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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깨우러 가노라
요 11:6-16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2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요 11:6-16 / 그러나 곧 그들에게 가시지 않고 계시던 곳에 이틀 더 머물렀다가 7) 제자들에게 `다시 유대로 가자'고 말씀하셨다. 8) 제자들은 `선생님, 유대인 지도자들이 유대에서 선생님을 죽이려고 한 것이 바로 며칠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다시 그곳으로 가려고 하십니까?' 하고 말하며 반대하였다. 9)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기 때문에 걸려 넘어지지 않으나 10) 밤에 걸어 다니면 빛이 없기 때문에 걸려 넘어질 위험이 있다.' 11) 그리고 이어서 `우리의 친구 나사로가 잠이 들었다. 이제 내가 가서 그를 깨워야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12-13) 제자들은 나사로가 밤에 휴식을 취하려고 잠든 것을 두고 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하고 `그가 나았다는 뜻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14)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밝히 말씀하셨다. `나사로는 죽었다. 15) 내가 거기 있지 않았던 것은 너희를 위해 아주 잘된 일이다. 너희가 나를 믿을 수 있는 또 다른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로 가자.' 16) 그때 쌍둥이라는 별명을 가진 도마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그분과 함께 가서 생사를 같이합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다시 살릴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나사로에 대해서 예수께서 잘못 알고 계시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오해를 풀기 위하여 나사로가 죽었다고는 것을 확인시키시며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을 향해 길을 떠나십니다.
이틀을 더 유하시고(6-7)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간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하나님의 늦추심은 거절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의 기도가 바로 응답되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다리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응답이 지체되는 상황 속에서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다리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8-10) 제자들은 예수께서 맹인을 고쳐준 후 유대인들이 예수를 돌로 치려했던 그 쓰라린 체험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요 10:31-33). 그래서 그들은 유대의 그 위험한 곳으로 다시 가시려는 예수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루 중 열두 시간은 낮이라고 하십니다. 일반적으로 낮은 사람이 일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예수께서는 지상에서 죽음의 날이 오기 전에는 유대인들이 예수께 손댈 수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11-16) 예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 앞에 기뻐하고 계십니다. 나사로가 죽어서가 아닙니다. 나사로 사건을 통해 제자들이 믿음을 갖게 될 것을 바라보시며 기뻐하십니다. 이는 사람을 죽지 않게 하는 것보다 더 큰 이적을 보게 될 것이며, 이를 통해 제자들의 믿음이 더 자라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도마는 예수께서 유대 땅으로 죽으러 가시는 것으로 오해하고 예수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합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영적 수준이었습니다.
적용: 사람들은 육적으로 잠든 사람을 깨울 수 있으나 예수께서는 육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삶의 깊은 슬픔과 사망의 그늘을 거두시기 위해 우리 인생에 찾아오십니다. 그분을 맞아들이십시오.
예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제자들의 마음이 자라길 원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시련을 겪으며 믿음의 안목이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무엇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죽음의 길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생명의 길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를 믿고 따르는 우리도 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 설 교 >
그리스도의 고난에까지 이르게 하옵소서
인명진 목사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신 사순절 기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고난주간에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경건한 삶을 살기를 교우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기도 먹지 말고 오락도 삼가고 할 수 있는 만큼 금식하고 무엇보다도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일주일간이라도 새벽기도를 드리면 좋겠다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새벽기도는 습관이 되신 분은 모르겠지만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고행입니다. 그래서 몸살을 앓는 분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천주교는 고난주간에 우리 개신교보다 조금 더 엄격하게 신자들에게 고행을 요구합니다. 예를 들면 천주교는 전통적으로 이스트가 들지 않은 빵을 먹고 십자가를 들고 여러 계단을 오르내리는 등 그리스도의 고난을 직접 체험하게 하는 고행을 신자들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을 이렇게 겪어봄으로 나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을 깨닫고 그 고난으로 인하여 죄 씻음을 받고 구원을 받은 것을 감사하는 삶을 살아보자는 것을 교회가 전통적으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저와 같이 일하던 이숙경 집사가 고난주간을 맞아 저와 함께 금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숙경 집사 친구가 전화를 해서 어떻게 지내냐고 물어 고난 주간이라 금식을 하고 지낸다고 했더니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 몸을 생각해서 굶지 말고 밥 먹어라." 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제가 듣고 그 친구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고난주간이라고 일부러 사서 고생을 하지 않아도 우리가 세상을 사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인생이 고난입니다. 