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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詩노래 `부용산`에 얽힌 이야기|詩,영화,문학
詩노래 '부용산'에 얽힌 이야기
부용산 - 박기동
부용산 오리길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부용산 봉우리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리움 강이 되어
이 노래는 작사자가 1947년경에 폐결핵으로 죽은 어린 누이동생을 부용산에 묻고 나서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작곡자 안성현이 해방 후에 월북을 하고, 후에 빨치산들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로 이 노래는 널리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부용산
詩 : 박기동
작곡 : 안성현
부용산 오리길(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부용산 봉우리(산 허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부용산에서/보성 벌교
- 나천수
보성 벌교 땅 부용산에는
누워있어야 할 누이는
1947년 요절한 누이의 주검을
누이를 잊은 지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누이가 보고 싶을 때마다
부용산 산허리는
사람들이 詩碑를 보러 가는지
2004년 2월12일 벌교에서
▲ 54년만에 누이동생이 묻힌 전남 벌교 부용산을 찾은 박기동 시인(우측) 가운데 여성은 부용산 작곡자 안성현님의 부인
타계한 `부용산' 작사 박기동옹
“빨치산 노래” 숱한 고초, 93년 호주이민 지난해 귀국 고향 벌교서 연극 등 재조명
자신이 만든 노랫말 `부용산'을 빨치산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로 숱한 핍박을 받으며 이역만리 타국을 떠돌아야만 했던 벌교출신 박기동 시인이 지난 5월 국내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이같은 사실은 부용산의 노랫말과 이데올로기를 조명한 연극이 박 시인의 고향 벌교의 한 무대에 올려지면서 알려졌다..
6일 벌교번영회 등 지역민들에 따르면 누이의 죽음을 애도한 `부용산'의 노랫말을 지은 벌교 출신 박기동 시인이 지난 5월9일 향년 88세를 일기로 서울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는 것. 그의 시신은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묘원 내 아내 옆에 안장됐다.
박 시인은 지난 93년 가족을 두고 호주로 이민을 떠나 시드니에서 주로 생활해오다 지병인 뇌경색이 악화돼 지난해 9월 아들(54^치과의사)이 있는 서울로 들어와 치료를 받아왔다.
벌교번영회 등 지역민들은 박 시인의 빈소를 찾아 박씨를 벌교읍내 부용산에 안장하고 장례를 벌교읍민장으로 치르는 문제를 논의했으나 성사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용산'은 박씨가 1947년 스물네살 꽃다운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한 누이를 부용산에 묻고 돌아와 쓴 시에 목포 항도여중에서 재직하던 안성현이 1년뒤 곡을 붙인 현대판 `제망매가'.
이 노래는 해방과 전쟁 이후 `폐허'라는 당시 상황과 어우러져 당대 최고의 히트곡이 됐지만 한국전쟁 때 작곡가 안성현이 무용가 최승희와 함께 월북한데다 당시 빨치산이 즐겨불렀다는 이유로 숱한 탄압을 받아야만 했다.
1957년 목포사범학교 국어교사를 끝으로 교직을 떠난 박 시인이 지난 93년 호주로 단신 이민을 떠나게 된 것도 가택수색과 연금^구금 등 가족 전체가 겪어야 했던 숱한 고난과 무관치 않다는 게 그를 아는 사람들의 지적이다.
박 시인은 지난 2000년 10월 부용산 노래비가 벌교읍 부용산 오리길에 세워지고 인기가수들의 음반에 실리는 등 재조명되는 상황 속에서 호주에 머무르며 시로 고국 및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온 것으로 전해졌다.
박 시인의 장남은 “아버님의 장례 이후 들춰본 시작 노트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들이 적지 않았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며 “`내가 태어나도 참 좋은 나라. 다시 태어나도 한국에서 살고 싶다'라는 시구를 유언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광주^전남 중견연극단체 보성공연예술촌 `연바람'이 제4회 벌교꼬막축제의 마지막 날인 6일 벌교제일고 운동장에서 부용산의 노랫말에 담긴 시대적인 의미와 아픔을 담아낸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이번 연극을 연출한 오성환(42)씨는 “지난 해 10월 충남 공주에서 열린 전국 향토연극제에 `부용산'을 무대에 처음 올렸는데 박시인이 숨져 안타깝다”고 말했다.
전남일보 김용재 기자 2005. 11.07
定說 '부용산'
김성우 에세이 /한국일보 1998. 3. 28.
이런 반응속에 커다란 볼멘소리가 섞여나왔다. '부용산'이 목포의 노래로 주장된 데 대해 전남 보성군 벌교읍 쪽에서 이것은 벌교의 노래라는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작사자 박기동 씨가 벌교사람인데다 부용산은 벌교에 실재하는 산이고 노래의 주인공은 작사자의 목포 항도여중 제자가 아니라 벌교의 친누이동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벌교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이 곡을 고향의 노래처럼 합창한다고 한다.
'부용산'이 벌교의 노래라는 뒷받침으로는 광주에서 발행되는 '예향'이라는 월간지가 94년에 쓴 기사가 있다고 한 독자가 알려주었다.그 잡지를 구해 보니 현재 전남 순천 낙안의 금둔사 주지로 있는 知虛스님의 증언을 빌려 '부용산'은 작사자가 16세 때 죽은 그의 누이동생을 벌교의 부용산에 묻고 돌아오면서 가사를 지은 제망매가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지허스님의 전언은 출처가 불분명하다.
'부용산'의 본향을 다시 찾아나설 수 밖에 없다. 5년전 호주로 이민 가서 시드니에 살고 있는 박기동 씨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올해 81세인 그의 육성증언의 내용은 이러하다.
