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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가 죽을 병에 들다
요 11:1-5
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요 11:1-5 / [나사로의 죽음] 여러분은 값진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씻겼던 마리아를 기억할 것이다. 바로 그 마리아와 그의 언니 마르다와 함께 베다니에 살고 있던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 3) 그래서 두 자매는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주님, 주님이 아끼는 사람이 매우 위독합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4) 그러자 예수께서 `그의 병은 죽을 병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인 내가 영광을 받게 되었다' 하고 말씀하셨다. 5) 예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를 무척 사랑하셨다.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기적으로, 이 기적을 통해 예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베다니(1-2)나사로는 예루살렘 동쪽 약 2km 지점에 있는 베다니라는 조그마한 마을에 동생 마리아 마르다와 함께 살았습니다. 영국의 신학자 아더 핑크는 '하나님께서 택한 자녀들이 있는 마을이나 나라는 하나님 보시기에 유명한 곳이다. 신약 성경에 뉴욕이나 파리는 나오지 않아도 마리아와 마르다의 마을은 기록되어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베다니의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로 소개됩니다(요 12:1-8). 이들은 예수의 공생애 내내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던 본받을 만한 집안이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3)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그 누이들은 예수께 사람을 보내 그 사랑하시던 자가 병들었다고 알리며 예수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 누이들이 예수께 그들의 문제를 가지고 가는 이유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들은 나사로에 대한 주님의 사랑에 호소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도 어려운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만났을 때 예수께서 나와 내 가정을 사랑하신다는 확신은 우리에게 굉장한 용기와 담대함을 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4-5) 예수께서는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나사로가 죽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라 그 병의 최종적인 결과가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나사로는 죽겠지만 다시 그를 살리실 것입니다. 이 병의 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이를 인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고난을 지나 부활의 영광을 얻을 것을 보여주십니다.
적용: 우리 가족 중에 누가 병에 걸렸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내 삶에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있습니까? 나의 고난을 영광 받으실 기회로 삼으시는 주님의 능력을 신뢰하십시오.
그리스도인에게도 시련과 어려움은 찾아옵니다. 그 때에 우리는 어항하기도 하고 어떤 식으로든 빨리 해결하려고 노력합니다.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우리는 그 일 뒤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필요합니다. 시련은 우리의 믿음을 단련시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합니다. 그 시간 나의 믿음을 자라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하는 은혜의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 설 교 >
또 그리로 가려 하나이까
요한복음 11:1-10 / 인명진 목사
얼마 전에 제 후배목사 몇 명이 찾아와서 저에게 “목사님도 이제 호(號)를 하나 가지셔야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호를 하나 가지고 왔습니다.” 하였습니다. 사실 내로라하는 지도자들이 이름 앞에 붙이는 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우남(雩南)이라는 호가 있었고 임시정부의 주석이셨던 김구 선생은 백범(白凡)이라는 호가 있었고 조병옥 박사는 유석(維石)이라는 호를 쓰셨습니다.
또 교계에서도 내로라하는 목사님들은 다 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추양(秋陽), 조용기 목사님은 영산(靈山) 그리고 김재준 목사님은 장공(長空), 강원룡 목사님은 여해(如海), 곽선희 목사님은 남원, 문익환 목사님은 유일하게 한글로 늦봄이란 호를 쓰셨습니다.
요즘은 호보다는 영문 이니셜로 많이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김종필씨는 JP, 김대중 전 대통령은 DJ, 김영삼 전 대통령은 YS로 부릅니다.
호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많이 알려진 지도자들의 이름에 붙여지는 또 하나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살아왔던 삶, 해왔던 일, 인간성 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이름이 호입니다. 호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 같은 사람이 호를 가진다는 것이 주제넘은 일이요, 자칫 웃음거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제넘게 무슨 호냐고 두 손을 내저으며 사양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도대체 이 사람들이 무슨 호를 지어왔는가 궁금하기도 하여 호기심이 생겨 ‘내 호를 무엇이라고 지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자신들의 생각으로는 제 호로 삼우가 좋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삼우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석 삼(三)자에 어리석을 우(愚)자로 세 번 어리석은 짓을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생각에 제가 평생을 어리석게 산 사람인데 적어도 제 인생에 세 번은 바보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호를 삼우(三愚)라고 지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그럴 듯하다, 나에게 어울리는 호라는 생각이 들어 제가 삼우를 제 호로 사용하기로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삼우라는 호를 사용하려고 한다고 했더니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다 깔깔거리고 웃는 것입니다. 삼우라는 말이 세 번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인데 인명진 목사에게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호를 들을 때 그 호가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과 어울린다고 생각해야 그 호를 마음 놓고 사용할 텐데 그 호를 듣고 사람들이 웃는다면 이것은 아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야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제 마음속에 새삼스럽게 생각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만약 우리가 예수님에게 호를 지어 드린다면 어떤 호가 적당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에게 호를 붙여드린다면 어떤 호가 적당할 것 같습니까? 저는 아주 쉽게 생각이 났습니다. 예수님에게 호를 붙여드린다면 더 말할 것도 없이 바보라고 붙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보 예수’ 얼마나 예수님에게 잘 어울리는 호입니까? 인명진 목사의 호가 바보라고 하면 이의가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예수님의 호가 바보라고 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 모두가 다 그럴듯하다, 어울린다고 100% 동의할 것입니다. 바보 인명진 목사라고 하면 웃던 사람들도 바보 예수라고 하면 웃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일생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정말 바보처럼 사셨습니다. 바보라도 그런 바보가 없습니다. 우선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것이 바보 같은 짓이었습니다. 하나님이셨던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것도 바보 같은 짓입니다.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위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예수님은 내려오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데 하나님이셨던 예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바보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 시골 나사렛의 낮고 천한 요셉의 아들로 태어난 것도 바보짓입니다. 기왕에 세상에 오시려면 명문가문, 좋은 집안을 택해서 나셔야지 저 시골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도 바보짓입니다. 제자들을 뽑을 때도 배우지 못하고 천박한 사람들을 뽑아서 데리고 다닌 것도 바보짓입니다. 저라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보 같은 제자들 때문에 예수님이 얼마나 고생을 하시고 속이 상하셨습니까? 그게 다 바보 같은 예수님이 스스로 자초한 바보스러운 일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의 이 바보 같은 행동은 오늘 본문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1장에서 보면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예수님에게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제자들이 간곡하게 말렸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수전절에 예루살렘 솔로몬 행각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때 백성들이 예수님에게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인가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단호하게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화가 났습니다. 저 자가 감히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신성모독이라고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덤벼들었습니다. 간신히 유대인의 손에서 벗어난 예수님은 먼 곳으로 도망을 가셨습니다. 10장 40절에 보면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요단강 저편, 옛날에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던 산골짜기로 도망을 가신 것입니다.
마침 그때 베다니에 사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서 한 사람이 심부름을 왔는데 이들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병이 들었으니 예수님께 빨리 좀 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10리, 4킬로쯤 떨어진 곳입니다. 그러니까 베다니로 간다는 것은 다시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잔뜩 벼르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청대로 베다니로 가는 것은 기름을 지고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스스로 무덤으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예수님이 사랑하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청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친구인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쉽게 그곳으로 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닙니다. 가기만 하면 영락없이 곤경에 처하게 되는 상황입니다. 아니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 대목에서 예수님께서 아주 곤혹스러워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것이 바로 엊그저께인데 마리아와 마르다의 청대로 베다니로 가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요단강가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가기는 가야 하는데 가면 분명히 고생하고 죽을 것입니다.
6절 말씀을 보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도망가셔서 피해 계시는데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도 이틀을 더 유하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늦게 가셔서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소식을 듣자마자 베다니로 달려가셨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늦게 오셔서 오라버니가 죽었다고 예수님을 원망하는 말을 합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이틀을 더 고민하시다가 마음에 결심을 하셨는지 베다니로 가자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8절 말씀에 보면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라고 말합니다. 쉬운 말로 하면 “예수님 정말 죽으시려고 하십니까? 거기가 어디인줄 알고 가시려고 하십니까? 고집부리고 가시면 이번에는 정말 죽습니다. 가시면 안 됩니다. 며칠 전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극구 말리는 것입니다. 너무도 상식적이고 당연한 말입니다. 우리들이라도 그랬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안일을 생각한다면 아무리 나사로가 병이 들었더라도 절대로 가면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예수님은 이와 같은 제자들의 일리 있는, 합리적인 말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대로 다시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가셔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만 결과적으로 그곳에서 붙잡혀 돌아가시게 됩니다. 결론은 예수님은 스스로 바보짓을 하신 것입니다. 안 가도 되는 유대 땅으로 스스로 가셔서 그것이 화가 되어 자신의 죽음을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조금이라도 생각하셨다면 누구든지 예측할 수 있는 훤히 내다보이는 일을 하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베다니에 안 갔다고 해서 예수님이 잘못했다고 탓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바보처럼 처신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곤경에 처하신 것입니다.
가정이지만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말을 듣고 베다니에 가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은 절대로 그렇게 빨리 죽지 않고 좀더 오래 사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당하고 돌아가신 것은 스스로 자초하신 것입니다. 자업자득입니다. 제자들의 말을 듣고 못 이기는 척하고 그냥 요단강가에 머무르셨다면 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바보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와 같은 바보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나도 예수님처럼 바보처럼 살겠다고 작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은 얼마만큼 예수님처럼 바보처럼 이 세상을 사느냐 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바보처럼 사는 사람은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이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약삭빠르고 계산적이고 이해타산에 밝은 사람은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바보처럼 살겠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나는 얼마나 바보처럼 사는 사람인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바보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하는가 아니면 약삭빠르고 계산적이고 이해타산에 밝은 사람이라고 하는가?' 질문을 해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도 그와 같은 바보였습니다. 그가 젊은 시절에는 지혜롭고 똑똑하게 살았지만 예수님을 믿은 뒤로 바보처럼 살았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 자신이 가진 권력과 명예와 지위 등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보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구약성경의 다윗도 바보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끈질기게 따라다녔습니다. 어느 날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굴속에 숨어 있는데 마침 그때 사울왕이 굴속에 들어와서 볼 일을 보려고 무기를 내려놓고 옷을 벗었습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바보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고 옷자락만 살짝 베었습니다. 원수를 갚을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인다 한들 뭐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사울이 먼저 다윗을 죽이려고 따라다니기 때문입니다.
바보였던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보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얼마만큼 열심히 바보처럼 사느냐 하는 것이 얼마나 열심히 예수님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오늘도 내가 바보처럼 살겠다는 말입니다.
우리 후배 목사들은 제가 살아가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본 사람들인데 저에게 “목사님은 바보처럼 사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알기로 최소한 세 번은 그러셨으니 호를 삼우라고 하십시오.” 라고 한 말을 듣고 사실 저는 크게 감격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보셨는데 저도 예수님처럼 바보였다고 감히 비교할 수도 없고 불경스러운 말입니다. 그래도 몇 사람이라도 제가 바보처럼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제 인생 최고의 영광이요 자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사람들이 저를 바보라고 한 것은 지금까지는 예수님처럼 바보처럼 살지 못했지만 앞으로 남은 인생만은 바보처럼 살라는 후배들의 애정 어린 충고, 바람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앞으로 남은 인생에 세 번만이라도 바보짓을 해보라는 부탁으로 그런 호를 저에게 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보처럼 산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 ‘저 사람 참 바보다. 보통 세상 사람이라면 절대로 저렇게 돈을 쓰지 않는데, 저렇게 처신하지 않는데 참 바보처럼 사는 사람이다. 저렇게 하고 세상을 어떻게 사는가?’ 그런 말을 듣는 것, 그렇게 사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제자들이 말렸을 때 “그렇다. 그곳에 고난이 기다리고 내 생명을 빼앗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리로 가겠다.” 라고 하시며 예루살렘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가신 예수님,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고 그 예수님을 따라서 바보처럼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귀한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영광에 이르는 병
김서년 목사
오늘 같이 읽으신 본문의 말씀은 우리 모두가 다 잘 알고 있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이적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복음서에서 보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참으로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귀먹고 벙어리 된 사람을 듣고 말하게 하시며, 귀신들린 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연과 관련된 기적도 베푸셨는데,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서 5천명을 배불리 먹이셨으며, 물 위를 걸으셨고, 풍랑이 이는 바다를 잠잠케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이적들 가운데서도 오늘 분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이적들 가운데서도 최대의 이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이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어서 무덤에 장사까지 지낸 자를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이적들을 곰곰이 살펴보면, 단순히 하나의 사건으로서의 기록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그 이적을 통하여 나타나는 계시적 의미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풍랑을 잠잠하게 하실 때에는 대자연을 지배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 병을 고치실 때에는 우리 인간의 병을 물리치시며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귀신을 내어 쫓으실 때에는 사탄의 능력을 제어하시는 예수님이심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말씀도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하나의 이적에 대한 이야기로서 보다는, 우리가 믿음 생활하는 데 있어서 아주 밀접하게 연관된, 우리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중요한 내용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이점을 우리가 깊이 생각하며, 은혜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오늘 본문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 아뢰는 장면부터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사로의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서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사실은,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고 말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장면을 한번 깊이 생각해 보세요. 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물론 오늘 본문 5절에서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하는 말씀처럼,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단순히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그 내면 속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살펴보면, 우리 마음속에 내재해 있는 또 다른 의미가 바로 이 말 속에 내포되어 있음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병을 다 고쳐주시는 분이십니다. 평소에 전혀 모르던 사람들 까지도 말이지요. 그런데 이 나사로는 단순히 그런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이지 않습니까?
이들은 주님을 특별히 사랑하며 애정과 충성을 다 바치고 있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이들을 깊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사람에게 이런 불행이 닥치는 것입니까?
사실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우리가 제일 시험에 들기가 쉽고, 때로는 회의에 빠지게 하는 것들이 바로 이런 내용이지 않습니까?
나는 그 동안 열심을 다 해서 믿음생활을 하여왔습니다. 주일도 빠짐없이 지켰고, 십일조 생활도 충성스럽게 하였고, 또한 교회봉사에도 열심을 다하였습니다. 남이 볼 때에도, 또 자기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정말이지 열심과 헌신과 충성을 다 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중한 병에 걸린다든지, 사업이 망하게 되었다든지, 자녀가 대학입시에서 낙방을 하였다든지, 불의의 사고를 당하였을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되십니까?
솔직히 이런 때에 우리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실망하게 되고, ‘왜 내게 이런 일이…, 나는 그렇게도 열심히 하였고 충성을 다하였는데, 축복은 고사하고 왜 이런 일이 내게…’ 하고, 참으로 원망과 갈등 속에서 흔들리게 되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어야 합니까?
우리 생각대로라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는 병도 없고, 실패도 없고, 공부도 잘하고, 돈도 잘 벌고,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척척 잘될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고, 사랑하시는 자가 왜 실패해야 합니까? 왜 인간적인 불행을 겪어야만 합니까?
‘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어야 합니까?’ ― 피상적으로 보면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내용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분명히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고, 그것도 죽을병에 걸렸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의 마음 깊이에 중요한 무엇을 오늘 본문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점을 잊지 마십시오. 성경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다고요. 예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자도 병들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일단 생각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병들었다고 하여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보다, 내가 벌 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지 않으셨다’ 하는 등등의 쓸데없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 본문의 의미를 깊이 생각한 오늘 이후로는, 결단코 여러분에게 그런 망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깊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주의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습니다. 사랑도 보통 사랑이 아니요 특별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그의 가족을 사랑하셨습니다. 그의 가족 또한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였습니다!!
