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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6. 묵상글 (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내게 십자가는 걸림돌일까, 사랑일까? .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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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김신부님께서 오늘 2025년 8월 6일 예수님 거룩한 변모 축일 강론글
아래 '2' 대신 '1'로 교체하여 작은형제회 홈페이지에 올리셨습니다. -
= 1. ===============================================
25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8.06 05:47
- 내게 십자가는 걸림돌일까, 사랑일까?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2016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모습을 바꾸심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 특히 세 제자를 위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일부로 제자들에게 변화된 당신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 제자에게 특별히 보여주신 것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겟세마니의 그 처참한 모습도 세 제자에게만 보여주셨고,
죽은 아이를 살리시는 것도 세 제자에게만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어떤 것을 봤을까요?
영광스러운 모습을 봤을까요, 아니면 처참한 모습만 봤을까요?
능력의 주님만 봤을까요, 아니면 무력하게 죽으시는 주님만 봤을까요?
제 생각에 제자들의 인생을 통틀어 볼 때
예루살렘 입성 전엔 영광스러운 모습만 보고,
수난 다음에는 처참한 모습만 봤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순조롭고 평화로운 때에는 수난의 예수님과 십자가는 보고 싶지 않고,
큰 환난과 고통 중에는 영광스러운 주님, 부활의 주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이는 대로만 볼 것이 아니라 덕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덕으로 본다?!
예. 덕으로 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좋을 때는 사랑으로 수난의 주님과 십자가를 보고
환난과 고통으로 암울할 때는 믿음과 희망으로 부활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너무도 황홀하여
타볼 산 위에 초막을 셋을 짓고 거기서 살고 싶다고 합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다.”는 유행가 가사와 같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초를 치듯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며
그것을 대비하고, 그것을 직시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돌아가시는 주님을 사랑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잃고 절망과 두려움으로 다락방에 숨어있을 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당신이 함께 계시니
두려워 말고 당신이 주는 평화를 받아 지니라고 하십니다.
상황이 아무리 암울하고 죄책감과 절망감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바로 그때 사랑의 주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부활하시고 부활케 하시는 주님을 보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감사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뽑힌 증인들 앞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어
제자들 마음속에서 십자가의 걸림돌을 없애 주셨으며,
머리이신 당신에게서 신비롭게 빛난 그 영광이,
당신 몸인 교회 안에도 가득 차리라는 것을 보여주셨나이다.”
지금 우리 마음속에서 십자가는 걸림돌입니까?
아니면 사랑입니까?
이것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 2 ===============================================
25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8.06 03:02
- 힘이 없어도 믿음은 있는
연중 18주 수요일-2019
오늘 독서와 복음의 얘기를 연결 비교하여 보면 재미있을 겁니다.
오늘 민수기는 가나안 가까이 파란 광야까지 온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곧 들어갈 가나안에 정탐대를 보내고 난 뒤 그 보고를 듣고
소동이 일어나는 얘기입니다.
오늘 복음은 앓고 있는 딸을 둔 이방 여인이 딸의 치유를 청하자
주님께서 이 모녀를 모욕하지만, 여인이 겸손과 믿음을 보이자
주님께서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는 내용입니다.
민수기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를 비하하고 믿지 못하는 데 비해
오늘 복음의 이방 여인은 겸손하면서도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겸손과 비하, 믿음과 불신의 차이를 비교하면 유익할 겁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이 들어갈 가나안 토착민들과 비교하며
자기들을 메뚜기와 같다고 형편없이 비하합니다.
크고 강한 토착민과 그 앞에 있는 보잘것없는 자신을 보면
골리앗 앞의 사울과 그 군대처럼 졸아들어 그렇게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 지나친 자기 비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겸손과 비하의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겸손은 터무니없이 자기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자기를 보고, 그런 자기를 믿고 사랑합니다.
그래서 정확한 자기 인식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하고, 도움을 청할 것은 청합니다.
이에 비해 자기 비하는 터무니없이 자기를 깎아내리기에
그런 자신을 믿을 수 없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신감이 없어
지레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패배주의에 빠집니다.
우리는 겸손해야지만 자신감도 있어야 합니다.
자신감이 없는 겸손은 사실 겸손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교만한 자신감을 많이 봤기에
자신감이 있게 뭘 하면 겸손한 것이 아니라고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기 비하가 아니라 참으로 겸손하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는 패배주의도 아니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아닌,
그러니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안에서 자신감을 가집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은 솔직히 인정하며 도움을 청합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사람에게건 하느님에게건 도움을 잘 청하고
사람이건 하느님이건 잘 믿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골리앗 앞에서 이스라엘을 보겠습니다.
같은 골리앗 앞에서 사울과 그의 군대는 졸아 지레 전쟁에 졌지만
다윗은 졸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골리앗을 때려눕혔습니다.
다윗은 결코 자기가 골리앗보다 크고 힘세다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졸지 않았으니 힘은 없지만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여인도 연약하였으나 믿음이 있었고 그래서 감히
이방 남정네와 상대할 수 없는 그때 예수님께 다가와 청합니다.
따가운 시선과 모욕도 두려워하지 않고 감수하고 감당합니다.
이것이 겸손한 믿음이고 겸손의 힘입니다.
힘이 없어도 믿음이 있으면 그것이 제일 큰 힘을 깊이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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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변모의 여정
“기도, 만남, 순종”
“하늘은 그분 의로움을 널리 알리고,
만백성, 그분 영광을 우러러 보네.”(시편97,6)
기상하자마자 집무실에 들어와 만세칠창후 선물같은 하루를 시작합니다. 우선 인터넷을 열어 국내외 뉴스를 일별해 봅니다. 산불과 폭우가 폭염의 기후재난이 일상화 되어가는 국내외 공히 격변의 시대요 총체적, 복합적 위기의 시대입니다. 특히 국내외 정치지도자들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지혜와 용기의 탁월한 리더십이 참으로 절박한 시절입니다.
아니 정치지도자들뿐 아니라 크고 작은 다양한 공동체 책임자들의 리더십 또한 절실한 때입니다. 지도자들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그 처지가 한번 삐긋하면 천길낭떠러지처럼 참 위태하게 느껴집니다. 특히 지도자들은 참으로 늘 깨어 제자리에서 주어진 제몫의 책임에 충실해야 함을 봅니다.
오늘은 주님의 변모 축일입니다. 참 아름답고 중요한 시의적절한 고마운 축일입니다. 각자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만남으로 주님을 닮아가는 변모의 여정이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오늘 옛 현자의 지혜도 변모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좋은 도움이 됩니다.
“한 갑자의 공부를 두 단어로 정리하자면, 바로 ‘마음’과 ‘일상’이다.”<다산>
평상심(平常心)이 도(道)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평범한 ‘일상’에 충실함이 제일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근심도 마라. 어려움 앞에서도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라.”<다산>
알게 모르게 겪는 주님의 변모체험이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는데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곤궁에는 운명이 있음을 알고, 형통에는 때가 있음을 알고, 큰 어려움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성인의 용기다.”<맹자>
주님과 일치의 변모체험에 충실할 때 이 모두가 충족됨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 최측근 애제자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셋에게 당신의 변모 은총을 체험토록 각별한 배려를 하십니다. 복음의 위치가 참 절묘합니다. 앞서 베드로는 주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 고백하여 칭찬과 더불어 큰 축복을 받았지만 주님의 수난 예고시 이를 거부함으로 사탄이라 질책을 받았습니다. 졸지에 주춧돌 반석이 걸림돌로 전락한 베드로입니다.
이어 주님은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심과 동시에 당신을 따르는 삶의 자세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는데, 한결같이 그들이 예상하는 메시아상을 완전히 벗어난 충격적인 말씀들입니다. 제자들의 분위기도 극히 위축되어 있고 사기도 침체되어 있는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제자들을 위한 비상조치의 특별산상피정이 바로 오늘 복음의 주님의 변모사건입니다.
참으로 십자가의 광야 여정중에 있는 모두가 절실히 필요로하는 오아시스와 같은 주님의 변모신비체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맙게도 날마다 미사전례를 통해 주님의 변모신비체험에 참여합니다. 변모체험의 일상화를 가능하게 해준 매일의 미사전례시간입니다.
어제 말씀드렸다시피 예수님의 삶 중심에는 늘 기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루가복음은 기도의 복음이라 할만큼 기도하는 예수님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변모 사건은 우리의 변모의 여정에도 좋은 참고가 됩니다. 주님은 기도와 만남, 순종의 세 측면에 걸쳐 유익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첫째, 기도입니다.
예수님께 산들은 주로 주님을 만나는 기도처였습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란, 제 짧은 고백시도 수도원의 배경인 하느님의 산, 불암산이 그 대상입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시는 중 주님의 변모를 체험한 제자들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주님과의 소통은 물론 주님을 만나 변모의 은총을 위해, 내외적 치유를 위해 끊임없는, 한결같은 기도는 필수입니다. 기도하지 않아 영혼의 영양실조요 무수한 정신질환들입니다.
