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blog.naver.com/neolamo/220667654130
우정(禹晶)의 노년인문학칼럼(153) 죽음의 철학: 삶과 죽음 - 아직 오지 않은 죽음에 미리 달려가 보기 -
죽음은 여전히 인간에게 있어서 어려운 문제 중에 하나다. 죽음은 삶의 마지막 끝으로써 우리 인식의 영역을 넘어선 단계다. 죽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명이라고 할 수 없다. 헤겔(2005)은 “신체의 죽음이야 말로 개인(개체)이 공동체를 위한 마지막 노동”이라고 했다. 모든 개체가 도달하는 보편성이 죽음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 것을 알 수가 없다. 쇼펜하우어는 “죽음에 대해 무관심 하라”고 했지만 누구든지 가끔은 좋은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간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건강을 잘 유지하면서 죽음을 초월하려는 것이 인간의 현세적 목표다. 기쁨, 초월적 힘, 영혼의 불멸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 실존이다. 살아있는 사람 모두는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죽어도 영혼의 영원성을 추구한다.
죽음의 철학(philosophy of death)은 모든 사람이 결국 죽는 다는 데서 출발한다.(Kamath, 1993), 다뤄지는 주제 역시 다양하다. 죽음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들, 즉 죽음이 무엇인가?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죽음의 순간을 수없이 넘기면서 느끼는 인간의 실존은 무엇인가. 실존주의적 죽음에 대한 형태와 범위는 무엇인가. 아니면 죽음이 좋은 일인가 나뿐 일인가, 영혼은 존재하는가. 죽음은 우리가 사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등이 망라된다.
사실상 죽음보다 더한 보편적인 주제를 상상하기 어렵다. 이 세상에서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지만 죽기를 두려워한다. 실제 우리 생활 속에서 문학과 예술에서, 사회규범과 윤리에서 다뤄지지만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전문가로써 살기는 어렵겠지만 죽음과 죽어감(dying)에 대한 관심은 누구나 빼놓을수 없는 대상이다. 공자는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했다. 불교에서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살 것인지도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만큼 죽음에 대한 이해는 우리 삶의 현실적 문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죽음을 둘러싼 철학적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인생에서 죽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큰 질문 말이다. 죽어감과 죽음은 누구에게나 최대의 관심 대상이니 그렇다. 철학자 혹은 철학자가 아니든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데는 큰 차이가 없는 것 아닐까. 그동안 죽음에 대한 논의가 은유적이거나 금기시되는 주제였기에 가장 취약한 문제이고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죽음을 모르면 언젠가 찾아올 죽음을 배울 수 없다. 인간으로써 최대 관심은 건강과 생존 및 죽음 이후의 내세와 영혼의 문제인 것이다.
□ 죽음이 왜 철학의 주제인가
죽음은 철학의 주제다. 죽음의 철학은 자연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탐구다. 철학은 진리를 찾는 것, 그리고 우리가 진실 되게 살아가도록 돕는 학문이다. 그러나 늘 그랬듯이 철학적 문제는 논쟁의 세계다. 인간은 동물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특별한 실존으로써 ‘나’를 인식하는 장대한 존재이다. 인간은 호모사피엔스(생각하는 인류, 이성인)다. 인간의 동물이 아닌 것은 본질적으로 자기 인식 능력에 있다. 자기 인식 없이는 존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생명의 가치는 다르지 않다는 것, 다만 종(種)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주장도 있지만(Singer, 1994) 인간은 정신적 존재(mental being)라는 점에서 동물과 다르다. 짐승들도 자신들의 고유 방식으로 의사소통하지만 이성적 정신적 존재는 아닌 것이다.
독일 정치 철학자 헤겔은 말했다. 인간의 실체는 동물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사유하는 존재자의 실체라고. 그는 인간사고가 세계정신 자체의 사고로 전제하고 현실이 곧 이성임을 강조한다. 정신은 본질적으로 현실적인 것이어서 이성의 눈으로 철학하기를 강조한다. 이성은 곧 정신으로써 이는 또한 영혼의 삶과 연결돼 있다.(비앙키, 2014) 또한 프랑스 아날학파의 필립 아리에스(Aries, 2004) 역시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동시에 삶의 완성이라면서 인간은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했다.