오늘날 같으면야 예수님을 사랑하기가 어떤 면에서는 쉽습니다. 그러나 이때 당시는 이미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미움을 받고 있었고, 또 죽이고자 하는 모함 속에서 많은 핍박을 받고 있는 터입니다. 정말이지 순교적 정신이 아니고서는 그토록 극진하게 사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함께 죽겠다는 결심이 없으면 사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사로와 그 가족은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합니다. 예수님도 저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습니다. 그것도 중한 병에 말이지요!!
바로 이 문제를 놓고 여러분, 한번 단계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결론을 얻을 수 있으십니까?
먼저 오늘 본문이 말씀해 주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도 병이 든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좀 더 나아가 깊이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이기에 병들었다고 오늘 본문은 우리에 말해주고 있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병든 것입니다. 바로 이점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병’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병을 두고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병이 나면 혹시라도 죽을까봐 지레 걱정하게 되지 않습니까? 감기만 걸려도 ‘내가 죽으려나’ 싶고, 가슴이 두근두근 뛰면 심장마비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을 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 인간의 깊은 곳에는 두 가지의 고민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죽을까봐 고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죽은 다음에 지옥 갈까봐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록 내가 지금 죽더라도 천국에 간다는 확신만 있다면, 사실 그토록 고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천국에 분명히 간다고 하는 확신만 있다면 죽는 것이 결단코 두렵지 않게 될 것이고, 또 죽는 것이 두렵지가 않다고 하면 그까짓 그 어떤 병에 걸린다고 한들 그게 사실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죽을 병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여기서 ‘병’이란 것을 한번 긍정적인 눈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병이 들었지만, 사랑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분명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 전제하에서 한번 병을 이해해 보십시오. 그러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병을 주신 것이다’ 하는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랑하시기 때문에 병을 주신 것이다.”―이렇게 전제하고 보면, 이 병이 나에게 오히려 이로운 것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조용히 ‘이 병이 나에게 이롭게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그 이로운 점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먼저, 질병은 우리를 쉬게 합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늘 정신없이 바쁜 것을 보게 됩니다. 지방출장이다, 해외출장이다 하여 집에는 절반도 못 들어오다가 그만 덜컥 드러눕고 맙니다.
병원에 드러누워 그제야 좀 쉽니다. 그동안 나 아니면, 내가 일하지 않으면, 회사가 돌아가지 않을 것처럼 뛰었습니다만, 병들고 나니 모든 것을 멈추고 편히 쉬게 되었습니다. 병문안을 온 회사의 동료들이 한결같이 조금도 걱정하지 말고 병 치료만 잘 하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회사는 회사대로 또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걱정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질병은 우리로 하여금 쉴 수 있도록 해줍니다!!
또한 생각하게 됩니다.
그동안 정신없이 뛰었습니다. 사는 게 무엇인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이제 병들어 누어있고 보니, 성경도 읽게 되고 다른 책들도 보게 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동안 생각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생각하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바로 질병입니다. 무엇이 가치가 있고 무엇이 무가치한 것인가를, 무엇이 영원한 것이고 무엇이 일시적인 것인가를,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치 않은 것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것도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건강할 때는 그저 생각이 많았지만 그러나 그 깊이가 얕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병들었을 때에는 깊어집니다. 보다 중요한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병이 듦으로써 사람은 겸손해 집니다.
건강할 때에는 내 마음대로 할 것 다 했습니다. 얼마나 교만하고 오만불손했습니까? 얼마나 기고만장했습니까?
이제 병들어 누웠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지위도 재산도 소용없습니다. 정성껏 간호해주는 아내도 자식도, 그러나 나를 대신해 아파줄 수는 없습니다. 결국은 ‘나 혼자이다’――비로소 실존적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평소에 겸손하지 못한 분들은 지금부터라도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겸손하지 못한 그대로 그냥 두어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실상 큰일인 것이지요. 그리고 사랑하신다면, 사랑하시기 때문에 병이 들게 해서라도 겸손하게 만드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병세가 위중해지면 겸손해집니다. 자랑할 것이 무엇이며 주장할 것이 무엇입니까? 병이 들면 겸손하게, 진실하게 됩니다!!
또한 병은 화목하게 만듭니다. 병이 듦으로서 나보다 남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비로소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평소 아내와의 관계가 좋지 못했습니다. 맑은 정신으로 집에 들어오는 날이 없었고, 매일 술에 취해 들어와서는 ‘죽어라, 죽어라’하면서 아내에게 발길질을 합니다. 아주 못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 분이 고생고생하며 살다가 정말 병에 걸렸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옆에서 그 남편이 생각해보니 큰일 났습니다. 그간 매일 ‘죽어라, 죽어라’ 했는데, 이제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는데, 덜컥 겁이 납니다. 아이가 다섯이나 되는데 죽으면 큰일 아닙니까?
이때 이분이 “여보, 그동안 미안했소. 사실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 당신은 내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오.” 이렇게 말하면 좀 좋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그저 막말만 하던 사람이라 그렇게 말하지는 못하고, 대신 한다는 말이 “야, 죽지 마. 너 죽으면 큰일 나!” 그런데 그 아내가 그 말을 듣고는 기뻐서 눈물을 흘립니다. ‘죽어라, 죽어라’ 하다가 처음으로 ‘죽지 말라’고 하니, 그것이 기쁜 것이지요.
그리고 그 남편은 일이 바쁘다고 하면서도 하루에 세 번씩이나 아내의 병상을 찾습니다. 정성을 다해서 간호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병이 화목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병드는 것을 무조건 나쁘다고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본문을 보세요.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그래서 병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병이 기도하게 합니다.
물론 평소에 기도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건강할 때는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기가 어렵습니다. 세상사에 늘 메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병들면 기도도 간절해지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서 느끼게 되며, 하나님의 사랑도 더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병석에서 오히려 이렇게 체험하신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신비로운 기쁨은 오히려 병석에서 체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신비로운 기쁨! ― 이것은 물질에서 오는 것이 아니요, 건강이나 세상 명예로부터 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에서 바로 이 신비로운 행복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환자를 문병할 때마다 늘 기도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 이 병석에서 하나님과 가장 가깝고 신비로운 교제를 하도록 해주시옵소서.”
병에 들게 하시는 목적, 하나님께서 병을 주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병이 들었을 때 잃어버리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얻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 말고,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게 병을 주셨다고 받아들이면, 질병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받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한 치라도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물론 병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시기에 주시는 은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가정을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선물을 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선물 중에서 제일 큰 선물이 무엇이겠습니까? 덮어놓고 돈 보따리를 준다고 선물이 됩니까?
오히려 멸시하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경험하실 것입니다만, 사실 선물 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선물 중의 가장 큰 선물! ―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선물은 바로 명예였습니다.
돈도 아니요, 건강도 아니요, 물질도 아니었습니다. 세속적인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이름’을 주려 하셨습니다.
‘죽었다가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난 사람!’ ― 굉장합니다. 이런 선물 하나 받으면 참으로 괜찮습니다.
아마 지금도 이러한 일이 생긴다면 온 세계의 기자들이 다 몰려들 것입니다. 당시도 그랬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를 만나기 위하여 온 마을 사람들이 찾아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를 만나러 온 사람들이 오히려 많았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굉장한 선물인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이 같은 선물을 받게 될, 우리 받는 자의 편에서 갖추어야 할 중요한 사실을 또한 일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집에 선물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큰 감격과 큰 은혜, 특별히 다시 찾은 생명에 대한 감격을 선물로 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시고자 하는데, 받는 쪽에서 갖추어야 할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여러분,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나사로가 병들었음을 기별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그런데 이 말 뿐입니다. 빨리 오셔서 살려달라는 그 말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신앙입니다. 사실 그대로를 알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처분을 기다릴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무릇 인간관계에서도 그러합니다만, ‘사실이 이러이러하다’라고 알렸으면 다음 일은 그쪽에 맡겨야 합니다. 전적으로 맡겨야 합니다. 이렇게 해 달라, 저렇게 해 달라고 내편에서 내 생각대로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안주면 미워하겠다, 어떻게 하겠다고 협박해서도 안 되지 않습니까?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했으면 그만입니다. 예수님께서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 사랑하시는 자가 지금 병들었습니다.” ― 그 다음은 주님께서 알아서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유익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낫게 하시는 것이 더 좋으면 낫게 하실 것이요, 더 아파야 되겠으면 아프게 하실 것이고, 죽어야 할 것이면 죽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단순히 아뢰는 것! ― 이것은 사랑에 대한 신뢰요 능력에 대한 신뢰에서 그렇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별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나머지는 주님의 뜻과 지혜에 위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를 하십니까?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습니다.” ―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병이 낫고 더하고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성공하고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인할 뿐입니다. 모든 기도의 응답은 사랑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끝나야 합니다. 다음 일은 하나님께 맡길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자에게 대한 우리 주님의 ‘응답’이 다음으로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영광에 이르는 병’을 말씀하십니다. 4절에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만, 그러나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병의 개념’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잠깐 죽은 것으로 병을 보십니다. 예를 들어 야이로의 딸이 죽었습니다. 모두들 모여서 소리치며 통곡합니다. 이들을 보고 예수님은 말씀하시지요.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분명히 죽은 것을 보았기에 ‘잔다’고 하시는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아이야, 얼어나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아이의 영이 돌아와서 일어나지 않습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분명 죽었습니다만, 예수님께는 ‘잠깐 죽은’ 병입니다.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병은 우리가 생각하는 병보다 더 깊은 데까지 들어갑니다.
우리에게는 숨이 넘어가면 죽은 것이지만, 예수님께는 장례식을 치렀다고 해도 죽지 않은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까지만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그 다음까지 생각하십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다!” ― 예수님은 다시 찾을 수 있는 생명, 그 사실을 전제하시고, 죽을 병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사로의 병듦 앞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죽을 병이 아니라 ‘영광을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 하나님의 영광, 아들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오늘날 우리의 삶에 적용하여서 바꾸어 말한다면, ‘하나님의 영광, 사역자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의 영광’ ― 이를 위하여 이 사건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말씀이지 않습니까?
오늘도 우리가 진솔 되게 믿음을 지키고 주님을 충성스레 섬길 때에는 많은 고통이 따르게도 됩니다.
그러나 궁극에는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갈 것입니다! 또한 이 일에 가담한 사람들과, 이 일을 위하여 수고한 사람들에게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바로 이런 말씀입니다.
‘영광’을 위하여 병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그 과정은 참으로 괴롭습니다. 그러나 앞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며 극복해나가야 합니다.
죽음도 그러합니다. 잘 죽으면 영광이 됩니다. 본인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큰 영광이 됩니다. 순교가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그러므로 진실한 믿음과 순종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는 우리가 다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마지막 중요한 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하는 말을 들으시고도, 그 계시던 곳에서 이틀이나 더 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병들어 죽어간다는 기별을 받으셨으면 빨리 가보아야 할 터인데, “어서 가자” 하고 서두르셨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다 아시면서도 태연히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그 사이에 병은 더 깊어져서, 마침내는 죽고 장사지내게 될 터인데도 말이지요!
바로 이점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틀이나 더 지체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가지고, 주님의 이같은 ‘지체하심의 뜻’을 우리는 바르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보세요.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영광! ― 그러면 병이 깊이지고 고통이 심할수록, 영광은 더 크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실제로 주위를 보아도 그러합니다. 조금 앓다가 나은 사람은 병원을 퇴원하면서 감사헌금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을뻔하다가 살아난 사람은, 그간 병원비용을 많이 썼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퇴원하면서 감사헌금을 합니다. 퇴원을 할 때도 집으로 바로 가지를 않고, 교회부터 들러 기도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더 큰 고통에서 더 큰 감사가, 더 큰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틀을 더 유하시고 올라가니,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났습니다. 이미 무덤에 장사까지 된 나사로를 우리 주님께서 다시 살리십니다!
여기서 한번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만일 죽기 전에 부지런히 달려가셔서 고치셨더라면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까 하고 말이지요.
그랬더라면 그것은 그저 작은, 그동안도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는데, 그러니 또 하나의 이적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또한 죽자마자 살려내셨더라면, 영광은커녕 “그저 잠깐 가사 상태에 있던 것을 깨어나게 한 것이다” 하고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례까지 치르고, 무덤에 안치까지 한 다음에 살리셨기에, 더는 할 말이 없습니다. 굉장한 이적으로, 굉장한 영광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은 깊을수록, 잘 감당할수록, 더 많은―더 큰 영광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주셨으면 하지만, 하나님은 기다리게 하십니다.
여기서 끝냈으면 좋으련만, 더 내버려 두십니다.
우리는 현재를 구하나, 주님은 영원을 주십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것을 구하나, 하나님은 신령한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것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기도하자마자 당장에 응답을 주셨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영광을 더 크게 하기 위하여, 더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믿음이 참된 믿음인 것입니다.
이 섭리를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큰 영광을 주님께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큰 은혜를 깨닫고, 그래서 그 믿음 속에서 더 큰 영광을 돌리시는, 승리하는 믿음생활을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나사로의 죽음
요 11:1-16 / 조영태 목사
‘홀리’가 지나면 ‘댕기’의 계절이 옵니다.
‘댕기 모기’에 각별한 주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댕기 모기는 주로 낮에 활동을 한다고 합니다.
집안에서야 모기 안 물리려고 잘 때 모기장도 치고, 모기약도 뿌리고, 리퀴드도 벽에 꽂아 두는데 문제는 밖에 나갈 때 조심해야 합니다.
기사들이 낮에 기다리면서 창문을 열고 차 안에 앉아 있기 때문에 이때 모기가 들어올 수가 있으니 오도모스를 바르고 나가든지 아니면 전기충격 모기채를 준비해서 차 안에 들어오는 모기들을 잡아 주는 게 좋습니다.
5월 중순 정도 되면 날씨가 뜨거워지기 때문에 모기도 그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인도 날씨가 더운 것이 그나마 감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조심해도 댕기 피버에 걸리기도 하고, 위생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에 장티푸스라든지 식중독 이런 저런 열병에 많이 걸리게 됩니다.
또 나이 탓도 있고, 환경 탓도 있어 크고 작은 병에 걸리게 됩니다.
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 크리스천이 병에 걸리게 되는가?
그리고 병에 걸렸을 때 기도해서 나아야하는가 아니면 병원에 가야 하는가?
오늘 본문은 병문제로 시작이 됩니다.
1절에 “어떤 병자가 있으니....”
I. 질병의 원인들
1. 부주의
말하자면 건강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생기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5장 23절에 보면 사도 바울을 디모데에게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했습니다.
디모데는 어린 나이로 큰 목회를 하느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특히 위장병은 신경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이 건강에 좋습니다.
최근에 어떤 퇴직한 분을 만났습니다.
아직 젊은 분인데 대기업에 근무하셨던 분입니다.
그 분이 내게 하는 말이 “그때가 좋았다”는 것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 들어오고, 회의도 줄기차게 하고, 밤샘도 종종하면서 “이렇게까지 스트레스 받고, 힘들게 직장 생활해야 하나?”
인간답게 살려고 직장 그만두고 자영업을 십 년째 하고 있는데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는 겁니다.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돌아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대부분이 주재원으로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스트레스 많이 받고 힘들죠.
하지만 스트레스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도 관리가 된다는 것도 기억하고 살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고 하셨고,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며 믿음으로 스트레스를 극복하고 있음을 봅니다.
