경지에서 결정적인 전기가 되는 한마디 말을 해 보라!” 長靈卓, 上堂云, “未離兜率, 已降王宮, 釋迦老子, 向者裏, 掩 耳偸鈴. 未出母胎, 度人已畢, 直饒伊麽, 也未是性燥勦絶底 漢. 何況更有周行七步, 目顧四方, 向什麽處去也? 祖父當時, 旣已和身放倒, 兒孫今日, 又且如何? 欲得昌隆後嗣, 別現淸 規, 試向出空入有, 變化無方處, 下一轉語!” 61) 엄이투령(掩耳偸鈴).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것을 비유하는 말.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치면 그 소리가 자신에게 들리지 않으므로 남들도 듣지 못할 것이라고 어리 석게 믿는다는 뜻이다. 조사선에서 상대가 감추려고 했던 속마음을 간파했다는 뜻으로 쓰인다. 62) 공안의 이야기 자체에는 문제를 해결하는 단서가 전혀 주어지지 않은 것을 말 한다. 화두는 완결된 상태로 제기되지 않고 후손들이 늘 그것에 대해 비판적 평 석을 내릴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조상이 할 일을 다 마치지 못하면, 그 재앙이 자손들에게 미친다(祖禰不了 , 殃及兒孫)”라는 말과 유사하다.
송원의 상당
이 공안을 제기하고 말했다. “황면노자는 처음부터 한 조각의 널빤지 를 어깨에 짊어지고 오로지 한편만 보았기에63) 후대의 아손들로 하여금 있는 힘을 다하여도 다리를 들어 올리고 일어서지 못하도록 만들었던 것 이다.” 松源, 上堂, 擧此話云,“ 黃面老子, 末上擔一片板, 只見一邊, 致令後代兒孫, 盡力擡脚不起.” 63) 보통 담판한(擔板漢)이라 한다. 한쪽 시야가 널빤지에 막혀 양쪽을 모두 보지 못 하는 것과 같이 견해가 한편으로 치우친 사람을 비유한다.
[설화] 장령과 송원의 상당법문은 공안의 본칙에 이미 드러난 뜻이다. 長靈松源上堂, 話中已出. [출처] 1칙 세존도솔世尊兜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