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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1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요한 6,51-58
성체의 열매: “할 수 있다!”
오늘은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가톨릭교회는 뭐니 뭐니 해도 성체성사로 삽니다.
만약 냉담하게 되는 신자가 있다면 성체성사의 의미와 효과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라고 하셨는지 이해해야만 합니다.
심판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먼저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성체는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할 수 있음을 믿게 만드는 힘입니다.
어떤 자매가 아기를 낳고는 불안증으로 한강에서 아기와 함께 뛰어내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문을 걸어 잠가도, 친정어머니를 찾아가도 그 불안증을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고로 결국 어머니는 목숨을 건졌지만, 아기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나는 아기를 키울 능력이 있다’라는 믿음이 없다면 이처럼 진짜 아기를 키울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믿어서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고 키우는 것입니다.
할 수 있다는 믿음만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의 애착 실험은 사랑의 실체를 증명하고 싶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새끼 원숭이를 어미와 떼어놓고 어미 사랑을 받지 못하게 한 채 키웠습니다.
그리고 교배시켜 또 새끼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새끼가 위험에 처하자 어미 원숭이는 새끼를 밀쳐냈습니다.
새끼 때 자신을 안아준 어미 원숭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받아야만 줄 수 있는 실체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먼저 어머니의 젖이라는 따듯한 양식으로 전해집니다.
그 양식을 먹은 새끼는 자신도 소중한 존재임을 믿게 되어 어미처럼 할 수 있는 존재라 믿게 됩니다.
옛날 일본의 한 천민 아이가 사무라이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무라이는 귀족만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성주가 새로운 성을 짓는데 그 성 기둥에 들어갈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합니다.
일본엔 기둥에 사람을 넣고 성을 지으면 그 성이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오랜 믿음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이 그 기둥에 들어갈 테니 자신의 아이를 그 성에서 사무라이로 교육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성주는 그렇게 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약속대로 아이는 귀족 아이들과 함께 사무라이 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귀족 아이들의 괴롭힘이 너무 심해서 밤에 도망치기로 합니다.
몰래 성을 빠져나가던 중 어머니가 들어있다는 기둥을 만납니다.
그는 그 기둥을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몇 번이고 이런 일이 반복되었지만 결국 그 아이는 기둥을 지나쳐 도망갈 수 없었고 그래서 끝까지 참아내어
일본의 유명한 사무라이가 됩니다.
아이는 어머니가 들어계신 그 기둥에서 힘을 얻어 사무라이가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어머니는 죽었고 그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나오는 힘이 그를 새로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아이가 사무라이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어머니의 피를 통해 아이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매일의 양식을 먹으며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지니게 됩니다.
용서가 안 되는 이유는 용서하고 싶지도 않고 용서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다음 이야기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가 바로 생명의 양식인 그리스도의 살입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배에 맞아들였습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분은 물 위를 걸을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요한은 이처럼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그리스도처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이 생겨야 함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야곱은 에사우의 옷을 입고 자신이 에사우라고 우깁니다.
그래서 장자만이 받을 수 있는 축복을 받습니다. 야곱은 에사우를 피해 도망치다가 베텔(하느님의 집)이라는 동네에서 하룻밤을 묵습니다.
거기에서 하늘까지 닿는 사다리를 봅니다.
에사우는 그리스도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에사우의 옷을 입고 에사우처럼 사랑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사다리의 양 기둥은 바로 희망을 상징하고 각 계단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많은 열매를 맺었고 그것을 나중에 에사우에게 바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체를 영하는 우리 운명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11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요한 6,51-58
열정과 사랑으로 성체성사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께서 당신께서 담당하시던 교구 내 가장 오지 본당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워낙 시골인데다, 오랫동안 본당 사제도 없어 신자들의 어려움이 컸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제 부족으로 인해 교구청에는 파견할 사제가 없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그 지역의 젊은 농부 한 사람을 뽑아 속성과정으로 사제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사제로 서품했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 본당 주임으로 발령을 냈습니다.
그러나 주교님의 마음이 영 껄끄러웠습니다.
괜한 짓을 했나 후회도 되었습니다.
