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제 가문과 정초부] 정병경.
ㅡ운포를 찾아ㅡ
우수ㆍ경칩이 지나 계절은 봄에 접어든다. 꽃피는 4월에도 산간엔 폭설이 내려 계절을 망각하기도 한다. 새벽엔 이슬비가 내려 눈으로 바뀌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구름이 걷히어 다시 청명해진다. 계절도 서로 밀고 당기며 세력을 과시한다. 봄 날씨는 기후 변화가 심해 긴장된다. 팔당호를 스치는 물결에서 상큼한 봄향기가 느껴진다.
운포雲浦 여성제呂聖齊(1625~1691) 선생이 태어난 곳은 광주廣州 남종면 수청리이다.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나며 관료 생활을 명예롭게 마친 인물이다. 광주문화원 광주학 연구소 김이동 부소장과 함께 운포 선생의 생가와 묘역 탐방에 나선다. 아직은 이르지만 곧 수양버들 벗꽃이 활짝 피어 행인을 유혹하는 팔당호숫길로 달린다. 고등학교장으로 퇴임한 부소장으로부터 역사 인물과 묘역에 관련된 석물 등 많은 상식을 얻고 있다. 함께 동행하며 고향에 묻힌 역사의 인물을 재조명하는 계기이다.
운포가 남긴 저서 '운포유고집'은 후대에게 물려준 문화유산이다. 그의 생가는 터만 남았는데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다. 주택 모퉁이에 신도비가 방치되어 있다. 묘역은 신도비에서 200m 위쪽 가파른 능선에 자리했다. 동리 주민으로부터 묘역의 위치를 대충 듣고 경사가 심한 산으로 향한다. 부소장 덕분에 겨우 찾은 무덤 모습을 보는 순간 만감이 교차한다. 후손은 각처에 흩어져 있다. 묘비가 정면이 아닌 무덤 방향으로 있고 장명등은 기울어져있다. 묘지는 한양을 등진 동쪽방향이다. 그가 남긴 업적에 비해 관리가 소홀함을 느낀다. 후손인 여운형의 기념관과 비교가 된다. 제향 올릴 사당과 묘역길을 조성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두루 거친 관직과 정직한 성품인 운포 선생의 업적을 기리지 못한다면 선친에 대한 수치이다.
여운형(1886~1947)의 기념관은 강 건너편 신원역 뒤편에 있다. 비교적 넓은 면적의 언덕에 자리했다. 많은 이들이 생존 당시를 회상해 꾸준히 찾고 있다. 여운형 선생은 여정현呂鼎鉉과 경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이고 문장가이기도 하다. 지닌 기량을 펴보지 못한채 암살 당하면서 세간에 주목받는 인물이다. 집안의 노비를 해방시키고 교육ㆍ계몽 활동에 전념하기도 한다. 아직도 후대는 그를 평가중이다. 그에게 만약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가 천수를 다했다면 세상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전제를 놓기 때문이다. 후덕함과 겸손하며 리더십이 있다는 평이다. 후세들은 그를 재평가하며 천재적으로 태어난 금세기 드문 인물이라고 한다.
ㅡ정초부를 기리며ㅡ
여성제呂聖齊 가문과 정초부鄭樵夫(1714~1789)와의 관계를 새겨본다. 정초부는 여씨 문중의 노비이다. 이름은 정이재鄭彛載이고 초부樵夫는 나뭇꾼이란 의미인데 호號로 더 알려져있다. 그의 시짓는 솜씨가 출중해 사대부들로부터 명성이 높다. 여성제 5대손인 헌적軒適 여춘영呂春永(1734~1812)은 정초부의 시짓는 재능을 알아차린다. 함께 시를 지으며 가르침을 준다. 이후 신분을 초월해 교우 관계가 된다. 여춘영은 20살이 위인 정초부를 스승처럼 배려한다.
정초부의 시가 사대부 사회에 알려지며 극찬을 받게된다. 초부는 가난한 삶을 살면서도 시짓기에 전념한다. 천민인 그는 양반들 시회詩會에 초대되어 함께 시를 짓기도 한다. 그의 시상에 대해 양반 사회에서 화제로 부각된다.