2. 하나님의 징계
민수기 12장에 미리암이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문둥병에 걸리게 됩니다.
하나님께 회개하자 문둥병을 바로 고쳐주십니다.
신명기 28장 20~22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죄를 지으면 역병으로 그들을 치시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에,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불순종할 때, 교만해질 때 하나님께서 병을 주십니다.
물론 우리는 매일 불순종하고 교만합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병을 주신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시는 사랑의 주님입니다.
길이 참으시는 중에 그 성도를 세상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질병을 주셔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대게 병들면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돌아보게 되고, 겸손해 집니다.
3. 귀신이 주는 병도 있습니다
욥기에 보면 사탄이 욥에게 병을 줍니다.
중요한 것이 이 병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서 준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자기 마음대로 시험을 하지 못합니다.
요한일서 5장 18절에,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성도를 향한 특별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허락한 범위 내에서만 사단에게 시험을 하게 하기도 하고 병을 주게 하기도 합니다.
이단으로 지목된 김기동 베뢰아나 은사주의나 신사도 성령 운동하는 사람들, 잘 알려진 손 아무개 장로 같은 사람들은 질병에 대해 아주 잘못된 성경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질병을 귀신의 저주로 봅니다.
그래서 병이 들었을 때 귀신을 저주하고 추방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만일 손 장로나 신사도 운동하는 사람들 말처럼 병을 귀신의 저주로 보고 귀신을 쫒아 내야 한다가 한다면 병에 걸린 성도는 다 귀신들린 존재가 됩니다.
손 장로 담임목사가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입니다.
손 장로가 그렇게 능력이 있는 주의 종이라면 자기 담임목사에게 붙은 귀신 하나 쫒아내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만들었다는 말이 됩니다.
만일 병들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받았다면 세상 천지에 병 걸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암에 걸려 죽어가는 가련한 사람들이 있는 병원에 가서 귀신을 쫒아 내고 그들을 주께 돌아오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암 때문에 무너진 가정들을 세워주는 것이 얼마나 큰 선교입니까?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결코 병원에 가서 치유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Never! Never!
길거리의 노숙자들은 돈이 없어서 병원에 제대로 가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기적의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 능력 받았다는 종들은 결코 결코 길거리로 나가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들만의 밀폐된 공간 안에서만 잔치를 열고 있습니다.
더더욱 이상한 것은 그들에게 치료 받았다고 앞에 나와 간증하는 사람들 데려다가 병원에서 검사해 보면 거의 100% 거짓말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 사람들이 치료했다고 선전하는 사례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부분 익명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사람이 무슨 병에 걸렸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누구이고 나이는 몇 살이고, 지금 어디에 살고 있다는 그런 정확한 정보나 정말 병이 나았다는 어떤 증거 자료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능력의 종이었지만 사역 후기에는 자신의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의 병을 고쳐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네 위장병을 안수해서 고쳐줄 수 없으니 포도주를 조금씩 마셔라”(딤후4:29)고 했습니다.
자기의 동역자인 에바브로디도를 고칠 수 없었습니다(빌2:25-27)
또 선교 여행 때 자기와 동행한 드로비모를 고치지 못하고 아픈 채 밀레도에 남겨 두고 온 것을 매우 걱정했습니다(딤후4:20).
심지어 자신의 병 낫기를 위해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고칠 수 없었습니다(고후12:7-10).
이런 사람들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도인 사도 바울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궁금합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사도 바울은 ‘말년에 믿음이 떨어져 제대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한 무능력한 사역자’로 여길 것입니다.
모든 병이 귀신이 들렸다고 말하는 이런 사람들이 바로 귀신들린 자들이라고 저는 의심하고 있습니다.
혹은 영적 사기꾼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얼마든지 병원에서 간단한 수술을 통해 치유할 수 있는 암 1기 환자가 이런 거짓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고, 기도 받고 병 고치려다 시기를 놓쳐 죽는 경우가 한 두건이 아닙니다.
제가 알고 있는 몇몇 크리스찬 의사들이 이런 황당한 믿음을 가진 크리스찬 들을 보고 개탄 하고 있습니다.
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는 병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나사로의 병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주님은 무덤에 장사된 나사로를 부활시켜 주심으로 나사로 자신에게는 부활체험을 하게 되고 그 기적을 본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 그리고 소문을 들을 사람들이 ‘과연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그리스도가 맞다!’며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나사로의 병을 통해 큰 영광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정말 중한 병에 걸렸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 죽을 것 같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될 때 본인은 생명을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께 깊은 감사와 헌신의 삶을 살게 되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런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사람들에게 병을 주시고 치료해 주십니다.
어떤 경우로 병에 걸렸든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시기에 병을 치료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그의 자녀들의 질병을 치료하십니다.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치료하십니다.
좋은 의사를 만나게 하심으로, 좋은 약을 만나게 하심으로, 믿음을 통해 마음의 평강을 주심으로, 그리고 당신의 자비하신 손을 얹으셔서 기적의 방법으로 치료하십니다.
나사로의 병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병이었습니다.
이 병을 통해 나사로는 부활신앙을 체험하게 되었고,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은 ‘생명의 능력’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하고 믿게 되었습니다.
II. 헌신된 가정에도 극한 시험이 올 수 있다(1~4)
나사로 가정이 당한 시험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시련입니다.
어느 가정보다도 헌신된 가정이었고, 주님 역시 사랑하는 가정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할 정도로 머무실 곳이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예수께서 아무런 부담이 없이 머무실 수 있었던 집안이 하나 있었는데 베다니 나사로의 집이었습니다.
정말 진심을 다해서 주님을 환영한 집이었습니다.
특히 마르다는 주님이 오실 때 정성스럽게 식사를 준비해 주었고, 동생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머리에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음으로 최고의 손님으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나사로 역시 예수께서 “내 친구”라고 부를 정도로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런 특별하고 특별하게 헌신하고 있는 가정에 예기치 못한 불행이 닥쳤습니다.
오라비 나사로가 병든 것입니다.
그것도 죽을병에 걸린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급히 사람을 예수께 보냈지만 예수님은 그 급한 소식을 듣고 오히려 이틀을 계시던 곳에서 더 머무셨습니다.
결국 나사로는 죽게 되고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15절에 보면 오히려 주님은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라고 했습니다.
나사로가 병이 들었고, 나사로가 죽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셨다는 정말 이해하지 못할 주님의 행동이셨습니다.
나사로 가정의 입장에서 보면 간절히 주님께 기도를 했는데 기도 응답을 안하신 것입니다.
주님께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사역할 때 장례가 자주 있었습니다.
교회가 크다 보니 한 달에 한 번 꼴로 장례를 치룰 때가 있었습니다.
복 받은 장례식은 장수하시다가 때가 되어 자녀들에게 둘러 싸여 작별인사라도 받으면서 돌아가시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예기치 못한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정말 이해할 수도 없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장례식도 있습니다.
교회 청년회장이 있었는데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부인이 당시 임신 8개월이었습니다.
전날 밤 청년회 모임이 있어 나와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연락이 온 것입니다.
간밤에 심장마비로 죽었다고요.
장례식 마치고 장지에 도착해 하관예배를 드리고 관을 땅 속에 내려놓는데 제주도에서 올라오신 장인이 “하나님 살아 계시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나님 살아 계시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계속해서 울부짖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장인어른은 믿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당하는 시험 가운데는 나사로의 가정이 당하는 시험처럼 도무지 이해도 안 되고, 용납도 안 되는 시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 우리의 믿음을 보여야 할 때입니다.
이 시험을 통해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된다는 하나님을 향한 굳은 신뢰가 있을 때 우리는 그 시험을 감당할 수가 있고, 소망을 가지고 이길 수가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그 시험으로 인해 기뻐할 날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가 아니면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숙제가 풀리고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III. 사명만큼만 이 땅에서 살 수 있다
9~1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다시 유대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최근에 그곳에서 예수님은 돌에 맞아 죽을 위험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그 위험한대로 가자니 제자들이 걱정이 된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은 낮이라고 하셨습니다.
낮은 일하는 시간입니다.
즉 사명 감당할 시간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약에 예언된 구원자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는 사명을 다 감당하시기 전에는 죽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죽는 시점까지 주님 자신이 정하신다고 했습니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요10:18)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셨기 때문에 잡혀 돌아가시는 날이 반드시 유월절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요일 잡히시고 금요일 유월절에 십자가 고난을 받고 운명하셨습니다.
‘인류의 구속’이라는 사명 감당을 하신 후에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다 이루었다”였습니다.
사명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운명하신 것입니다.
성도의 사명은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다”는 것을 믿고 전하는 사명입니다.
잘 믿는 그 날까지 하나님께서 그 성도를 버리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권면하시며 믿음을 자라게 하십니다.
‘성경을 배우고,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그 삶이 전도와 선교의 삶이며, 복음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이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그 날까지 우리를 이 땅에 살게 하실 것입니다.
IV. 성도에게는 죽음이 없다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잠에 비유했습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은 나사로가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잔다고 말씀하십니다.
11절에,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죽음을 ‘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연장이 아니라 일단 죽음을 통과한 다음에 얻어지는 생명을 말합니다.
이 생명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 바로 죽음입니다.
그래서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시작의 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성도들에게 소망인 것입니다.
교역자 생활을 하면서 많은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신실한 성도들의 죽음을 많이 목격했습니다.
성도는 결코 죽음으로 이 세상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간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합니다.
얼마 전 첸나이에 갔을 때 지금 첸나이 한인회장을 하고 있는 김태협 집사 부부를 만났습니다.
부인인 배미희 집사는 신학교 때 저를 가르쳤던 배영철 교수님의 딸입니다.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던 교수님 가운데 한 분이었고 특히 성경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큰 가르침을 주신 분입니다.
그 분이 암으로 걸려 돌아가셨는데 마지막 임종에 대한 이야기를 이번에 들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직전에 사모님이 우시니까 ‘왜 웁니까 지금 천사들이 나를 데리러 이렇게 많이 내려와 있는데 나를 위해 슬퍼 울지 마세요. 나는 지금 영광의 나라로 들어갑니다. 하며 바로 운명하셨다고 합니다.
성도는 이 땅에 육체를 벗고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잠시 자는 것입니다.
그걸 알면서도 죽음 앞에 섰을 때 긴장이 되고 일말의 두려움이 있는 것은 저의 경험이었습니다.
다른 게 두려운 것이 아닐 이제 잠시 후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선물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 동안 하나님 나라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질문을 받았을 때 할 대답이 매우 궁색했습니다.
한다고는 열심히 했는데 그게 정말 주님을 위해 한 일인지 나를 위해 한 일인지 혼돈이 생겼습니다.
어쩌면 나를 위해 한 일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경험해 보니까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에 천국에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신부와 같은 성도들이 흰 옷을 입고 찬양을 합니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고 했습니다.
지난 날들도 하나님의 은혜지만 앞으로 남은 날들에 기회가 주어졌을 때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을 가지고 세상에 살면서 이런 일도 했고, 이런 일도 했고....뭔가 자랑할 것이 많은 성도가 되어 그 날에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영광을 돌리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임마누엘 성도 여러분!
주님은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생명의 능력’을 보여 주심으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구원자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했습니다.
지금 우리 역시 주께서 공급해 주시는 ‘생명의 능력’을 공급 받아 영혼들이 사망에서 살아나 지금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이 능력으로 ‘선한 행실’을 많이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늘에서 입을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준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죽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1)
김태환 목사
예수님께서 요단강 동쪽 베다니 (Bethany beyond Jordan)에 며칠이나 머물러 계셨는지 모르지만 유대에서 급한 소식이 왔습니다. 나사로라는 사람이 병이 들어 죽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쓴 제자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나사로라는 사람에 대하여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 (Lord’s dear friend, 3절)”이라고 썼습니다. 나사로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였고, 집은 예루살렘에서 한 오리쯤 떨어진 베다니 (Bethany)라는 마을에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1:18) 오리면 약 2km쯤 됩니다. 마일로 하면 1마일이 조금 넘는 아주 가까운 마을입니다.
나사로는 어떤 사람인지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나사로에 대한 말씀은 꽤 많이 나오지만, 나사로 자신은 한마디도 말하는 장면이 없습니다. 그대신 마르다와 마리아에 대해서는 인상 깊은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마르다는 매우 활동적이고 활발한 성격을 가진 여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셨을 때는 늘 마르다가 음식을 만들어 대접을 했습니다. 동생 마리아는 매우 조용하고 정적인 성격을 여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셨을 때 “예수의 발 앞에 앉아서 (at the Lord's feet, 누가복음 10:39)”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누가복음의 말씀은 그 말씀을 읽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줍니다. 그 이유는 이 말씀 속에 참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영원한 가치란 어떤 것인가 하는,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사람다워지고, 아름다워집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인정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너무 많은 일 때문에 걱정하며 안절부절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일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그 좋은 쪽을 선택했으니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누가복음 10:41-42) Eugene Peterson은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One thing is essential, and Mary has chosen it- it’s the main course, and won’t be taken from her.” (삶에 있어서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선택했다. (네가 준비하고 있는 음식에 비유한다면) 그것은 메인 코스 요리와도 같다. 마리아는 결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참 탁월한 해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메인 코스 요리가 나오기 전에 애페타이저 (appetizer)나 디저트 (dessert)를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불러 버리면 막상 맛 있는 메인 코스 요리가 나와도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습니다. 억지로 먹어도 참 맛을 알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애페타이저를 먹지 않아도 얼마든지 메인 코스 요리를 즐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이 있는데, 다른 것들로 배를 불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도 그렇고, 요한도 그렇고, 마르다보다는 마리아의 삶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마르다의 삶이 가치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복음서의 기자들은 마르다보다는 마리아에게 초점을 맞춤으로써 삶의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요한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씻어 주었던 바로 그 여인입니다 (2절)”라고 쓰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부어 드린 것은 “a pound of very costly perfume of pure nard (매우 값비싼 나드 기름, 요한복음 12:3)”이라고 합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모든 사람들이 쓸데 없이 기름을 낭비한다고 마리아를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은 마리아의 편을 들어 주셨습니다. “마리아가 내게 한 행동은 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다” 라고 마리아의 편을 들어주셨습니다. 마리아의 삶 속에 사람다움의 참된 가치가 들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지금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 집안에 대하여 조금 길게 말씀 드린 이유는, 이 집이 예수님과 이런 관계 속에 있었던 집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세 사람은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께도 늘 이 집을 편하게 생각하시고 기회 있을 때마다 자주 가시는 집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보낸 생애의 마지막 일주일도 저녁에는 제자들과 함께 성을 나와 베다니에서 밤을 보내셨습니다 (마태복음 21:17, 마가복음 11:11). 오늘 말씀에서도 요한은 확실하게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오빠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5절)”라고 쓰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관계가 이처럼 중요합니다. Robert Benchley (1889-1945)란 사람이, humorist, columnist, actor였다고 하는데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Death ends a life, not a relationship (죽음이 생명을 끊어 놓는 것이지 관계를 끊어 놓는 것은 아니다).” 참, 여운이 남는 말 아닙니까?
