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인되어야 할 성구>
1)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어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2:10)
2)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2:16)
<본문 설교>
오늘도 행복한 주일 아침입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예배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함께 우리의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아멘, 아멘!
오늘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아가서 입니다. 아가서는 유대인들이 유월절에 낭독했다는 히브리 성경의 다섯 두루마리 중 하나입니다. 아가서는 구약성경에서 정경성의 위치를 획득하는데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건, 남녀의 '성'과 정신적. 정서적. 육감적 사랑을 중심으로 하는 그 내용의 파격성과 현란함에, 일반 신자들도 당황하거나 혼란스러워 했기 때문입니다. 적나라한 성에 대한 묘사와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고양된 찬양, 감미로운 구애 등은 설교자들에게 적지 않은 두통거리를 제공했습니다. 그렇기에 설교자들은 아가서를 설교해야 할 경우, 꺼림칙한 이 책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안절부절 못하게 됩니다. 물론, 풍유적 해석을 통해 그러한 꺼림칙한 마음을 어느 정도 해소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본문 자체에 대한 어색함은 앙금처럼 그대로 남습니다. 영혼에 그윽한 안위와 평화를 주어야 할 바로 '그 말씀'이, 이제는 그들의 마음과 영혼을 혼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연애편지를 쓰면서 이전 세대의 젊은이들은 아가서로부터 과감하게 표절하기를 즐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청교도적 어른들은 아가서에 대한 그들의 숨겨진 불편함을 타고난 피부색처럼 치부하며, 마음속에 받아들인채 지내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이미 정경이 확립된 1세기경에 많은 랍비들이, 아가서의 정경성에 대해 커다란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위대한 랍비였던 아키바(Akiba)는 단호한 목소리로, "아가서는 신성하다. 아가서가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던 날은 온 세상이 감당치 못하였을 것이다"(Mishnah Jadajim3:5)라고 말하면서, 카페에서 불리는 에로틱한 샹송 정도로 아가서를 사용하는 자는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아가서가 후대에 얼마나 해석상의 논쟁과 토론의 주제가 되었을 것인가를 예상케 합니다.
그러나 결국, 유대 전통(맛소라 전통)과 기독교 전통 모두, 아가서를 그들 경전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위대한 영혼들과 신학자들은 이 책에 깊이 매료되어 그들의 최상의 노력과 연구를 아낌없이 쏟아 부었습니다. 이처럼 아가서는 언제나 이러한 이중적 반응을 얻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가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가 아가서를 어떠한 관점으로 볼것인가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건 아가서가 담고 있는 내용의 파격성과 의외성 때문에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은 아가서를 어떠한 방식으로 이해할 것인가에 관해, 많은 논란과 관심을 기울여 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가서를 다루는 전통적 해석 방법은 "풍유적"(allegorical)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의 경우, 아가서 해석은 단순한 풍유적 해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취한 풍유적 해석은 '역사적'풍유적 해석이었습니다. 다시말해 아가서는 '이스라엘의 이야기'에 대한 풍유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이야기인가 하면, 아가서는 출애굽에서 시작하여 메시아의 도래에 이르는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에 대한 풍유이거나, 아니면 포로기에서 시작하여 다윗 왕조의 재건을 향한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에 대한 풍유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적 전통 역시, 이러한 풍유적 해석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개인 신자 사이의 관계로, 혹은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교회와의 관계로 아가서를 읽어 내려 갔습니다. 물론 해석 방법론으로써 '풍유'(allegory)와 '모형론'(typology)사이에 상당 부분이 겹치고 있음을 부인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유적 해석은 아직까지 상당수의(복음주의적)교회들 안에서나, 몇몇 영성 신학 전통 안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복음주의적 전통의 교회에서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그리고 있는 성경으로 읽히며, 이런 경우 자연스레 아가서는 풍유적으로 혹은 모형론적으로 해석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개인 영성을 강조하는 부류의 사람들과 신학자들은, 아가서가 하나님과 한 개인 영혼의 진솔한 영적 사랑의 밀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항상 그런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독법은 매우 감성적이고 감흥적인 신앙적 전통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서 쉽게 발견되기도 합니다.