박씨는 전남 여수의 돌산이 고향이다. 일본의 간사이(關西)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1943년 귀국해 벌교의 남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해방이 된 이듬해 벌교상업중학교로 옮겨 국어와 영어를 가르쳤다. 이무렵 아버지가 벌교로 이사와 있었다. 1947년 박교사는 새로 설립된 순천사범학교로 전근했다. 이 해에 큰 누이동생인 박영애가 순천 도립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죽었다.
누이동생은 심성이 곱고 얼굴도 예뻐 천사같다고 소문나 있었다. 1941년 18세 때 벌교로 시집을 갔고 죽은 것은 24세 때였다. 30세이던 박교사는 벌교의 부용산에 누이동생을 장사 지내고 돌아와 순천에서 '부용산'이라는 시를 썼다.
이듬해인 1948년 박교사는 목포의 항도여중으로 초빙되어 갔다. 여기서 안성현이라는 음악교사를 처음 만났다. 안교사는 극단적인 낭만주의자였다. 이때 항도여중 3학년에 김정희라는 학생이 경성사범에서 전학해 와 있었다. 특히 문예방면에 소질이 뛰어난 천재소녀였다. 조희관 교장 말이 이 학생에게 국어를 가르칠 선생이 없어서 박교사를 모셔왔노라 했다. 이 해에 이 아까운 소녀가 폐결핵으로 죽었다. 박교사는 장지까지 따라갔다.
얼마 뒤 서랍 속에 넣어둔 박교사의 시작노트를 안교사가 몰래 가지고 가서 곡을 하나 붙여 왔다. 그것이 '부용산'이었다. 박교사는 맨 끝 구절인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를 상여 나가는 소리로 만들자고 조언했다.
'부용산'은 노래를 잘하던 배금순이라는 상급반 학생이 맨처음 불렀고 금방 전남 일대로 유행해 나갔다. 나중에는 전혀 사상성이 없는 노래이면서도 지리산 빨치산들의 애창곡이 되기까지 했다.
곡이 나오자 학생들이 수근거렸다. "박선생님이 정희의 무덤에 가서 울었단다"하는 소문이 퍼졌다. 박교사는 그 때 아직 총각이어서 여학생들한테 인기있는 선생이었다. '부용산'의 주인공이 정희라는 설은 이래서 와전된 것일 것이다. 박씨의 카랑카랑한 전화 목소리는 여기서 끝난다. 작사자 본인의 토로이니 제망매가설을 정설로 굳힐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말의 의문은 남는다. 누이동생이 결혼까지 하고 24세에 죽었다면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라는 구절은 어색하지 않은가. 박씨는 "시를 미처 다듬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예향'이라는 잡지에는 항도여중 때 김정희의 단짝친구로 '부용산'의 哀弟子曲설을 내세운 경기대 김효자 교수의 기고도 실려있다.
김교수는 이 글에서 박교사가 누이를 묻고 읊은 시가 '부용산'이라고 해명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부용산'은 우리에게 의당 사랑하는 친구 정희를 애도하는 노래였다. 부용산이 어디 있은들 무슨 상관이랴. 그것은 차마 일찍이 잃어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운 사람이 묻힌 상징적인 산일 뿐이다"라고 썼다.
'부용산'은 '향수'의 가수 이동원이 곧 취입을 한다고 하고 벌교에서는 노래비도 세울 것이라고 한다. '부용산'이 어디 것인들 무슨 상관이랴. 차마 잃어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운 노래 하나를 만 50년만에 살려 널리 불려지게 할 수 있다면 족할 뿐이다.
부활의 노래 '부용산 오리길에'
글-최성환 1999. 12. 목포문화사랑. 특집
'부용산'은 48년 목포지역을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에서 크게 유행했던 노래로 작곡자가 월북하고 빨치산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로 우리 곁에서 영원히 사라질 뻔했던 이 노래가 50여 년이 흐른 지금 다시 부활하게 되기까지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를 정리해본다.
'부용산'은 어디에 있는가?
부용산은 전남 벌교에 있는 해발 95M의 조그만한 산이다. '부용산'이라는 시(詩)를 쓴 박기동은 그의 나이 10세 때 여수에서 벌교로 이사와서 살게되었었다. 1947년에 이르러 그의 친누이인 박영애가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폐결핵에 걸려 사망하자, 박영애의 시댁 식구 몇명과 함께 이 곳 부용산에 그를 묻었다. 그날 부용산 오리길을 내려오면서, 살아남은 오빠의 애절한 마음을 시(詩로) 만든 것이 '부용산'의 출발이다.
작사가 박기동은 어떤 인물일까?
1917년 11월 28일생인 박기동은 한의사였던 아버지 박준태의 덕에 비교적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14세의 어린 나이에 일본유학을 가게되었다. 그곳에서 중학교를 마친 후 관서대학에 진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하는데 이때 우리말의 소중함을 인식하게 되어 시인이 되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귀국 후 교편을 잡으며 문학적 감성을 후학들에 가르치는데 열성을 쏟지만, 부용산이라는 노래가 좌경계열의 시로 낙인찍히면서 한 곳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굴곡의 연속인 삶을 살게 되었다. 80년대에까지 가택수사 등 감시와 얽매임을 받았던 그는 결국 한 많은 조국을 등지고, 호주로 이민을 떠나 현재 6년째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 7평 남짓한 임대주택과 호주정부로부터 받는 월 연금40만원이 전부인 그의 가난한 삶에는 아직 희망찬 두 가지 미래가 남겨져 있다. 하나는 죽기 전에 개인 시집과 수필집을 발간해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버린 조국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가겠다는 신념이다. 다음은 그의 주요 경력이다.
44년 벌교초등학교(교가작사)에 부임. 교편생활을 시작.