지금 유대에서 온 기별은 나사로가 심한 병에 걸려서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베다니의 나사로가 병이 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소식을 듣고 “이 병은 죽게 될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이 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얻을 것이다 (4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이틀이나 더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나사로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금방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딱히 하시는 일 없이 이틀이나 더 계셨습니다. 환자의 생명이 시각을 다투는데 48시간은 너무나 긴 시간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시간을 끌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머리 속에 웬 일인지 모세가 떠 올랐습니다. 모세가 공주의 아들로 살다가 궁전을 나온 것이 40살 때 일입니다. 혈기왕성했던 모세의 가슴에 애국심이 끓고 있던 때였습니다. 히브리서에는 “믿음으로 모세는, 성장한 뒤 파라오 (Pharaoh)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절 하였습니다. 그는 잠시 동안 죄의 즐거움을 누리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택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1:24-25)”라고 나와 있습니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문제입니다. “그는 이집트의 온갖 보물을 가지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이 주실 상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말씀에 동의하시나요? 사실 모세가 그런 마음으로 파라오의 궁전을 나간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다보니까 일이 꾀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파라오가 두려워서 미디안 사람들이 사는 땅으로 멀리 도망을 친 것입니다 (출애굽기 2:14-15). 결코 모세가 이집트의 온갖 보물보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 받는 것 더 낫다고 생각하고 바로의 궁전을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은 훗날 모세의 생애를 해석해 보면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미디안 사람들이 사는 땅에서 모세는 양을 치는 외예는 하는 일 없이 40년을 보냅니다. 그 시기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귀한 시간들입니까?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 가장 창조적으로 시간을 써야 할 때가 그 때 아닙니까? 모세도 몰랐을 것입니다. 미디안의 생활이 이렇게 길어질 줄 모세도 미처 몰랐을 것입니다.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가도 모세가 파라오의 궁전으로 돌아갈 기회가 도무지 생기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미디안 땅에서 이렇게 평생 도망자로 살다가 아무 업적도 남기지 못하고 허무하게 가게 생겼습니다.
나이 80이 된 모세에게 젊었을 때 가졌던 정열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한 때는 고난 받는 자기 동족 히브리인들을 위해서 뭔가 큰 일을 하겠다는 큰 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옛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이 80이 되니까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자신감도, 정열도, 미래에 대한 꿈도 모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성경에서 모세에 대한 말씀을 읽을 때 모세의 입장에서 그 말씀을 읽으면 정말 한 사람의 인생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시각에서 모세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말씀이 됩니다. 인간적인 관점을 가지고 보면 한 청년의 젊음이 사라지고, 꿈이 사라지는 것이 아쉽지만, 하나님의 시각에서 모세의 생애를 들여다 보면 처음부터 하나님은 모세가 그렇게 되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인간적인 자원 (resources)이 고갈 되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이제 내 인생은 끝이 났다!”는 절망스러운 고백이 모세의 입에서 나오기까지 하나님은 40년을 기다리신 것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그 병이 깊어져서 죽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일 없이 48시간을 요단 동편 베다니에서 시간을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80세가 된 모세를 통해서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했던 하나님은, 이제는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있서서 죽음은 무엇입니까? 너무 어려운 철학적인 질문인가요? 그래도 언젠가는 찾아 올, 아니 어쩌면 금방이라도 찾아 올지 모르는 죽음에 대하여 두렵거나 겁을 내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죽음이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죽음이 무엇인지 아무도 답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식이 이처럼 발달하고, 인간이 이룩한 업적이 이처럼 대단하지만 죽음은 여전히 우리에게는 접근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인간이 죽음을 정복할 그 때가 되면 그 때야말로 과학과 인간 지식의 최고의 전성기가 될 것이라고요. 그러나, 정말 그런 때가 올까요?
성경만큼 죽음의 문제를 깊이,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이 없습니다. 성경만큼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있는 책이 없습니다. 죽음의 문제는 인류 역사상 아무도 다가가지 못했던 난제(難題)입니다.
언젠가 그런 글을 읽었습니다. 지금까지 수학자들이 풀지 못한 일곱 개의 난제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Millennium problems”라고 한답니다. 2007년 CMI라는 수학연구소(Clay Mathematics Institute)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입니다. 그 연구소가 우리가 사는 Cambridge에 있다고 하는데 한번 방문해 보시지요. 한 문제를 푸는데 100만 달러 상금을 걸었습니다. 그 난제 중의 하나인 “푸앵카레 추측 (Poincaré Conjecture)”이라는 문제를 40세의 러시아 수학자 그레고리 페렐만(Grigory Perelman)이란 사람이 풀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2003년부터 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Princeton Universit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t Stony Brook, Columbia University and New York University 등 유수한 대학에서 페렐만의 증명이 옳은지 검증에 들어갑니다. 그 결과 페렐만의 Poincaré Conjecture 증명을 공식적으로 인정합니다. 참 대단합니다. 그 정도의 수학 문제를 풀 정도이면 그 실력이 정말 대단하지 않겠습니까? 실력도 실력이지만, 2006년 8월에 페렐만이 수학자들에게 주는 가장 영예로운 Fields Medal 수상을 거부하고, 2010년에는 CMI에서 주는 100만 달러의 상금도 거절함으로써 더욱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가 수상을 거절한 이유는 자기보다 먼저 "Ricci Flow"를 발견한 수학자 Richard Hamilton에게 상금을 주어야 옳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한 일은 결코 Richard Hamilton의 업적을 뛰어 넘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상금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On July 1, 2010, he turned down the prize, saying that he believes his contribution in proving the Poincaré conjecture was no greater than that of Hamilton, who first suggested a program for the solution).
기도 응답이 지연되고 있습니까
요 11:1-11 / 최창훈 목사
우리가 종종 기도응답에 대한 간증을 듣게 되면 대부분의 기도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즉각적인 응답을 받는 것으로 인상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적적이고 즉각적인 응답의 경험은 오히려 예외일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우리의 기도는 기도의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응답을 경험하지 못한 채, 아직도 응답의 어떤 징후나 문제 해결의 희망 없이 오기 하나로 버티고 있어야 할 때가 훨씬 더 많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경우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의 상황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의 생애 동안 친근하게 지냈던 나사로가 병들어 눕게 되자 마르다 마리아 자매는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에게 빨리 오셔서 오라비를 고쳐달라고 요청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나사로는 숨을 거두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마르다 마리아 자매가 되어 이런 상황에 던져졌다면 이 상황에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서 기도의 응답이 지연될 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겠느냐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3절을 보면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했고
5절을 보면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아가페라는 단어로 쓰여진 것으로써, 이것은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사로에게 질병과 죽음이 그를 찾아 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절대적인 사랑에도 불구하고 나사로에게 질병과 죽음이 찾아 온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이나 불행을 만나게 되면 제일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왜 어찌하여 우리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를 질문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은 명백하게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예외 없이 질병과 죽음이 온다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의 도상에서 질병과 죽음을 만나거든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사랑만은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질병이 우리의 건강을 빼앗아 갈 수 있고, 죽음이 우리의 목숨을 빼앗아 갈 수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만은 빼앗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사랑받는 복음의 사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배의 파선,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사십에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번이나 맞아야 했던 생명의 위험, 동족인 유대인들의 참소와 살해 위협, 수차례 감옥에서 겪은 시련, 등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롬8:35절 이하를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고 바울은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롬8:37절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는 바울의 고백은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기도의 응답의 싸인이 없고, 고통의 현실이 조금도 나아짐이 없어도 하나님의 사랑만은 붙잡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 이것만 확신하신다면 우리는 마침내 승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4절을 보면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들 중에 어떤 분은 "나사로는 결국 죽지 않았습니까?" 라고 물으실 분이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물론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음에서 일어나 부활한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치유보다 더 좋은 죽음을 이긴 놀라운 승리였습니다.
바로 이렇게 죽음이 인생의 마지막이 아니라는 놀라운 사실을 선포하기 위해 예수님은 이 가정의 기도에 대하여 즉각적인 응답을 지체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6절에서 나사로의 질병의 소식을 듣고도 그가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며 늑장을 부리시던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도의 응답이 지연될 때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 응답의 지연에는 더 좋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감취어져 있음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복음을 온 세계에 전하기 위하여 당시 세계의 중심인 로마로 가게 하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했지만 그의 기도는 응답되지 못한 채로 로마행은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는 대신에 롬8:28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고백하며 기도의 응답이 지연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갑자기 예측할 수 없었던 죄수로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게 되었습니다.
사실 바울은 선교사 파송예배를 드리고 로마시민의 환영을 받으며 로마에 입성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좋은 섭리의 계획을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죄수로 압송되었기 때문에 그는 교통비를 절감할 수 있었고, 그의 생명을 노리는 자들에게서 당당한 보호를 받을 수 있었으며, VIP죄수로 로마에 입성했기 때문에 그는 로마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까?
그러므로 기도의 응답이 지연되어도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수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준비된 궁극적인 선하신 섭리를 믿을 수 있다면, 이제 남은 것은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물론 나사로의 죽음은 슬픔을 가져 왔습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만에 이곳 베다니의 나사로 가정에 도착하신 예수님도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11:33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의(마리아)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며 민망히 여기사"
그리고 35절에서는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도 슬퍼하시고 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슬퍼하시거나, 우시기만 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섭리, 즉 부활의 섭리를 아셨기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11:41절을 읽어봅시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아직 나사로는 무덤에 있었고, 사람들은 울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감사를 드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감사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확신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11:42절에서 우리는 이런 주님의 확신의 마음을 읽어 낼 수 있습니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감사의 기도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우리의 삶에 선을 이루실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그리고 우리의 기도응답이 지연되고 있어도,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섭리와 그의 사랑, 그리고 그의 신실하심을 믿을 수 있다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감사의 영성으로만 우리는 이 시대의 고난을 이겨내는 승리를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저는 나사로의 부활의 기적은 감사가 낳은 기적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야말로 이런 감사의 기적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최근 이런 감사의 기적을 경험하고 있는 한 자매를 보고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바로 이지선 자매입니다.
최근 출간된 "지선아 사랑해"는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어보면 이 자매는 처참한 교통사고로 고운 미모와 희망의 미래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자매는 "정말 내게 기적이 없었는가?"고 자신에게 반문합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이렇게 스스로 대답합니다.
"기적처럼 하나님은 제 눈을 지켜 주셨고 캄캄한 절망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내 얼굴에 새 피부를 덮어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더 큰 기적은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저 조차도 이해되지 않을 정도의 평안함이 늘 있습니다. 소망가운데 감사하는 가운데 임했던 평안, 몸의 편안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것, 전쟁터 속에 있어도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거기서 오는 영혼의 평안함. 예전 얼굴을 다시는 찾을 수 없을 것이라 말과, 여덟 손가락을 절단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제가 요동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 평안 때문이었습니다. 왼손보다 오른손이 더 짧고 잘 움직여지지 않는데 왜 오른손을 더 지켜 주시지 않았냐고 울며불며 원망하는게 아니라, 왼손이라도 오른손처럼 잘 쓸 수 있으니 감사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손가락을 절단하러 들어가는 그 수술실 앞에서는 더 많이 자르지 않아서 감사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술을 마시고 운전해 우리 차를 들이박은 그분께 조금도 미운 마음이나 분노가 생기지 않도록 제 마음을 지켜 주셨습니다. 정말 힘든 가운데도 어제는 숟가락을 혼자 잡을 수 있어서, 오늘은 또 문고리 잡고 열 수 있어서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는 마음, 그래서 매일 매일이 너무 행복한 마음이 제게 일어난 가장 큰 기적입니다. 이 모든 것이 제 힘으로나 제 의지로는 결코 일어날수 없는 일이기에 저는 감히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자매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은 축복입니다. 힘겹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이기고 나면 주어지는 보물이 있습니다. 고난을 통하지 않고서는 배울 수 없는, 가질 수 없는 열매들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저는 이제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 제게 물었습니다. 예전의 모습으로, 사고 나기 전 그 자리로 되돌려 준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바보 같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제 대답은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제 안에 담겨 있는 고난이 가져다 준 축복의 보물들은 정말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몰랐던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고 사랑을 맛보았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 안에 있습니다. 저는 기대합니다. 지금은 상상치도 못할 일들이 앞으로도 펼쳐질 것입니다. 크고 작은 기적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의 이 모습이 아니고는 전할 수 없는 메시지들을 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이 아니고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며, 이런 모습의 저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분명 제게 맡겨주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 살아 계십니다. 지금 저는 행복합니다."
우리도 지선 자매처럼 주님의 사랑과 섭리를 믿고 감사함으로 고난을 이기는 기적의 축복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기도하십시다.
신앙생활의 의문이 생길 때
요 11:!-16 / 이재철 목사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사로 가정에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 가정을 무척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사로 가정은 정상적인 가정이 아니었습니다. 부모님도 계시지 않았고, 세 남매 모두 배우자도 없었으며, 자녀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떨어져 있는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어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 의아한 행동을 하십니다. 이틀 동안 가시지 않고 외면하셨습니다.(5-6절) 그리고 그 사이에 나사로는 죽게 되었습니다.
세 남매는 최선을 다해 주님을 믿고 섬기던 자들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뿌린 자였습니다.(2절)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가정에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는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죽기전에 예수님만은 오셔야 하지 않는가.’ 이런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많다더니 아닌가봐.’하는 의아심과 배신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들이 우리를 섭섭하게 하고 괴롭게 합니다.
이틀이 지나서야 예수님은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고 하십니다.
살다보면 이해 안 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도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지연되고 어려움을 당할 때 그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 상황에서 외면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기도할 때 거절당하거나 지연되는 경우는 다음 두 가지 경우입니다.
첫째는, 내 인간적인 욕심으로 구했을 때입니다.
이때는 기도할 때 깨닫게 해주셔서 바로 구하게 해 주십니다.
둘째는,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기다리라고 하실 때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주님께 거절당했다는 것이 힘들게 느껴집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입장에서는 “백부장의 하인이 아팠을 때는 예수님께서 먼저 가서 고쳐주셨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아플 때도 즉시 와서 고쳐주셨는데 왜 우리에게는 오시지 않는가”하며 시험에 들 수도 있습니다.
◈ “기다리라”고 하실 때는 두 가지 이루실 일이 있습니다.
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4절)
나사로 가족은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예수님은 문상도 오지 않고 나사로의 무덤에 가셨습니다.
고쳐달라고 했을 때 고쳐주었으면 한 환자만 살리는 것이었으나,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였습니다.
39절 말씀에 “돌을 옮겨라”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에 마르다는 “죽은 지가 나흘이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라고 불만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관성 있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40절)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면 받아들이십시오.
이해가 안 되고 못마땅해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받아들이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② 우리의 믿음을 키워주기 위한 것입니다.(15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보다 그릇을 더 키우기 위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통해서 믿음을 크게 성장시키십니다.
병자를 살렸으면 심방감사로 끝났겠지만 죽은 자를 살림으로써 예수님이 부활이고 생명이심을 알게 하셨습니다.
45절 말씀에 보면 마리아와 마르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유대인들이 믿었습니다.
믿음은 이러한 가운데 자랍니다.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응답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 이런 사실을 믿고 나면 이 기간동안 하루하루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죽을 각오를 하십시오.(16절)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죽음을 무릅쓰고 주와 함께 가자고 하였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면 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천국의 본향이 있습니다.
편하게 살려고 하니까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기도하십시오. 죽을 각오를 하고 일하십시오.
㉡ 나그네 의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17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나그네는 이동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짐이 가볍습니다.
나그네는 돌아갈 본향이 있습니다. 나그네는 오늘 할 일을 오늘 합니다.