따라서 죽음의 철학에서는 무엇을 이해 할 것인가? 하는 것이 핵심주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이 시작되는 삶의 동반자이지만 정작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작용해왔다. 그런 점에서내 우리의 몸과 의식이 깊은 침잠에 깨어나야 한다. 죽음을 잘 관리하고 맞이하기 위해서는 삶의 의미를 꾸준히 찾아내 대처하는 일이다. 삶이 펼쳐지는 시공간 속에서 몸과 마음, 그리고 지각을 온전히 유지하는 일이 건강한 삶이다. 영혼의 질병을 잘 치유하면서 죽음을 준비해 나가는 것이 노년기의 지혜다. 이와 관련해 죽음의 철학에서 우리가 배우고 실천해야 할 요소들이 무엇인가 찾아보자.
첫째, 죽음의 의미(meaning)를 아는가?. 죽음은 각자 독특한 형태를 갖는다.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을 부여했던 조건들이 상실 돼가는 과정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예를 들면 생물학적으로 건강이 약해지면서 기침이 잦아지고 가래가 끊는다. 앉고 일어날 때도 힘들다. 결국 생명의 끝을 맞는다. 죽음의 끝은 개인 자신의 종말이다. 과거 현재 미래로 가는 시간속에서 ‘지금-순간’에 물질적인 존재 뿐만 아니라 비물질적인 영혼의 문제까지 깨닫는 일이다.
둘째, 몸의 소멸인 죽음의 모습은 어떤가?. 즉 몸과 죽음의 관계로서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 그것은 다른 이의 타자화 된 죽음과 주체적인 ‘나’의 죽음으로 나눌 수 있다. 자신의 죽음에는 또 죽임을 당함(타살됨)과 스스로 자연 순리에 내 맡기는 죽음(순명)이 있다. 죽음의 형태는 자연사 뇌사 병사 안락사 자살 타살 변사 의문사 고독사 사형 등 다양하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식물들, 그리고 이 땅위에 살고 있는 동물들, 모두가 죽음과 동시에 해체된다는 사실을 성찰하는 일이다.
셋째, 죽음에 대한 공포, 두려움, 불안, 허무함(무로 돌아감)과 같은 감정이 어디서 오고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 즉 죽음에서 오는 본능적인 두려움 같은 것을 어떻게 멀리할까? 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영적 위로를 받지 못하고 심한 압박감과 미몽 속에서 죽어갈 것이다. 물론 죽는 그 순간 육체와 뇌는 죽게 됨으로 죽음 자체는 인식 또는 학습 할 수 없다. 죽음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라고 느낄 시간적 심적 여유가 없다는 의미로 죽음의 순간에 의식은 상실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에 근접한 한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더 잘 살기를 원하게 마련이다.
넷째, 죽어가면서 후회하는 것이 무엇인가?. 후회(regret)는 우리 생활과정에서 실패한 것, 낭비한 것, 해보지 못한 것 등 다양할 것이다. 죽음 앞에서 후회는 눈물로 변한다. 인간이기에 후회하는 것이다. 일본의 호스피스 전문의 오츠 슈이치(2015)는 ‘죽을 때 후회하는 것“들을 말한다. 그것은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을 못한 것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 것 △지금 순간에 충실하지 못한 것 △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것 등을 제시하고 있다. 말인즉 마지막 순간까지 후회 없이 잘 살아왔는가를 묻는 것이다.
다섯째, 죽음의 질이 무엇인가?. 삶의 질과 죽음의 질이 다른 것은 아니다. 죽음을 알면 삶이 잘 보이기 마련이다. 잘 죽는 법을 알지 못하면 잘살지도 못한다.(Critchley, 2008)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 없이 가족들에게 좋은 기억을 남기고 떠나는 것이 좋은 죽음이고 세상과 화해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이 오는 방식은 매우 비극적이다. 치매 등을 앓다가 죽으면 가족들에 대한 영원한 수치가 된다.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뜻이다. 마지막 임종단계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고통을 완화하며 개인의 존엄성을 지키는 죽음이 좋은 죽음이다.