노래로 만들어진 '부용산'
당시 목포항도여중(현 목포여고의 전신)에는 김정희(1931.10.1∼1948. 10.10)라는 학생이 있었다. 그는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했던 수재로 해방이 되자 고향인 목포로 전학을 왔으며, 당시 교장이었던 소청 조희관 선생이 김정희학생을 가르킬 만한 사람이 없어서 박기동을 불러왔다고 자주 이야기했을 정도의 천재적인 소녀였다. 또한「감화원 설계」라는 글로 전국글짓기 대회 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문학적 감수성도 뛰어난 학생이었다. 그가 요절하자 전교생이 슬퍼하였으며, 음악담당이었던 안성현 선생이 박기동의 시작노트 중 '부용산'을 보고 곡을 붙여 노래로 불려지게 되었다. 이 곡은 학교 교정을 넘어 목포를 비롯한 인근 지역에 빠르게 전파되었으며, 비슷한 정서를 가지고 있는 벌교에서까지 애창되었다.
작사가 박기동은 원래 시에는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분이 다르게 표현되어 있었는데, 노래로 만들면서 약간의 수정을 직접 하였다고 한다. 또 곡의 뒷부분 '푸르러 푸르러'를 상여 나가는 소리처럼 들리게 처리하자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노래를 만든 안성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동경음악학교를 나왔으며, 성악가이자 작곡가였는데 당시의 제자들은 낭만적이고 인간미가 넘치는 미남선생님으로 피아노를 매우 잘 쳤다고 회고하고 있다. 합창단을 직접 지도하며, 노래 집을 만들고 1년에 두 차례씩 발표회를 갖기도 했던 안성현은 제자 김정희의 장례가 있은 지 얼마 안돼 이 노래를 만들었는데, 자신의 누이동생의 죽음에 관해서는 잘 몰랐을 것이라고 박기동은 회고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던 이 곡이 어느 순간 잠잠해지기 시작한데는 작곡가 안성현이 월북했다는 데 중요한 원인이 있다. 그는 동경유학시절 만났던 무용가 최승희의 "북은 예술인의 천국이다" 라는 말을 듣고 그를 따라 북으로 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국립교향악단장을 지냈다는 소문이 있을 뿐 현재로서 그의 행방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당시에 그가 만들었던 11곡의 음악이 담긴 작곡집이 전해오는데,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어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을 엿 볼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젊은 학생들의 불타오르는 음악 열에 알맞는 곡을 만들어주느냐 하는 것이 해방 후 나의 과제였다.…(생략)"
부용산은 금지곡이었나?
한동안 '부용산은 금지곡이다'라는 이야기가 많았지만, 공연윤리위원회에 따르면 이 노래가 금지곡 명단에 들어간 적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이노래가 이데올로기의 피해가 심각했던 우리사회에서 좌익계열의 음악으로 주목받게 되자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부르는 것을 조심스러워 했을 것이다.
실제 빨치산들이 불렀었나?
빨치산의 음악은 아니지만, 빨치산들이 애창했던 것은 사실이다. 당시 빨치산 활동을 했던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서정적인 멜로디와 가사가 자신들의 처지를 노래하는 것처럼 가슴에 와 닿아 즐겨 불렀다고 한다.
51년만의 2절 가사 탄생
애절한 가락이 가슴을 파고드는 이 노래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 호주에 거주하고 있는 작사자 박기동씨를 직접 찾아 간 연극인 김성옥(목포에서 부용산 음악회 개최)가 2절 작사를 제의, 그가 수락함으로써 2절을 완성할 수 있었다. 박기동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들이 오래가지 못하고 빨리 사라지는 슬픔을 소재로 2절의 가사를 지었으며, 마지막은 인생무상의 감정을 느끼는 자신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80평생에 단 두 번 밖에 울어 본 적이 없다는 그도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에 서 있으니' 부분을 지으면서 30여분 책상에 앉아 울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다시 불리워질 부용산
가수 안치환에 의해 97년 처음 음반으로 정식 발표된 이 노래는 그동안 구전으로만 전해와 상당부분의 가사와 박자가 변형되어 있었는데, 항도여중 출신 경기대 김효자 교수(93년 동국대 철학과 정교수로부터 동문회모임을 통해 건너받게 되었다고 함.)가 작곡집을 보관하고 있음이 알려지면서 원곡의 악보와 가사가 밝혀지게 되었다.
또 지난 5월 29일 목포에서 열린 부용산 음악회를 시작으로 벌교에서도 6월 26일에 부용산 음악발표회를 가졌으며, 9월에는 부용산에 기념비와 기념누각을 세우기도 하였다.
과거 부용산이라는 노래가 유행하게 된 모태가 된 두 지역에서의 이러한 노력을 필두로 부용산은 다시 대중의 곁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몇몇 지역의 노래가 아닌 같은 시대 같은 정서를 가지고 살아갔던 한국인 모두의 노래로 발전되어 가기를 바래본다.
부용산의 시인 박기동
kbs라디오, 서해안시대 서해안 인물열전(04.07.1)
서해안이 배출한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 살펴보는 서해안 인물열전, 오늘은 광복후 전라도 일대에서 크게 유행했던 노래 '부용산'과 그 노랫말을 만든 시인 박기동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제20회 부용산의 시인 박기동
진행: 최성환
시를 쓴 박기동은 어떤 분인가?
시인이자 번역문학가로 활동했던 분이라고 하겠는데, 서해안 인물열전에서 소개하는 인물 가운데서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분이다. 지난 시간에 소청 조희관 선생을 소개하면서 조희관 선생이 항도여중(지금의 목포여고 전신)에 교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부용산이라는 노래가 유행을 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잠시 언급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직까지도 구전가요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노래인데, 그 부용산이라는 노래에 나오는 원 가사를 시로 만든 분이 바로 박기동 선생입니다. 부용산이라는 노래와 함께 참 우여곡절이 많은 생을 사셨고, 현재 호주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박기동 선생이 '부용산' 노래의 작사가인 셈인데, 선생의 간단한 약력부터 살펴보죠?