“나그네 의식”과 더불어 무엇을 해도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사십시오.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요 11:1-4 / 지태일 목사
어떤 경우에라도 포기할 수 없고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살고 싶은 사람 있다면 먼저는 부부가 그러할 것이고 더욱 그러하다면 아마도 부모에게 자식이 그런 대상일 것이1니다. 어떤 경우에라고 포기할 수 없고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그런 사람, 관계가 바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일 것입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당사자도 괴롭고 힘들지만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이 더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아플 때 부모의 마음은 차라리 내가 대신 병들어 죽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됨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와 비슷한 장면을 발견하게 됨니다.
1. 병들어 죽게 된 오라비 나사로를 뜨거운 눈물로 가슴 아프게 바라보는 누이동생들, 바로 마리아와 마르다입니다.(3절)
1절을 보면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병들어 죽게된 사람은 바로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입니다. 1절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나사로는 정말로 3일 후에 죽습니다. 이렇게 죽게 될 오라비 나사로를 바라보는 누이동생들은 얼마나 가슴 아프고 황당한 일인지 모름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병든 나사로와 예수님과의 대화는 없고 누이 동생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병든 나사로를 위하여 예수님께 아뢰는 두 자매의 모습이 바로 중보자적 모습니다. 이 대화하는 모습이 바로 중보기도와 같습니다.
중보기도는 원래 예수님이 죄인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시는 기도를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중보기도로 인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생명까지 십자가에 내놓으신 사랑의 기도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사랑하는 오라비를 위해 뜨거운 눈물로 가슴 아프게 바라 보면서 주님께 나아가 기도합니다. 요청합니다.
오늘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람니다. 마르다 마리아처럼 사랑하는 오라비를 위해 뜨거운 눈물로 아뢰는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 바람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바라보면서 대신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신하고 용기있는 마음으로 나가시기 바람니다. 이것이 병든 나사로를 살리는 능력이었습니다.
2. 뜨거운 영적 사랑을 주님께 드린 마리아입니다.(3절)
본문 2절에 보면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누구 이야기입니까? 마리아의 주님 사랑 이야기가 나옵니다. 원래 마르다 마리아는 둘 다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예수님과 친했습니다.
5절 말씀만 보더라도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이 가족이 평소에 예수님과 친한 그런 관계였음을 보여줍니다. 둘 다 주님을 위해 좋은 일을 했습니다. 마르다는 좋은 음식으로 주님을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특별히 사랑했는데. 자기가 시집을 가려고 준비해 두었던 가장 귀한 향유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붓고, 자기의 소중한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아마 이처럼 아름다운 장면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복음이 증거되는 곳마다 기념될만한 모습입니다. 그 와중에 많은 사람들은 마리아의 모습을 보고 비난했습니다. 특히 가롯 유다가 화를 냈습니다.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지 왜 낭비하느냐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자를 비난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죽음을, 즉 십자가의 죽으심을 준비한다 하시고 그 여자의 믿음은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오래 남는 사랑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닌 마음적이고 영적인 사랑입니다. 희생입니다. 순종입니다. 마르다는 물질적인 사랑을 표현했지만 마리아는 영적으로 사랑을 희생을 순종을 예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을 생각만 하는 것은 초신자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드릴 생각까지 하는 것은 성숙한 자의 신앙입니다. 받은 생각을 하는 성도가 많은 교회는 죽어 갑니다. 그러나 드릴 생각을 하는 성도가 많은 교회는 살아납니다.
우리가 처음에는 교회에 올 때 다닐 때는 문제를 해결 받으려고, 상처를 치료받고 위로 받기위해, 소원에 응답 받기 위해서 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월이 흐르고 10년, 20년을 그런 모습으로만 있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다 차원 높은 축복을 받으려면 우리의 신앙이 드리고, 섬기고, 헌신하는 신앙으로 발전되어야 합니다. 쓰다 남은 물질을 드리고, 활용하다 남은 시간에 봉사하고, 마음의 중심이 아닌 구석에 주님을 모시는 모습은 복된 모습이 아닙니다.
사람이 계산하는 복은 '취하는 것'으로 계산되지만 하나님이 계산하는 복은 '드리는 것'과 '나누는 것'으로 계산됩니다. 또한 취할 생각을 많이 하면 온통 섭섭한 마음뿐이지만 드릴 생각을 하면 섭섭할 것이 하나도 없고 감사할 뿐입니다.
3. 성숙한 사랑의 기도입니다.(3절)
이제 두 자매는 오라비가 죽게된 사실이 너무 안타까워 마음의 멧세지를 담아 사람을 통해 예수님께로 보냄니다. 그렇게 사람을 보내는 것은 예수님께서 병든 오라비를 살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시기 바람니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이 말씀속에서
1) 왜 마르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직접 가지 아니하고 사람을 보내었을까요?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사람을 보낸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가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거나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어서 사람을 대신 보낸 것은 아님니다.
마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은 부하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직접 예수님께 찾아가 부하의 병을 고쳐 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백부장은 예수님이 직접 가실 필요가 없으시다 하고 “예수님이 말씀만 하셔도 내 부하의 병이 낫겠습니다”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그 믿음에 놀라움을 표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은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만져 주시고 기도하고 안수해 주셔야 안심하고 믿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오시지 않고 말씀만 하셔도 낫겠다는 그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백부장과 같은 믿음이 바로 마르다와 마리아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대신 보낼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지극히 내면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찾아 오시지 않고 말씀만 하셔도 나을 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 끝에 만져지지 않아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조건이나 댓가를 바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그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감동을 주고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 냄니다.(찬송가 344장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들려도 하나님의 약속위에 서리라 걸어 가세 믿음위에 서서 나가세 의심 버리고 나아가세 믿음위에 서서 눈과 귀에 아무 증거 없어도. 아멘)
2) 사람을 보내며 하는 말입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참으로 간단한 멧세지입니다. 그러나 이 멧세지속에는 두 자매가 지닌 엄청난 믿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멧세지속에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1) 늦게 오심에도 섭섭함이나 원망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오라비가 죽게된 상황에서 뭘 하시느라고 여기에 빨리 오시지 않으시냐고 원망이나 섭섭함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원망이나 섭섭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도는 간구는 아무리 힘들고 내 생각대로 안되어도 힘들어 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사랑하면 사랑안에 있으면 힘들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불평하지 않습니다. 원망과 불평이 신앙에서나 가정에서나 있는 것은 사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2) 병든 오라비를 고쳐달라고 협박이나 공갈하는 말도 강요하는 말도 없습니다.
우리는 생활중에 협박성 발언을 자주합니다.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려고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이름으로 상대방의 자존심을 짓밟기도 하고 협박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아내거나 이루려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인간의 사랑에는 감동이 없습니다.
그런데 두 자매의 멧세지에는 일방적으로 예수님께 오라비의 병을 낫게 해달라는 그런 협박성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성숙한 기도는 있는 그대로를 병들었다고 주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3) 예수님께 속히 찾아와 달라는 부탁도 없습니다.
사실 상황으로 보면 급합니다. 그러나 급하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월권하지 않습니다. 언제 고쳐줄 것인가? 언제 어떻게 응답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기도하면서 언제 어떻게 응답해 달라고 시간이나 방법까지도 하나님께 명령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나 지혜나 사랑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나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실 것이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하는 그런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르다 마리아 두 자매가 예수님께 대한 기도속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1장을 보면서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베다니의 3남매는 주님의 사랑 받는 존재였는데, 왜 주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이 듣고도 바로 가지 않고 이틀을 더 유하셨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왜 주님은 사랑하시는 자의 고통에 바로 반응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경우를 당하면서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신앙인들은 가끔 회의에 빠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상황을 만나도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디 응답하시고 우리가 생각한대로 다 이루어지지 아니한다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이틀 때문에 나사로는 죽었지만 결국 그가 다시 완전히 살아나면서 하나님은 더 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처럼 때로 믿는 우리에게 고통의 순간이 오래 지속되고 심지어는 "다 끝났다!"는 상황이 될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롬8:28)
여러분! 결혼하고 싶어서 많은 자매나 형제들을 만나는데 별로 진전이 없다해도 너무 속상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더 좋은 분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인즐 믿습니다.
여러분! 내가 원하는 대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관심은 항상 그분의 사랑 받는 자녀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주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항상 주님의 사랑 받는 자로서 맑고 깨끗한 영혼을 소유한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그러면 3절의 두 자매의 기도속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1) 요구가 아니라 호소입니다. 간절한 희망입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이 말은 요구가 아니라 호소입니다. 오라비를 살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뿐입니다. 결국 이 믿음이 죽은 오라비를 살리게 됩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주님의 권위와 능력을 믿고 다 맡기시기 바람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이 말은 역시 간절한 희망을 열망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 기도속에는 간절한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가정이든 교회든 나라든 잘 세우고자 하는 열망, 뜨거운 눈물이 있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그냥 냉냉하게 기도해서는 안됨니다. 주님의 시선을 구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2) 그 다음에는 오라비를 향해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라고 합니다.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렸을 때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면서 나사로에 대해 우리가 아니면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표현하지를 않고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라고 부릅니다. 자기들의 사랑하는 오라비라 하지 않고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사랑받는 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인척관계를 드러내기 좋아합니다. 인간관계를 엮어서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뭔가 이득을 얻으려고 이 사람 저 사람 이름을대가면서 뭔가 관계가 있고 힘께나 쓸 것처럼 이야기할 때가 많습니다. 인간적인 권위나 지위나 권력을 이야기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마르다 마리아는 그런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라고만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셔야만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사랑보다 내가 하나님께 해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심이 더 큰 줄 암니다. 이 베푸신 사랑과 은혜를 따라 우리가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숙한 믿음은 그 주체가 내가 아니라 항상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주님이 나를 사랑함이 너 크고 큰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비하면 내 사랑은 너무 작습니다. 나약한 아이의 손이 아버지를 잡는 것보다 힘이 있고 큰 아버지의 손이 아이의 손을 감싸쥐고 나가면 안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찬양합니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인간이 주님을 사랑하는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부족합니다. 왜 우리 사람의 사랑은 가변적입니다. 변덕이 심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괴로우나 즐거우나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것 못 지킨 때가 많습니다. 완전하지도 못한 사랑으로 나가지 말고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하여 나가시기 바람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라는 그런 확신이 어디에서 생긴 것일까요? 그들이 지위가 높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부모가 없이 자란 요즘 말로 하면 소년 소녀 가장의 집이었습니다. 그들의 행위가 완벽해서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마르다는 주님 앞에서 실수를 많이 있습니다. 말 실수도 많이 했고, 주님 앞에서 동생 마리아 문제로 짜증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처럼 부족한 부분이 많아도 베다니의 3남매는 자기들이 주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우리도 그런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좋은 행위나 높은 지위를 가지는 것보다 주님의 사랑 받는 자라는 확신을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은 행위를 보여드리는 사람보다 신뢰를 보여드리는 사람을 더 사랑해주실 것입니다.
본문 5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본래 그들을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그처럼 주님은 우리의 외적인 조건을 보고 사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사랑의 확신이 어떤 행위나 조건이나 환경보다 중요합니다. 어떤 분의 마음에 지속적인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자세히 보면 지금 그 분이 누군가와 사랑을 주고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어떤 분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도 역시 그분이 누군가와 사랑을 주고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고등학교에 불량 학생이 있었습니다. 부모의 골칫덩어리이고, 학교에서도 항상 말썽만 피웠습니다. 부모님과 선생님이 아무리 벌을 내려도 그는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학생이 이웃의 한 여고생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술도 끊고 담배도 끊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사랑하는 그 여고생이 술 담배를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받는 존재라는 확신을 가지면 우리의 방황은 끝나게 될 것이고, 우리는 더욱 주님의 사랑 받는 자가 될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병들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할 때 4절에 예수님 말씀하심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 여기서 말하는 병은 죽게될 정도의 쇠약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죽을 병은 아니라 말씀하심니다. 즉 나사로가 걸린 병은 죽음으로 끝나는 병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그런 병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요한복음에서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의 이야기 아님니까? 그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본인의 죄나 부모의 죄가 아니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 했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당하는 고난은 우리의 죄나 조상의 죄가 아님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더욱이 오늘 4절에서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질병에는 죽을 병이 있고 살 병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병이라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3일 후에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라 했습니다. 누구나 언젠가는 다 죽습니다. 하나님 부르시는 날 다 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죽어도 다시 살아납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에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으로 모든 것을 끝내지만 하나님은 끝이 아니심니다. 사람의 죽는 것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따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물러가기를 세 번씩이나 간절히 간구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말씀하시면서 바울의 가시를 그냥 두셨습니다. 우리 중에도 병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질병으로 고통을 당해도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님니다. 오히려 사는 날 동안에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육체의 약할 때 오히려 강해졌다고 했습니다. 장로교를 시작하고 종교개혁자인 칼빈은 걸어다니는 병동, 병원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그는 평생 동안 각종 질병을 달고 살았습니다. 두통으로 고생하면서도 글을 썻고, 위장병으로 식사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언제나 몸에 열이 많아 고생했습니다. 신경통으로 고생했고 건강이 안좋아 몸은 깡말랐습니다. 강단에 서서 말씀을 증거해야 하는데 몸이 너무 약해지자 서서하다 의자에 앉아서 하고 죽던 해 1564년 부활절 때에는 걷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하고 의자에 실리어 나와 성찬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칼빈은 1564.5.27 61세에 죽기 전까지 기독교 강해라는 대작을 썼고 온 몸이 아파 글 못 쓸 상황속에서도 계속 집필했습니다. 나중에 정 글을 쓸 수 없을 때에는 다른 사람에게 대필시켜서라도 쓴 것입니다.
우리가 병들어도 실패해도 망해도 망한 것이 아님니다. 실패한 것이 아님니다. 병든 것이 아님니다.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다시 건강해질 것입니다. 고난은 비극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의 시작이요 문입니다.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가정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셨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세상의 즐거움이나 인간적인 안락함이나 평안을 위해 살지 않게 이끄셨으니 얼마나 큰 복입니까? 고난은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임을 믿으시기 바람니다. 고난을 축복의 도구로 삼으시기 바람니다.
두려워 하지 마시기 바람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겸손해지고 진실하며 의롭게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람니다.
나사로의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기 위한 고난임을 분명 히 말씀하심니다. 순풍중에도 아멘으로, 큰 풍랑중에도 아멘으로 나가시기 바람니다. (찬송가 503장,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하나님께만 영광되는 귀한 삶들이 다 되시기 바람니다.(찬양/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세상일에 실패했어도 찬양)
45절에 보면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그랬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게 되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응답은 속히 응답하시든... 늦게 응답하시든... 우리는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것과 우리에게 가장 좋은 시기에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참 믿음란... 응답이 없을수록... 흔들리지 말고... 굳게 믿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주님이 응답하실 때 까지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30:18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 나시리니 이는 저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랬습니다.
주님을 믿고 끝까지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예화) 어느 대학생이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이 믿음도 좋고, 꿈도 많았으며, 머리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 몸에 갑자기 이상이 생겼습니다. 온 몸에서 기운이 빠지고 모든 일에 의욕을 잃어 가는 병이었습니다. 여러 병원을 다닌 결과 알아낸 병명은 '근육무력증'이라는 희귀하고도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이 병은 갈수록 근육에서 힘이 빠져서 나중에는 누워서 말라죽게 되는 그런 희귀병이었습니다. 아직 앞날이 창창한 대학생이요, 그것도 주님을 잘 믿는 신실한 학생이 이런 병에 걸렸으니 얼마나 눈앞이 캄캄했을까요...