둘째, 만남입니다.
기도할 때 주님을 만나며 동시에 이웃을, 참나를 만납니다. 회개와 더불어 겸손과 믿음이 뒤따릅니다. 예수님은 기도중에 영광에 싸여 나타난 에녹과 함께 승천한 두 인물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 당신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눕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과 더불어 모세와 엘리야를 발견한 것입니다. 주님 부활의 영광을 앞서 체험한 제자들입니다. 이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동안 의심의 구름도 활짝 걷히고 심신도 치유되어 원기도 회복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상시 시공을 초월하여 모세와 엘리야를 멘토로 삼아 자문을 받았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도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보나벤투라를 평생 영적 스승으로 삼았다 합니다. 예수님의 세 제자들은 잠에서 깨어나 스승 예수님과 대화하는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자 감격에 벅차 고백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엉겁결에 놀라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베드로의 어처구니 없는 착각입니다. 주님의 신비변모체험은 혼자 독점할 수도 없거니와 집착도 금물입니다. 또 그 체험이 아무리 좋다해도 영원히 산에서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수도원 피정이 아무리 좋다해도 평생 피정할 수 없는 경우와 흡사합니다. 자기 제자리에로의 귀환이 맞는 것입니다. 내 삶의 제자리에서 하루하루 날마다 십자가의 여정에 충실하면서 주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말그대로 변모체험의 일상화입니다.
셋째, 순종입니다.
베드로의 청에 하느님 친히 예수님을 대신해 말씀하십니다. 구름이 그들을 덮자 덜컥 겁이난 그들에게 주님은 구름속에서 말씀하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이 거룩한 미사전례중 주님의 변모를 체험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런 말씀후 예수님만 보였다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가 평생 영원히 따라야 할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바로 이 예수님의 정체는 다니엘 예언서에서 잘 들어납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으리라.”
이 예언 그대로 가톨릭교회를 통해 실현되고 있으니 제1대 베드로 교황에 이어 제267대 레오 14세 교황입니다. 인류가 지속되는 날까지 알게 모르게 계속 확대될 그분의 나라입니다. ‘들어라(Listen to him)!’ 얼마나 많이 강조되는 말마디입니까? 잘 듣기 위한 경청의 침묵이요 경청에 이어 겸손한 순종입니다.
이제 남은 삶은 묵묵히 내 삶의 제자리에서 자발적 기쁨으로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뿐이겠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따라 주님과 함께 변모의 여정에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베드로 사도의 권고말씀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2베드1,19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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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곧 하느님의 현현입니다.
이 축일의 의미를 <본기도>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의 증언으로 신앙의 신비를 밝혀주시고,
~저희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공동상속자가 되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공동상속자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제자들과 함께 변화의 힘을 입습니다. 그 힘을 입고 우리도 변화될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산에 오르자 구름이 산을 덮었다. 주님의 영광이 시나이 산에 자리 잡고”(탈출 24,15-16) 모세를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시켰듯이 말입니다. 마치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마리아를 덮었”(루카 1,35)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변화를 이루시는 거룩한 영께서 오늘 우리를 그 빛나는 구름으로 덮어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힘에 덮인 이들입니다. 아버지의 크신 자비의 구름에 덮인 이들입니다. 이토록, 아버지께서는 변화의 힘을 주시고, 그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다니엘 예언자의 환시를 통해, 장차 벌어질 사람의 아들의 영광된 모습과 통치를 미리 보여줍니다.
그리고 <복음> 역시 장차 있을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을 미리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난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직전에 세 제자와 함께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던 중에 변모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단지 예수님 변모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만이 아닙니다. 제자들에게도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는 길’도 가르쳐주십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이는 당신 아들의 신원을 밝혀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곧 우리가 어떻게 살 때 변화를 입을 지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따라 사는 일이며, 그렇게 살 때 변화를 입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할 지를 가르쳐줍니다. 곧 지금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이요, 들려오는 말씀이 성취되도록 ‘말씀의 권능을 수락하는 일’이요, ‘말씀을 실행하는 일’입니다. 곧 자신을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집으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자신을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이 건물(초막)은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게 될 것’(에페 2,21-22 참조)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입니다.”(2코린 3,18 참조).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중요한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자신이 변모되기를 바란다면,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명’(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주님!
말씀 아래 있게 하소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말씀이 제게서 실현되게 하소서!
말씀에 응답하는 일, 바로 그 일을 제가 하게 하소서!
말씀의 권능으로 저를 덮으소서. 변모되게 하소서.
제 자신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가 되게 하소서.
오늘 말씀의 그늘 아래에서 비천한 제 몸이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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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옷이 눈처럼 하얗게 빛나는 모습으로 변모하신 날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면서 어릴 때 읽은 동화 중에 ‘미운 오리 새끼’가 생각났습니다. 백조의 알이 어찌하여 오리의 알 속에 있었습니다. 오리알 속에 태어난 백조는 자기가 오리인 줄 알았습니다. 다른 오리와는 외모가 다른 백조는 스스로 ‘나는 미운 오리 새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호숫가에서 우아한 백조가 있는 걸 보았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백조를 보면서 ‘참 아름답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뜩 물에 비친 모습을 보니 ‘미운 오리 새끼’는 우아하고 멋진 백조였습니다. 이제 미운 오리 새끼는 자신이 아름다운 백조였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멋진 날개를 펴고 백조들에게 날아갔습니다. 저도 어릴 때 제가 미운 오리 새끼라고 생각했습니다. 집이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육성회비를 내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신문 배달도 했었습니다. 운동 신경이 좋은 편도 아니었고, 손재주가 좋은 편도 아니었습니다. 신체적으로 체격이 좋은 편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제게 ‘기억력’이라는 재능을 주셨습니다. 저는 그 기억력 덕분에 남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는 공부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저를 부르셔서, 사제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거지가 된 왕자’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왕자가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왕자와 똑같이 생긴 거지를 만났습니다. 왕자는 거지와 옷을 바꿔 입었습니다. 거지의 모습이 된 왕자는 궁궐과는 다른 세상을 경험했습니다. 세상에는 아픈 사람도 많았고, 가난한 사람도 많았고, 굶주린 사람도 많았습니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서 고통받는 사람이 있었고,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서 괴로운 사람도 있었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서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었고, 악의 유혹 때문에 무너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거지가 된 왕자는 궁궐에 있을 때는 알 수 없었던 것을 배웠습니다. 다시 궁궐로 돌아온 왕자는 백성들의 아픔을 경청하는 왕이 되었고,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왕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헐벗은 사람을 보았고, 병든 사람을 보았고, 마귀 들린 사람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이끌지 않으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이 땅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만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르면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문득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변모는 무엇일까?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일까? 옷이 아름답게 변하는 것일까?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외적인 모습의 변모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신 것입니다. 그냥 하늘에 계셨으면 ‘이 꼴 저 꼴’ 안 보시고 편하게 계셨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되셔서 말구유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사람이 되셔서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 위에서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사람이 되셔서 제자들의 배반을 눈으로 보아야 했습니다.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변모는 몸소 사람이 되시려고 했던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변모는 ‘겸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도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늘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잔치에 초대받으면 윗자리에 앉지 말고 아래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는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여러분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여러분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변모는 ‘사랑과 겸손’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과 겸손이 세상을 구원하였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보면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보면서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텐트가 아닙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보면서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사랑과겸손’이라는 ‘변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염색을 하는 것도, 체중 조절을 하는 것도, 성형을 하는 것도, 화장하는 것도 변모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거룩한 변모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거룩한 변모입니다. 사랑과 겸손으로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이 거룩한 변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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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현실에 토대를 둔 예수님의 가르침!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8월 5일 화요일- 서른한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지혜의 선생님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어떻게 우리 삶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오시는지를 알려줍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지혜는 앎의 또 다른 방식으로서 포용성의 더 높은 차원에 있는 것들을 이해하게 해줍니다. 우리는 이것을 "변모" 혹은 비-이원론적 사고라고 부릅니다.
- 리처드 로어, 숨겨진 것들(Things Hidden)
리처드 로어는 지혜를 겸손과 진솔함에 토대를 기반을 두고 있으며 현실에 근거한 변모의 길이라고 여깁니다.