속성으로 교육시킨데다, 실습조차 하지 않은 상태로 파견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주교님은 평복 차림으로 그 본당을 찾아가 그 사제가 미사 드리는 모습을 몰래 지켜봤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교님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주교님은 그동안 수많은 사제들이 봉헌하는 미사를 봐왔지만, 그 사제처럼 세상 경건하고 진지하게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는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미사 드릴 때 그 사제의 눈은 별처럼 빛났고, 열정과 사랑이 가득 담긴 강론을 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미사가 끝난 후에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은 제단 앞으로 나아가 그 사제 앞에 무릎을 꿇고 강복을 청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이 주교님이란 것을 알게 된 사제는 깜짝 놀라 그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습니다.
“주교님께서 제게 강복해주셔야지, 어떻게 제가 주교님을 강복할 수 있단 말입니까?”
주교님은 다시 무릎을 꿇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신부님이 나를 강복해주십시오.
저는 신부님처럼 열정과 사랑으로 미사를 드리는 사제는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제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습니다.
“아니, 주교님, 한 사제가 어떻게 열정과 사랑 없이 미사성제를 드릴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게 말이 되는 것입니까?”
저만해도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열정 없이, 사랑 없이, 미사를 집전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저 습관처럼 타성에 빠져 앵무새처럼 경문을 외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 성체성사에서 무슨 기적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겠지요.
사제가 열정이나 사랑 없이 미사를 집전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신자들도 열정과 사랑 없이 미사성제에 참여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아벨의 정성스러운 제사는 기쁘게 받아 들이셨지만 건성으로 바친 카인의 제사는 거부하셨습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는 봉헌인 성체성사에 온몸과 마음, 모든 에너지와 정성을 기울이는 성체 성혈 대축일이 되길 기원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2023. 6. 11.)(요한 6,51-58)
<이론이 아니라 삶>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3-58).”
이 말씀을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한다면, 나를 먹어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빵, 나의 살, 내 피’ 라는 말들은 모두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는 성체성사에 관한 예수님 말씀이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사실을 그대로 나타낸 말씀이라고 믿고 있고, 성체성사도(영성체도) 상징적인 예식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미사 중에 축성하는 빵이 실제로 예수님의 몸으로 변화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체를 받아먹음으로써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시게 되고, 동시에 우리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즉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받아서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이 곧 참된 양식이고 참된 음료입니다.
이 말은, 지상에서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들은 일시적인 양식일 뿐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으로 무슨 거창한 극기고행이나, 평생 걸리는 수행과 수련 같은 것을 말씀하시지 않았고, 성체를 받아먹으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성체를 받아먹는 일은 누구나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하고, 성체성사를 ‘삶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 그 두 가지 조건입니다.
믿음 없이 성체를 받아먹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고, 성체모독죄를 짓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성체는 먹는 사람에게 무조건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마법의 약이 아닙니다.>
또 믿고서 받아먹긴 하는데, 그것으로 그치면서 ‘삶’으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 되어버립니다(야고 2,17).
‘죽은 믿음’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주님의 만찬’과 관련된 문제로 코린토 신자들을 크게 꾸짖은 일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1코린 11,20-22).”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1코린 11,27-29).”
“그러므로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만찬을 먹으려고 모일 때에는 서로 기다려 주십시오(1코린 11,33).”
그 당시에는 주일 저녁에 신자들이 모두 모여서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미사를 드렸는데, 각자 자기 집에서 먹을 것을 가지고 와서 봉헌한 다음에 성체성사를 겸한 만찬을 행했습니다.
부자들은 먹고 마실 것을 많이 가지고 왔을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적게 가지고 오거나 빈손으로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들끼리만 모여서 자기들이 가지고 온 것을 먹어치우고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일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때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배고픈 것도 서러웠을 것이고, 따돌림 당하고 소외당하는 것은 더욱 서러웠을 것입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교회에서.>
그런 일이 코린토만의 문제는 아니었는지, ‘주님의 만찬’, 또는 ‘아가페 식사’는 초대 교회 때 잠깐 시행되다가 폐지되었고, 지금과 같은 성체성사만 남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부자들에게 요구한 것은,
“가난해져라.”가 아니라 “함께 먹어라.”입니다.
함께 먹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쉬운 일도 안 하는 것은 ‘사랑 없음’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앞에서 ‘믿음 없이’ 성체를 받아먹는 것은 성체모독죄를 짓는 일이 된다는 말을 했는데, 바오로 사도가 한 말을 합하면, ‘사랑 없이’ 성체를 받아먹는 것도 성체모독죄를 짓는 일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6-18).”
<가지고 있는 재물로 ‘나눔’을 실천하는 일은,
‘벗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사랑’과 같은 일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