여섯째, 생명/죽음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 무엇인가?. 죽음과 관련해서 신체에 대한 병리의학적으로 치료하고, 그리고 죽음에 대한 합리적인 태도를 갖도록 하는 것이 윤리적 판단이다.(Morhaim, 2012) 그러나 장수사회에서 죽음과 관련된 윤리논쟁(자살, 장기기증, 안락사 등)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식물인간 상태(뇌사상태)에 있는 삶에 대해 죽음을 재촉할 수 없는 일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에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막아 웰다잉을 유도한다는 법안들도 마련되고 있다. 무리한 생명 연장 때문에 존엄성이 짓밟혀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곱째, 죽음 관련기술의 발전이 무엇이고 어느 수준인가?. 노화문제와 관련된 줄기세포 복제 유전자치료 인간 게놈 염기 서열 조작을 통한 생명 연장술들이 발전하고 있다. 생명공학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데 수명연장술, 냉동보존술, 바이오 산업 등 생물 의학적 영역에서 크게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100세 시대 “나는 언제까지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갖게 한다.
여덟번째, 인간의 불멸성(indestructibility)은 가능한가?. 흔히 인생의 유한성과 불멸성의 논쟁은 끝이 없다. 유한성은 물질에 기초한 것이고 불멸성은 정신(spirit)의 개념이다. 육신은 죽더라도 영혼은 계속된다는 개념이다. 인간 속에 생명의 본질인 불멸성이 깃들어 있다는 얘기다.(Fischer, 2013) 이러한 불멸의 희망은 종교가 그러하듯이 영혼의 존재를 반영한다. 사이몬 크리츨리(Critchley, 2008)는 내세에 대한 믿음, 불멸에 대한 갈망은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극복의 열망이라고 진단한다. 우리 신체는 사유하는 존재지만 우리 삶은 영혼의 삶과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아홉 번째, 죽음이후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우리 대부분은 사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모른다. 다만 타인들의 죽음을 통해서 막연히 이해 될 뿐이다. 그런데 매우 제한적이지만 우리가 죽으면 소멸(無의 상태), 영혼 정신의 계속성(부활), 불교 힌두교에서 말하는 환생, 윤회설 등을 알고 있다. 기독교의 성경, 불교 경전의 능가경(楞伽經)과 금강경(金剛經) 등 모든 경전들이 죽음이후의 다른 세상을 얘기한다. 종교적 믿음, 영성, 수행의 길을 인도하고 있다. 죽음 이후에 천당 혹은 지옥에 갈수 있다는 교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죄를 짓지 않는, 지속적인 정화가 필요한 존재들이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정말 큰 질문들이다. 죽음, 죽어감에 대한 철학적 이해 그리고 죽음 이후에 우리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의 궁극적 개념들조차 난해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죽음의 철학을 논하는 것은 우리가 죽음에 잘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소멸의 공포를 직시하고 이를 극복하도록 돕는 것이 죽음 철학의 과제다.(Critchley, 2008) 현자들은 죽음을 영적으로 해방되는 재탄생(환생), 부활을 통해 영생의 길로 나갈 수 있는 여정으로 설명한다. 말인즉 죽음을 완전히 준비하기 위해서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는 수행을 요구한다. 죽음과 영혼의 상실은 생명의 에너지가 단절 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에서 한 평생 통찰과 깨달음이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에피쿠로스는 사람들에게 현재의 “삶에 신경 좀 쓰라”고 권면하지 않았던가. 죽음이라는 예정된 시간은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지금 현재 삶의 형태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
□ 죽음의 설교자들 철학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했다. 죽은 다음의 생이 없다는 철학자도 물론 있다. 하지만 많은 철학자들이 초월(형이상학)보다 일상을 하늘 저편 대신 땅위의 삶을 더 강조한다. 내가 없는데 천당도 지옥도 없다면서 내가 절대유일의 존재가 아닌가 묻는다. 어떤 이는 죽음에 대해 무관심 하듯 죽음 앞에서 유언도 싫고 무덤도 싫다는 반응이다. 공자 역시 “삶에 대해서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 알 수 있는가“라며 죽음의 문제를 적극 다루지 않았다. 한마디로 죽음과 영혼에 대한 문화적 종교적 철학적 견해는 다양하다. 죽음의 의미, 영혼불멸에 대한 철학적 주제는 끝이 없는 논쟁의 세계인 것이다.