이런 저런 아픔과 고난이 우리의 삶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고난과 아픔이 날마다 우리의 삶에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고난주간에 일부러 고생을 안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은 충분히 고난을 겪으면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인생 모두가 다 고난주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실컷 고생을 하는 우리들에게 고난주간이라고 해서 고생을 더 강요하는 것은 조금은 잔인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기독교가 이 점에 있어서 조금 유별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종교는 이렇게 고난의 연속인 우리의 삶을 어떻게 편안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그것을 위해서 애를 쓰는 반면 우리 기독교는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나를 따라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고난이며 아픔이며 슬픔이며 죽음입니다. 눈물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려거든 고난의 십자가 아픔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고난과 아픔을 지니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입니다. 고난주간이 있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고난의 종교, 십자가를 지는 종교이며 고통과 아픔 속에서 살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경험하셨겠지만 고난과 아픔은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고 어떻게든지 피해보고 싶은 것이 본능적인 생각입니다. 옛날 어른들은 창자가 끊어지는 듯 한 배고픔의 고통이 생각날 것입니다. 겨울이 되면 살을 에는 듯 한 추위 그 고통이 기억나실 것입니다. 땀 흘리며 뼈가 부서지도록 일하던 노동의 고통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저는 무자비한 고문의 고통을 생각하며 몸서리를 칠 때가 있습니다. 육신이 병들었을 때 겪는 고통은 말할 수 없습니다. 말기 암환자들은 고통이 너무 심해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말합니다. 병으로 인한 고통이 정말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고난을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소망입니다. 병원 진료 과목 중에 통증클리닉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치료과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사가 병을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통증을 없애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통증도 병입니다. 병중에 병입니다. 아픔이 없게 해야 합니다.
아무튼 이런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안 해도 되는 일부러 당해야 하는 고난주간은 솔직히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내가 당하는 이런 저런 고난만으로도 충분한데, 지금 겪고 당하는 고난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어떻게 하면 여기에서 벗어날까 하는 고민에 쌓여서 지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교회를 다니고 신앙을 가지는 이유도 우리의 삶의 고통과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한, 어떻게 하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일부러 고난을 당해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주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은 우리들이 인생에서 겪는 수많은 고난은 도대체 그 종류가 몇 가지나 될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각각의 고난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며 그 이유가 무엇이고 무엇 때문에 생기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암은 불치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의학의 발달로 말미암아 암이 불치병이 아니라고 합니다. 며칠 전 신문에 국립암센터에서 조사하여 발표한 것에 의하면 암을 발견해서 수술을 한 후에 십년동안 생존한 생존율이 여자들은 58.9% 거의 60%정도라고 합니다. 남자들은 그보다 낮은 39.1% 40% 가량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암에 걸리면 6개월에서 1년 정도 살다가 죽게 되었는데 이렇게 10년 이상 살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새로운 치료약이 많이 나왔지만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암의 종류를 분류하는 기술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동안은 암이면 다 암인 줄 알았습니다. 예를 들면 그동안은 폐암이면 다 폐암이라고 생각했는데 연구에 의하면 폐암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그냥 무턱대고 치료를 했는데 지금은 암의 종류가 무엇인지를 알아서 거기에 맞는 치료를 하기 때문에 치료율도 높고 생존율도 높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통과 고난은 한 가지가 아니라 종류가 다양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종류가 다양한 것처럼 그 고난을 가져오는 이유도 다양합니다. 암도 종류에 따라 각각 다른 약을 써서 치료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의 고난도 무슨 종류의 고난인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어디에서부터 오는 고난인지 연구하고 대처해야 그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제가 오늘로부터 시작해서 다음 주일 그리고 다음 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특별새벽기도회 시간 동안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도대체 몇 가지의 고난이 있으며 각각의 고난을 가져오는 이유가 무엇이며 어떻게 그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들을 성경 말씀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끝없이 괴롭히는 고난에서 벗어나서 고통과 눈물과 아픔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이 고난을 당하신 이 고난주간에 깊은 명상과 고난에 대한 성경적인 해답을 얻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겪는 고난이 몇 가지나 될까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지금 내가 당하는 고난이 몇 가지나 되는가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시간이 나시는 대로 종이에 써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 인생을 괴롭히는 고난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것을 말입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인생을 괴롭히는 고난의 종류가 수백 수천 가지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고난의 종류를 크게 몇 가지로 분류해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섯 가지 정도의 고난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는 가운데 오늘은 그 첫 번째 고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째 불가항력적으로 운명적으로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 개인의 책임이 아닙니다. 