치료받을 길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 병은 치료가 불가능한 그런 병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연필도 들 힘이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방안에 누워있는 시간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고쳐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잠잠히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점점 병은 호전되지 아니하고 나빠지는데... 그 와중에서도 이 학생은 조금 기운이 나면 옆에 있는 책을 들고 겨우 책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기운이 나면 일어나 앉아서 신문에 있는 중요한 내용들을 스크랩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그마치 5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런 병이 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주여!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오냐, 알았다 가만히 기다려라!" 그리고 금방 고쳐주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수년동안 침묵하시다가 5년이 될 무렵에서야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훗날에 그는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저는 왜 하나님께서 이런 어려운 상황을 주셨는지 곰곰이 생각한 후에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제가 미처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께서는 저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셨다는 것과 그 일을 위해 저를 준비시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공적인 기업 경영을 위해서는 2가지의 준비가 필요한데, 한가지는 기업을 하나님의 뜻대로 정직하게 경영할 수 있는 신앙적인 준비이고, 다른 한가지는 다방면에서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광범위한 지식을 준비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나를 병중에서 이 두 가지를 준비시켰습니다. 지난 5년 동안 읽었던 책과 모든 자료들이... 회사를 경영하는데 꼭 필요한 기본적인 재산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이랜드 그룹의 박성수 장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에게...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절대 의미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 배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당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이 속히 안 온다고 해서... 믿음이 흔들리거나... 주님을 원망하거나.... 교회를 떠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때가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질병이 있으십니까?...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하셨습니까?... 남모르는 걱정과 근심이 있습니까?..... 다윗은 시편 42:5절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그랬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괴로울 때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람니다. 찬양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기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 주리라”
빌립보서 4:6-7절에서도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랬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단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신뢰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는 마르다에게 25-26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러셨습니다(요11:25-26).
주님은 우리가 끝까지 신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 뒤에는 반드시 이런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그랬습니다(요11:4).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주님 앞에 나가서 "주여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사랑하는 자가 어려움을 당합니다!"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주님의 응답을 기다려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모든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준행하는 성도는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 되면 걱정할게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이심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이미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가정, 주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성도, 우리 모두 그런 가정이 되고, 그런 성도들이 다 되어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
요한복음 11:1-4 / 홍정길 목사
여러분은 생애에 있 어서 어떤 것이 가장 큰 축복 이라고 생각하며 사십니까? 어 떤 사람들은 돈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이 잘 산 다고 해서 보면 돈이 많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분들이 잘 살까요? 심리학자들 의 보고에 의하면 돈이 많은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자식들 이 그렇게 슬퍼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부모님의 죽음의 슬픔 보다 내게 돌아올 유산이 얼마 인가가 더 간절하기 때문에 슬 퍼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놓고 자식 슬퍼하지 도 않는 말년이 될 수도 있습 니다. 또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받기로 작정한 사람들 은 아무리 많이 줘도 만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재산이 많은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자식들 의 마음이 갈래 갈래 찢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번 주간 에 있었던 현대 사건이 우리에 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 합니다.
또 좋은 집을 가진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사 는 사람이 있습니다. 방 한 칸 에서 일곱, 여덟 명이 한꺼번에 우글거리고 살았던 때부터 시 작했는데 이제는 식구대로 화 장실 있는 집을 갖고 사는 집 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 넓은 집이 행복을 줍니까? 제일 처 음 전셋집에서 내 집 마련해 들어갈 때 정말 기뻤습니다. 그 러나 그 기쁨이 며칠 갑니까?
또 좀 잘 사는 사람 들은 보석 콜렉션 합니다. 돈이 라는 것은 늘 가져보면 그저 그렇습니다. 그래서 뭘 좀 다른 것 같고 싶다 해서 보석을 수 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친척 중에서도 보석을 수집하 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계 여행 어디든지 가면 보석상에 가서 보고 못 사면 가슴 아파하고
"참 좋았는데..."하면서 몇 번이 나 혀를 찹니다. 언젠가 그 집 에 가서 사놓은 보석 좀 보자 고 하니까, 깜짝 놀라면서 어떻 게 그 귀한 보석을 집에 놔둘 수 있느냐는 거예요. 그러면 어 디 있냐고 물으니 은행에 있답 니다. 언제 그것을 한번 목에 걸어봤느냐니까 어떻게 그것을 걸고 다니냐는 거예요. 그래서 모조품을 똑같이 만들어서 달 고 다닌대요. 그러니까 제 둘째 아들이 있다가
"이모, 바보다. 그렇게 가까이 갖지도 못할 것 같으면 그냥 하루 차 타고 나 가서 보석가게 돌아다니고 좋 다 감상하고 돌아오시지 뭘 그 렇게 돈 들여, 애써 사느냐?"며 핀잔을 주었습니다.
좋은 옷, 옷은 날개라 고 합니다. 그 옷 없으면 내 인 생이 어떻게 될 것 같은 목마 름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집에 서 사가지고 들어온 순간부터 그것 별거 아니지 않습니까? 또 우리 어렸을 때 자동차 배 기가스가 향기인양, 뒤쫓아 다 니던 것이 엊그제예요. 그런데 이제는 모두다 차 한대씩 몰고 다닙니다. 그래서 행복하십니 까?
그래서 제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정말로 제게 무엇 이 축복인가 생각해보았습니다. 제게 첫 번째 축복은 구원받은 것입니다. 어쩌다가 예수 믿었 는지 지금도 참 신기합니다. 그 렇게 안믿으려고 애쓰고 도망 다니고 항거하고 또 실제로 믿 어지지도 않았는데요. 김용옥씨 가 왜 저렇게 떠드는지 제가 잘 압니다. 홧김에 저러거든요. 안믿어지니까 그럽니다. 주님의 사랑이 바다 물결처럼 끊임없 이 밀려오는 사건, 사건마다 주 의 은총이 나를 전후좌우로 붙 잡아줍니다. 이 구원이 너무나 소중합니다. 축복입니다.
두 번째로 제가 축복 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 살면서 참 좋은 사람들을 만나 사랑하고 교제하며 는 것입니 다. 가족은 두말할 것도 없고 좋은 믿음의 친구들이 있습니 다. 저는 우리 성도들 정말 마 음에 이쁩니다. 이뻐 죽겠어요. 정말 좋습니다. 어디 목사들 모 임 가면 목사들이 자기 교인들 에 대해 그렇게 아프게 이야기 합니다. 기도원 가면 저와 면담 하자고 줄 섭니다. 이야기 들어 보면 자기 교인 나쁘다고 계속 떠드는데, 정말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 25년 목회하면서 정말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귀한 형 제, 자매들과 함께 신앙생활합 니다. 아마 천국 가도 참 반가 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서 이런 확신을 가지고 삽니다. 돈이라는 것은 쓴 것만 내 돈 이지, 안 쓴 것은 어느 날 나와 전혀 상관없어집니다. 그리고 진정한 기쁨은 사람들을 얼마 나 넓고 깊게 사랑하는가에 의 해 결정됩니다. 사랑하면 반드 시 기쁨이 있습니다. 사랑하면 서 기쁨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 입니다. 사랑하면 반드시 감동 이 있습니다. 불을 켜면 빛만 나는 것이 아니라 열이 나는 것처럼 사랑이 있는 곳에 기쁨 과 감격은 언제나 있습니다. 그 래서 여러분이 여러분들에게 질문하면 됩니다. 내가 언제 감 격했는가? 그러면 그 때 사랑 하고 있었던 나를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 하면 두려움이 밀려납니다.
우리 예수님에게도 이 땅에 계실 때 사랑하는 사 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 에 주께서 만족하셨고, 그것 때 문에 주께서 기뻐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랑했던 첫 번 째 사람들, 성경에서 열 두 제 자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3 장 1절에 예수께서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시고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구름 떼처럼 모여 드는 사람을 피하셔서 조용히 제자들과 만나 그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셨고 자기를 왕으 로 삼으려는 인기 같은 것은 한 눈에도 차지 않은 채, 인간 적인 눈으로 보면 무지렁이 같 은 무식한 20대의 갈릴리의 어 부들과 사랑하시면서 기뻐하셨 습니다. 사랑은 어떤 돌맹이도 다이이몬드 보다 더 빛나는 광 채로 만들어버리는 능력을 가 졌습니다. 사랑은 어떤 고통도 견딜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어 느 분이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는 확신만 있으면 내가 어떤 고통도 참겠다."
그것이 흔들리 니까 생애가 흔들립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 서 또 확실하게 사랑했다고 성 경에 기록한 예가 있습니다. 그 것은 베다니의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의 가정이었습니다. 11장 3절에 주께서 사랑했다는 기록 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 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 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사랑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예 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 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요 11:
5)이 사람들만 사랑받는다 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도 본래 사랑했다고 말합니다. 또 주변의 많은 사람도 예수께 서 그 가정을 사랑하시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35절에 나사로 가 죽은 것을 본 그 현장에서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 라"(요 11:35)고 말했습니다. 그 러니까 36절에 이렇게 기록되 어 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 하였는가 하며"(요 11:3
6)다른 사람이 볼 때에도 우리 주님은 그 가정을 그처럼 사랑하셨습 니다.
이 세상에 많은 가정 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주께서 특별히 사랑하는 가정이 있었 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수많은 예배가 있고 예배에 주 님께서 반드시 참여하시지만 어떤 예배는 우리 주께서 찡그 리는 예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예배는 주님께서 임재하셔서 기뻐서 어쩔 줄 모 르는 예배가 있다고 저는 믿습 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께서 기 뻐하시고 주께서 이곳에 오셔 서 편하게 쉬실 수 있는, 영광 을 받으시는 예배되기를 소원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베들레 헴에서 또 예루살렘에서 성공 한 사람들, 부자들, 유명한 사 람들의 집에 유하시지 않았습 니다. 부자였던 아리마대 요셉 도 주님을 좇아 다녔지만 주께 서 저의 집에 유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 한 촌 베다니에서 자기 집처럼 계신 것입니다. 주 께서 정말 남서울은혜교회가 주님의 교회다, 이렇게 말하는 교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점 에서 우리 교회는 확실하게 주 님 기뻐하실 점이 두어가지 정 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의 하나는 장애를 가진 형제, 자매 들과 함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가 장 관심을 많이 기울이신 분들 이 장애인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는 장애인들이 같이 예 배할 수 있는 시설이 되어있지 않습니다. 아마 주님께서 그 사 실을 몹시 아프시게 느끼실 것 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여기 서 온갖 장애를 가진 형제, 자 매들과 같이 주님 기뻐하시는 영광 속에 예배드리고 있습니 다. 주님, 기뻐하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 일을 위해서 예배당을 멋지 게 지어서 우리끼리 편하게 자 동차 주차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편리한 예배 드리기 를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이렇 게 복잡한 주차 때문에 5분이 나 10분 더 성의를 내어 예배 를 준비해야합니다. 환승 주차 장에서 여기까지 걸어올 때 우 리 주님이 몹시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우리 주님이 사랑하 시는 예배,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성도들 가정 가 정이 우리 주님께서 유하기 기 뻐하는 가정들 되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 주님 오시 면 무얼 가장 감추고 싶으십니 까? 어떤 집은 화투장일 수도 있구요. 어떤 집은 비디오 테이 프 감추느라 혼나고요. 어떤 집 은 부부싸움 한 것 감추고 싶 고요. 여러 종류가 있을 수 있 겠지요. 여러분의 가정이 주님 이 유하기를 기뻐하시는 가정, 주님의 사랑이 머무는 가정 되 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 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처 럼 사랑하는 가정에 사랑하지 않은 것 같은 증거, 세 개를 발 견합니다. 첫 번째로는 이 가정 보니까 형제들이 똑같지 않습 니다. 늘 나대기를 좋아하는 자 기 중심적이고 또 다른 사람에 게 위압적인 사고를 가진 마르 다. 이 마르다는 언제든지 열심 히 활동하고 일하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얼마나 대담하던지 주님에게도 명령합 니다.
"주여 저 마리아로 하여 금, 당신 발 앞에 앉아 당신 말 만 듣게 하지 마시고 날 좀 도 와주게 하시오."
이 마리아에게 꾸중하고 명령하면서 사실은 또 주님에게까지 명령합니다. 교회 안에 보면 이렇게 나서기 좋아하고 준 것 없이 미운 사 람이 꼭 있습니다. 늘 자기 중 심적입니다. 그래놓고 자기는 자기 결점을 모릅니다. 자기 중 심적인 사람일수록 자기 결점 을 모릅니다. 나는 최선을 다했 다고 생각합니다. 주변이 얼마 나 상처입는가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께 꾸중을 듣습니 다. 그런가하면 마리아는 주께 서 자기를 향해서 무슨 말씀을 가장 하고 싶으실까 생각하며 얼마 남지 않은 때, 자기를 향 해서 부어주시는 깊은 사랑 앞 에 나아갔습니다. 그의 발 앞에 앉아서 주님과 사랑의 눈동자 를 마주치고 주님의 말씀에 귀 를 기울이고 주님의 심장에 그 마음이 와 닿아있는 겸손한 마 리아입니다. 그런가하면 나사로 를 봅니다. 만약 나사로가 우리 남서울은혜교회에 있어도 그 사람이 누굴까 싶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죽었다가 살아난 사 람이 그 다음에는 도무지 뭘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소극 적인 사람, 전혀 눈에 띄지 않 는 사람, 요즘 튀는 것 좋아하 는데, 튀는 것과는 정반대인 사 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 도 아닙니다.
여러분, 잘못 생각하 면
"나는 이런 이런 실수로 주 님께 꾸중을 받았기 때문에 주 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라 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교회 가봐 야 도무지 표시가 안나. 할 일 도 없는 것 같아. 그리고 내 능 력에는 한계가 있어."
그래서 자기를 늘 작게 생각하는 사람, 주님께서 나 같은 것은 사랑 안한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있 습니다.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 서는 모두를 사랑하신다고 말 씀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자 기 마음에 꼭 드는 이 마리아 를 몹시 사랑하셨습니다. 그러 나 나서기를 좋아하고 실수를 많이 하지만 자기를 향해서 온 전하게 나아가고자 하는 마르 다를 우리 주님은 똑같이 사랑 하셨습니다. 아니, 있는 것 같 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도무지 인간적인 눈에는 별로 드러나지 않는 이 나사로를 우 리 주님은 사랑하셨습니다. 사 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 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자식이 내 마음에 들어야만 사랑이 되 든가요? 자식이 내게 고통을 줄 때, 실망을 줄 때, 더 큰 사 랑으로 나아가지 않습니까? 그 사랑이 중단됩니까? 마음에 들 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랑이 포 기됩니까? 우리 주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내가 다른 사람 보다 유명하지 못하고 그 사람 에 비해서 다른 모습을 가졌다 고 주께서 나 같은 것을 사랑 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십시 오. 주께서는 그 때도 나를 사 랑하십니다. 내가 넘어져 있을 때 더 깊이 사랑하십니다. 사람 들이 나를 눈 여겨 보지 않을 때, 더 사랑하십니다. 간증 중 심의 설교가 위험한 것은 하나 님께서는 영(靈) 아니면 사랑 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하게 하 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에이 브라함 링컨이 참 재미있는 이 야기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을 제일 사랑하신 다고요. 증거를 대라고 하니까 뭐라고 답변하는가 하면 그래 서 제일 많이 만들었답니다. 자 기가 좋아하는 것을 자꾸 만들 잖아요. 성공한 사람들, 잘난 사람들은 이미 자기 상을 많이 받았어요. 우리 주님은 실패한 나를, 평범한 나를 더 깊이 사 랑하십니다. 이 가정이 증거입 니다.