까다롭지만 죽음의 문제는 철학자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철학적 입장에서 우리 모두는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논리실증적으로 우리는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한다. 죽음의 본질, 내세로의 영원가능성, 죽음의 대한 수용태도 등 '죽음학' 입장에서 보면 매우 중요한 주제다. 이러한 죽음의 문제는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 스피노자의 작품들에 이어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 칼 야스퍼스, 비트겐슈타인 등에서 잘 나타난다.
O 하이데거의 현존재와 죽음
죽음의 설교자 중에서 우선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Heidegger)가 있다. 그는 “인간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부터 시작한다. 살아있는 실존적 의미에서 인간존재를 다른 존재들과 구별해서 ‘현존재’(Dasein)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현존재란 다름아닌 죽음을 향한 존재다. 죽음이란 자신의 실존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는 상태다. 이는 인간을 ‘세계-내-존재’(being-in-the-world)에 초점을 맞추고 인간을 이 세상에 내 ‘던져진 존재’로써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고 살다가 죽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 누구도 국가 부모 성별 출생일을 택할 수 없이 태어났기에 자기 맘대로 결정할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것, 어느 상황에 처해 있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존재에 대해 ‘책임을 지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분석에서 생물학적으로 죽음 또는 죽어감에 대해 관심이 없다. 다만 죽음의 현상에 대해서도 인간 현존재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being-towards-death)입장에서 접근한다. 이때에 현존재란 자신의 한계, 자신의 불안을 극복하며 자신의 본래적 모습을 찾아가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의 관심은 현존재인 인간은 “아직 오지 않은 죽음”(yet-to-come' death)의 상태, 즉 죽음으로 ‘미리 달려가 봄’으로써 자신의 유한성을 깨닫고 자기 고유한 본래적인 전체적인 삶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존재의 관점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할 때 죽음은 실존으로서 다가오게 된다는 논리다.
더구나 하이데거의 죽음에 대한 입장은 ‘존재와 시간’(Being and Time)속에서 설명한다.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죽음에서는 타락(fallenness), 내던져짐(thrownness), 죄(guilty) 등의 문제로 설명하면서 단순한 존재가 아닌 인간의 현존재(Dasein)을 설정한다.(하이데거, 1998) 그는 현상학적으로 죽음에 대한 종교적 프레임에서 벗어나 ‘존재와 시간’에서는 하나님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인간실존을 내세운다. 인간의 존재를 종교적으로 신 또는 불멸에 관계없이 순수 형상으로 보았다.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로 본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며 피할 것이 아니라 죽음을 직접 대면하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성찰하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죽음이 저 멀리(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은 늘 생의 바로 옆에 거리 없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해 실존적으로 분석하고 있는데 그것은 ▷죽음은 목격 될 뿐 자신은 결코 경험될 수 없다는 것, ▷인간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점에서 죽음은 언제나 한계상황으로 존재한다는 것, ▷죽음에 대한 경험이나 예측도 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죽음은 늘 인간에게 있어서 현존재일수 없다는 입장이다. 사람은 아직 죽지 않은 상태에서, 즉 삶이란 자신이 태어난 후 지금까지 죽음이 아직 찾아오지 않은 시간 속에 살아갈 뿐이다.
하이데거의 이러한 죽음에 대한 근본적 성격 때문에 인간은 ▷원치 않는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데 이때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는 점, ▷인간은 불안을 부정하기 위해 현재 자신의 상태를 외면하려한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죽음의 가능성을 늘 안고 살아가는 존재로써 ‘한정된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는 입장이다. 인간은 죽기 전에까지는 자신의 죽음을 경험할 수 없고 이해 할 수도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죽으면 더 이상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죽음 자체를 전할 수 없다. 다만 주변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에서 자기 자신도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 할 뿐이다. 사람들은 자기 죽음이 멀리 있다는 생각을 하며 “아직은 아니다”라며 살아갈 뿐이라고 강조한다. 결국 하이데거의 죽음에 대한 실존적 개념은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그것은 주체적 으로 받아들이는 죽음이고, 또 하나는 비주체적, 비존재 상태로 도피하려는 태도다. 전자는 최종적인 죽음을 향한 존재,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후자는 죽음은 ‘세계-내 존재’로부터 분리되는 소멸성이 인간의 한계이지만 살아있는 동안 자기존재 불가능성에 대한 두려움, 불안, 허무함, 무화(nothing)의 가능성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존재들이다. 즉 ‘죽음에 임하는 존재’로부터 도피하려는 인간의 나약함을 지적 하고 있다.