그럼 아가서가 주는 신학적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고대 이스라엘에 있어서 인간적인 모든 것들 중, 아가서에서 표현되고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아가서는 하나님의 성품들 중의 하나로 인간에게 하사된 선물인 '사랑'에 대해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더할 나위 없는 매력과 아름다움을, 영감된 언어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가서에 있어서 사랑의 주된 목소리는 잠언 8:1~9:12의 지혜의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여성의 목소리입니다. 이것은 사랑과 지혜는 여성의 유혹이 지니고 있는 미묘함과 신비함으로 남자들을 강하게 끌어당김을 시사합니다.
이 여성의 목소리는 사랑에 대해 심오하게 이야기하며, 사랑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묘사합니다. 그것은 또한 사랑의 배타성을 요구하고(2:16"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또 사랑에는 순수한 자발성이 필요함을 역설합니다(2:7"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그리고 그 목소리는 또한, 사랑의 압도적인 힘을 선포합니다. 이것은 무시무시한 대적인 죽음의 힘과 경쟁 관계를 이루기도 합니다. 사랑은 강력한 불처럼 맹렬하게 타오릅니다. 이 사랑의 불은 대양의 깊은 물로도 꺼뜨릴 수 없습니다(8:6~7상). 그 목소리는 사랑의 귀중함을 주장합니다. 모든 재산을 주고서도 사랑을 살 수 없고, 또(그 대안으로)모든 재산과 사랑을 교환할 수도없습니다(8:7하). 그 목소리는 명확하게 말하지는 않지만, 사랑이 주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선물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비록 사랑이 고대와 현대의 사람들에 의해 크게 왜곡되고 남용되어져 왔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사랑이 자신의 선하신 창조세계 내에서, 결혼 생활의 정상적인 일부분이 되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창1:26~31; 2:24).
그렇다면 아가서를 통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타락은 인간의 삶의 모든 국면을 손상시켰고,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인간의 모든 삶의 적절한 기능을 회복시키는데 목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이 낭만적인 사랑이, 이 사상의 잠재적인 고통과 변질에도 불구하고, 구속받은 자기 백성의 즐거움의 한 무대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가서에 등장하는 사랑에 빠진 두 남녀를 보십시오. 바로 다윗의 아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입니다. 그런데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을 상징하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과 사랑에 빠진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사랑에 빠진 성도들은 아가서를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아가서를 통해, 예수님이 나에게 사랑을 고백하시고, 내가 예수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결 론
'리챠드 범브란트' 목사님은 루마니아의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 모진 박해를 받으신 분입니다. 목사님이 옥중에 있을 때 성경을 읽어 내려가다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수없이 기록된 것을 보고, 도대체 몇 번이나 씌여 있는가를 세어 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365번이나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일 년 365일 동안 매일같이 두려움에 싸여 있는 우리들에게 성경은 하루도 빠짐없이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가서의 주요 대상은 인간의 "성"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언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는 감히 하나님을 넘볼수도 없는 사람들이 되었지만, 하나님은 더이상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사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경외의 대상이시며,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시기 때문입니다.
아가서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구약에서 결혼 메타포는 매우 강한 메타포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결혼 언약처럼 그의 백성과 언약 관계를 맺으십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간음을 범할 때에라도 언약은 충성을 요구합니다. 신약은 동일한 메타포를 긍정적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에베소서5:22-33은 남자와 그 아내의 관계를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로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결혼의 친밀성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친밀성을 묘사하는데 사용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파트너가 되어주시며, 우리의 신랑이 되어주신 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면 무능하고 부족하여 한숨 지을수 밖에 없지만, 우리의 영원한 신랑이 되어주시는 예수님과 함께 할때, 우리는 성공적인 삶을 살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을 사치라고 생각하십니까? 맞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분명, 우리가 누릴수 있는 최고의 사치입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과분하게도 누릴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음을, 오늘 아가서는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이야기로 아가서를 말씀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아가서는 하나님과의 상실된 관계의 회복의 이야기이며, 회복된 사랑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사랑을 누려야 합니다. 사랑을 받아야 하며,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짝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그에게 속한 사랑, 그가 나에게 속한 사랑(2:16)뿐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 이시간에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누리라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함께 기도드리시겠습니다.
<참고 문헌>
"손에 잡히는 구약개론" IVP
"성경개관 구약편" 부흥과개혁사
"ESV스터디바이블" 부흥과개혁사
"위드바이블" 바이블넷
"옥스퍼드 원어 성경대전" 제자원 바이블네트
"구약개론"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구약총론" 생명의말씀사
"두란노How주석시리즈" 두란노아카데미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