나와 관계가 없는 아주 억울한 고난입니다. 예를 들면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불가피하게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내 개인의 책임이 아닙니다. 내 입장에서는 참 억울한 고난입니다. 지난 해 이맘때 일본 후쿠시마에 지진이 일어나고 쓰나미가 덮쳤습니다. 우리가 텔레비전에서 보는 대로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가족을 잃고 조상 대대도 살던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고난이 누구의 책임입니까? 개인이 잘못해서 겪는 고난이 아닙니다. 누구 개인의 책임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일본에서 살았다는 것, 일본 중에서도 후쿠시마에서 살았다는 이유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이를 데 없는 고난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이런 고난이 있습니다. 수해로 가뭄으로 인한 고난이 있습니다. 더위 때문에 죽는 사람도 있고 추위 때문에 자연재해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누구의 잘못으로 인한 것은 아니지만 피할 수 없는 고난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사는 사람은 아프리카라는 지형 때문에 당하는 여러 가지 고난이 있습니다. 물 때문에 질병 때문에 특별히 말라리아 때문에 엄청난 고난을 겪습니다. 제가 북한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북한 사람들은 같은 한국 사람인데 북쪽에서 태어났다는 그 운명적 이유 하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이곳저곳에서 노래를 부르는 북한 젊은 여성들이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남쪽에 태어났으면 대단한 활약을 할 사람인데 단지 북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힘들게 인생을 살아갑니다. 운명적인 고난입니다. 북에서 태어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운명적인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벗어날 수 없는 고난입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더라도 일제하에 사신 분들은 엄청난 고난과 고생을 했습니다. 육이오 전쟁 때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피난가고 굶주렸습니다. 운명적인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고난입니다. 본인의 잘못은 아니지만 말할 수 없는 아픔이요 고난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이런 고난이 있습니다.
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다 병으로 인한 아픔과 고난을 겪었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최근에 치통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는데 평소에 이를 잘 관리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루에 세 번 이를 잘 닦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 서두르다가 발목을 다쳤습니다. 나이가 들었으니 천천히 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나이가 들면 병이 들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오래 쓰면 불가피하게 부서지고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병도 인간이 피해갈 수 없는 고통의 터널입니다. 운명적 고난입니다. 싫든지 좋든지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고난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제가 성경을 읽는 가운데 아주 중요한 말씀을 발견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9절에서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당하게'라는 말을 원문을 찾아보니까 '애매하게' 라는 뜻입니다. 애매하게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을 생각하고 슬픔을 참으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쉬운 성경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억울하게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생각하고 말없이 참는다면 하나님은 그런 그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애매하게 억울하게 부당하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당하는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내가 잘못해서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아무런 잘못이 없이 당하는 고난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이 역사 속에서 당하는 고난 이 땅에서 살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도 그런 고난이 있습니다. 이유가 애매한 당하는 자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고난이 있습니다. 이런 고난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말없이 참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불평을 하고 불만을 갖고 신세타령을 하고 운명을 탓하게 됩니다. 나라를 욕하고 지도자를 욕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지난해 지진이 나고 쓰나미가 몰려와 피난을 가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중계했는데 아직도 제 기억에 생생한 장면이 몇 개 있습니다. 피난 길에 후쿠시마에서 다른 지방으로 피난을 가는 길은 자동차가 빽빽하지만 반대 차선에는 차가 한 대도 없는 것입니다. 피난을 가는 사람들이 길에서 5-10시간 씩 기다리는데도 아무런 불평이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같으면 옆 차선이 비어있다면 다 그리로 몰려갔을 것입니다. 이게 다 지도자를 잘못 만난 탓이라고 지도자를 욕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에는 이유 없는 고난, 억울한 고난을 당한다고 해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말없이 참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데 하나님께서 무슨 생각이 있으시겠지 생각하고 신세타령하지 말고 운명을 탓하지 말고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묵묵하게 참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기뻐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지만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삶 가운데 이유가 없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고난이 있습니다.
