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 매상을 공치면서 마음의 공백이 공허로 이어지지자 운동, 글쓰기에 그림까지
릴레이 중이었는데 6시 쯤 매형이 바비큐 저녁을 준비했다며 픽업하러 왔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림 그리는 것이 더 낫고만 한 끼를 때울 겸, 핏줄에 대한 예의 차원
에서 군말하지 않았습니다. 불은 제가 피웠고 탄수화물이 빠진 식사를 잘 먹었습니다.
-
삼겹살 두 근, 목살 한 근, 꽃게 찜, 새우구이를 맥주 한 캔과 먹으면서 호사스런
식사라는 생각이 들었고 여수 누나가 낼 떠난다고 해서 하룻밤 더 자줬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부자 집 대형 스크린으로 보게된 "덕혜옹주"는 이것저것 볼거리가 많습니다.
작년에 27대 조선왕조를 정리한 터라 나름 역사적인 시각을 가지고 보았습니다.
-
감독이 누군지 몰라도 영화 참 잘 만들었습니다. 개봉영화 "부산 행, 인천상육작전,
터널, 밀정" 중에서는 제일 잘 만든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기대하고 보았던
“밀정”은 같은 대한독립만세라도 나하고 상관없는 만세인데 비해 “덕혜옹주”는 트랙이
도는 내내 숨겨놨던 애국심을 발동시키고 말았습니다. 역사 왜곡이다 뭐다 말들이
-
많지만, 육갑들 하지 말라고 하세요. 역사 왜곡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글들을
읽어보니 대부분 논리가 약해요. 역사란 완전한 검증이 불가능하다는 특성 때문에
무엇보다 겸손해야하고 수고해서 내 놓은 작품에 대한 경외감이 필요합니다.
작가 권 비영 씨를 잘 알지 못하지만 작가입장에서 작품은 자식 같은 것입니다.
-
그리고 우리가 아는 것처럼 글쓰기의 핵심이 정직성인 것을 가만 해야 할 것입니다.
좋은 작품을 써 준 작가에게 감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물론 영화 “덕혜옹주“의 감독과
배우들은 완전 칭찬 해주고 싶습니다. 손 예진, 박해일, 한 제문, 라미란을 캐스팅한
허진호 사단이 대박 나서 1,000만 까지 승승장구하기를 기대해봅니다.
-
배경 이해를 위해 순종에 대하여 조금만 언급하겠습니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제위에서 물러나자 그 뒤를 이어 순종이 제위에 올랐으며 (고종 양위 사건) 연호를
융희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정식 군주로 인정하지 않던 일부 세력은 그를 황제나
주상이라 부르지 않고 전각의 이름을 따서 창덕궁 전하라고 불렀습니다.
-
순종은 건강이 좋지 않았고 자식이 없었던 관계로 자신의 이복동생들 중에서 후계
자를 정해야 했습니다. 이복동생 중 나이가 어린 영친왕을 황태자로 봉하였습니다.
이복동생 중에는 의친왕도 있었고, 의친왕의 아들을 양자로 입양시켜서 황태자로
임명할 수도 있었는데 어떤 연유로 영친왕을 태자로 봉했는가의 배경은 미지수입니다.
-
이는 자신의 왕위를 계속 위협했던 이준용과 이강을 견제하려는 고종의 의도와 이 준용
파와 이강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로 보입니다. 이로써 장기간 해외 망명생활 중에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
대우와 주목과 견제를 받아왔던 이준용과 이강은 졸지에 순종의 동생이자 황태자의
-
숙부라는 지위로 격하되었습니다. 즉위한 해인 1907년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대원왕으로 추봉하였습니다. 한일신협약을 체결이후, 일본인의 한국 관리
임용을 허용하여 사실상 국내정치는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8월 1일에는 다시 일본의 압력으로 한국군을 해산하였으며, 12월에는 의민황태자가
-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고,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을
허가하여 경제침탈의 길을 열어주게 되었습니다. 1909년 일본은 한국의 민정을
살펴가며 국권탈취공작을 추진하여 7월에 군부를, 10월에는 법부를 각각 폐지하여
정치조직을 통감부 기능 속에 흡수하였습니다.
-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본국으로 간 뒤, 소네 아라스케를 거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후임으로 오면서부터 더욱 야욕을 드러내자, 각지에서 나라가 망함을 통탄하고
조정 대신들의 무능을 비난하며 암살을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동년 10월 안중근에 의하여 이토가 암살되고 12월 이완용이 습격을 당하였습니다.
-
그러나 위태위태하던 이씨 왕조는 1910년 8월 29일 27대 519년 만에 망하고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일본은 순종을 창덕궁에 머물게 하고, 이왕(李王)이라 불렀습니다.
고종의 일곱째 아들인 영친왕은 순종이 즉위한 뒤(1907)에 황태자가 되었고, 순종이 죽자
(1926)왕의 지위를 계승한 후, 1907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왕족인 마사코와 정략결혼을
-
하였으며, 일본 왕족으로 대우를 받으며 일본군 장성을 지냈습니다.
