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같이 산밭으로 일을 나간 엄마를 대신해 아침밥을 짓는 든든한 맏딸 봉필순은, 부지깽이로 부뚜막을 내리치며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감골 소녀다. 필순은 야학에 다니게 되면서 한글을 깨치게 되고, 나아가 경성에 가 뾰족구두를 신고 커피를 마시는 신여성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된다.
한편 여덟 살에 아버지가 한성 권번에 팔아 버린 아이 김섭섭은 권번에서도 쫓겨나 조선 총독부 경무국장 집의 식모가 되어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가는 열네 살 소녀다. 야학당 사건으로 필순이 경무국장의 집에 오면서 이 둘은 함께 살게 되고, 동갑내기인 둘은 노래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하면서 마음을 터놓는 동무가 된다.
그러던 중 예기치 못한 사고가 일어나고, 섭섭은 군대 위안부로 끌려갈 위험에 처하고 만다. 동무가 불행의 나락으로 빠질 걸 알면서도 모른 체할 수 없는 필순은 섭섭의 손을 잡고
야반도주를 하는데…….
과연 두 소녀는 무사히 자신들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좇아 고군분투하는 두 소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차례
1. 불씨
2. 감골 소녀
3. 꽃샘추위
4. 경성
5. 섭섭이
6. 유코 할머니
7. 유성기
8. 겁탈
9. 도망
10. 베레모
11. 파랑새 극단
12. 신인 가수 선발 대회
작가의 말
책 속에서
“선생님, 신식 가요 많이 아세요? 가요 좀 가르쳐 주세요, 네?”
필순의 가슴은 수많은 질문으로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 날은 돌아와 잠자리에 누워도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간신히 잠이 들면 꿈속에서 자신이 신여성이 되어 뾰족구두를 신고 어딘가를 향해 끝없이 걷는 꿈을 꾸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거짓말처럼 발목이 아팠다. _28쪽
다른 건 몰라도 필순은 일본 순사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어른들도 아이들도 벌벌 떠는 일본 순사가 무섭지 않은 날이 온다면……. 그런 날이 올 수 있다면, 조선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필순은 마른 가지를 뚫고 나오는 새싹처럼 빼꼼 세상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씩 생각의 잎이 자라나고 있었다. _29쪽
필순은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유성기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나팔꽃 한 송이가 어두운 상자 속을 막 뚫고 나와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필순은 사랑스러운 눈길로 유성기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직 감동에 빠지기엔 일러. 진짜는 소리야. 한번 들어 볼래?”
섭섭은 중요한 비밀이라도 가르쳐 주는 양 낮게 속삭였다.
“그래도 될까? 마님이 아시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필순의 눈은 이미 상자 위에 얹혀 있는 검은색 원형 판에 꽂혀 있었다. _97쪽
‘괜찮아, 잘될 거야.’
필순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 나서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두렵고 무서웠지만 섭섭을 구하자면 용기를 내야 했다.
여덟 살에 아버지가 권번에 팔아 버렸다는 아이, 권번에서도 쫓겨나 일본인 집에서 식모살이를 해야 했던 아이, 안주인에게 회초리를 맞으면서도 울지 않던 아이, 겁도 없이 안주인의 유성기를 틀어 놓고 춤을 추며 노래하던 아이, 신식 가요를 멋들어지게 부르던 아이, 그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도와야 할 아이다. 더구나 섭섭은 필순이 낯선 경성에 와 처음으로 마음을 나눈 동무다. 동무가 불행의 나락으로 빠질 걸 알면서도 모른 체할 순 없다. _126쪽
나는 놀랐습니다. ‘저고리 시스터즈’가 결성된 1930년대 후반 일제 강점기는 내 머릿속에 어둡고 아픈 시대로만 기억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 우리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희생을 당했습니다. 많은 소년들이 징용에 끌려가고, 소녀들은 군수업체 여공이나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습니다. 정말 안타깝고 슬픈 역사지요.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꿈을 꾸고, 그 꿈에 도전하고, 엎어지고, 또 일어나 도전하면서 어두운 시대를 건너온, 용기 있는 청소년들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_<작가의 말> 중에서
지은이 소개
김 미 승
돌이켜보니, 내가 청소년 시절에 읽었던 책은 대부분이 ‘세계 명작’이라는 타이틀을 단 책들이었다. 이해되는 책도 있었지만 이해되지 않는 책도 마치 통과 의례처럼 읽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읽었던 책들을 통해 어렴풋이 세상의 흐름, 역사가 보이기 시작했다. 작품 안에서 배경이 되는 역사는 곧 인류의, 우리의, 나의 역사이기도 했다.
나는 역사를 좋아한다. 역사는 삶의 무늬다. 그래서인지 역사를 소재로 한 좋은 작품(영화, 드라마까지)을 만나면 금세 마음을 홀랑 빼앗기고 만다. 그런 작품을 쓰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세상에 없는 아이》에 이어, 두 번째 역사 소설 《저고리 시스터즈》를 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