O 야스퍼스의 한계상황에서의 존재의 죽음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는 시간차원에서 경험자체로 자신의 존재를 말한다. 실존적 분석이 곧 하이데거의 철학이다. 그러기에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한 우리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수많은 과오 속에서 살아간다. 반면에 칼 야스퍼스(Jaspers)는 하이데거와 다르게 ‘인간의 존재론적 구조’를 말하지 않는다. 존재(dasein)의 죽음에서 죽어가는 존재를 넘는 초월성, 궁극적인 내세, 불멸을 말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해 종교적 관점에서 보는 것은 아니지만 초월하는 존재(existenz)로서의 실존적 개념으로써 비인격적인 신을 상정한다.(Filiz, 2008) 하이데거와 야스퍼스가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하이데거는 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고 야스퍼스는 인간이 신의 품에 안기게 된다고 함으로써 유신론적 실존주의 입장을 취한다.
아울러 인간은 한계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그것은 죽음, 우연, 투쟁(다툼), 고뇌, 죄책(부채)이다. 죽음은 존재로서의 피할 수 없는 조건이다. 야스퍼스의 실존철학(philosophy of Existence)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이 겪는 한계상황은 고통과 죽음의 문제다. 한계상황은 어떤 벽(사회제도 규범)에 맞서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의미한다. 이런 한계상황(critical situation, Grenzsituation)은 인간의 ‘세계 내 존재’(being-in-the-world)의 끝을 의미하기 때문에 죽음은 우리의 안정감 존재의 기반을 위협하는 것이다.
알아차리기 쉽지 않지만 죽음은 삶의 적이다. 생명은 본질에서 있어서 창조이고 자발성이지만 사실 생사문제는 어떤 예정이나 예상도 허락 하지 않는다. 야스퍼스가 말하는 죽음에 대한 태도는 3가지로 요약되는데 이를테면 ▷죽음은 절대 끝이 아니다, ▷육체의 죽음은 절대 끝난다, ▷죽음을 회피하고 무관심 해 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이 일어날지 전혀 예상이 불가능한 한계상황에서 좌절하며 생존해 가는 존재들임을 말한다. 즉 야스퍼스는 인간이 늘 필연적 한계상황에 늘 놓여 있다는 판단이다. 여기서 한계상황인 죽음 고뇌 투쟁 죄책 등 숙명적인 한계상황을 극복 못하고 오히려 이런 한계상황을 감내하며 세상에서 버텨내는 것이 실존의 본질이다.(Filiz, 2008)
특히 야스퍼스는 죽음을 인간존재의 피할 수 없는 한계상황으로 보고 인간이 죽음에 직면해 취할 수 있는 태도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그것은 우선 객관적 사실로 특정 한계상황에서의 존재의 죽음이다. 야스퍼스가 말하는 한계상황은 피 할 수 없는 상황 즉 실존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을 의미한다. 죽음은 고유한 것, 남과 바꿀 수없는 것, 반드시 찾아오는 것을 변경할 수 없는 것이 한계상황이다. 그러나 우리가 피 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있더라도 그것을 넘어 진정한 자신을 찾게 되고 초월적 능력을 갖는, 즉 죽음을 모르는 불멸(deathlessness)의 실존임을 강조한다. 죽음을 허망한 종말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즉 자기의 한계상황을 인식하며 희망을 잃지 않도록 대처하는 것이 인간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모르는 존재라는 사실은 죽음을 초월해서 살 수 있는 영원성이다. 영원성은 시간을 초월한 비물질적 자유 그자체이다. 죽음을 초월해서 영적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인간 실존을 초월하여 신에게 다가가는 것, 신에 의한 초월, 구원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 이를 때 사람은 비로써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자유로서의 실존’ 이 주어진다. 주체적인 자기존재를 초월하여 영원히 살고 싶다는 욕구는 인간의 궁극적 관심이며 이는 종교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죽음은 인류역사 이래 중대한 의미로 인식되어온 것이다.