고통과 탄생, 죽음 그리고 재-탄생 (혹은 질서, 무질서, 그리고 재-질서) 이라는 경계 공간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책으로만 배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충분히 비워지고, 충분히 준비되고, 충분히 혼돈을 겪고, 충분히 불안정하게 되었을 때에만 알 수 있는 특별한 진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천재성입니다! 단지 신학을 배우는 교실에서 이 질문들을 풀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실상, 성경에 관한 것들은 어떤 것도 학문적 배경에서나 학문을 위해 쓰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겸손과 인내심으로 성경을 대해야 하고, 또 우리의 개인적 관심사를 버리고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더 깊은 의미를 깨닫게 해 주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이미 동의한 내용이나 찾고자 마음먹은 내용만 듣게 될 것입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요? 바오로가 말한 대로, "우리는 이 선물에 관하여, 인간의 지혜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말로 이야기합니다."(1코린 2,13). 이런 가르침의 방식은 정보(information)를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변모(transformation)를 위한 가르침의 방식입니다. 이것이 전체적인 초점과 목적을 바꾸어 줍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만지시고 가르치시고 변모해 주신 데에는 선결 조건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 공식적인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가톨릭 교회가 중세 때 스콜라 철학과 신학에 매료되어 있었지만 그분의 지혜는 스콜라 철학이나 신학에 근거를 둔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선생으로서 대개 무엇이 실재이고 무엇이 비-실재인지, 그리고 무엇이 일시적이고 무엇이 지속하는 것인지에 관해서 말씀하셨고, - 그러므로 이런 현실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는 교육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과 진솔함이 요구되었습니다. 수천 가지 방식으로 그분은 하느님께서 우리 삶으로 가장하여 우리에게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은 이것을 "개별성의 스캔들"(the scandal of particularity)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구체적인 가르침 방식에 대해 숙고해 보십시오. 그분은 여러 번 성전에서 가르치기도 하시지만, 대개는 사람들과 함께 길을 가시면서 가르치시고, 광야에서 가르치시고, 또 자연 속에서 가르치십니다. 그분이 드신 예들은 당신 주변에서 보신 것들이었습니다: 새, 꽃, 동물, 구름, 땅 주인과 소작인, 어린이, 빵을 굽고 청소를 하는 여인 등. 그런데 우리가 그분의 가르침을 이와는 다른 어떤 것(신학)으로 만드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체계적인 신학을 창안하여 가르치시기보다는 오히려 일상의 이야기와 비유, 그리고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훨씬 더 많이 가르치십니다; 이는 빛의 방식이라기보다는 "어두움"의 방식입니다. 그렇지만 이 가르침들을 통해 사람들이 보편적인 빛 안으로 뚫고 들어오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드시는 구체적인 사례들입니다. "개별적이고 독특한 것"이 대개는 우리를 보편적인 것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이 바로 시인들의 한결같은 이해 방식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85세 된 여성으로서 남성 지배적인 교회의 위계질서를 더 이상 존중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향심 기도 모임과 작지만 특별한 지향을 가지고 모인 성체성사 공동체에 참여하며서 위안을 찾고, 또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 그리고 그분의 현존을 더 깊이 알아차리게 됩니다. 관상 기도를 통해 저는 과거에 제도 교회 안에서 받은 주입식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은총을 입게 되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의 영적 여정과 이런 영적 여정에 함께하는 다른 이들과의 관계 맺음에 스스로 책임을 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저는 제 신앙이 나날이 더 강해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Gina S.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Things Hidden: Scripture as Spirituality, rev. ed. (Franciscan Media, 2022), 135–136.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Mishal Ibrahim,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예수님은 일상의 변모해 주는 진리 안에서 지혜를 발견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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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 이들....
오늘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에 14세기의 라인강변 신비주의자 중 하나이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제자인 요한네스 타울러(Johannes Tauler: 1300-1361)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복음 나눔을 시작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신성한 심연으로부터 불꽃을 내시어 영에 불을 붙입니다. 이 초자연적인 도움에 힘입어서 빛을 받고 정화된 영혼은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하느님을 순수하게 향하는 아주 고유하고 형언할 수 없는 상태로 이끌려집니다....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완전한 전환은 모든 이해와 모든 느낌을 초월합니다; 이는 그저 놀랍기 그지없어 어떤 상상으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 이 상태에서 정화되고 빛을 받은 영혼은 하느님의 신성한 어두움으로 가라앉습니다. 고요한 침묵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치로.... 여기서 영혼은 하느님 안으로 흡수되어, 이제는 같음과 같지 않음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 심연에서 영혼은 자기 자신을 잃어 버리고 하느님에 대해서나 자기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그분과 유사함이나 그분과 다름조차 알지 못하고,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저 영혼은 하느님과의 그윽한 일치 안에 잠겨 모든 구별의 감각을 잃게 됩니다."
우리 영혼도 이런 신비적인 상태에 이르는 것이 가능할까요? 물론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제가 자주 강조하여 말씀드리듯이, 우리의 이성적 논리와 판단을 우선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어떻고, 저것이 어떠해야 하고, 이러니까 이렇게 된 거고, 저러니까 이런 결과가 나온 거고... 등등의 논리와 이성적 판단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고는 온전히 영원한 타자이자 영원한 '나'이신 분께서 우리 존재 안에서 당신 사랑의 불을 붙이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무슨 뜬 구름 잡는 이야기냐고요?!
아마 여전히 '나'의 이성적 계산과 논리가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한은 이것이 그저 뜬 구름 잡는 이야기로 들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신다는 것"(요한 5,17)을 믿는 작은 그리스도들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세상적 논리와 일체의 생각을 내려놓고 그분께서 우리 존재 안에서 일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그분 사랑에 온전히 내맡겨 드리는 수양이 우리에게는 참으로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이성적 논리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한은 우리는 우리의 논리를 훌쩍 뛰어넘는 그런 사랑의 일치라는 것을 전혀 경험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올해 주님의 변모 축일에 우리는 루카 복음의 주님의 변모 이야기를 복음으로 듣습니다.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전하지만 기도의 복음이라고 일컬어지는 루카 복음에서만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가운데 예수님의 신성이 드러났나고 전합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기도에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우리의 이성 작용이나 생각이라는 것을 전제로 루카 복음의 주님 변모 이야기를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변모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큽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본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예전에 한 번 언급해 드렸듯이 성인이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어느 자그만 소녀가 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떠올리며 "빛을 통과시켜 주는 사람"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빛을 통과시켜 준다면 그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빛이 비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이 빛은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빛이라기보다는 영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빛일 겁니다.
우리 육신의 눈으로는 우리 서로를 볼 때 하느님의 모상을 볼 수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생각이나 인과응보적 논리를 내려놓고 진정으로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신다는 것"을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믿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하느님의 모상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세상적 이치와 이성적 논리로 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이해는 커녕 오히려 서로에 대한 반발과 미움만 커질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는 확신이 우리에게 있다면 하느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서 자라나도록 우리의 계산과 논리를 치워 놓으려는 노력(수양)을 우리는 자주 기울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난 저 사람이 너무 이해가 안 돼!" 하는 생각이 든다면, 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또 다른 이성적 논리의 잣대를 갔다 댄 것일 겁니다. 이런 이성적 논리의 잣대는 절대 의구심을 떨쳐 내 주는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더더욱 큰 의구심과 혼란과 적대감으로 우리를 몰고 갈 뿐입니다.
매일, 매순간 우리는 참된 기도를 해야 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더더욱 '내' 이성적 논리를 내려놓은 상태에서 하느님 안에 머물고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 봅시다! 당신의 빛나는 신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주님께 도움을 청하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주님의 신성한 빛을 내는 '성인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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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그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루카 9,28)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교회의 아들들이다
세 사람만 선택되어 산으로 따라갔습니다 ...순결한 믿음으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간직한 사람만이 부활의 영광을 볼 수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은 사람이었고(마태 16,19 참조), 요한은 주님께서 당신 모친을
맡긴 사람이었으며(요한 19,27 참조), 야고보는 첫 번째로 주교좌에 오른 사람이었지요.
-암브로시우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1
세가지 탄생
우리의 탄생, 하느님의 탄생, 하느님 자녀인 우리의 탄생
평화로운 침묵이 온 세상을 덮고 밤이 달려서 한고비에 다다랐을 때(지혜 18,14).
우리의 돌파는 우리의 새로 남을 구성한다. 그것은 요한 복음의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말하는 새로 남이다. 설교 17에서 엑카르트는 그것을 우리의 탄생과 결부시켜 말한다. 다른 곳에서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현재 속에 머무르는 영혼 안에서, 하느님은 자신의 외아들을 낳으십니다. 이 탄생에 의해 영혼도 하느님 안에서 새로 납니다. 그것은 하나의 탄생입니다. 영혼이 하느님 안에서 새로 나는 만큼 자주 아버지께서도 영혼 안에서 자신의 외아들을 낳으십니다.
여기서 핵심은 “그것은 하나의 탄생”이라는 문장이다. 우리의 탄생 내지 돌파,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탄생,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아들의 탄생을 이야기할 때, 엑카르트의 어법은 때때로 당혹스럽다. 분석의 관점에서 보면, 이 탄생들은 각기 다른 탄생으로 나뉜다. 하지만 사건 자체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현재” 속에는 하나의 탄생만이 있을 따름이다. 우리의 탄생, 하느님의 탄생, 하느님의 아들의 탄생은 하나의 탄생을 구성한다. 우리는 돌파를 자주 경험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하나의 탄생일 따름이다. “하느님은 이렇게 한다: 그분은 영혼의 가장 고귀한 곳에서 자신의 외아들을 낳는다. 그분이 내 안에서 자신의 외아들을 낳는 것과 같은 시간에 나도 아버지 안에서 그 외아들을 낳는다." 실로, 이 세 탄생은 한 탄생이다.(441)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1기: 1500~1700년
종교개혁과 가톨릭 개혁
제1절: 종교개혁의 전제들
중세 후기 교회의 폐해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경고음이었습니다.