두 번째로는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 하지 않는다고 착각하기 쉽습 니다. 이 가정에 병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보통 병이 아 니라 죽을 병이 들었어요. 우리 들은 실패했던지 병들었던지 고통당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증거라 고 확신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 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십니 다. 그 하나님의 큰 사랑은 어 떤 때는 나를 아프게도 사랑하 고, 어떤 때는 슬프게도 사랑하 고, 어떤 때는 심장이 찢어지는 아픔으로도 사랑하십니다. 잘못 된 신앙은 모든 질병의 원인을 귀신이라고 합니다. 그 소리는 귀신 같은 소리예요. 성경에 어 디 그런 말이 있어요? 성경에 는 귀신들린 자 있다고 했습니 다. 그러나 연약한 자도 있고 각색 병든 자가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몇 가지 증거를 가지고 강조를 하니까 사람들이 모든 질병은 귀신으로부터 오고 병 이 든 것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증거라고 잘못 오해합니다. 이 단들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 께서 질병으로 그 분의 큰 사 랑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큰 병을 몸에 지녔습니 다. 하나님께 목숨을 걸고 기도 했습니다. 그 간절한 기도를 세 번이나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 나 하나님께서는 안 고쳐주셨 습니다. 그리고
"내 은혜가 네 게 족하다"(고후 12:9)고 하나 님의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 러자 아무 것도 안 변했는데, 이것을 도리어 크게 기뻐하였 다고 했습니다.
제가 이번에 한 달 쉬면서 혈당을 체크해 보니 150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당뇨 병 환자라는 거예요. 자각 증세 가 없었으니까 도무지 몰랐습 니다. 그런데 그 결과를 받고보 니 참 마음에 기쁨이 몰려오는 데, 첫 번째 기쁨은 우리 하나 님께서 주님 앞에 갈 예비초청 장 보내주셨구나 하는 것이었 습니다. 땅에 있는 장막들은 하 나씩 무너지쟎아요? 부품 고장 이 나기 시작해요. 어떤 것은 고칠 수 있는데, 고쳐지지 않으 면 그대로 주님 앞에 가야 됩 니다. 그런데 내가 건강한 줄로 착각하고 준비 없이 갈 뻔 했 어요. 주께서 경고를 보내주셨 습니다. 어제 밀알 음악회때 어 떤 분이 거룩한 성을 찬양했습 니다. 그러면서 관중들에게 따 라 부르라고 해서 따라 불러봤 습니다. 30년 전에 제가 그 노 래 잘 불렀거든요. 불러 보니까 가사들이 모두 생각이 나더군 요. 거룩한 성이 세 scene으로 불려졌습니다. 첫째로는 나 어 젯밤에 잘 적에 꿈을 꾸었네. 호산나! 주께서 입성하시는 것 을 찬양하는 노래가 첫 번째입 니다. 두 번째 scene입니다. 주 께서 처참하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루살렘, 그 거룩한 성의 비참을 노래합니다. 세 번 째는 그 꿈이 변합니다. 이 땅 은 무너지고 새 하늘과 새 땅 이 다가섭니다. 거기는 유리 같 은 바다가 있고 밤이나 낮이 없는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가 있습니다. 제가 30년 만에 그 노래를 부르면서 그 노래와 함 께 그 은총의 보좌 앞에 가는 감격을 누려보았습니다. 제가 가야할 곳이 거기거든요. 이 곳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모르 고 살았다가 초청장 받고
"하 나님 감사합니다"
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생활의 규칙이 가져지더라구요. 과거에 는 음식을 먹으라고 하면 별수 없이 먹어야 되었습니다. 그런 데 이제는 혈당이 높아서 음식 못 먹는다고 양해를 구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리고 억지로 하루에 1시간씩 운동하려고 애 를 씁니다. 운동 끝나고 나면 혈당 지수가 한 20-30정도 줍 니다. 참 재밌더라구요. 그러니 까 몸 전체의 컨디션이 좋아지 고 건강해져요. 게으르고 바빠 서 운동 못하다가 이제는 운동 안 할 수가 없으니까 열심히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기분도 좋고 진작 운동할 것을 게으른 놈이 운동 안하니까 하나님께 서 별 방법으로 운동시키신다 고 생각됩니다. 여러분, 질병 속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모릅 니다. 고통 속에 주시는 하나님 의 축복은 알 사람이 없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 역사 상 주께 영광 돌린 사람들은 대부분 순교를 비참하게 당했 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성공과 상관없는 생애를 살았습니다. 여러분, 그렇기에 내가 질병 때 문에 고통받고 고통 당하는 것 이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 아니 라고 외면하지 마십시오. 하나 님은 사랑이십니다.
세 번째로 기도가 응 답되지 않을 때 우리들은 하나 님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지금 병들자 마자 예수께 사람을 보 냈습니다.
"주여, 사랑하는 자 가 병들었나이다."
그랬는데 주 께서 오시지 않았습니다. 여러 분, 우리에게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 다.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지 않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는 절망감을 갖습니다. 이사야 40 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 와께서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 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사40:2
7) 이 세상의 수많은 사건 가운데 내 사건 같은 것은 하나님의 눈에 안띄는가? 그래서 절망합 니다. 아니, 간절히 기도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 중에 내 기도는 미약해서 하나님이 귀 를 안 기울이시는가? 이렇게 우리가 좌절할 수 있단 말이예 요. 그것이 아닙니다. 여기 성 경은 참으로 이상한 말씀을 하 십니다. 5, 6절에 이렇게 말합 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 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 을 더 유하시고"
그런데 영어 성경에는
"Therefore"(NASB)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 수께서 이 가정을 사랑하시더 니 이틀을 더 유하셨다. 이상한 말 아닙니까? 아니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면 그냥 맨발로라도 뛰어가서 허 준처럼 살려내야 될 것 아닙니 까? 그런데 이틀이나 더 유했 습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 시오. 주께서 달려가서 그를 병 석에서 일으킬 수 있다고 믿습 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저를 병 석에서 일으키시기 원하지 않 고 무덤에서 일으키기를 원하 셨습니다. 엄청난 차이 아닙니 까? 엄청난 비교 아닙니까? 그 냥 아픈 자리에서만 일으키신 것이 아니라 죽어서 나흘 되어 썩은 시체, 그 가운데서 일으키 시기를 원했단 말입니다.
이런 일이 우리 생애 속에 있습니다. 주께서는 우리 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고 주께서 영광스러운 것으로 주 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너희 중 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 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 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 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 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 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9-1
1) 우리가 원하는 대로 주시는 것 이 아니라 아버지의 좋으신 대 로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 다.
이런 일은 우리 생애 속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 다. CCC에 있을 때였습니다. 모일 장소가 없어서 하나님께 건물 200평 짜리 달라고 목이 터지도록 기도했습니다. 안주시 더라구요. 모든 것이 끝났습니 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 어서 오기가 나서 하나님께 기 도했습니다. 하나님, 이제는 500평 주셔야겠습니다. 그랬는 데 하나님께서 5000평 주셨어 요. 시시한 것은 안주시더라구 요.
남서울교회 초창기의 일입니다. 교인들이 모이기 시 작해서 예배 처소가 필요했습 니다. 그 때 교인이 300여 명 모일 때였는데, 거기에 맞춰서 예배당을 짓기 위해서 땅을 물 색하다가 지금 반포 한신 15차 아파트 앞에 큰 정자나무 하나 가 있습니다. 그 옆의 땅, 220 평을 계약했습니다. 계약을 하 고 보니까 그 땅 지분이 어떻 게 복잡하던지? 도무지 우리 것으로 가질 수도 없고 언제 지어질지도 모르고... 일종의 사 기처럼 되었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계약금을 떼었습니다. 하 나님의 교회가 손해 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정말 가난한 목사 가 죽을 노력해서 그 손해나는 것을 조용히 갚아 놓았습니다. 그 때는 220평만 되도 300명 모이는 교회는 예쁘게 지을 수 있겠더라구요. 그런데 한 두 달 있다가 어떤 분이 453평을 가 지고 와서
"목사님, 이것은 암 만 생각해도 남서울교회 것입 니다."하며 거저 주시더라구요. 그것이 지금의 남서울교회 터 입니다. 안주면 더 좋은 것 주 시더라구요. 시시한 것 안주셔 요.
여기 중동교회 때부 터 계셨던 분들 여러분이 증인 입니다. 중동학교가 부도가 났 습니다. 서울시 교육청에서 그 것을 사라고 종용했기 때문에 사려고 계약까지 다 했습니다. 그런데 중동학교 동창들이 일 어나서 우리 학교는 민족사학 이지 미션스쿨 아니다 반대를 열심히 해서 결국 그것을 삼성 이 사갔습니다. 그 때는 참 마 음이 안좋더라구요. 계획을 다 세웠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땅을 주셨어요. 서울 시내에 서 이 땅 보다 좋은 땅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요. 그리고 이 건물 주셨어요. 저는 이 건물 볼 때마다 우리 하나님 정말 얼마나 멋쟁이 하나님인가 하 고 생각합니다. 시시한 것 안 주셔요. 안심하세요. 노처녀들 도 안심하세요. 시시한 것은 안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주 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좋 으실 대로 주십니다. 기도가 응 답되지 않을 때 절망하지 마십 시오. 기도하는 심령을 하나님 이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 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기뻐하 십니다.
"그래도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가 없어."하십니 까? 느끼는 방법을 가르쳐 드 릴게요. 주께서 말씀하셨습니 다.
"너희가 나를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 했다"고 말합니다. 그런고로 주 님을 사랑하기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거기서 먼저 사랑하셨 던 주님의 사랑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은 사랑 으로만 대답이 됩니다. 사랑은 사랑으로만 연결이 됩니다. 이 세상에 멋진 언어들이 많습니 다. 그 중에 충성이라는 언어도 있고 성실이라는 언어도 있습 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느 냐?"는 말 앞에
"나는 당신을 향해서 충성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대답 아닙니다. 그것은 사 랑 앞에 모독입니다. 당신을 향 해서 성실하겠다는 말, 충성하 겠다는 말은 사랑에 대한 치욕 입니다. 그것 자체는 좋은 말이 지만 사랑에 대한 대답이 아니 라는 말이예요. 주께서 말씀하 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가 큰 사랑을 베풀겠다"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사 랑하기로 작정하면 그 주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와 길이가 날마다 더 알아집니다. 주님 사랑하기를 시작하십시오. 그 때, 우리들은
"주를 사랑하 는 자에게 해가 힘있게 돋아나 게 하시옵소서."
(삿 5:31)하는 드보라의 고백을 알게 될 것입 니다. 또
"우리가 알거니와 주 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 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롬 8:2
8) 무엇을 이룹니까?
"...선을 이룹 니다."
그 대목은 좋아하시네 요. 뒤만 좋아하시지 말고 앞부 터 좋아하세요. 하나님을 사랑 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 을 입은 자입니다. 고린도 전서 2장 9절에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 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 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 였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이제까지 본 적 도 없고, 그 소문을 들은 적도 없고, 상상력의 날개를 펴서 하 늘 끝을 가고 온 세상을 돌아 다녀도 생각할 수 없는, 사랑하 는 자를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 의 놀라운 사랑을 말씀합니다. 그처럼 크고 놀라우신 삶으로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예비해 놓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을 향해서 사랑으로 나아가십시오. 플렌티스(E. P. Prentiss) 여사 가 전염병이 돌 때, 사랑하는 아이들을 다 잃었습니다. 자녀 가 감기만 들어도 부모의 가슴 이 찢어지는데 전염병에 아이 를 모두 잃고 나서 그가 하나 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여러분, 하 나님의 사랑을 만나고 싶으면 사랑으로 나가십시오. 여러분이 주님을 등지고 살았던 삶을 돌 이켜서 사랑으로 나가면 아직 도 포기치 않고 나를 사랑하시 는 그 사랑을 만날 것입니다. 우리 그 주님을 찬양하십시다. 찬송가 511장을 우리 함께 찬 양하겠습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 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이 전엔 세상 낙 기뻤어도 지금 내 기쁨은 오직 예수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 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이 세상 떠날 때 찬양하고 숨질 때 하는 말 이것일세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 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응답이 지연될 때
요 11-1-44 / 조상호 목사
지난 금요일 미션 2002팀이 사역을 마치고 남태평양팀이 먼저 돌아왔습니다. 우리 중국팀은 순차적으로 돌아와서 그 동안의 사역을 보고할 것입니다만, 지난 금요일 저녁과 어제 중고등부 모임에서 간단하게나마 보고한 내용을 통해서 남태평양팀의 그간의 활동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실 남태평양팀이 갔던 피지는 원래 습기가 높은 무더위와 예측하지 못하는 가운데 쏟아지는 소낙비와 극성스럽게 달라붙는 모기가 많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또한 세상에 알려진 관광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토가 매우 낙후되어 있어 교통편과 주거환경이 매우 열악한 곳입니다. 그곳에 우리 남태평양팀이 약 1주일을 방문해서 복음도 증거하고 훈련도 받고 돌아왔습니다. 보고에 의하면 이번에 다녀온 피지 땅에 비가 자주 내렸던 것 같습니다. 비가 많이 와서 찬양, 드라마, 워쉽, 인형극 등의 Performance를 제대로 진행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우리 팀원들이 진흙구덩이가 된 바닥에 쓰러지며 온 몸이 흙투성이로 뒤덮여짐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또 남태평양팀은 참 많이 걸었던 것 같습니다. 공항이 있는 난디나 피지의 수도인 수바와 같은 대도시에서도 복음을 증거하기도 했지만, 소수의 사람들밖에 살지 않는 오지 산골과 섬 등지를 찾아다니기 위해서 난디와 수바 사이의 거리 등의 장거리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이동을 도보로 했습니다. 하루에 두 세 시간은 보통이고 때로는 하루에 20Km 이상 무려 7시간 이상 정글을 헤매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현지의 스텝들 없이 우리 팀 스스로 이동하다보니 산속에서 길을 찾느라 고생도 했습니다. 늪지대와 같은 곳을 어렵게 건너기도 했습니다. 또 짧은 거리이지만 배도 탔습니다. 그리고 밀림과 정글을 헤매고 다니는 동안, 별도로 식사를 준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동하면서 마른 라면을 부수어 라면 스프와 섞어서 먹기도 하고, 미숫가루을 물에 타서 먹기도 하고, 어느 성도님이 헌물 해주신 육포를 뜯어 먹으며 행군을 하며 산골 오지에 있는 영혼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과 함께 준비해 간 의약품과 구호품들을 전달했습니다. 결국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에 힘입어 피지에 승리의 깃발을 꽂고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 동안 많은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께서 길을 열어주셔서 작년 미션 2001에 이어 미션 2002를 이렇게 다녀 올 수 있게 된 줄로 믿습니다. 이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또한 그 동안 여러 가지 물질로, 마음으로, 그리고 뒤에서 기도로 중보하며 후원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미션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한, 미션은 멈추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시기나 방향과 방법 등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리고 팀장과 팀원들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미션은 작년에 이어 올해에 다녀온 것처럼,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계속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물론 내년도 미션 2003을 어디로 갈지 아무도 모릅니다. 작년이나 올해에 갔었던 일본이나 중국이나 2년 연속 방문했던 피지로 다시 가게 하실지, 아니면 한번 갔던 곳을 더 이상 가지 않고 사할린으로 가게 하실지, 인도네시아로 가게 하실지, 대만으로 가게 하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믿기로는 우리가 미션 2001과 미션 2002를 준비 할 때, 하나님께서 전혀 기대하지 않은 분들을 우리 교회에 보내 주셔서 우리 미션팀을 인도해 주신 것처럼, 미션 2003도 하나님께서 준비시켜 주시고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지난 2년 동안의 미션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미션 2003을 갈 것입니다. 여러분! 미션 2002에 동참해 주신 것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고, 계속해서 내년도 미션 2003 준비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션 2003 사역지 선정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틈나는 대로 이미 돌아온 남태평양팀과 앞으로 돌아오게 될 중국팀의 선교보고를 더 자세히 듣는 시간을 갖기로 하고, 오늘은 “응답이 지연될 때”라는 제목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남동쪽 약 3Km 지점에 위치한 베다니 동네에 사는 나사로 가정입니다. 그런데 5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 마리아와 오라버니 나사로, 이 세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가정을 굉장히 아끼셨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이 정상적인 가정이 아닌 비정상적인 가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결손 가정이었습니다. 어떤 이유해서인지 모르지만, 부모님이 계시지 않고 세 남매만 살고 있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고아 세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가정에 슬픔이 닥쳐왔습니다. 오라버니 나사로가 병들어 눕게 되었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병들기도 하고 죽기도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것은 다른 가정과 달리, 이 가정에 큰 위기였습니다. 부모님 대신 두 동생을 돌보며, 가장으로 역할을 하며 모든 가정의 기업을 이어가던 오라버니는 이 가정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유일한 보호자였습니다. 믿음의 대상이었습니다. 기업 무를 자였습니다. 오라버니가 가장의 역할을 잘하면 이 가문이 다시 살아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기대가 오라버니 나사로에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오라버니가 병들어 죽게 된 것입니다. 이 가정에 피할 수 없는 절박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혹시 이러한 어려움과 위기에 처한 분이 이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까? 믿었던 가장이 쓰러지고 희망이 다 사라져 버린 채 좌절의 늪에 빠져 있는 분이 있지 않습니까? 아꼈던 친구가 배반하고 떠남으로 살 소망조차 없이 고민하고 있지 않습니까? 인생의 대사라고 하는 결혼문제의 벽에 부딪혀 위기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고민하고 걱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희망을 걸고 있었던 자녀가 문제를 일으키며 가정을 위기에 빠뜨렸습니까? 이러한 상황이 나사로 가정과 같은 상황입니다. 그러한 고난의 상황, 위기의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은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약5:13)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에서 징징 짜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고난 가운데에서 주저앉지 말고 강청하여 부르짖으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들은 예수님께 강청하였습니다. 오라버니가 죽게 된 절박한 상황에서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10장 40절에 의하면 ‘요한이 세례 주던 곳’, 즉 요단강 동쪽 베레아 지방에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베레아 지방은 나사로 가정이 있는 베나니에서 약 30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걸어서 만 하루 길이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는 오라버니를 살리기 위해 만 하루 길에 떨어져 계신 예수님께 사람을 통해 전갈을 보내었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무슨 말입니까? 