그러므로 야스퍼스는 인간의 죽음의 필연성과 비존재 개념을 이해 할 것을 요구한다. 야스퍼스는 실증주의적 과학과 지식에 대한 과신을 경고하면서 인간의 비합리성에 기초한 본래적인 인간존재의 문제를 실존철학이라는 방법으로 설명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존재라는 개념을 사용했다면 야스퍼스는 ‘자기 실존’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특히 ‘자기실존’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근본적 물음과 관련돼 있다. 결국 ‘나’는 실존적 불안, 소외와 고독, 죽음의 문제들을 극복해 가는 존재로써 여기에는 자기인식, 정체감, 타인과의 관계 찾기 등을 모색하고 재정립 해 가는 ‘나’를 강조한다.
덧붙이면 야스퍼스의 실존이라는 의미는 객관적 존재, 자아존재, 그리고 존재자체를 말한다. 여기서 ‘객관적 존재’란 사람 짐승 건물 등 모든 대상들이 존재하는 것이고, ‘자아존재’란 나 자신이 세계에 존재하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옳고 그름의 이치를 깨닫는 자아를, 그리고 ‘존재자체’란 현존재에 관계하는 초월적 시원적 본질로써의 존재를 말한다. 이들 세 가지 형태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전체로 묶여져 결속되는 실존을 구성한다. 말인즉 모든 존재는 자체만으로 소중하고 아름답고 사랑받아야할 존귀한 존재들이다.
결국 야스퍼스는 죽음에 대한 포괄적이고 실존적 개념에 매달리지 않고 죽음에 직면해서 겪는 다양한 심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나는 죽음에 대해 어떤 의식과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죽음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달라진다는 입장이다. 한계상황에서 자기가 유한하다고 인식 할 때 초월자(또는 포괄자, Periechontolgie)와의 실존적 소통이 가능하게 된다. 죽음의 사실을 자각할 때 현실의 삶을 더 돌아보게 하고 본래의 자기를 주체적으로 인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인간으로써 ‘모든 것’들이 불가능하다는 것, 바로 그러한 사실 때문에 유한성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학습해야 한다는 것이다.(끝)
<참고자료> 비앙키, 올리비아(Olivia Bianchi, 2014), 『헤겔의 눈물』, 김동훈(역), 서울: 열린책들. 아리에스, 필립(Aries, 2004), 『죽음 앞의 인간』, 고선일(역), 서울: 새물결 오츠 슈이치(2015), 『죽을 때 후회하지 않는 사람들의 습관』, 황소연(역), 서울: 한국경제신문사. 하이데거, 마르틴(1998), 『존재와 시간』, 이기상(역), 서울: 까치. 헤겔, 게오르크 빌헤름 프리드리히(2005), 『정신현상학』(2), 임석진(역), 서울: 한길사. Critchley, Simon(2008), The Book of Dead Philosopher, New York: Random House. Filiz, Peach(2008), Death, Deathlessness and Existenz in Karl Jaspers' Philosophy,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Fischer, John Martin(2013), "Immortality", in Bradley, Ben, Fred, Feldman(2013), The Oxford Handbook of Philosophy of Death,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pp.336-353. Kamath, M.V(1993), Philosophy of Life and Death, Mumbai: Jaico Publishing House. Morhaim, Dan(2012), The Better End: Surviving(and Dying) On Your Owen Terms in Today's Modern Medical World, Maryland: The John Hopkins University Press. Singer, Peter(1994), Rethinking Life & Death: The Collapse of Our Traditional Ethics(2nd ed), New York: St Martin's Press.
우 정(자유기고가, 사회학) 작성일자: 2016. 3. 23. 최종수정: 2016. 3. 28. [출처] 죽음의 철학: 삶과 죽음|작성자 물푸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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