1917년 11월 28일생인 박기동 선생은 전남 벌교가 고향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작은 섬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한의사였던 아버지(박준태) 덕에 비교적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14세의 어린 나이에 일본유학을 가게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중학교를 마친 후 관서대학에 진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하는데 이때 우리말의 소중함을 인식하게 되어 시인이 되기로 결심하였다고 합니다. 귀국 후 교편을 잡으며 문학적 감성을 후학들에 가르치는데 열성을 쏟지만, 공교롭게도 '부용산'이라는 노래가 좌경계열의 노래로 낙인찍히면서 한 곳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굴곡의 연속인 삶을 살게되었습니다. 80년대까지도 가택수사 등 감시와 얽매임을 받았던 그는 결국 한 많은 조국을 등지고, 1993년 호주로 이민을 떠나 현재 호주 시드니 거주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부용산이라는 노래는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는데, 어떤 곡인지 소개?
부용산은 1948년에 목포에서 만들어졌고, 이후 널리 애창되었던 곡입니다. 작곡을 했던 안성현이라는 분이 월북하고 나중에 빨치산이나 민주화운동세력들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로 금지곡 아니 금지곡이 되어 공개적으로 부르지 못했던 노래입니다. 그러나 노래 자체가 가지고 있는 생명력이 매우 강해서, 단절되지 않고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구전가요로 지금까지 전해 내려져 왔습니다. 구전으로만 전하다 보니 노래에 얽힌 여러 가지 사연과 추측들이 생겨났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에 부용산 노래 원본이 발견되고, 실제 작사가인 박기동 선생이 호주에 살고 계신다는 것 등이 밝혀지면서 노래에 얽힌 사연들이 하나 둘 확인되기 시작하였고, 지역민들의 관심이 고조되면서, 부용산 시비와 노래비가 세워지고, 음악회가 열리고, 관련 책도 발간되기도 하였습니다.
목포에서 '부용산'이라는 노래가 탄생하게 된 남다른 배경이 있다는데?
당시 목포항도여중(현 목포여고의 전신)에는 김정희(1931.10.1∼1948. 10.10)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그는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했던 수재로 해방이 되자 고향인 목포로 전학을 왔으며, 당시 교장이었던 소청 조희관 선생이 김정희학생을 가르킬 만한 사람이 없어서 박기동 선생을 항도여중으로 불러왔다고 자주 이야기했을 정도의 천재적인 소녀였습니다. 김정희라는 학생은「감화원 설계」라는 글로 전국글짓기 대회 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문학적 감수성도 뛰어난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학생이 요절하게되자 전교생이 슬퍼하였으며, 음악담당이었던 안성현 선생이 박기동의 시 '부용산'에 곡을 붙여 노래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구전상으로는 학생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박기동 선생이 시를 지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사실은 그 이전에 본인의 누이동생을 위해서 부용산이라는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구전되어 오는 내용과는 달리 박기동 선생이 부용산이라는 시를 지은 것은 누이동생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어떤 사연이 있습니까?
노래의 가사는 원래 박기동선생이 쓴 '부용산'이라는 시였습니다. 부용산은 실제 전남 벌교에 있는 해발 95M의 조그만한 산의 이름인데, '부용산'이라는 시(詩)를 쓴 박기동은 그의 나이 10세 때 여수에서 벌교로 이사와서 살게되었습니다. 1947년에 이르러 그의 친누이인 박영애가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폐결핵에 걸려 사망하자, 박영애의 시댁 식구 몇명과 함께 곳 부용산에 그를 묻고, 그날 부용산길을 내려오면서, 살아남은 오빠의 애절한 마음을 시(詩로) 만든 것이 '부용산'노래의 출발이라고 하겠습니다.
시가 만들어진 배경은 벌교이고, 노래로 만들어지고 불려지게 된 것은 목포라고 할 수 있겠군요. 이 노래가 그렇게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고 전해 내려오는 생명력은 어디에 있을까?
김정희라는 학생의 죽음을 추모하면서 불려진 이 노래는 학교 교정을 넘어 목포를 비롯한 인근 지역에 빠르게 전파되었으며 잔잔한 멜로디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면서 널리 애창되었습니다.
사실 구전으로만 전하던 부용산 노래가 대중에게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98년 한국일보에 김성우 논설위원이 부용산에 얽힌 사연을 소개하면서부터입니다. 이를 계기로 사람들의 가슴속에 기억되고 있던 부용산 노래가 다시 햇빛을 보기 시작했고, 고향인 목포와 벌교를 중심으로 추모행사가 이어지면서 화제를 모았습니다. 99년 목포에서 부용산 살롱음악회를 시작으로 고향인 벌교의 부용산에 정자와 시비(99년 9월)가 세워졌고, 부용산 노래가 만들어진 목포여고 교정에는 부용산 노래비(02년 4월 24일) 세워지기도 하였습니다. 방송에서는 다큐멘타리가 제작되어 부용산에 얽힌 사연들이 하나둘 알려졌습니다.
호주에 살고 계신다고 했는데, 박기동 선생을 직접 뵌 적이 있군요. 박기동 선생을 직접 뵙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운 좋게도 세 차례 정도 그분을 직접 뵐 기회가 있었습니다. 박기동 선생은 건강을 위해 생식과 요가를 꾸준히 하고 있어서 인지, 87세의 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고, 옛날 일들을 바로 어제 일처럼 정확하게 기억을 하고 계셨습니다. 부용산이라는 시 한편으로 인해서 뜻하지 않은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정작 본인이 이 곡이 빨치산이나 민주화 운동 세력의 애창가요로 널리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도 몰랐는데, 시를 쓴지 51년이 지난 뒤 호주에서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연극인 김성옥씨의 부탁으로 실로 50여 년 만에 부용산 노래가사 2절을 만들면서 옛 감회에 젖어서 끝없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혹시 박기동 선생으로부터 직접 부용산 노래를 들어보신 적은 있는지?
