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 허련 가족의 미술세계와 운림산방]
ㅡ이별 행진ㅡ
음력으로 정월과 2월이 겹치는 달이어서 날씨가 변화무쌍하다. 꽃을 피우던 춘삼월도 마지막주에 접어드니 마음이 바빠진다. 금년도 세 달이 지나고 보니 세월歲月의 무상無常함을 실감한다. 체중은 미달이지만 세월의 무게감이 더해진다. 모친은 알츠하이머로 인해 주간 요양 보호센터에 다니신다. 모친을 보살피기 위해 고향인 퇴촌에서 생활이 석달째이다. 오늘 행사가 있어 익숙치 않은 정장차림으로 본가인 서울로 일찍 나선다. 그림과 글쓰기와 유적지 산책 등 취미 생활의 일부가 줄어들어도 오히려 마음은 분주하다.
미사리길을 달리는 중 전화벨이 울린다. 수십 년 동안 내 건강을 보살펴 준 동네 주치의主治醫 조은미 원장님이다. 의사직을 은퇴한다며 마지막으로 인사차 알린다는 목소리이다. 마음 한켠에 공허함이 밀어닥친다. 원장실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안정을 찾았다. 만나면 반드시 헤어진다는 회자정리會者定離를 상기하며 유사한 일이 빈번할 것으로 여긴다. 그동안 못다한 여행과 자유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의사도 청진기를 놓으면 우리와 다름없으리라 여긴다. 건강 지킴이 후임 의사의 약력을 상세히 일러준다. 환자는 의사와의 교감으로도 치료가 된다. 조은미 원장님은 나처럼 외소한 체격이어서 의약 처방에 신뢰가 쌓여있다. 동병상련으로 여긴다.
아침 클래식 방송 '아름다운 당신에게'를 매일 듣는 편이다. 음악도 치료제 역할을 한다. 6년간 생방송진행자 강석우 탤런트가 2년 전 1월 27일을 마지막으로 하차했다. 그가 떠나면서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2번을 들려준다. 모처럼 왈츠 2번을 들어보니 새삼 당시의 추억이 연상된다.
인사동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점심 시간에 접어들어 전철 안은 붐비지 않는다. 낙원상가 옆 박사네갈비집은 만년 단골이다. 메뉴는 육개장이다. 입맛을 아는 직원은 메뉴를 묻지도 않고 주문한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다. 오랫만에 먹어보는 맛에 혼이 빠진다.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 1층과 2층에는 먹향이 감돈다. 전시 개막한 붓질 60년의 주인공 임전林田 허문(1941~)을 비롯해 5대 작품전이 열린다. 운림산방의 5대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4대 작가이다.
1대는 산수화의 대가인 소치小痴 허련許鍊(1808~1893)이다. 전남 해남 대흥사의 초의선사와 인연이 되어 추사 김정희 문하생으로 기량을 다진 조선 후기 대작가이다. 헌종(1827~1849) 왕의 신임을 받은 소치는 49세에 귀향한다. 진도 땅에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세우고 작품에만 전념한다.
소치의 막내 아들인 미산米山 허형許瀅(1861~1938)이 2대를 잇는다. 3대 남농南農 허건許楗(1908~1987)은 서정적인 실경 작가로 알려져있다. 미산의 막내이며 남농 동생인 임인林人 허림許林(1917~1942)은 25세에 요절한다. 4대인 임전林田 허문은 임인의 외아들이다. 선염법으로 운무산수雲霧山水를 그려내는 작가이다. 그에게 안개 작가라는 별칭이 따라다닌다. "이번이 마지막 전시이기에 많은 갤러리에게 꼭 와서 감상하라"고 당부한다. 자상하게 내용을 설명해주어 작품 감상에 도움이 된다.
남농 허건의 손자인 허진(1962~)과 허재(1973~)가 5대를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현대 기법과 접목해 색다른 멋을 연출해낸다. 2021년 2월 16일 여행 때 진도 운림산방 소치기념관에서 1대부터 5대로 이어지는 작품을 감상했다.
오늘의 하일라이트인 광진예술회관 나루아트센터로 발길을 돌린다. 동서울 BMS 대표인 전용한 회장이 광진문화원 11대 원장으로 취임하는 날이다. 10대 양회종 원장이 8년간 자리를 지켜왔다. 행사장 입구에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약력과 인품은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만큼 태산을 이룬 인물이다. 지난해 펴낸 자서전에 그의 성품이 담겨있다. 광진구에서 자타가 공인할만큼 소리없는 울림을 준 화가이기도 하다. 겸손과 배려, 솔선수범이 몸에 배어있다. 은퇴할 연령인데 일선에 들어선 전용한 원장에게 찬사를 보낸다. 임기를 잘 마치길 비는 마음에서 시 한수 바친다.
"바람을 가로질러
사뿐히 날아 올라
꽃술에 몸 부비며
향기를 가득 채워
한평생
날개짓하며
천사가 된 봉사인"
2024.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