이복형인 순종이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황위에 올으자 태자가 되었다가 순종이 죽은 뒤
제2대 이씨 왕으로 즉위한 것입니다. 정통성 문제는 순종으로 끝났지만 일본에 의해
황태자가 된 뒤에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를 후견인으로 삼아 일본으로 건너가
-
생활했으며, 1911년 일본의 육군 유년학교에 입학하였고, 1920년 일본의 왕족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한국이름 이방자)와 결혼하여 이듬해 아들을 낳았으나, 첫째아들인
이진은 1922년 한국을 방문하던 중에 죽었습니다. 1931년 둘째아들인 이구를 낳았고,
일본 육군 장교로 복무하여 1940년 육군 중장이 되었는데 일본의 패망 후 예편합니다.
-
그리고 1947년 일본 헌법이 시행되면서 이왕의 지위를 상실했으며, 그해 10월 18일에는
일본 왕족의 명단에서도 제외되어 일본 국적도 잃었습니다. 영친왕은 상해임시정부로의
망명까지 추진하며 반일정신을 고수한 의친왕 이강을 제치고 일제의 영향으로 황태자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친일에 대한 태생적 약점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
그래서 영친왕의 한국으로의 귀환은 반대에 부닥쳐 실현되지 않았으나, 결국 1957년
일본 국적을 취득하였고, 미국으로의 이민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들인
이구의 대학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959년 3월 뇌경색으로
-
쓰러진 뒤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다 5ㆍ16군사정변이 일어난 뒤인 1962년
12월 15일 한국 정부에 의해 영친왕 부부의 대한민국 국적 회복이 고시되면서 이듬
해인 1963년 11월 22일 병세가 악화된 상태에서 한국으로 귀국합니다. 그 뒤 병상에
있다가 1970년 5월 1일에 사망하여 고종이 묻혀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
-
능에 안장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덕혜옹주는 고종의 고명딸인데 정실인 명성
황후가 죽고 후궁에게서 낳은 자식입니다. 외로운 아비에게 늦둥이는 목숨일 것입니다.
8살의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고종 황제의 죽음은 일제의 독살이라고 믿었던 그녀는
순종 황제의 명령에 의해 영친왕에 이어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
대한제국의 황녀로 태어나 어찌 일본으로 유학을 가고 싶었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도 어머님이 살아계시는 자신의 조국에서 살아가고 싶었을 것
입니다. 조국은 차치하더라도 14세의 나이면 엄마가 필요한 나이가 아닙니까?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간 덕혜옹주는 영친왕과 그의 부인 이방자가 거처하던 집에서
-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 어렸을 적 만났던 독립운동가의 자손 김장한(배우
박해일)을 만나게 됩니다. (김 장환은 실존 인물인 김 을한입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독립 운동가를 꿈꾸는 청년이 아닌 일제의 군복을 입은 장교로 그녀 앞에 나타납니다.
물론 이중 첩자입니다. 고수 씨가 이우 왕자 역을 맡았는데 잘 어울립니다.
-
이우 왕자는 영친왕과는 다르게 결혼은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과 결혼을 함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내보이기도 했다고 하는데 원폭 투하 때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역사왜곡이라고 말하는 분들의 내용에 대해 궁색하지만 반박을 해보겠습니다.
영친왕이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는 부분은 한 나라의 왕족이 나라를 잃고 호강을 했으면
-
얼마나 했겠습니까? 저는 형님 생활을 할 때 내가 돈을 내지 않는 접대를 받은 적이
있는데 공짜고 뭐고 한 시도 그곳에 있기가 싫었습니다. 하물며 왕인데 내 존재감이
없는 부귀영화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덕혜옹주 역시 어머니와 떨어진 채로 타국에서
어미의 운명 소식을 접하면서말 그대로 고아가 되는 상황임에도 과연 그녀를 비판할 수
-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역사바로세우기가 안 된 부분은 인정합니다.
극중 한택수라는 쳐 죽일 놈의 인간이 미군의 호위를 받으며, 자신이 고국으로 금의환향을
하게 되는 부분을 보면서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라도 열 받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줄 담배를 피워야 할 노릇이지만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한택수란
-
인물이 어디 한 둘입니까? 우리가 왕족이라고 생각해보자고요. 본인이 자진해서 일본으로
간 것이 아니질 않습니까? 부모가 나라 빼기고 가족들이 그렇게 짓밟히고 살았는데
왜, 아버지는 그 것 밖에 안 되냐고 하는 자식이 어디에 있답니까?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이 광수를 비롯한 문인들의 친일이 백일하에 들어난 것처럼 현제까지
-
수면 위에 들어나 있지 않은 많은 정치인들의 명단이 곧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멀지않았습니다. 제 생각엔 다음 정권이면 가능하다고 봅니다.
조국이 대한민국인 필자의 입장에서는 고종의 핏줄인 덕혜는 영친왕보다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쌍한 덕혜옹주는 무조건 끌어안아야할 우리들의 누이가 아닙니까?
오호 통제라, 오호애제라! 대-한-민-국
2016.9.23.fri.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