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피로스 에른하임 폰 스텐베르그
붉게 물든 하늘, 그리고 그 공허한 공간을 채우려 밀려드는, 그러나 미치지 못하는 힘에 역시 그 붉음에 잠식되어 버리는 구름, 그리고 또 마치 그 붉은 창공을 휘저어 놓으려는 듯 그 틈새를 마구 파고드는 새카만 연기.
황혼에 젖은 붉은 대지,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붉은 무언가에 물기를 머금은 슬픈 대지. 그리고 그 위를 뒤덮은 슬픈 영혼들.
그리고, 그리고··· 그들의 꽃피우지 못한 슬픈 추억의 노래.
-크아아악!
-우와아아!
-어머니!
-······.
이 곳은··· 이 곳은······.
“세피로스-!”
터억-
누군가의 거친 손길이 나의 어깨를 강타했다. 이 곳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투박하고 끈끈한 느낌, 그러나 익숙한, 너무나도 친근한······.
“정신차려! 세피로스!”
뭐라고 하는 건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다. 이렇게, 바로 내 앞에서, 나의 눈을 바라보며 커다란 소리로 외치고 있는데도 들리지 않는다.
엘, 대체······.
“세피로스-!”
쉬잇- 퍼억-!
“컥-”
벗의 손길보다도 더욱 투박하고 묵직한 느낌이 오른쪽 어깨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다. 무언가 이질적인 것이 내 몸속으로 들어온 느낌이다.
잠시간 통증이 일었다. 하지만 희안하게도 더 이상의 고통은 없다. 거부감도 없다. 아니, 오히려 친숙한 느낌이 들기도······.
“세피로스-!”
“허억, 허억······.”
이상하다. 내 머릿속은 너무나도 투명한데, 그저 스쳐가는 바람소리만으로도 혼탁해질것만 같은데, 내 팔이, 내 손이, 내 손가락이······.
한번 몸을 크게 휘저으며 엘의 품으로 무너져 내렸다. 엘은 언젠가 내앞에서 사랑스럽게 안아들던 그녀를 대하듯 두 팔을 크게 뻗어 나의 몸을 받아 들었다. 포근하고 따스한 느낌. 마치··· 아버지의 품속 같다. 질식할 것만 같은 따스한 느낌.
“쿨럭, 쿨럭, 케엑-”
선홍색 액체를 한움큼이나 토해냈다. 길게 늘어뜨렸던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며 내 볼에 달라붙는다. 언제나 자랑스럽게 여기던 내 은빛 머리카락은 땀과 피에 뒤섞여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가 좋아하지 않을텐데······.
“세피로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엘, 그의 까만 눈동자가 보인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 그 깊이를 알 수 없을만큼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처음, 처음 그 허름한 주점에서 그에게 반했던 건 엘의 저 눈 때문이었다. 후훗-
“케엑, 켁-”
어지럽다. 눈가가 흐릿한 게 안개라도 낀 게 아닐까. 방금전까지 황혼을 보고 있었는 데,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엘의 등 뒤 머나먼 곳. 황금빛사자문양의 기가 펄럭이고 있다. 아름답다. 붉은 햇살 아래 마치 실루엣처럼 아른거리는 푸른 깃발.
그것은··· 바로 나다.
“······!!!!”
“세피로스?”
“아··· 안돼······.”
붉은 대지 위에 당당히 버티고 서있던 푸른 기가 땅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인정할 수 없다. 용납할 수 없다. 이것은, 이것은···!!
“으아아아~!!”
“세피로스-! 그만둬!”
날 그대로 잠식시켜버릴것만 같던 그의 따스한 품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이대로, 무기력하게, 그의 품에 안식할 순 없다.
미친 듯이 달렸다. 너덜거리는 슈츠 사이로 돌부리가 파고 들어왔다. 하지만 이미 피투성이가 되버린 내발은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스스로 놀랄 뿐이다. 대체 나의 몸 어디에 이런 기력이 남아 있었던 것일까. 훗, 그런 건 사실 아무래도 좋다. 난 그저 저 언덕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되니까.
“헉, 허억······.”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정상에 다다랐다. 높은 곳으로 올라오니 라히티스 평원의 장관이 한 눈에 들어왔다. 어릴적, 아버지와 말달리며 뛰놀던 초원, 어머니와 산책하던 숲길, 누이와 물장구치던 시냇가······. 그 모든 풍경이 그대로다.
스윽, 푹-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처져 있던 기를 주워들어 다시 바닥에 꽂았다. 그리고 오른쪽 옆구리에 깃대를 끼워 몸을 지탱했다. 붉은 바람이 불어와 나와 깃대를 훑고 지나간다. 상쾌한··· 느낌이다.
콰악-
“세피로스-!!!!”
오른쪽 눈가로 알 수 없는 느낌이 밀려들어왔다. 이상한 느낌. 오늘은 참으로 이상도 하지. 어째서 이리 희안한 감각들만 느껴지는지. 나, 꿈이라도 꾸는 걸까.
앞은 온통 캄캄한데 그녀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그 속에서 빛나고 있다.
“넬······.”
잊혀져도 할 말이 없는... 연재 속도 극악의 글 T^T
|
written by Purerain.tears
|
첫댓글 그래도 항상 올려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ㅁ; 다음 이야기도 기대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