저희 세대의 사람들은 억울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희가 어렸을 때는 좋은 반찬이 있으면 다 어른들이 잡수셨습니다. 좋은 반찬 근처에 숟가락 한번 가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어른이 되어 대접을 받을까 했더니 이제는 어린이가 대접받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나이든 사람들을 귀찮게 생각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저희가 젊었을 때는 어린이들이 많아서 천대를 받았는데 지금은 노인이 많아서 천대를 받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해보면 참으로 억울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침묵해야 합니다. 당사자의 입장에서 억울하지만 말없이 참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세상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시니 받아들이고 참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중에 내 책임이 아닌 운명적인 고난을 당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묵묵히 참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큰 깨달음과 은혜가 되는 말씀이기를 바랍니다.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사람들
박종순 목사
5절에서 사도요한은 "하나님은 빛이시라 "고 선언했습니다. 요한복음 1:9을 보면 예수님을 "참빛, 곧 각 사람을 비취는 빛이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8:12절을 보면 주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칸디나비아의 겨울은 길고 지루합니다. 겨울이 되면 낮의 길이가 세 시간밖에 되지 않습니다. 춥고 바람불고 음산합니다. 한창 일할 시간인데도 깜깜한 밤이 됩니다. 낮의 길이가 짧아 햇빛을 보는 시간이 짧고 비가 자주 내리고 구름 낀 날이 많은 나라일수록 우울증 환자와 신경통 환자가 많습니다. 그리고 자살자 수도 많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는 면적은 작지만 복 받은 나라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구분이 확실합니다. 봄 여름 가을은 햇빛이 작열합니다. 봄이면 꽃 피고, 여름이면 녹음 우거지고, 가을이면 낙엽 지고 오곡이 여물어 풍성합니다. 겨울이면 흰눈이 덮이고 얼음 꽃이 핍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이런 절기조건을 가진 나라가 없습니다. 햇빛도 열대지방처럼 뜨겁지 않고, 겨울날씨도 한대 지방처럼 춥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1200만 명, 인구 4분의 1이 영원한 빛이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5절은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 고 했습니다.
햇빛은 전 세계를 동시에 비취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은 동시에 전 세계를 비취십니다. 햇빛은 식물을 자라게 합니다만 하니님의 빛은 인간의 영혼을 살립니다. 햇빛은 반대편에서는 그늘을 만듭니다만 하나님의 빛은 그 어느 곳에서나 어둠이 없습니다. 우린 오늘 그 빛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신체내부를 촬영하여 질병유무를 밝혀내는 방법이 여러 가지입니다. X레이 촬영법도 있고, 내시경 촬영법도 있고, CT촬영(단층촬영)법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CT촬영 법은 마치 돋보기를 끼고 손으로 다듬듯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샅샅이 촬영하여 질병유무를 판독해 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은 내시경을 집어넣고 필름을 집어넣고 CT촬영기 앞에 드러누울 필요도 없습니다.
시편 139편을 보면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오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며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어둠을 밝히고, 세상을 구원하는 빛이십니다. 조금도 어두움이 없는 영원하고 완벽한 빛이십니다.
본문은 빛 가운데 살고, 빛과 함께 살고, 빛을 향해 걸어가면 어떤 복이 임하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7절 이하를 보면 빛 가운데로 걸아가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1. 바른 교제가 이루어 집니다.
7절을 보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라고 했습니다.
저는 실내조명이 밝은 것을 좋아합니다. 교회도, 가정도, 식당도, 찻집도 밝은 것이 좋습니다. 창 밖으로 하늘과 산과 바다와 강과 나무가 보이면 더 좋습니다. 앞에 앉은 사람 얼굴도 잘 안보일 정도로 조명을 어둡게 하고, 거기에 음산한 음악까지 겹치면 마치 해적 소굴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게 됩니다. 대부분의 범죄나 강력사건은 밤에 일어납니다.
우리는 밝은 것을 좋아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80%는 갱년기 현상으로 오는 우울증을 겪게 된다고 합니다. 우울증이 심해지면 가슴이 답답하고, 울고 싶고, 고층에서 뛰어내리고 싶고, 달리는 차에 달려들고 싶고, 세상만사가 귀찮아 집니다. 감기 걸린 것처럼 열이 오르고 밤이면 불면증으로 시달립니다. 여성에 비해 비율은 작지만 남성 우울증도 비슷합니다.