마지막으로 뵌 것은 지난 2002년에 5월 20일 <부용산>이라는 이름으로 박기동 산문집이 발간이 되었는데, 그때 목포에서 몇몇 지인들이 모여서 조촐한 출판기념회를 가졌습니다.
박기동 선생도 잠시 귀국을 해서 함께 참석을 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본인이 직접 부용산이라는 시를 낭독하셨고, 자리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참여했던 사람들이 제각기 돌아가면서 자신만의 스타일로 부용산 노래를 열창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참석자들의 요청에 따라 박기동 선생도 직접 노래를 불러주셨는데,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부용산 노래는 1997년에 가수 안치환이 정식으로 음반에 취입을 했었는데, 그때 만 해도 구전 가요 작자미상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멜로디도 원곡과는 좀 다른 부분이 있었죠. 후에 박기동 선생의 제자인 김효자씨가 원곡 악보를 가지고 있어서, 최근에 원곡의 멜로디가 복원되기도 했습니다.
박기동 선생과 부용산에 얽힌 사연을 듣고 있다보니까, 그러면 이 노래를 만든 작곡자는 어떤 분이였을까 궁금해지는데, 알려진 바가 있습니까?
노래를 만든 분은 당시 항도여중에 근무하던 음악교사 안성현(1920∼?) 선생으로 또 하나의 천재적인 예술인이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월북했다는 것 외에는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는 나주 남평 출신으로 동경음악학교를 나왔으며, 성악가이자 작곡가였는데 당시의 제자들은 낭만적이고 인간미가 넘치는 미남선생님으로 피아노를 매우 잘 쳤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안성현 선생과 관련해서 매우 의미 있는 소식들이 최근에 들려오고 있는데, 그동안에 그가 만들었던 11곡의 음악이 담긴 작곡집만 전해왔는데, 두 번째 작곡집이 발견이 되어서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안성현 선생의 처조카 성경래 씨(49, 광주시 북구 연제동)가 발굴했는데, “고모부의 음악적 행적을 찾기 위해 10여 년 동안 백방으로 뛰어다닌 결과 어렵사리 작곡집을 구해 간직해 왔다”고합니다. 이 작곡집을 통해‘안성현’의 올바른 재평가 작업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작곡집은 일제 강점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전국민들이 애창했던 ‘엄마야 누나야’(김소월 詩)를 비롯해 ‘부용산’(박기동 詩), ‘낙엽’(안성현 작사작곡), ‘앞날의 꿈’(조희관 詩), ‘진달래’(박기동 詩), ‘내 고향’(조희관 詩) 등 암울했던 민족의 슬픔을 희망으로 승화시켜 노래한 23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작품집에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미공개 된 조희관 선생의 시, 박기동 선생의 시들이 담겨 있어 문학적으로도 소중한 자료가 됩니다. 또한 최근에 광주 쪽에서 부용산을 주제로 하고, 작곡작인 안성현 선생의 삶을 모태로 뮤지컬을 준비하고 있다는 기쁜 소식도 있는데, 고향 쪽에서도 부용산과 그 곡을 만든 박기동시인, 작곡자 안성현 선생에 대한 추모사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부용산 - 안치환
부용산 산허리에 그리움 강이 되어
부용산 오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이 노래는 작사자가 1947년경에 폐결핵으로 죽은 어린 누이동생을 부용산에 묻고 나서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작곡자 안성현이 해방 후에 월북을 하고, 후에 빨치산들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로 ‘부용산’은 널리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이 노래는 남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구전가요 이였습니다 근래 들어 가수 이동원, 안치환, 한영애 같은 이들이 음반을 내면서 빛을 보게 되였습니다 이 부용산이라는 노래가 빨치산이 부르는 노래라는 데는 이견이 있다 다만 그 시대 남도의 사람들이 빨치산들에 의해 많이 끌려가 본의아니게 빨치산이 되였고 그 시대 지식인인 핵심 빨치산들중에서도 남도 사람들이 많았으리라 그런 연고로 이 남도의 노래가 그들의 정서를 자극하는고로 그 사람들이 많이 불렀을 것이라 사료된다
내 고향은 비취빛 바다가 있는 아름다운 여수이다 바다 건너 아름다운 남해와 바로 앞에는 나의 어릴쩍 모험과 즐거움을 가져다 준 돌산도가 아름답게 펼쳐 있다 내가 지은 시에도 이곳의 아름다움이 몇몇 소개되여 있는데 남도의 슬픈 서정이 짙게 깔린 이 시 부용산을 읽고 박기동선생이 왜 돌산이 고향인가를 짐작케 한다 이 시의 주인공인 박기동 선생의 누이동생인 박영애씨와 거의 동년배인 밀양 박씨인 내 모친(1925년생)의 고향이 돌산도 둔전리인데 그곳에는 밀양 박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항렬로 볼때 박기동선생은 모친과 같은 항렬로 보이며 이곳 박씨 집성촌은 예로부터 향학열이 높기로 유명하며 그 당시 이곳에 사시던 내 외조부께서도 일제시대 전문학교를 졸업하실 정도였다 내 어릴적 돌산대교가 생기기전에는 통통배로 건너 다녔었는데 그때도 뻐쓰가 섬안에서 운행 될 정도로 가까우면서도 먼 서정이 짙게 깔린 그런 커다란 섬 이였다(우리나라에서 9번째로 큰 섬) 이섬에 태여나면 누구나 시인이 될 수 밖에 없는 아름답고 아름다운 섬이다
