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3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루카.15,1-10
잃어버린 양을 구하는 법: 먼저 나에게 음식을 대접하게 하라!
유튜브 ‘SBS STORY, TV 동물농장’, ‘걸어 다니는 흰머리수리?’에 맹금이지만 소심쟁이 백설이가 나옵니다.
백설이는 하늘의 제왕이라 불리고 사냥의 명수 맹금류지만 날려고 하지 않습니다.
걸어만 다닙니다.
사람의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랍니다. 미꾸라지와 같은 살아있는 것들은 보기만 해도 질겁을 합니다.
먹이를 보고 도망 다닙니다.
백설이가 이렇게 된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인간에게 길러졌기 때문입니다.
워낙 약하게 태어나서 사육사가 먹이를 집어주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열다섯 살이 되어서도 본인이 인간인 줄 알고 걸어 다니기만 하는 것입니다.
맹금류를 팔 위에 앉힐 때는 보통 소가죽으로 만든 장갑을 사용하는데 백설이는 워낙 인간을 해칠 마음이 없어서 맨살에 올려놓아도 살포시 앉아있습니다.
본인이 인간과 인간 세상에 속한다고 믿게 된 것입니다.
백설이를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자연에 속한 자신과 비슷한 것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동물농장에서도 매를 이용하여 사냥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백설이도 들썩들썩하더니 동물을 사냥하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보지 못해서 못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에 다니는 것들을 잡아서 먹게 되고 고공비행도 성공합니다.
사람이 주는 음식을 먹으면 사람에게 속합니다. 자연이 주는 음식을 먹으면 자연에 속합니다.
음식이 나오는 출처가 자신이 속할 세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십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과정이라고 하십니다.
왜 죄인들이 주는 음식을 예수님께서 받아 드셔야 할까요?
그 이유는 먼저 죄인들의 세상에 속해야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세상에 속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 ‘신원 조회 불가, 어느 날 산속에서 홀연히 나타난 할머니의 정체는?’에서는
40년간 이름도 출생신고도 되지 않은 산속에서 지내는 한 할머니가 나왔습니다.
그 할머니는 남들이 먹다 버린 만두나 귤껍질 등을 삶아서 드시며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제작진들은 그분을 자신들의 세상으로 끌어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할머니에게 그런 음식 먹으면 안 된다고, 자신들이 맛있는 것을 사드리겠다고 설득합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제작진을 내쫓습니다.
자신의 세상과 그들의 세상은 완전히 달라서 마치 사람이 새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소원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제작진은 먼저 할머니의 마음을 열어야 했습니다. 그 추운 겨울에 텐트를 치고 침낭에서 자며
할머니와 대화를 시도하고 필요한 것들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장 좋은 쌀과 김치로 밥을 지어서 제작진들에게 주었습니다.
제작진들은 어쩌면 짐승에게는 적당한 그 음식을 받아먹었습니다.
할머니는 이로써 제작진들이 자신과 다를 바가 없음을 믿게 됩니다.
그러자 제작진의 세상에도 내려갈 용기가 생깁니다.
그렇게 할머니는 입원하여 치료받으십니다.
‘우와한 비디오’에 보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세상에 갇혀 있는 분들을 우리 세상으로 끌어내는 이야기가 여러 편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 우리 집을 뺏으려 한다! 365일 화장실에서 생활하는 여인’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도 할머니는 누군가 자기 집에 독가스를 주입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항상 마스크를 하고 열한 달 넘게 화장실에서만 생활합니다.
이분을 다시 거실로 끌어내기 위해 제작진은 습기가 많고 냄새나는 화장실에서 할머니 어깨도 주물러드리고 이야기도 들어줍니다.
할머니는 제작진이 고마운지 화장실에서 라면을 끓여주십니다.
제작진은 화장실에서 할머니가 주시는 음식을 받아먹습니다.
이때 할머니는 제작진이 당신과 다를 바가 없음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들의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믿게 됩니다.
결국 할머니는 거실로 나가서 정식으로 그들에게 밥상을 차려줍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이 주는 음식을 드시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제공하는 음식, 곧 미사 때 봉헌되는 빵과 포도주를 받으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속하시고 죄인들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다를 것이 없는 인간임을 믿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마치 아브라함이 멜키체덱에게 소득의 십분의 일을 봉헌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가진 선악과를 봉헌해야 합니다.
내가 봉헌하는 것을 그분이 받는 것을 보아야만
그분이 나와 다르지 않음을 믿게 됩니다.