양반 자제들이 배우는 서당에서 어깨 너머로 익힌 실력으로 문장가들과 함께 한다는건 쉽지않다. 운율과 성조를 익히며 기승전결을 맞춘 실력은 자발적인 노력의 덕택이다. 수청리에서 나무를 나룻배에 싣고 옥수동을 거쳐 동대문에 내다 팔며 생활한 나뭇꾼이 천직이다. 양반들의 배려 덕택으로 후에 양인이란 신분으로 바뀌지만 궁핍하기는 여전해 나뭇꾼 생활을 해야만 한다.
소문을 들은 양반들이 초부의 시상에 감응해 수청리 월계협 집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즉흥시를 지으면 군수가 감사의 표시로 쌀을 하사하기도 한다. 동원아집東園雅集과 같은 양반의 시회에 초대되어 함께 시를 짓기도 할만큼 실력이 충분한 문장가이다. 수원부사 김상묵과 사대부들은 직접 수청리까지 걸음하여 정초부를 만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의 시짓는 실력을 인정받아 조선 후기 대가들 작품이 실린 '병세집'에 정초부 시가 11수 실려있다. 김홍도는 노비 출신의 시에 반해 그가 그린 도강도渡江圖에 동호범주東湖帆舟 시를 차운한다.
"동호의 봄 물결은 쪽빛보다 푸르러/ 또렸하게 보이는 건 두세 마리 해오라기/ 노를 젓는 소리에 새들은 날아가고/ 노을 진 산빛만이 빈 못을 채우나니."
가난한 삶에도 그의 시상은 남다르다. 안빈낙도를 벗삼아 시 한 수 토해낸다. 배고픔의 고통을 시어에서 읽게 된다.
"산새는 옛날부터 산 사람 얼굴을 알고 있건만/ 관아의 호적에는 아예 들 늙은이 이름이 빠졌구나/ 큰 창고에 쌓인 쌀 한 톨도 얻기 어려워 / 강가 누각에 홀로 기대어 저녁밥 짓는 연기만 바라보네."
가난한 살림에 문집을 내기가 쉽지 않아 엄두를 못낸다. 정초부가 세상 떠난 후 여춘영의 배려로 '초부유고집'에 글을 싣는다. 초부유고는 정약용, 박제가, 이학규, 정초부 등 4명의 시가 실린 문집이다.
명시를 남긴 정초부는 76세에 세상을 하직한다. 당시의 수명으로는 천수를 누린 셈이다. 여춘영의 문집인 헌적집軒適集에는 정초부와 함께 지은 시가 실려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문도 실었다. 여춘영이 나뭇꾼을 떠나보내고 만시輓詩를 지어 바친다. "저승에서도 나무하는가? 낙엽은 빈 물가에 쏟아진다. 삼한 땅에 명문가 많으니 내세에는 그런 집에 나시오."
그가 살던 월계협을 기억하기 위해 월계초부ㆍ수청초부라는 호로 부르기도 한다. 문장가 여성제와 후손인 여춘영의 정기를 받아 세상에 시를 뿌린 정초부는 특별한 인연으로 여긴다. 정초부를 기억하는 시조時調 한 수 지어 올린다.
"월계협 나뭇꾼은
천상이 내린 시인
시 가득 짊어지고
산천을 두루 돌아
청탄 골
달빛 아래는
그림자만 외로이."
광주시에 간절한 바램을 옮겨본다. 정초부가 남긴 시를 모아 시 거리 조성과 아담한 기념관을 건립했으면 한다. 아마도 여성제 선생이나 후손 여춘영의 소원일지도 모른다.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노비 출신 시인이 광주 수청리 산골에서 함께 여생을 보낸 일대기는 후대가 체험해야 한다. 정초부의 시에 반해 감흥이 일어난다. 가슴 한켠에 시심이 또아리를 튼다. 절실하면 명시가 나온다. 불현듯 18세기 인물 정초부에게 달려가 시 한 수 배우고 싶은 마음이다. 수청리에서 두 가문에 대한 시인의 체취를 잠시나마 느끼고 돌아선다.
2024.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