청산산인 아래는 펌한 것임 박기동선생 약력 ▷ 1917 년 11 월 28 일 여수군 돌산면 둔전리 517 번지 출생. (박준태의 3 남 2 녀중 장남) ▷ 1929 년 (12 세) 초등학교 4학년때 돌산에서 벌교 보통학교 4학년으로 전학. ▷ 1931 년 (14 세) 벌교 보통학교 (현 벌교남초등학교) 6회 졸업. ▷ 1944 년 (27 세) 벌교초등학교에 부임. 교가 작사 - [남조선 교육자 협회] 가입이 문제가 되어 순천경찰서에 끌려가 고초를 받고 , 6개월 정직처분 ▷ 1947 년 9월 8일 누이 박영애를 벌교 부용산(절산)에 장사지냄. 집에 와서 부용산 을 씀 ▷1948 년 2월 (31 세) 목포 항도여중 전근 (교장 조희관. 현 목포여자고등학교) - 천재 문학 소녀 김정희( )와 음악교사 안성현(1920.- )을 만남 ▷ 1950 년 (33 세) 광주 동중 에서 교편 ▷ 1950 년 5월 문행자와 결혼 ▷ 1951년 (34 세) 아들 출생 ( 현재 치과의사) ▷ 1953 년 군산 해운말 근무 ▷ 1957년 (40 세) 목포 사범학교에서 국어교사 교편 (마지막) ▷ 1961 년 (44세) 서울 의 출판사에서 번역일 근무 - 일본소설 '빙점'등 번역 ▷ 1982 년 (65 세) 부인 문행자 작고(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 ▷ 1993 년 (76세) 호주 이민 (단신) - 생식과 요가를 통해 건강을 유지하며, 그리스 신화에 관한 글을 정리하고, 시와 수필등을 집필 ▷ 1997 년 (80 세) 안치환이 부용산 노래 취입 (구전 가요) ▷ 1998 년 (81세) 박기동의 제자 김효자 교수가 부용산 노래 악보 원본을 제보 ▷ 1998 년 5 월 29 일 목포에서 부용산 음악회 개최 ▷ 1998 년 6 월 26일 벌교에서 부용산 음악 발표회 개최 ▷ 1999 년 9 월 벌교 부용산에 노래기념비 및 기념누각 건립 ▷ 1998 년 연극인 김성옥(목포출신)의 요청에 의거 시드니에서 부용산 가사 2절을 완성 ▷ 1999 년 (82 세)보성공연예술촌'연바람' (대표 오성환)이 공주 전국향토연극제에서 부용산 연극 공연 ▷ 1999 년 목포에서 부용산 살롱음악회 개최 ▷ 2000 년 (83 세)보성공연예술촌'연바람'이 제4회 벌교 꼬막축제 마지막날 (6일) 부용산 연극 공연 ▷ 2002 년 벌교 부용산 오리길 노래비 방문 (54년 만에 벌교 부용산 동생 묘 방문) ▷ 2002 년 4 월 24 일 목포여고 교정에 노래비 세움 ▷ 2002 년 5월 20 일 (85 세) 목포에서 부용산 (박기동 산문집) 발간 출판기념회 - 잠시 귀국 ▷ 2003 년 (86세) 영구 귀국 .아들(치과의사) 과 함께 거주 - 뇌경색으로 병원 치료 ▷ 2004 년 5월 9 일 (87 세) 별세 -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내 부인과 합장
부용산 사연의 주인공 故 박 영애
▷ 1941년 (18세) 벌교 세망동으로 시집 감
안성현 ▷ 1920 년 나주 남평에서 출생 ▷ 함경도 함흥에서 성장 ▷ 일본 도꾜 동방응악대학교 성악부 졸업 ▷ 목포항도여중 교편 (음악교사) - 광주 사범대학교 - 조선대학교 - 전남여고 ♡ 성동월과 결혼 (1남 1녀를 둠) - 남한에서 살고 있음 ▷ 1950 년 최승희 따라 월북 (안성현은 최승희 남편 안 막 의 조카임) ▷ 작곡집 1집 (11곡 ) ▷ 작곡집 2집 (23 곡) - 처조카 성경래씨(광주 북구 연제동) 가 발굴 ▷ 작곡 노래 - 엄마야 누나야 (김소월 시) - 부용산 (박기동 시) - 낙엽 (안성현 시) - 앞날의 꿈 (조희관 시) - 진달래 (박기동 시) - 내고향 (조희관 시) ▶ 2006. 4. 25 오후 3시에 노환으로 평양에서 별세 (86세)
김정희 ▷ 1931. 10. 1 - 1948. 10.10 (18세. 항도여중 3학년 때 사망)
노래관련한 행사 등 일지 ▷ 1947 작사 (박기동) - 동생 박영애 사망으로 슬픔을 시로 씀 ▷ 1950 안성현 처 삼촌 안막 , 안막의 부인 최승희 와 월북 ▷ 1993 박기동 시인 호주 이민 ▷ 1997 안치환 이 구전가요를 음반으로 취입 - 세상에 알려짐 ▷ 1998. 3.28. 한국일보 김성우 논설위원이 정설'부용산' 에세이를 씀 ▷ 1998 박기동 선생의 제자인 김효자 경기대 교수가 악보를 제보 ▷ 1998. 5. 29 목포에서 부용산음악회 개최 ▷ 1998. 6. 1. 최성각(소설가)시가 단편소설 '부용산' 발표 ▷ 1998. 6. 26 벌교에서 부용산음악 발표회 개최 ▷ 1998 연극인 김성옥(목포출신) 의 요청에 의해 박기동 선생이 시드니에서 3일만에 2절 작시 ▷ 1999. 9 벌교 부용산에 부용산노래기념비및 기념 누각 건립 ▷ 1999 보성공연애술촌'연바람' (대표 오성환) 이 공주 전국향도연극제에서 부용산연극 공연 ▷ 1999 목포에서 부용산 살롱음악회 개최 ▷ 2000 보성공연예술촌'연바람'이 벌교꼬막축제 마직막날(6일) 부용산 연극 공연 ▷ 2002 박기동 시인 벌교 노래비 방문 . ▷ 2002 . 4. 24. 목포 여고 (구 항도 여중) 교정에 부용산 노래비 세움. ▷ 2002. 5. 10. 박기동 산문집'부용산' 출판 ▷ 2002. 5. 28 연합뉴스, 경향신문에 박기동 시인 인터뷰 기사. ▷ 2002. 6. 3. 목포에서 부용산 수필집 출판기념회 개최 - 6. 8 호주로 출국 ▷ 2003 박기동 시인 시드니에서 영구 귀국 장남과 거주 - 병원에서 퇴경색 치료 ▷ 2004. 2.12. 나천수 시인 (나주 향토사학자) 부용산 시 발표. ▷ 2004. 7. 1. KBS 라디오에서 최성환(목포 신안 향토사학자) 진행으로 서해안인물열전에서 박기동시인을 소개 ▷ 2004. 5. 9 . 박기동 시인 별세 -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부인옆에 안장 ▷ 2005.11. 7 . 전남일보 김용재 기자가 타계한 '부용산' 작사 박기동옹 기사 작성 ▷ 2006. 4.25 안성현 작곡가 평양에서 별세
노래 부용산은 1947년 당시 목포 항도여중의 교사였던 박기동씨가 노래 부용산은 2000년 10월 1일 감히 소리 내어 부르지 못하고
시인 박기동과 작곡가 안성현의 누이도 온다 간다는 말도 못하고 그렇게 갔다. 1947년 박영애는 벌교에서 스물넷에, 안순자는 광주에서 15살에 세상을 떴다.
