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나타나듯 흉악한 제왕으로서, 또는 포악한 군주로 '역사의 반역자'로 생각하였다. 이것은 신라정부를 배반하고,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한 장본인으로서 왕건에 의해 축출됨으로서 불인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므로『삼국사기』에는 그가 태어날 때부터 이가 있었고, 기상이 활발하고 담기가 있었으며, 외출할 때 항상 백마를 타고 동남동녀와 두 아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불경스런 경문을 강설한 불인의 화신으로서, 천하의 원악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인물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승자이 편'에서 이룩되었으므로 패자는 부정적으로 서술되기 마련이다. 고려말의 최영·정몽주, 조선초의 정도전을 비롯하여 성삼문과 조광조 등은 분명히 반역으로 처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들은 반역자가 아니라 충신으로 존경을 받는다. 다만 궁예·견훤은 국가(왕조)의 흥망에 관계되었기 때문에 신원의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만일 그 후손에 의해서 왕위가 복위되었다면, 그는 중흥의 제왕의 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도덕적으로 불인의 행위를 하였고, 미륵신앙에 도취되어 자신을 신격화시켰으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였다. 다만 그의 정치적 위상이 고려왕조에 어떤 영향을 주었고, 또 그의 정치행위가 우리 나라 역사에서 어떠한 위상을 가졌는가하는 것은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포악한 군주라고 해도 일정한 업적이 있었고, 다음의 역사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궁예는 신라의 몰락귀족 출신임으로 자신의 권위회복과 가문복구에 대한 야심(복수심)에서 철저한 반신라의 입자에 서 있었다. 더구나 몰락신분으로 농민층과 호홉을 같이하였으며, 자신의 지위확장을 위해 불교(미륵신앙)를 이용하였다. 그러므로 나말의 반신라적 풍조에 자신의 지위를 높일 수 있었다. 그는 우선 강릉지역(김주원세력)의 반신라적 조류와 강원도일대의 무장된 농민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패서일대의 호족(평산박씨·정주유씨·왕건계열)들의 세력을 유지하는 선에서 후고려를 세울 수 있었다. 이러한 세력확장은 장기간 나말의 환란을 수습해야 한다는 정치적 과제 속에서 가능하였으나, 많은 전투경험 속에서 성장된 왕건세력의 대세에 편향된 호족과 마군의 향배속에서 궁예는 몰락하게 된다. 궁예를 떠받치던 호족의 경제력과 전문적인 군사력(마군)은 이제 왕건의 지지기반으로 자리를 바꾸게 된다.
그러나 궁예는 나말의 혼란상을 수습하여 새로운 왕조(고려) 창설을 가능케 한 교량적 위상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단지 왕건의 성장을 가져오게 한 정치적 매개자가가 아니라, 신라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강력한 왕권강화정치를 가능케 한 장본인이었다. 이미 그는 호족의 문제점을 인식하여 내성기관을 강화시키고 병권을 장악하여 호족연립정부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였고, 대국토이상을 나타내 고려왕조가 추진한 북진·자주 정책의 기저를 마련해 준바 되었다.
**궁예는 누구인가
강 병 석 (소설가) ----------- 세미나자료 중 발췌
내가 궁예라는 인물을 처음 맞닥뜨렸던 것은 30여 년 전, 내 나이 열 살 때였다. 황무지를 개간하겠다며 고향을 떠나 휴전선 턱밑인 철원 땅으로 이사한 아버지 덕분이었다.
수복지역 철원 땅은 그 때 폐허였다. 산자락과 들판의 곳곳에는 가시철조망과 깡통조각 탄피들이 불발탄과 함께 녹슬어 가고 있었으며, 키를 넘게 웃자란 잡목들과 가시덤불 속에는 썩은 군화짝과 사람의 뼈가 예사롭게 뒤섞여 나뒹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황량한 폐허를 파 일구고 씨앗을 묻었다. 나이가 많아 개간을 돕기 어려운 노인들이 있었다. 동구 밖 나무 그늘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다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 심심풀이 삼아 옛날 얘기를 풀어놓았다.
- 비겁한 놈의 친구가 되는 것보다는 정직한 놈의 원수가 되는 게 더 낫다. 독사와 전갈은 조심하면 피할 수 있지만 비겁한 인간은 피할 수 없다. 천 연도 넘는 아득한 옛날, 여기 철원 땅에 고려국을 세웠던 궁예대왕이 그렇게 말했다.
- 궁예대왕은 귀족과 평민들을 모두 없애 버리고 백성들이 골고루 잘살 수 있도록 자상하게 보살폈던 탓에 미륵대왕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 저 아랫녘 원주 땅에서 군사를 일으킨 양길이란 장수는 힘이 얼마나 셌던지 당할 자가 없었고, 밤에 잘 때도 한쪽 눈씩 교대로 뜨고 잤던 탓에 후백제와 견훤이 여러 번이나 자객을 보냈지만 끝내 해치지 못했다.
- 궁예대왕이 가뭄이 극심한 어느 날 저 아래 강물을 건너다가 물줄기가 땅 밑에 깊이 묻혀 있어 들판의 농토로 끌어들일 수 없음을 한탄했는데, 그 때부터 저 강이 한탄강이라 고 부르게 되었다.
자칫 황량한 폐허 위에 팽개쳐진 채 시들어 버릴 뻔했던 내 어린 시절의 꿈을 채워주고도 남을 만큼 얘기는 흥미진진했다. 말 타고 철원의 산야를 누비는 궁예의 전설을 쫓으며 상상의 날개를 펼치느라 소년기는 미처 심심해할 틈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자라면서 학교에서 배우고 읽은 교과서와 삼국사기 따위 책에 적힌 기록은 토박이 노인들에게 들었던 얘기와는 딴판이었다. 한마디로, 고려(후고구려)의 궁예왕은 포악한 인물이었다는 내용뿐이었다. 나는 한동안 모진 혼란과 충격 속에 놓이게 되었다.
나는 숫자로 씌어진 현대사 4·19, 5·16, 12·12, 5·17, 6·10 의 현장을 한 금씩 통과하면서 자랐고, 이긴 자의 손으로 쓰여진 역사의 기록이란 어쩔 수 없이 윤색되고 왜곡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도 눈을 뜨게 되었다.
비로서, 고려왕조의 정난정국공신 김부식이 역사를 기록하기에 합당한 인물이 아니라는 심증을 갖게 되었다. 고려 왕실의 신하였던 김부식으로서는, 왕건의 패륜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궁예를 폄훼할 도리밖에 없었으리라.
나는 아주 오랫동안 궁예의 흔적과 자료를 찾아 여기저기를 헤매었다. 성과는 미미하였지만, 더는 미룰 수 없다는 생각으로 올 봄에는 소설 궁예를 탈고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나는 소설 궁예를 쓰는 동안에 궁예가 누구였는가를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