전문가의 견해는 누군가로부터 내 감정을 이해 받고 공감 받을 때 우울증이 치료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격의 없이 만나서 위로해 주고 인정해주는 사람과의 관계가 우울증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약이라는 것입니다. 우울증 환자가 우울증 환자와 만난다든지 함께 살면 그 집안은 공동묘지가 되는 것입니다.
우울증환자는 음악이나 드라마나 영화도 음산하고 비극적인 것, 삼각관계로 얽힌 것들은 좋지 않습니다. 코미디 프로같은 밝고 경쾌한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찬송도 기도도 성경도 소리내서 부르고 읽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겐 빛 되신 하나님이 날마다 시간마다 어디서나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43:5절을 보면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고 했고, 마태복음 28:20을 보면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고 했습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듀크대학병원 정신의학 교수인 해럴드 쾨닉 박사는 96년 1월부터 97넌 3월까지 55세 이상 된 중환자 596명을 대상으로 질병을 극복하는데 신앙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조사했습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며 신앙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일수록 사망위험률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마귀 때문에 질병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수록사망률이 높았습니다.
쾨닉 교수는 "환자들의 신앙이 치료과정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를 조사결과 확인하게 되었다 "고 말했습니다.
빛 가운데로 걸어야 빛 되신 하나님을 믿고 살아야 내가 밝은 사람을 살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밝은 사람은 밝은 사람과 교제하고 살아야 합니다.
1950년대 인기 최고의 미녀 배우 오드리 햅번은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온갖 명성과 부와 영광을 한 몸에 거머 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말년을 헐리우드에서 마감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굶주리고 헐벗은 땅 아프리카를 찾아가 굶주린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밤 그녀는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남긴 말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또 다른 손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는 자신을 위한, 하나는 다른 사람을 도와주기 위한 손길이라는 사실을. "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웃과도 바르고 정당한 교제를 나눌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7절을 보면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9:22절을 보면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 "고 했습니다. 구약시대 사람이 지은 죄를 사함 받으려면 짐승을 잡아 그 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반드시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를 피의 제사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은 짐승의 피 대신 예수님이 대신 죽으시고 그 피로 우리 죄를 사해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9:12절을 보면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스리라 "고 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으면 그 피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게 됩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여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문제를 풀지 못합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 병원에 가고, 자동차를 고치기 위해 공장에 가야 합니다. 죄사함 받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교회에 나오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9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위대한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죄를 사하시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아멘.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을 신뢰하고 모든 것, 죄, 걱정, 근심, 불안 따위를 맡기는 것입니다. 평소 걱정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그 걱정거리가 실제 상황이 됐을 때 대처 능력이 없다고 심리학자들은 말합니다. 걱정한다고 문제가 풀리지 않습니다. 불안에 떤다고 문제나 걱정이 떠나지 않습니다. 발등을 찍고, 손가락을 자른다고 해서 죄가 물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내가 죄인임을 자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모리스 장드롱은 20세기가 낳은 10대 첼리스트중의 한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920년 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때만 해도 카세트나 텔레비전이 없었던 때라 오직 악보만을 들어다보며 그는 연습 또 연습을 했습니다.
어느 날 피카소를 만나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첼로입니다. 선생님이 저를 위해 첼로 그림을 한 장 그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 라며 부탁을 했습니다. 피카소는 흔쾌히 "좋습니다. 멋진 첼로를 하나 그려 드리지요 "라며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몇 번을 만났는데도 그림 이야기는 일언반구도 없었습니다. 아마도 피카소가 약속을 잊어버렸나라고 생각하고 장드롱 역시 그 약속을 잊어 버렸습니다. 10년이 지난 어느 날 피카소가 장드롱을 만나자 불쑥 그림 한 장을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뭐냐 "고 묻자. 피카소는 "당신이 첼로를 그려달라는 말을 듣고 10년 동안 날마다 첼로 그리는 연습을 했습니다. 이제야 겨우 내 마음에 드는 첼로를 그렸기에 당신에게 주는 겁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장드롱도 피카소도 연습 연습 또 연습. 훈련 훈련 또 훈련을 반복한 위인들이었습니다.
빛이신 하나님을 향해 가는 것을 신앙 생활이라고 합니다. 가는 길이 험할 수도 있고 거칠 수도 있습니다. 가파른 언덕이어서 숨이 찰 수도 있고, 비탈길이어서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태산을 넘고 험곡을 지나 빛을 향해 가야 합니다.