시인 김소월이 자란 곳은 평안북도 정주의 바닷가 마을이었으니, ‘뒤뜰 밖 갈잎의 노래’는 온전한 꿈이었을 것이다. 소월도 가고 꿈도 갔지만, 시 ‘엄마야 누나야’는 북의 정주를 떠나 남의 나주 남평 지석강에서야 꿈꾸던 터를 잡을 수 있었다. 지석강이 키운 안성현을 만나 노래가 되었고, 금모래와 갈잎의 노래에 둘러싸인 노래비로 남았다. 박기동 시인의 ‘부용산’이 이 땅의 누이를 위한 불멸의 애가(哀歌)로 남게 된 것도 그곳 안성현과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화순군 이양면 왕피나무골에서 발원한 화순천은 능주 적벽을 거쳐 남평 들로 접어들면, 나주호에서 흘러나온 대초천이 기다렸다는 듯 합수하여, 지석강이란 이름을 얻는다. 물색이 얼마나 맑고 고왔으면, 물길이 감싸안은 들엔 쪽돌이란 마을이 들어섰다. 늘 푸른 숲과 눈부신 모래밭 그리고 쪽빛 물은 그곳 사람들의 결 고운 서정을 잉태했고, 애틋한 연민을 자양분 삼은 시와 노래를 출산했다.
하지만 지석강은 지명일 뿐 사람들은 오로지 드들강이라 하니, 솔밭 입구엔 그 연원을 새긴 장대한 비석이 이정표를 대신한다. 그만큼 남은 이들의 마음 빚이 컸다는 뜻이리라.
겁도 없지, 비석은 전설의 연원을 고려 말이었다고 시기를 명시했다. 남도 제일의 고을이던 나주 남평 사람들은 식수와 농업용수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수심 깊은 곳에 보를 쌓았다.
그러나 웬만한 홍수에도 보는 터졌고, 범람한 물은 오히려 농경지를 쓸어버렸고, 해마다 불행은 되풀이됐다. 대개의 전설이 그러하듯 그때 현인이 나타나, 예의 그 희생공희를 권한다. 제물은 물론 정결하고 아름답고 효성스런 처녀다.
그건 드들강에만 특별한 것은 아니다. 김제 벽골제엔 단야가 있다. 스스로 제물이 되어, 사랑하는 연인의 행복을 지키고, 제방과 마을의 안녕을 지켰다는 낭자의 전설이다.
제주도엔 김녕 뱀굴 전설도 있다. 세상의 남정네는 문제만 생기면 누이의 희생에 기대어 저의 안녕을 꾀했던 셈이다. 우리나라만의 일도 아니다. 지난 5월29일이 초연 후 꼭 100년째라던 스트라빈스키 작곡, 니진스키 안무의 ‘봄의 제전’도 그런 내용이다. 아름답고 정결한 처녀는 봄의 생명력을 깨우기 위해 희생된다. 세상의 오라비들은 참으로 비겁했다!
말이 자청이지, 어느 누가 수장을 원할까. 하지만 전설의 공식대로, 효성스런 처녀 드들은 희생을 ‘자청’했다. 명주실 반 타래나 빠진다는 그 시퍼런 물속에 드들을 수장시킨 뒤 쌓아올린 보는 어떤 홍수도 이겨내며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희생을 기려 드들강이 되었고, 송림 맞은편 산은 드들매가 되었다. 그건 남정네들의 누이에 대한 최소한의 속죄의 표시였다.
드들처럼 공공의 안녕을 위해 희생된 것만도 아니다. 가난했던 시절, 그나마 한 줌 먹거리는 오라비 차지였고, 누이들은 언제나 병약했다. 누이란 이름이 애잔하고 슬프고 가냘픈 이미지로 다가오는 건 그런 까닭이었다. 그렇게 간 누이를 기리는 시와 노래의 원조가 신라 때 월명사의 제망매가. “죽고 사는 길은/ 여기 있으매 두려워하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하고 가느냐/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양주동 주석)
사무치는 노랫말과 애잔한 선율은 해방 정국 신산한 삶에 쫓기던 이들의 마음을 금세 사로잡았다. 그해 10월 여순 사건이 발생하고, 산으로 쫓겨난 이들이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는 노래가 되었다.