마치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성경을 가슴 뜨겁게 해석해 준 것에 고마워서
음식을 대접해드리기 위해 자신들의 집에 초대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정성스러운 봉헌으로써 주님을 우리 안에 초대하고 음식을 대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엔 그분의 세상에 속하기 위해 그분이 주시는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체와 성혈입니다.
이 성체와 성혈을 영함으로써 우리는 이제 그분의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그분처럼 될 수 있음을 믿게 됩니다.
그분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실 수 있는 것을 믿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가 될 수 있음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을 때 그분의 세상에 속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양을 찾는 방식이고 우리가 세상에서 똑같이 실천해야 하는 사랑의 방식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3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지금은 무조건 예수님께 나아갈 순간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결점이나 약점, 반복되는 악습들 마음 같아서는 단칼에 없애버리고 싶지만, 그게 생각처럼 그리 쉽지 않습니다.
최근 참으로 부끄러운 일을 한 가지 체험했습니다.
열심한 후배들의 모임 때였습니다.
강의 시간에 제가 공공연하게 한 가지 결심을 선언했습니다.
“살레시안들의 대희년인 돈보스코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며, 각자가 뭔가 한 가지씩 봉헌한다든지, 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변화는 거창하거나 두리뭉실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돌아보니 ‘과속’이라는 아주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험하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날아오는 딱지도 만만치 않을뿐더러 쓸데없는 연료 소모도 엄청날 것입니다.
앞으로 저는 도로 표지판이 지시하는 규정 속도를 정확하게 지키기로 결심합니다.
그것이 대희년을 준비하는 제 개인적 결심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새벽부터 꽤 장거리를 뛰어야 했습니다.
운전대 앞에 앉으면서 어제 공개적으로 한 말도 생각나서 규정 속도를 지키면서 천천히 운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좋더군요. 마음의 여유도 생기고...
그런데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너무나 답답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습관을 바꿔서 그런지 마치 기어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도착지는 생각보다 너무나 멀었습니다.
내비게이션에 찍힌 도착 예정시간을 보니 밟지 않으면 불가능했습니다.
이러다 미사시간 늦겠다는 생각과 함께 어제의 ‘대단한’ 결심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예전의 공격적, 저돌적인 저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악습이란 것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습니다.
당대 질 나쁜 사람들의 대표 주자였던 세리와 여러 부류의 뒷골목 인생들이 몰려왔으니 분위기가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세리와 죄인들의 지난 삶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들어선 이 길, 한번 벗어나보려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지 않고 한번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나름 수도 없이 결심도 하고, 때로 죽기 살기로 몸부림도 쳐 봤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 다시는 이렇게 살지 않는다,
이런 나쁜 습관은 내일부터 버린다며 혈서까지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뿐 몸이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오랜 세월 몸에 밴 악습을 단칼에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은 굴뚝같았지만 행동이 뒷받침되어주지 못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어제로 돌아가서 악습을 반복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악습의 순환 고리를 끊지 못하고 한 평생 괴로워하며 살았던 세리와 죄인들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예전의 지도자들이 그토록 회개를 부르짖었지만 미동도 하지 않던 세리와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감미롭던지, 또 얼마나 따뜻하던지, 그리고 얼마나 큰 위로를 주던지, 그들은 그들의 폐부 깊숙이 박혀버렸습니다.
그들이 정수리와 골수를 관통하면서 그들을 순식간에 딴 사람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구제불능으로 낙인찍힌 세리와 죄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시는 예수님을 향해, 그리고 몰려든 세리와 죄인들을 향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며 투덜거렸습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이런 그들의 빈정거림에 예수님께서는 제대로 한방 날리십니다.
그 한방의 말씀은 위선자들에게는 마치도 쌍날칼처럼 날카롭지만 세리와 죄인들에게는 한없이 부드럽습니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살다보면 우리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이 안 되는 문제들이 생깁니다.
때로 사방이 높이 둘러싸인 벽으로 가로막혀 탈출구가 안보입니다.
그 순간은 바로 예수님께로 나아갈 순간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리와 죄인들처럼 큰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송구스럽고 죄송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무조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나를 향한 마음>
2022. 11. 03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루카 15,1-10 (되찾은 양의 비유, 되찾은 은전의 비유)
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하나를 향한 마음>
수많은 사람 가운데
단 하나라도
단 하나라도
단 하나라도
하나가 모여 이루는 모두를
살리는 마음입니다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쯤이야
하나쯤이야
하나쯤이야
하나가 모여 이루는 모두를
죽이는 마음입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