개개인의 인간적인 배신은 언제나 있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폐해가 개인 차원이 아니라 제도 자체에 기초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는 점입니다.
즉, 교황직 자체에 구조적 결함이 있었고,
그로 인해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나쁜 추기경들이 나쁜 교황을 선출하고,
또 그런 교황들이 다시 나쁜 추기경들을 임명하는 악순환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교황은 교황령과 관련된 세속적인 이해관계에 깊이 얽매여 있었고,
설령 어떤 교황이 진심으로 개혁을 시도하고자 하더라도,
그 현실의 벽 앞에 무력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진지한 개혁 의지를 갖고 있었던 **고귀한 교황 하드리아노 6세(1522–1523)조차도
그 개혁을 실현하지 못하고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주교직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주교직은 봉건적인 구조에 얽매여 있었고,
그 속박에서 거의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이기적인 귀족들이 주교좌 성당의 참사회(장로회)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그 참사회가 자기들 편의 인물 가운데서 주교를 선출했습니다.
선출된 주교는 다시 귀족 가문에 예속되어,
그들을 위해 복무하고, 정치적 의무를 지는 구조에 놓여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귀족의 영향력을 끊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심지어 불가침처럼 여겨졌습니다.
이런 구조는 종교뿐 아니라 정치적 종속성과도 얽혀 있었습니다.
예컨대, 제네바가 프로테스탄트 도시가 된 결정적 배경은,
그곳 주교가 사보이 영주의 가문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주와의 정치적 대립은
결국 교회와의 대립, 나아가 신앙의 분열로 이어졌습니다.
이와 같은 교회-귀족-정치의 복잡한 얽힘은
도시, 교구, 수도원, 주교좌 성당 등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교좌 성당이나 공주 성직자단의 고위 성직자들 또한
비슷한 귀족 친족정치의 제약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그들 역시 가까운 귀족 집안의 이해관계에 얽매여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수도원들은
영적 중심지가 아니라, 귀족의 생활공간으로 변질되었고,
그곳의 분위기는 귀족적 세속 정신이 지배했으며,
정말로 영적인 삶은 거의 실종된 상태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위 성직자들도 가난과 비참함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적은 보수를 받으며 고단한 삶을 꾸리는 보좌 신부들,
제단에서 미사 집전과 작은 봉사로 근근이 살아가던 하위 성직자들은
실제로는 “성직자 프롤레타리아”였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해 보면,
개인의 배신이나 타락은 그들 개인의 도덕적 나약함 때문만은 아니었고,
그 시대의 사회 구조와 제도가 낳은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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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제가 많은 책을 읽는다고 사람들이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우선 읽은 책이 많을까요? 아니면 읽지 않은 책이 많을까요? 당연히 이 세상의 책 중에서 읽지 않은 책이 훨씬 많습니다. 많은 사람이 읽었다는 고전 중에서도 읽지 않은 책이 많고, 소위 필독서라고 불리는 것도 읽지 않은 책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도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저 책을 좋아할 뿐이지, 많이 읽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대단하지 않습니다. 대단해 보이는 사람도 별것 없습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살고 있습니까? 그리 부족함이 많으면서도 남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자기 단점보다 남의 단점을 더 크게 보려고만 합니다. 그 결과 주님의 뜻에서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주님께서 모범으로 보여주셨던 겸손을 간직해야 합니다. 나의 부족함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족함을 알고 남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것이 진짜 겸손이었습니다. 그래야 자기 영광을 드러내려는 교만에서 벗어나,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됩니다. 그만큼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이 드러나는 장소인 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십니다.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입니다. 단지 외적 변화가 아닌,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의 영광스러운 존재가 드러난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율법과 예언서를 대표하는 인물인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이때 베드로가 나서서 여기에 머무르게 초막 셋을 짓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영광의 순간에 계속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자기의 생각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이 생각이 잘못되었기에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지요.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이 소리가 울린 뒤에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지고 예수님만 보입니다. 모세나 엘리야보다 예수님이 중심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이나 예언서보다도 예수님 말씀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보다 세상일을 중심에 두려는 우리입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의 관점으로만 이해하고 행동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 자기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면서 주님의 뜻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당연히 우리가 그렇게 가려는 하느님 나라에서도 멀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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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길을 걸어가려면 자기가 어디로 걸어가는지 알아야 한다(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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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촛불 켜들고 묵주들 때에야 주님 참모습이
박윤식 [big-llight] 2025-08-05 ㅣNo.183958
우리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 14일)의 40일 전인 8월 6일에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낸다.
예수님의 이 영광스러운 변모는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어,
그들을 안심시키고자 이 ‘변모된 모습’을 미리 보여 주셨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 따로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내면의 깊숙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장차 예루살렘에서 하실 마지막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빛나는 존재가 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고 마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라,
그 죽음을 끝내 이기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시리라는 것을 미리 알려 주는 거다.
사실 그 자리에 그 옛날 그들 조상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겪으실 당신 수난과 죽음에 대하여 일렀다.
곧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시고 돌아가시는 것은 하느님의 계획이며,
이는 하느님께서 성경과 율법과 예언자들을 통하여 오래 전부터 밝히신 계획이라는 거다.
사실 모세와 엘리야 그 두 분은 구약의 예언자내지는 지도자를 대표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예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런데 그때에 베드로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그 영광의 자리에만 머물고 싶었기에.
하지만 십자가 없는 영광이 그 어디에?
우리 역시 이런 유혹에 끊임없이 직면할게다.
이는 고통과 희생 없이 영광만을 맛보려 할 때가 많기에.
그만큼 하루하루 바라보아야 할 많은 십자가가 주어지리라.
나날의 걱정으로 삶이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때로는 하느님께 불평불만을 쏟는다.
우리는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지닌다.
살인마처럼 보이는 자도, 천사처럼 느껴지는 이도 있다.
빛이 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둠의 그늘에 파묻힌 이도 있다.
또한 탐욕에 젖어 정신없이 바쁜 모습을 지니는가 하면,
모든 것을 잃고 망연자실한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모습은 ‘하느님 모상’일 게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본디의 모습으로 변해야만 한다.
그분을 믿는 우리는 덧없고 무의미하게 끝을 내어서는 결코 안 될게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절대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또 우리가 믿는 그분께서는 함께 아파하시고 고통을 함께 나누시며,
우리 삶에 동참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당신 본연의 거룩함이 드러난 게 언제였는가?
바로 기도하실 때였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일 게다.
거룩하게 변모하려면 먼저 기도해야 하리라.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탈출은 당신의 떠나가심,
곧 당신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종종 ‘겉모습’에만 초점을 둔다.
옷 하나 들고서는 거울 앞에서 요리조리 몸을 비튼다.
그렇지만 정작 참모습은 곧장 기도 때에 드러난다.
그것도 촛불 켜놓고 묵주 들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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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직 겸손과 믿음으로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박윤식 [big-llight] 2025-08-05 ㅣNo.183957
예수님은 티로와 시돈의 이교도 지역에 가셨다.
그런데 어떤 가나안 부인이 그분께 소리를 질러가며 호소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그녀의 이 부탁은 이교도 입장에서는 예수님께 대한 가장 최고의 극찬이나 다름없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그 여인의 자신의 딸에 대한 이 구원의 요청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서는 감히 청할 말이 아닐 게다.
여느 때는 예수님은 이런 청은 반드시 들어주셨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의 호소에 일체 대꾸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
사실 예수님 시대의 여인들은 사회에서 인격적으로 존중받지 못했다.
특히 이방인 여인들은 더 차별과 멸시를 받았으리라.
그들은 주님 은총에 대한 어떤 권리도 갖지 않았기에.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예수님이 이 냉정한 모습을 보이신 이유는
가나안 여인을 무시하거나 관심이 없어서가 아닐 게다.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드러내 보여, 믿음이 무엇인지를 진정 가르치고자 하셨으리라.
그녀는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더 극진히 매달렸지만,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단호히 거절하셨다.
믿음의 정도를 물으신 거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을 강아지에 비유하시는 예수님 대답에도
‘주님, 그렇습니다. 강아지들도 주인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그 버리는 그것도 감지덕지라며 매달렸다.
당신네 백성에게 먼저 베풀고는, 그래도 남는 것 좀 줄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매달림이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감동 받으신 우리 예수님이시다.
그처럼 강한 믿음으로 매달린 그 여인의 딸이 바로 그 시간에
호된 마귀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단다.
가나안 여인의 그 믿음은 예수님을 사로잡았으리라.
사실 그때만 해도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의 청을 들어주실 때가 정녕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녀는, 예수님만이 자신이 청하는 것을 ‘들어주실 메시아’라고 확신하였을 게다.
어디서 이런 믿음은 나왔을까?
그렇다.