빨리 와달라는 것입니다. 오라버니가 죽게 되었는데 오셔서 고쳐 병을 고쳐 달라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이 전갈을 받는 즉시 자기 집으로 오실거야. 그리고 능력으로 우리 오라버니를 살려주실 거야“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이 자신들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각별한 사이로 자신들을 사랑해 주시고, 자신들의 가정을 돌보아 주시던 예수님이시기에 즉시로 오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셔서 자기의 오라버니를 일으켜 세워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6절을 보면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도 곧바로 병든 나사로에게 오신 것이 아니라,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두 자매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지만,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오라버니 나사로는 결국 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슬픔 가운데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오라버니의 장례식을 치루었습니다. 오라버니의 시체는 당시의 관습에 따라 굴속에 넣어두고 입구를 큰 돌로 막아놓았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상황에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아마 예수님으로부터 외면당했다는 생각으로 심한 좌절감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예수님과 우리가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서로 잘 아는 사이였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정말 믿었는데 예수님도 너무 하시지’하며 심한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얼마나 예수님이 원망스럽게 느껴졌겠습니까? 21절을 보십시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32절에 보면 동생 마리아도 언니처럼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이것을 쉽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진작 오시지 않고 주님 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좀더 일찍 오셨으면 우리 오빠가 죽지 않았을 텐데 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언니 마르다와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불평이었습니다. 항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릅니다. 이사야 55장 8절과 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마리아나 마르다가 “빨리 오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오라버니가 죽기 전에 오셔서 오라버니의 병을 고쳐 주세요”라고 부탁을 했지만, 주님은 달랐습니다. 곧바로 가지 않고 이틀을 지체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예수님께서 이틀을 더 지체했을까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첫째로,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능력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죽은 그를 기적적으로 살리면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만방 가운데 증거되며, 결국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마르다와 마리아가 보낸 사람의 전갈을 듣고 주님께서 즉시로 가서 병들어 누워있는 나사로의 병을 고쳐 주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할까요? 기껏해야 예수님을 단지 병을 고치는 의사정도로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사람들 마음속에 ‘나사로의 병이 나을 때가 되었기 때문에 나사로의 병이 나은 것이지 예수가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한다고 나사로의 병이 나았나?‘라는 불신앙적인 반응들을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이러한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이틀을 더 지체한 후에 나사로가 죽은 후, 그것도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송장 썩는 냄새가 물씬 풍겨나는 무덤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만방 가운데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무슨 이유 때문에 우리 삶 가운데 어려움이 있습니까? 어떠한 이유로 문제가 풀리지 않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그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내기 위해서 입니다. 더 큰 역사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므로 인생 가운데 어려움과 역경이 찾아 올 때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게 나를 쓰시려고 이러한 고난을 허락하시는가?’라고 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영광을 주시려고 이러한 일들을 허락하시는가?’하며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당신의 크신 능력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응답을 지체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굳세게 해주시기 위해서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굳세게 해주시기 위해서 응답을 지체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 한국 말 속담에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처럼, 응답이 지연 될 때 믿음이 강화됩니다. 14절과 15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예수님께서 병든 나사로에게 곧바로 가시지 않고 지체함으로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 뿐 아니라, 마리아 그리고 마리다의 믿음이 단단해 졌습니다. 주위에 있는 제자들도 자기들 눈앞에서 벌어진 역사를 보고 믿음이 부쩍 커졌습니다.
이번에 미션 2002 남태평양팀이 피지에 가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도 걷지 않던 자매들이 하루 종일 정글 속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잠도 푹신푹신한 침대가 아닌 맨 바닥에서, 그것도 사방이 제대로 막혀 있지 않은 뻥 뚫린 교회당 바닥에서 잠을 잤습니다. 뜨거운 뙤약볕에서 햇빛을 받으며 행군했습니다. 발바닥이 아프고 무릎이 아파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에 이르기까지 고생하며 걸었습니다. 중국팀도 정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48시간도 더 넘게 기차를 타고 이동하기도 했습니다. 공안원의 도청과 감시를 피해 조심했습니다. 탈북한 북한 아이들과 함께 지내기도 했습니다. 살인적인 추위 속에서 너무 추워 코피가 나고 그 코피가 멈추지 않음에도 코피를 막아가며 사역을 했습니다. 이렇게 남태평양팀이나 중국팀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남태평양팀의 우리 지체들이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우리가 선교하러 갔지만, 우리가 선교훈련을 받고 돌아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팀원은 “저는 평생 동안 피지에서의 6박7일을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팀원은 “이제 내가 돈벌어야 할 이유를 알았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팀원은 “이제 평생 동안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살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기 까지 했습니다. 또 중국팀 몇 분과 통화를 했는데, 감기 걸려 코맹맹이 소리하는 팀원들이 있어 “감기에 걸렸군요. 고생 많이 했습니다”라고 위로하는 말을 했더니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아니 예요. 목사님! 고생이 아니라 정말 많은 것을 느끼고 많은 것을 배우고 왔어요. 선교 보내주셔서 감사해요”라고 말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저는 이번 선교에 다녀온 우리 미션팀을 보면서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교를 통해서 우리 선교팀의 믿음을 크게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 믿음이 부쩍 커져서 돌아왔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쉽게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왜요?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우리를 강한 자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해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뜸을 들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응답이 지체되어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응답이 지연될 때에도 우리의 믿음이 한 단계 엎그레이드 될 것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 하기 위해서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 응답을 지체하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약간 아픈 자를 고칠 때와 완전히 죽은 자를 살릴 때, 둘 중 어느 때에 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까요? 말하나마나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실 때, 사람들에게 더 영향을 미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섞은 냄새가 물씬 나는 나사로를 살렸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45절을 보면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사로 한 사람의 고난을 통해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원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다른 사람을 살릴 수 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실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에 왼손을 다친 이유를 과거에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장난기 많고 모험심 많은 아이의 실수로 손을 다친 줄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철이 들고 믿음이 생기면서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도구로 저의 다친 왼손이 쓰여 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래 맞아. 하나님의 허락 없이 내가 손을 다친 것은 아니야. 나를 통해, 나의 왼손을 통해 하나님께서 쓰시려는 목적이 있었던 거야” 결국 저의 다친 손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핸디캡과 단점을 통해서도 수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과 역경도 후에는 불신자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는 간증이 될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믿음으로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우리의 생각과 달리, 주님께서 늦게 오신다 할지라도 주님을 원망하지 말고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응답이 지체되는 것 같아도 불평하지 말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영화로도 제작되어 전세계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소설은 마가릿 미첼이 썼습니다. 원래 그녀는 처음부터 인기 있는 작가가 아니었습니다. 남북 전쟁 때 종군 기자였던 미첼은 전쟁터엣 부상을 당하고 고향 애틀란타로 돌아와 휴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휴양 기간에 구상한 작품이 바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소설이었습니다. 그가 5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완성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 작품을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미첼은 낙심하지 않고 여러 출판사를 찾아다니며 자신의 작품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성과도 없이 7년 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에 “뉴욕의 대출판사인 맥밀란의 사장 레이슨이 애틀란타에 왔다가 기차로 돌아간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기사를 본 미첼은 원고 보따리를 가지고 역으로 달렸습니다. 그리고 막 기차에 올라타려는 레이슨 사장에게 원고 보따리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장님, 이것은 제가 쓴 소설인데 읽어보시고 관심이 있으시면 연락 주십시오.” 그러나 기차에 오른 레이슨 사장은 원고 보따리를 기차 선반위에 집어 던지고 관심조차 두지 않았습니다. 기차를 타고 두 시간쯤 갔을 때, 여객 차장이 전보 한 장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레이슨 사장님, 원고를 읽어보셨습니까?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첫 페이지라도 읽어 주십시오. 미첼 올림.” 레이슨 사장은 전보를 받고나서도 그 원고에 아무 관심도 두지 않고 두 시간쯤 갔을 때, 또 다시 같은 내용의 전보가 날아왔습니다. 그래도 레이슨 사장은 관심조차 두지 않았습니다. 그 후 또 두 시간이 지난 후 세 번째 전보가 배달되었습니다. 그제 서야 레이슨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썼길래 이 야단인가?’하고 원고 보따리를 풀어서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독서는 기차가 뉴욕역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진통을 겪은 끝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소설이 출간되었고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급기야는 영화로까지 제작되는 불후의 명작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만약 미첼이 심혈을 기울여 소설을 완성했다할지라도 출판하고자 하는 노력을 중도에 포기했었다면 그의 작품은 책 제목처럼 이 세상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졌을 것입니다.
여러분! 힘이 드십니까? 응답이 더디다고 생각됩니까? 조금 더 인내하십시오. 포기하지 말고 한 번 더 기도하십시오. 주님은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야고보서 5장 11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어떠한 사람을 복되다고 하십니까? 인내하는 자를 ‘복되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자비하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시기에 인내하는 사람을 복되다고 인정하시고 그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그러므로 응답이 지체될 때도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커다란 변화가 나타나지 않아도 믿음으로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믿는 자가 주님의 역사를 봅니다. 40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여기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순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보여 주면 믿겠습니다. 기적이든 뭐든 보여 주면 믿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먼저 믿으라!“고 가르칩니다. ”믿으면 역사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으면 우리가 영광을 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신년 초 저희 교회에 오셔서 말씀을 증거 해주실 이오규 목사님께서는 참으로 귀한 은사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은사를 주셔서 내적 치유 사역과 함께 신유사역을 하십니다. 저도 시드니에서 보내 온 비디오를 직접 보았는데, 짧았던 한 쪽 팔이 정상적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한 쪽 다리가 짧아 어려움을 당하던 분의 다리가 똑같이 되기도 하고, 오랫동안 허리로 고생하던 분의 허리가 펴지기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목사님의 집회에서 특별히 이빨이 금이빨로 변하는 신기한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곳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가는 곳마다 신기한 역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서울과 각 지방, 그리고 해외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시드니에서도 일어났고, 또 이목사님께서 시드니에서 사역하셨던 비디오를 본 브리스베인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그러한 역사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소문이 많이 퍼졌습니다. 오죽하면 저희 교회 성도님들이 제가 알기도 전에, 이러한 소문을 브리스베인으로부터 듣고 나서 “목사님! 브리스베인에 있는 어떤 성도는 이빨이 금이빨로 변했다고 하는데, 그 목사님 우리도 초청하면 어떨까요?“라고 저에게 말씀을 해주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물론 다른 현상과 달리 이빨이 금이빨로 변하는 현상은 성경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매우 민감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길은 없지만,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고치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안에 두통, 신경, 류마티스, 관절염 뿐만 아니라, 이가 아픈 치통이 들어갈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금이로 바뀌어지는 것도 주님의 치유 사역 가운데 한나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일반적인 의학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일어난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에 어러한 신기한 일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내적치유 세미나는 다른 신유집회나 치유집회와 달리, 말씀을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모든 회중들이 내적치유 세미나 교재를 가지고 직접 말씀을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말씀을 기준으로 사역을 합니다. 일반적으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되는 시시껄렁한 부흥사들과 다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기한 역사가 나타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두 가지입니다. 한 가지 부류는 “이빨은 절대로 변할 수 없어, 내가 알고 있는 의학상식으로는 절대로 이빨이 금으로 바뀔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한 부류는 ”하나님의 능력이 부어진다면 이빨 하나 금이빨로 바꾸지 못하겠습니까? 이빨이 금이빨로 바뀔 수 있음을 믿습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이목사님께서 저에게 이메일을 보내면서 강조하시는 것이 ‘믿음’이었습니다. 이목사님께서 이러한 요지로 저에게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이빨이 변하는 것을 보고 거부감을 나타내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크라이스트처치순복음교회 성도님들이 거부감을 가지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나님의 신기한 표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리 개인별로 자신의 이빨을 살펴보기 위해서 손거울과 랜턴을 준비하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입니까? 믿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이 결국에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 다시 살아난 기적의 현장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비록 나의 기도에 우리 가족의 기도에, 우리 교회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을 곧바로 해주시기 않는다 할지라도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당장 응답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좋은 길을 예비하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백성은 넘어져도 은혜요, 일어서도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전진해도 은혜요, 후퇴해도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즉시 응답을 받아도 은혜요, 즉시로 응답이 오지 않아도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떠한 장벽이 앞에 놓여 있어도 어떠한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어도 좌절하지 말고 믿음으로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원망과 불평을 입술에서 제하여 버리고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