시인 박기동과 작곡가 안성현의 누이도 온다 간다는 말도 못하고 그렇게 갔다. 1947년 박영애는 벌교에서 스물넷에, 안순자는 광주에서 15살에 세상을 떴다. 박기동은 벌교 읍내에서 오 리 길, 부용산에 누이를 묻고는 돌아와 이런 제문을 남겼다. “부용산 오 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안성현 역시 같은 해 누이의 죽음을 가슴에 묻었다. 가야금 명인이던 부친(안기옥)이 북으로 떠난 뒤 그가 보살폈던 어린 누이였으니 상심은 깊고도 깊었다. 그가 일본 동방음악원으로 유학 갔을 때나, 돌아와 교편을 잡아 이리저리 옮겨다닐 때나 누이는 그저 오라비를 그리워했다.
안성현이 목포 항도여중(지금의 목포여고) 음악교사로 부임한 것은 1947년, 박기동이 순천사범에서 항도여중으로 옮긴 것은 1948년 2월이었다. 가슴에 상처를 안고 있던 작곡가와 시인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그리고 아끼고 아꼈던 제자 김정희가 누이처럼 폐결핵으로 요절하면서, 시 부용산이 안성현의 송(頌)을 얻어 노래 ‘부용산’으로 탄생했다. 그것은 필연이었다.
당시 항도여중은 “이처럼 내면이 아름답고 희망에 찬 학교가 어디 있을까”라고 박기동이 찬탄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경찰의 주목을 받던 두 사람은 1949년 가을 차례로 학교를 떠나야 했다. 두 사람이 이후 밟은 기구한 인생처럼 부용산의 곡절 또한 기구했다.
부용산은 1948년 4월11일 목포 평화극장에서 열린 학예회 때 5학년생 배금순의 노래로 처음 발표됐다(안성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자료집).
그리고 8월7일 발간된 안성현의 두번째 작곡집에 실렸다. 사무치는 노랫말과 애잔한 선율은 해방 정국 신산한 삶에 쫓기던 이들의 마음을 금세 사로잡았다. 그렇게 입에서 입으로 퍼져가던 그해 10월 여순 사건이 발생하고, 산으로 쫓겨난 이들이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는 노래가 되었다.
그 후 부용산은 빨치산 노래로 붉은 밑줄이 그어져 안성현·박기동까지 연좌되기에 이른다. 6·25 이후 안성현이 북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부용산의 봉인은 더 치밀해졌다. 그 봉인을 처음 푼 것은 안치환. 1997년 낸 앨범 <노스탤지어>에 ‘부용산’을 작가 미상의 구전가요로 올렸다.
박기동은 늘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아야 했고, 툭하면 가택수색, 연행 혹은 구금을 당했다. 애지중지하던 시작 노트는 이 과정에서 모두 빼앗겼다. 76살 나이에 호주로 이민을 갔던 것은 숨 한번 편하게 쉬자는 생각에서였다. 부용산 말고 순천사범학교 재직 중 남조선교육자협회 성명서에 서명한 것도 족쇄처럼 따랐는데, 내용이란 게 고작 “우리의 권익은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신생 한국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구전가요’ 부용산은 1997년 안치환에 의해 세상에 그 존재를 알린 뒤, 이동원·한영애 등 우리의 가객들에 의해 원곡도 발굴되고 그 선율이 소개됐다. 이제 벌교 부용산엔 시비와 부용정이, 항도여중엔 노래비가 그리고 목포와 남평에선 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2009년엔 장안의 내로라하는 자유인들이 서울 운현동 뒷골목 ‘낭만’에 모여 ‘부용산 잘 부르기 대회’를 열기도 했고, 대회를 위해 김학민씨가 부용산의 사연을 조사해 발표하고, <한겨레> 노형석 기자는 그 자리를 세밀화 그리듯 묘사해 독자에게 전했다. 아직 봉인이 덜 풀렸는지 노래방 노래집에 그 이름 오르지 않고, 방송이 이를 꺼린다 해도, ‘부용산’은 금기에선 벗어났다.
그럼에도 오늘 다시 그 내력을 지면에 올린 까닭은 오로지 ‘우리 안의 윤창중’ 덕이다. 누이들의 희생에 기대는 것도 모자라, 식(食)과 롱(弄)의 목록에 올려 시도 때도 없이 껄떡대는 그 욕정과 탐욕이 한없이 부끄럽고 두려운 것이다.
비겁한 남정네여 부용산을 노래하게나. 드들강변이나 부용산 부용정이 아니어도 좋으니, 누이들의 애잔한 향기를 기억하시게.
(덧붙임)
안성현기념사업추진회(위원장 박종주)의 활동을 통해 몇 가지 사실이 추가로 확인됐다. 안성현은 1950년 9월15일 목포에서 공연한 무용가 안성희(최승희의 딸)를 만나, 부친과 최씨를 만나볼 셈으로 안성희의 북행에 동행했다.
사흘 뒤 인천상륙작전 및 서울 수복과 함께 전선이 교착되면서 졸지에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효자가 어머니와 처자식을 방기할 리 없었다.(부인 성동월씨) 안성현은 순흥 안씨, 최승희의 남편 안막은 죽산 안씨로, 조카 삼촌 사이가 아니다.
그의 북행과 안막은 무관하다. ‘부용산’ 탄생에 제자 김정희의 요절이 작용은 했지만, 실은 누이의 죽음이 더 큰 계기였다.(성동월씨) 그러나 이런저런 논란을 떠나, 변함없는 사실은 부용산이 이 땅의 누이들을 위한 애가라는 것이다. |
출처 :위대한 여정 원문보기▶ 글쓴이 : 신기루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