딸을 살리려는 산고의 고통을 겪은 어머님만이 가지는 마음에서부터 나왔으리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딸을 구해 주실 분이 예수님밖에 없음을 알았기에.
누가 뭐래도 주님이신 예수님만이 자신의 이 애타는 심정을
치유해 주실 수 유일한 분임을 확신하였기에.
그래서 이교도인 그 여인은 처절하게 그분께만 매달린 것이다.
예수님 사랑은 어떤 신분과 지역을 넘어선다.
가나안 여인의 뛰어난 믿음의 본보기이다.
그녀는 주님 은총에 대한 어떤 권리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겸손하게 받아들였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어떤 권리도 감히 주장할 수가 없을게다.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총은 오직 당신 사랑의 선물이니까.
따라서 믿음으로 충만한 가나안 여인마냥 하느님의 자비하심에서 오는
무한의 은총을 얻으려면 끊임없이 청할 수밖에는.
사실 우리의 삶에도 크고 작은 갖가지 나름대로의 고통과 시련이 있을 게다.
저 가나안 여인처럼 예수님 구원의 손길만을 믿고
인내하면서 겸손하게 기도로 다가가면 참 좋겠다.
그분의 자비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믿음일 수밖에!
그 여인의 그 믿음을 아마도 제자들도 눈여겨보았으리라.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도 확실한 믿음으로 예수님께로 다가가야만 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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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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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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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늦게 올라오거나 다음날 또는 게재 아니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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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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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fmkorea.org/ofmhomily
위 “작은형제회 홈페이지– 나눔방– 말씀 나눔.” 리스트에서 ‘김명겸요한’으로 들어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오전 시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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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9,28ㄴ-36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따로 데리고 하느님께 기도하시려고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그분의 얼굴 모습이 거룩하게 변하고 의복은 하얗게 빛나지요. 성경에서 ‘흰 옷’은 하느님이나 천사들만 입는 것으로 표현되며 세상 종말의 날에 부활하여 영광을 누릴 의인들의 표징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시고 그분의 의복이 하얗게 빛났다는 것은 그분께서 하느님과 같은 천상적 존재이시며, 죽음을 겪고 난 후 부활하시어 영광을 누리시리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또한 영광에 싸여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도 예수님의 미래를 암시하는 표징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명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인물입니다. 또한 엘리야는 바알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 대한 참된 믿음으로 돌아오게 한 예언자입니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수많은 고초를 겪었지요. 예수님 역시 하느님 백성을 구원의 길로 이끌기 위해 고통을 당하실 운명이지만, 그분께서 걸으실 십자가의 길은 반드시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한편 베드로는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예수님을 보고 감동한 나머지 그 산 위에 계속해서 머무르자고 청합니다. 그러자 갑자기 하늘에 구름이 일더니 그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 말씀은 부활과 영광이라는 결과만 얻으려 들지 말고, 하느님의 뜻과 의도를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들으며 그분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 길의 끝에 다다른 이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부활의 영광을 누리시는 건 고통과 어려움을 동반하는 십자가의 길을 피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즉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명하며 따르셨기에 그분 옆에서 참된 영광을 누리시게 된 겁니다. 그러니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건 우리도 그분의 모범을 따라 철저히 하느님 뜻에 순명하는 신앙의 길을 걸으라는 초대겠지요.
주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신 사건이 갖는 의미는 그분께서 겪으신 수난과 죽음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으로,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참된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확신을 제자들의 마음 속에 심어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관점으로 오늘의 감사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뽑힌 증인들 앞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어 제자들 마음속에서 십자가의 걸림돌을 없애 주셨으며, 머리이신 당신에게서 신비롭게 빛난 그 영광이, 당신 몸인 교회 안에도 가득 차리라는 것을 보여 주셨나이다.” 십자가를 ‘걸림돌’이라고 표현한 것은 십자가 자체가 우리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어떤 마음으로 대하는가에 따라 나 스스로가 십자가에 걸려 넘어진다는 뜻이지요. 십자가가 ‘걸림돌’이 되는 사람은 신앙생활에서도 쉽고 편한 것만 찾는 사람입니다. 고통과 시련을 나쁜 것으로 여겨 싫어하고 회피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다 자신에게 그것이 닥치면 나만 재수가 없어서 이런 힘든 일을 겪는다며 불평 불만을 늘어놓는 사람입니다. 반면, 십자가를 하느님 나라로 올라가는 ‘디딤돌’로 삼는 사람도 있습니다. 쉽고 편한 길보다 주님 뜻에 맞는 길을 먼저 찾는 사람입니다. 나에게 고통과 시련을 겪게 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닥쳐오는 고통과 시련을 이웃의 슬픔과 아픔을 이해할 기회, 예수 그리스도와 더 깊이 일치할 기회로 삼는 사람입니다. 이런 이들은 십자가를 디딤돌로 삼아 하느님 나라로 올라갑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라고 거룩하게 변모하신 당신 모습을 보여주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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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307
8월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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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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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서울대교구 김용주 마태오(구의동(지)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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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뜻은 원대하게, 그러나 시선은 발밑을!>
타볼산 정상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베드로 사도에게 있어서 엄청난 충격이었던가 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던 스승님의 모습이 갑자기 변화되었습니다. 얼굴은 광채로 빛났으며, 입고 있던 옷도 새하얗게 빛났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말로만 듣던 이스라엘 민족의 대영도자, 엘리야와 모세가 눈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분위기에 살고 분위기에 죽는 사람이었던 분, 급하고 충동적이었던 베드로 사도는 갑작스레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황홀하고도 기상천외한 분위기 앞에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한 마디로 맨붕 상태에 빠졌습니다.
잠깐 동안의 천상 체험으로 인해 무아지경에 빠진 베드로 사도는 앞뒤 가리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루카 9,33)
베드로 사도는 비록 잠깐이지만 맛보고, 느끼고, 만끽한 천국 체험을 붙들고 싶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의 연속인 산밑의 세상으로 내려가지 않고, 여기 지금, 타볼산 위에서, 광채로 빛나는 인물들 사이에서 영원히 머물고 싶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를 위해 자신은 동료들과 함께 초막 셋을 짓겠다고 약속까지 합니다.
그러나 스승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청을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잠깐이지만 맛본 천상 체험을 뒤로 하고, 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잠깐 동안의 천상을 체험한 사도들이었지만, 하산(下山)해보니, 무정하게도 세상은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어제과 같은 피곤한 일상이 반복되고 있었고, 어제와 같은 인간 실존의 비참함은 되풀이되고 있었습니다.
아직 영광과 완성의 때가 도래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스승님으로 인해 최종적으로 도래할 그 순간을 맞이하려면, 먼저 그분처럼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 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타볼 산에서의 변모 사건을 통해 자신의 신원과 정체를 핵심 제자들에게 뚜렷히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외아들이시며, 머지 않아 십자가 죽음을 맞이하시겠지만, 죽음에 머물러있지 않으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실 것이며, 하느님 오른 편에 앉으실 것이며 세세대대로 세상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형제들과 공동체 식사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식사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 원장 신부님께서는 식사 후 기도를 하려고, 계속 분위기를 살피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한 식탁에서는 한 형제의 주도로 나라와 민족, 인류와 지구 온난화 등을 주제로 한 범국가적, 범세계적 대화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원장 신부님은 이런 말로 대화를 종료시켰습니다. “자, 그럼 나라는 나중에 구하고, 우선 마침 기도부터 바칩시다.”
그렇습니다. 이상은 원대하게, 뜻은 크게 품어야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늘 우리의 발밑을 향해야겠습니다. 매일의 귀찮고 짜증나는 일상사 안에 하느님께서 굳게 현존하고 계십니다. 부족하고 죄투성이인 우리 공동체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거룩한 산 위에만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귀찮겠지만 또 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야겠습니다. 형편이 좋든지 나쁘든지, 내려가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해야겠습니다. 조금 전에 맛본 감미로운 천상 체험을 이웃들에게 나눠야겠습니다. 저 아래로 내려가서, 복음 때문에 고생하고 박해받으며, 멸시당하고 배척당하면서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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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
<예수님께서 타볼산에 오를 때 이미 당신이 변하실 것을 아셨을까?>
찬미 예수님!
새해 첫날 헬스클럽은 왜 늘 인산인해를 이룰까요? 그리고 한 달 뒤에는 왜 그토록 텅 비어 버리는 걸까요? 우리는 모두 더 나은 내가 되기를 꿈꾸며 ‘변화’를 시도하지만, 그 결심이 작심삼일로 끝나고, 결국 제자리로 돌아와 있는 자신을 보며 실망하곤 합니다.
왜 포기할까요? 어쩌면 이제 변하는 것보다 편하게 먹고 마시는 것을 더 좋아하기를 선택하였거나, 혹은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이 사라지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나 일단 돈까지 줬으면 결과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이것을 끝까지 버티면 ‘변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기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기도하면 ‘반드시 변한다’라는 사실을 온전히 믿지 않으면 기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요즘 성당에서는 아이들 신앙학교가 한창입니다. 제가 겪은 일 중에 재미있는 차이가 있습니다. 개신교 신앙학교에 가는 아이들은 ‘오늘 밤 기도회에서 주님을 만날 거야!’, ‘뜨겁게 찬양하다 보면 성령을 체험할 거야!’ 하는 아주 강한 기대를 품고 갑니다. 그리고 정말 밤새 울고 웃으며 기도하면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뜨겁게 체험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 가톨릭 신앙학교는 어떻습니까? 물론 즐겁고 유익하지만, ‘기도해서 내가 변할 수 있다’, ‘기도 중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믿음과 기대는 상대적으로 약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안타깝게도, 성당에 열심히 다니던 아이가 친구를 따라 개신교 수련회에 갔다가, 난생처음으로 몇 시간씩 뜨겁게 기도하는 체험을 하고 와서는 “신부님, 하느님은 정말 살아계셨어요!” 하고 고백하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기도를 대하는 근본적인 차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기도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올라가셔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실 때, 홀로 계시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위대한 두 인물,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나타났습니다. 왜 하필 이 두 사람이었을까요? 이들은 바로 기도를 통해 우리가 변화되는 두 가지 핵심 통로, 즉 ‘은총’과 ‘진리’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한 예언자입니다. 그는 우리의 이성이나 노력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하늘에서 거저 주어지는 뜨거운 ‘은총’의 불을 상징합니다. 반면에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의 법, 즉 십계명을 받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삶의 기준이 되고 어둠을 밝히는 ‘진리’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변화는 바로 이 두 기둥, 즉 불같은 은총과 빛 같은 진리를 통해 일어납니다. 기도 안에서 만나는 이 두 가지는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나를 변화시키는 핵심 요인들입니다.
먼저, ‘은총’의 불로 변화된 한 남자, 영화 ‘미션’의 주인공 로드리고 멘도사가 있습니다. 그는 동생을 죽인 끔찍한 죄책감에 폐인이 된 채, 자신의 죄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갑옷 뭉치를 밧줄로 묶어 몸에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끌고 미끄러운 바위를 기고, 거친 폭포수를 맞으며 절벽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말로 하는 기도가 아닌, 그의 ‘몸으로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그가 변할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그 끔찍한 길을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정상에 올랐을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가 과거에 노예로 잡아들였던 과라니족 원주민 한 명이 다가와, 그의 목에 걸린 무거운 밧줄을 칼로 끊어줍니다. 순간, 갑옷 뭉치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나가고, 멘도사는 어린아이처럼, 혹은 한 마리 짐승처럼 통곡합니다. 바로 이것이 기도 안에서 받는 ‘은총의 불’의 열매입니다.
자신이 가장 상처 주었던 사람의 용서라는, 하늘에서 떨어진 불과 같은 은총을 통해 새로운 사람으로 변모하기 위해 올라간 모습이 예수님께서 기도하기 위해 타볼산에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변화는 이런 뜨거운 은총으로만 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여기 또 한 명의 남자가 있습니다. 서양 역사상 가장 명석한 두뇌를 가졌지만, 정작 자기 자신이라는 감옥에서는 한 발짝도 빠져나올 수 없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그가 절망의 끝에서 울고 있을 때, 어디선가 ‘집어서 읽어라!’(Tolle, lege!) 하고 외치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는 성경을 펼쳤고, 그의 눈에 들어온 구절은 이것이었습니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로마 13,13-14)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합니다. 그 구절을 다 읽는 순간, 마치 ‘확신의 빛’이 자기 마음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의심의 그림자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말입니다. 그는 ‘대낮’에 행동하듯이, 즉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주님 앞에서 살아가라는 그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그 한 문장의 진리가, 칼이 되어 그의 과거를 잘라냈고, 빛이 되어 그의 미래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그 한 말씀으로 바로 바뀌었을까요? 매일 빛 속에서 죄의 어둠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자신과 싸우면서 조금씩 변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복음은 분명히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 9,29)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그냥 일어난 신기한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본질을 알려주시기 위해, ‘내가 기도하면 어떻게 변하는지 잘 보아라. 그리고 너희도 이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라’ 하고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바로 ‘기도란 나를 변화시키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청하려고 하는 다른 모든 것들은 덤으로 얻어지게 됩니다. 내가 변하지 않아 은총을 청해도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큰 형님은 한때 매일 가위에 눌려 힘들었을 때 자기 전에 성호를 긋고 잤습니다. 그랬더니 기적처럼 가위에 눌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계속 성호를 그었고, 지금은 성당에 아주 열심히 다니고 있습니다.
열매가 무엇입니까? 자신이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하느님을 바꾸거나 이웃을 바꾸거나 환경을 바꾸려 하지 마십시오. 내가 먼저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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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옷이 눈처럼 하얗게 빛나는 모습으로 변모하신 날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면서 어릴 때 읽은 동화 중에 ‘미운 오리 새끼’가 생각났습니다. 백조의 알이 어찌하여 오리의 알 속에 있었습니다. 오리알 속에 태어난 백조는 자기가 오리인 줄 알았습니다. 다른 오리와는 외모가 다른 백조는 스스로 ‘나는 미운 오리 새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호숫가에서 우아한 백조가 있는 걸 보았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백조를 보면서 ‘참 아름답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뜩 물에 비친 모습을 보니 ‘미운 오리 새끼’는 우아하고 멋진 백조였습니다. 이제 미운 오리 새끼는 자신이 아름다운 백조였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멋진 날개를 펴고 백조들에게 날아갔습니다. 저도 어릴 때 제가 미운 오리 새끼라고 생각했습니다. 집이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육성회비를 내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신문 배달도 했었습니다. 운동 신경이 좋은 편도 아니었고, 손재주가 좋은 편도 아니었습니다. 신체적으로 체격이 좋은 편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제게 ‘기억력’이라는 재능을 주셨습니다. 저는 그 기억력 덕분에 남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는 공부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저를 부르셔서, 사제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거지가 된 왕자’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왕자가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왕자와 똑같이 생긴 거지를 만났습니다. 왕자는 거지와 옷을 바꿔 입었습니다. 거지의 모습이 된 왕자는 궁궐과는 다른 세상을 경험했습니다. 세상에는 아픈 사람도 많았고, 가난한 사람도 많았고, 굶주린 사람도 많았습니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서 고통받는 사람이 있었고,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서 괴로운 사람도 있었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서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었고, 악의 유혹 때문에 무너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거지가 된 왕자는 궁궐에 있을 때는 알 수 없었던 것을 배웠습니다. 다시 궁궐로 돌아온 왕자는 백성들의 아픔을 경청하는 왕이 되었고,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왕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헐벗은 사람을 보았고, 병든 사람을 보았고, 마귀 들린 사람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이끌지 않으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이 땅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만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르면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문득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변모는 무엇일까?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일까? 옷이 아름답게 변하는 것일까?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외적인 모습의 변모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신 것입니다. 그냥 하늘에 계셨으면 ‘이 꼴 저 꼴’ 안 보시고 편하게 계셨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되셔서 말구유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사람이 되셔서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 위에서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사람이 되셔서 제자들의 배반을 눈으로 보아야 했습니다.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변모는 몸소 사람이 되시려고 했던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변모는 ‘겸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도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늘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잔치에 초대받으면 윗자리에 앉지 말고 아래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는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여러분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여러분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변모는 ‘사랑과 겸손’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과 겸손이 세상을 구원하였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보면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보면서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텐트가 아닙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보면서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사랑과겸손’이라는 ‘변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염색을 하는 것도, 체중 조절을 하는 것도, 성형을 하는 것도, 화장하는 것도 변모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거룩한 변모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거룩한 변모입니다. 사랑과 겸손으로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이 거룩한 변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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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구약 성경이 신약 성경의 예고편이라면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의 완성이지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맞아 어머니이신 교회는 오늘 독서와 복음으로 무엇을 전할까요?
구약 성경의 후기 문헌인 다니엘 예언서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7,13)를 묘사합니다. 연로하신 분, 곧 하느님 곁으로 인도된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지며, 민족과 나라, 언어가 다른 모든 이가 그를 섬기게 되었다고 서술합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하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으리라는 묵시 문학적 메시지로 오늘 독서는 마무리됩니다. 이처럼 구약 성경에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는 인간의 희로애락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심판관이나 초월적 통치자의 모습입니다.
한편 다른 공관 복음서와 함께 루카 복음서는 영광에 싸여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를 나누시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이야기를 전합니다. 구약 성경의 이 두 인물은 율법서와 예언서를 대표하며,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계시의 역사를 요약합니다. 거룩한 모습으로 변모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둘과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베드로의 철부지 같은 제안이 무색하게 구름이 이 두 인물을 덮자,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다니엘서의 ‘사람의 아들 같은 이’는 복음서에 이르러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로 재해석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분 나라의 공동 상속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기쁜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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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9,28-36: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이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당신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얻으실 영광 받으신 모습이다. 이 모습을 제자들에게 미리 보여주심으로써 수난의 때가 되어도 제자들이 당황하지 않게 해주시려는 배려이다. 즉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그분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려 주신 것이다. 그러기에 항상 그분의 말씀을 따라야 함을 알려 주시는 것이다.
“이곳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루카 9,27)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는 장차 이 땅에 나타날 당신을 둘러싼 영광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 오실 것이다. 당신의 그 영광을 세 제자에게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그들을 데리고 산으로 가셨다. 그리고는 기도하신다. 그때 거기서 놀랍도록 밝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바뀌어 옷마저 번개처럼 번쩍이고 빛처럼 반짝였다. 거기다가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곁에 나타나 머지않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예수님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대화의 내용은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주시는 신비와 십자가 위에서의 고귀한 고통을 의미하고 있다.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 곁에 나타난 것은 그분이 바로 예언자들의 주님이심을 제자들이 알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주님의 영광을 보았다. 우리의 눈이 아무리 좋아도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더욱이 죄 많은 인간이 하느님의 영광을 견디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을 잠에 빠졌다고 표현한 것 같다. 그들은 나약한 잠으로부터 회개하고 깨어남으로써 그분의 영광을 보았고 그분의 위엄을 볼 수 있었다. 그분을 볼 수 있기 위해서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베드로는 말한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33절)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필리 1,23) 베드로 역시 사랑하는 마음과 열심한 행실로 초막 셋을 짓겠다고 약속한다. 베드로는 주님의 영광을 보고 하느님 나라가 왔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아직 주님의 구원업적은 시작 단계에 와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를 못하고 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34절) 그들을 덮은 것은 주님의 신비를 드러내는 거룩한 영이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칠 것이다.”(루카 1,35) 이 현상은 하느님의 말씀이 들릴 때 나타난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35절) 이 말씀은 거룩한 아드님을 가리킨다. 이 구름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음성에서 비롯하는 믿음의 이슬로 사람의 마음을 적시는 빛나는 구름이다. 아버지의 음성은 바로 십자가의 순간이 가까이 왔을 때, 그 모든 것은 당신의 자비로운 계획에 따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의 믿음이 비틀거리지 않도록 힘을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부활을 통해서 주님의 인성까지도 하늘빛에 의해 영광을 받게 되시리라는 것도 알려 주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지나치게 슬퍼하지 않게 해 주셨다.
제자들은 아직 연약한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음성이 들리자 겁이 나서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렸다. 주님은 자애로운 주님이시기에 말씀과 손길로 그들을 위로하며 일으켜 세우신다. 그분은 산 위에서 번갯불처럼 번쩍이셨고 해보다 더 밝게 빛나심으로 우리를 장차 드러날 당신의 영광의 신비로 이끌어 주셨다. 그리고 주님은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마태 17,9)라고 분부하신다.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친 사람 취급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말로만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삶을 통하여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도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려야 할 것이다. 주님의 변모 축일은 바로 우리의 변모를 위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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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쉬어 가자꾸나>
루카 9,28ㄴ-36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쉬어 가자꾸나>
갈
길이
아직
남았으나
여기까지도
힘들었을 테니
잠시 쉬자꾸나
더 가기 위한
쉼이었으니
한 걸음 또
가자꾸나
힘껏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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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십자가 없이는 신앙도 없고, 부활도, 구원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루카 9,28ㄴ-36)
1)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전하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신성과 하느님 나라를 직접 목격하고 체험했다는 증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는 말씀을 하셨을 때(루카 9,22), 제자들은 부활 예고 말씀은 흘려듣고, 수난 예고 말씀만 알아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 때문에 기가 꺾여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믿음과(확신과) 용기와 힘을 주려고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셨고, 하느님 나라를 미리 체험하게 해 주셨습니다. <목적지가 분명히 있고, 그곳이 정말로 좋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으면, 그곳까지 가는 길이 힘들어도 충분히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반대로 목적지를 모르거나, 아니면 목적지가 아예 없으면, 힘든 길을 굳이 걸어가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둘째 서간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줄 때,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한 것입니다. 그분은 정녕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2베드 1,16-18)
2)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라는 말은,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라는 말은, 평범한 보통 사람의 모습과는 다른, 천상적 존재의 모습으로 바뀌었다는 뜻이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는, ‘눈이 부셨다.’입니다. <이 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신성과 영광을 표현한 말들인데, ‘인간 언어의 한계’를 나타냅니다.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가 없어서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그친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을 목격한 일도,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증언입니다. 구약시대를 대표하는 두 사람이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는 말은, 그 두 사람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고 있음을 목격했다는 뜻입니다.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라는 말과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는 말은, 제자들이 ‘하느님 나라의 황홀경’에 빠졌음을 나타냅니다. <너무나도 행복하고 황홀해서, “영원히 이대로 이렇게 지내고 싶다.”라고 소망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라는 말도 제자들의 행복감과 황홀함을 나타낸 말입니다.
3) 여기서 ‘구름’은 ‘하느님의 나타나심’을 뜻합니다. 제자들이 하느님 말씀을 직접 들은 일도 중요한 체험입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는, ‘예수님은 메시아’라고 하느님께서 직접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에서 ‘그의 말’은, 바로 앞에 있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라는 말씀을 가리킵니다. 메시아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그 길 하나뿐입니다.
4)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라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완성되고 고백할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를 때에만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증언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십자가 없이는 신앙도 없고, 부활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서 충실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이신 분’으로 믿고, 또 하느님 나라가 정말로 행복하고 황홀한 곳이라고 믿어도, 지상에서의 인생을 생략하고 그곳으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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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하얗게 번쩍이는”>
오래 전에 뉴욕의 한 공동체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모임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켠에 연세가 드신 분이 한국에서의 당신의 화려한 경력(?)에 대해 소개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은 천주교 신자가 되기 전에는 주위에서 알아주던 말 그대로 ‘족집게 도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그 일을 하다 보니 자신에게도 식견이 생겼는데, 천주교 신자를 대번에 알아보는 경지에도 올랐다고 했습니다. 그러보니 우리 일부 나쁜 신자 중에 관상이나 점을 보러 있기는 있었나 봅니다. 그런데 끝말에 자신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 것은 관상이 잘 맞지 않는 사람은 거의가 천주교 신자였다는데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그때부터 천주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개신교 불교 다 각자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데 천주교의 특징은 보일 듯 말 듯 한 기쁜 얼굴이고 조용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나쁜 신자들을 놓고 이런 말을 하자니 그렇기는 하지만 그분은 바로 이 점이 가톨릭으로 들어와서 세례를 받고 이민 와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복을 누리고 있다는 결론 때문에 오늘 예수님의 모습과 연결시켜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 족집게 할머니의 말이 다는 아니겠지만 사람은 저 마다의 삶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쳐다만 보아도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심술궂은 심통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보다 더 다양한 모습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바라만 보아도 좋은 얼굴’은 하루 아침에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덕이 있고 믿음이 있고 마음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가득하다면 우리 얼굴은 기쁨이요 행복이며 참다운 평화일 것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목격한 주님의 기도하는 모습은 평소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눈처럼 희게 빛나는 모습이었고 모세와 엘리야와 말씀을 나누는 그 광경이 황홀해서 사도 베드로는 천막을 셋이나 그곳에 짓자고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묵시 중에 바라본 메시아의 모습도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양털과 같았습니다. 주님께서 높은 산에서 보여주신 그 모습이었습니다. 바로 수난과 죽음을 딛고 보여주시는 부활의 영광스러운 모습인 것입니다. 다니엘이 예시한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맞이할 영광을 이제는 주님께서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새겨진 미래의 부활의 주님 모습은 주님 죽음의 고통을 딛고 일어 설 수 있는 두고 두고의 위로요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부활을 희망하며 살고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된 모습을 우리도 나누어야 하겠지요?
때로 고통스럽고 힘든 순간이 있다하더라도 그런 것들에 우리가 찌프러지지 말고 주님의 부활의 희망 속에서 주님의 모습을 닮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좋으신 우리 주님의 모습을 이제 우리가 살며 가져야 할 아름다운 모습이 되도록 기도하며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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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김명식 가브리엘 신부님]
<말씀 새김에서 말씀 살기로>
매주 토요일 아침이면 서각 도구를 챙겨 각자(刻字) 전수 교육관으로 향합니다. 일 년 차 초보이지만 목판에 글자를 새기는 재미에 푹 빠져 두세 시간이 금방 지나갑니다. 처음 새김칼을 잡고 서툴게 획을 따라가던 칼끝이 생각납니다. 마음과 손이 따로 놀아 막막하기만 하고 삐뚤거리며 애태우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서툴기만 하던 칼끝이 꾸준히 반복하다 보니 조금씩 다듬어져 가는 변화를 느낍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서툴고 많이 부족합니다.
지난해 서각 교육을 마치면서 제출한 교육 수료 작품 두 점이 책상 앞에 걸려 있습니다. 하나는 저의 서품 성구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리 1,21)이고 또 하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는 말씀입니다.
두 작품은 다닐 행(行) 전서체 바탕에다 성경 말씀을 새겼습니다. 늘 이 말씀을 마주하면서 생각합니다. 말씀을 그저 새김에서 멈추고 만다면, 말씀을 살지 않고 바라보기만 한다면 죽은 말씀을 걸어 놓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타볼산에서 사랑하던 세 제자에게 장차 십자가를 통해서 완성하게 될 빛나는 참모습을 잠시 보여주심으로서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이때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마태 17,4)라는 제안을 하자 이어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라는 말씀과 함께 “일어나라."(마태 17,7)는 주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왜 일어나라고 하셨을까요?
일어난다는 의미는 소유의 삶을 사는 사람이 존재의 삶을 사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는 말씀으로 시작되었고 그 이후로 끊임없는 떠남의 역사였습니다. 그렇지만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것이 사람이기에 사람은 편한 것을 추구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오랫동안 길들여진 안식처를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또한 생경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을 감행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입니다. 그러나 떠남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지금의 이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향해 끊임없이 떠나는 삶입니다. 주님 말씀 따라 떠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권태롭고 숨이 막히며 발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게 똑같은 음성으로 “두려워하지 말고 일어나 떠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은 선택이 아닌 변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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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교구 김경주 이시도로 신부님]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사건을 알려줍니다. 불치병도 치유하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평소에는 여느 사람처럼 평범한 겉모습을 보여 주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왜 이 순간에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모습의 변화를 보여주게 된 걸까요?
함께 밥을 먹고 함께 걸어 다니던 예수님께서 범접하기 힘든 모습으로 눈앞에 계십니다.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에 제자들이 몹시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까지 등장했으니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겠죠.
평소와 다른 예수님의 모습, 이를 알기 위해서는 바로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는 제자들 앞에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공관복음인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두고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수난과 부활에 대해 명백히 이야기하셨음에도 제자들의 으뜸인 베드로는 반박하기까지 합니다. 수많은 기적을 베푸시는 주님께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러자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 베드로를 꾸짖으십니다.
수난과 부활의 첫 번째 예고, 그 이후 벌어진 일이 바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변모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높은 산에 오르시고 모습이 신비롭게 변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현존인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려주는 소리이죠.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 예수님께서 모습이 변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며 예수님의 말을 듣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믿음이 강하지 못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시며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 변모 사건에서 구름 속에서 들려온 말씀인 “그의 말을 들어라.”에 주목해 보면 좋겠습니다. 들려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믿는 삶일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은총을 더해주실 것입니다. 때론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삶 안에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도 벌어집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따르는 모습이 중요함을 오늘 복음이 말해줍니다.
우리의 믿음은 가장 어렵고 받아들이기 힘든 순간에 더 빛을 발하게 됩니다. 기쁠 때만이 아니라 힘들 때나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닥치더라도 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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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부님]
<고통 중에 계시는 주님의 찬란한 모습>
+찬미예수님
지난 학기 학생들의 점수를 매기고 발표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한통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점수가 매우 낮은데, 왜 이러한 점수를 받았는지 궁금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가르치는 윤리 과목은 점수를 매기기가 적잖이 까다롭습니다.
배운 것을 아무리 다 쓴다고 하더라도 논리력이 부족하면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습니다. 수업을 성실히 듣고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이 티가 나더라도 논리력이 떨어지면 윤리적으로 남들을 설득시킬 수 없으며 그저 좋은 말만 나열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사실 점수를 매기며 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나아가 학생들이 자신의 점수를 납득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학생의 메일을 찬찬히 읽어보니 자신이 받은 점수에 불만이 있다기 보다는 저의 피드백을 통해 앞으로 더 좋은 답변을 쓰고 싶다는 것이 요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다시 이 학생의 시험지를 꺼내들었고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학생의 답안지와 비교해 어떤 문장이 필요 없는 문장인지, 어떤 설명이 근거가 부족하고 논리력이 떨어지는지 일일이 표기해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이메일을 발송하며 또 다른 걱정이 들었습니다. 이 설명조차 본인이 납득하지 못하고 억울해하면 어쩌나 초임 교수로써 걱정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메일을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해당 학생으로부터 답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답변은, 해설과 함께 모범 답안과 자신의 답변을 비교해보니, 자신의 방법론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았고, 내용의 빈약함 또한 인지할 수 있었기에 앞으로의 공부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좀 더 좋은 답안지를 작성해 노고에 보답하도록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 답변을 보며 학생의 마음이 참으로 예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수에게 직접 메일을 보내 자신의 문제를 지적해 달라고 하는 것은 꽤나 조심스러운 일이었을 텐데, 굳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며 부족한 부분을 상기하는 것이 어렵고 마음 아픈 일이었을 텐데, 그 고통을 감내하는 적극적인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십자가의 고통 이후에 누리실 영광의 모습에 세 제자를 초대하십니다. 이렇게 변모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눈부시게 빛나는 황홀한 모습입니다. 이 지복직관과 같은 순간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참으로 영광스럽고 행복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홀린 듯 이야기 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베드로는 그 순간에 도취되어 오래도록 그와 같은 분위기에 머물고 싶었던 것입니다. 위대하고 거룩한 영광의 순간을 오래도록 연장시키고 싶었고 일상생활과 평범한 현실에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그는 하느님의 신비와 평온 안에 머물러 있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미래의 영광은 결코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위해 십자가의 수난과 고통을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오늘의 복음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오늘 복음의 앞부분을 함께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16,13을 보면 이 거룩한 변모에 앞서는 일련의 사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사건입니다. 뒤이어 예수님께서는 “나는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알려 주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주님,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만류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이렇게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예언하신 뒤 거룩하게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이는 곧 하느님의 영광에 이르기 위해 비참한 죽음의 과정, 사랑했던 모든 이들이 등을 돌리고 얼굴에 침을 뱉는 굴욕적인 과정,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하는 마리아의 고통이 있겠지만 이는 결국 찬란하게 빛날 주님의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한 번 저에게 자신의 문제를 지적해 달라고 청했던 학생을 생각해 봅니다. 분명 빨간색으로 덧칠해진 저의 갖가지 지적에 이 학생은 참으로 부끄러웠을 것이며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고 인정함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명확히 고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물론 다음 학기에 이 학생이 어떻게 시험을 치룰 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회를 통해 조금은 더 나은 답안지를 적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갖가지 어려움들 앞에 계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의 모습을 위해 십자가의 고통이 존재했음을 상기해 봅시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들, 어쩔 수 없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이런 저런 고통 속에 머무르곤 하지만 이 시기를 주님께 분명하며 항구히 주님께 걸어나가면 분명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해보다 환히 빛나는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고통 속에 계셨던 우리의 주님이 찬란한 모습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이분은 극심한 고통을 직접 겪으셨기에 우리 삶의 어려움을 아시는 분, 그렇기에 더욱 커다란 위로와 사랑의 손길을 보내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외아들을 보내신 하느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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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곧 하느님의 현현입니다.
이 축일의 의미를 <본기도>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의 증언으로 신앙의 신비를 밝혀주시고, ~저희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공동상속자가 되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공동상속자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제자들과 함께 변화의 힘을 입습니다. 그 힘을 입고 우리도 변화될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산에 오르자 구름이 산을 덮었다. 주님의 영광이 시나이 산에 자리 잡고”(탈출 24,15-16) 모세를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시켰듯이 말입니다. 마치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마리아를 덮었”(루카 1,35)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변화를 이루시는 거룩한 영께서 오늘 우리를 그 빛나는 구름으로 덮어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힘에 덮인 이들입니다. 아버지의 크신 자비의 구름에 덮인 이들입니다. 이토록, 아버지께서는 변화의 힘을 주시고, 그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다니엘 예언자의 환시를 통해, 장차 벌어질 사람의 아들의 영광된 모습과 통치를 미리 보여줍니다.
그리고 <복음> 역시 장차 있을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을 미리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난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직전에 세 제자와 함께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던 중에 변모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단지 예수님 변모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만이 아닙니다. 제자들에게도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는 길’도 가르쳐주십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이는 당신 아들의 신원을 밝혀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곧 우리가 어떻게 살 때 변화를 입을 지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따라 사는 일이며, 그렇게 살 때 변화를 입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할 지를 가르쳐줍니다. 곧 지금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이요, 들려오는 말씀이 성취되도록 ‘말씀의 권능을 수락하는 일’이요, ‘말씀을 실행하는 일’입니다. 곧 자신을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집으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자신을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이 건물(초막)은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게 될 것’(에페 2,21-22 참조)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입니다.”(2코린 3,18 참조).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중요한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자신이 변모되기를 바란다면,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명’(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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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주님!
말씀 아래 있게 하소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말씀이 제게서 실현되게 하소서!
말씀에 응답하는 일, 바로 그 일을 제가 하게 하소서!
말씀의 권능으로 저를 덮으소서. 변모되게 하소서.
제 자신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가 되게 하소서.
오늘 말씀의 그늘 아래에서 비천한 제 몸이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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