옛 시조가 생각납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건만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하더라」
어두운 쪽으로 가지 맙시다. 밝은 빛을 향해 갑시다.
죤번연이 쓴 「천로역정」소설을 보면 어떤 기독교인이 천성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가는 길이 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허영의 도시, 유혹의 도시가 있는가 하면 맹수가 길을 막고, 고통이 앞을 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헤치고 천성을 향해 길을 가고 있습니다. 가야하고, 가야 살고, 가야 주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우린 빛을 향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중단하지 맙시다.
멈추지 맙시다.
병실에서 임종을 기다리며 숨을 몰아쉬는 집사님에게 "집사님 천국을 바라보십시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다른 것은 바라보지 마십시요. "라고 했을 때 ri냘픈 목소리로 "아멘 "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분은 이틀 후에 하나님의 나라로 이사가셨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주저앉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빛을 향해 갑시다.
의리의 사나이
이정선 목사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말처럼 그렇게 단순한 일도 아닙니다. 아무리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평소에는 믿고 따르던 사람이지만, 나와 의견이 다를 때는 그를 신뢰하고 지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미국의 한 드라마 내용인데, 테러범들에 의해 미국이 핵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테러를 아랍권 세 나라의 고위관리들이 사이프러스에서 모여 모의한 내용의 녹음 파일이 입수되었습니다. 정부 내에서는 즉각 이 세 나라에 대한 보복공격을 준비합니다. 그러던 중 테러범들을 쫓던 현장요원으로부터 사이프러스 녹음이 위조되었다는 첩보가 대통령에게 보고됩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보복공격을 중단시킵니다. 증거가 위조된 것이라면 무고한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현장요원이 금방 증거를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는 동안에 정부 내에서는 대통령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끓어오릅니다. 증거도 없는 일개 현장요원의 말에 따라서 보복공격의 타이밍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대통령이 우유부단해서 이 위기를 헤쳐 나갈 능력이 없다고 판단합니다. 대통령이 가장 신임하던 비서실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대통령을 만드는 데 일등공신이었고, 또 대통령을 믿고 존경하지만, 이번에는 대통령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각료들이 대통령을 탄핵하고 비서실장도 거기에 가담합니다. 대통령은 구금되고 부통령이 대통령이 되어 보복공격을 재개합니다. 그렇게 보복공격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 마침내 현장요원이 녹음이 위조되었다는 증거를 찾아냅니다. 부통령은 탄핵조치를 즉각 취소하고 대통령이 복귀합니다. 대통령은 복귀하자마자 비서실장을 해고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네만큼은 끝까지 나를 믿고 지지했어야 했네.”
요한복음은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의 갈등을 매우 첨예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전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요단강 건너편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거기서 한동안 머물고 있는데,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 말을 듣고도 이틀이나 더 머물러 계셨습니다. 제자들 생각에는 예수님이 다시 유대로 돌아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시는 것 같았습니다. 나사로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목숨이 위태로운데 다시 유대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틀이 지나자 예수님이 갑자기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일제히 일어나 반대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한 것이 언제인데, 또 그곳으로 가신다는 말입니까?” 제자들에게 나사로의 목숨과 예수님의 목숨 가운데 선택하라고 하면 당연히 예수님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한 유대로 돌아간다면, 예수님뿐 아니라 제자들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겠다고 유대로 돌아가신다면, 그것은 큰 판단착오임에 틀림없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수님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 말씀이 완전히 동문서답입니다.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낮에 다니면 실족하지 않고, 밤에 다니면 캄캄하니까 넘어질 것이다.”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더니 또 하시는 말씀이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구나. 내가 가서 깨워야겠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이고, 잠들었으면 금방 낫겠네요. 깨우려고 거기까지 가실 필요가 뭐 있습니까?” 제자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더라도 예수님이 유대로 가시면 안 될 이유와 근거로 삼으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편견 또는 선입견의 결과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유대로 가시면 안 된다는 선입견으로 모든 사물과 현상을 접근하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잖아요? 남편이 미우면 남편 하는 짓이 다 꼴 보기 싫습니다. 반면에 마누라가 사랑스러우면 처갓집 말뚝에다도 절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 선입견을 바꾸는 것입니다. 좋은 선입견, 좋은 세계관을 갖는 것입니다. 선입견이 바뀌면 인간이 바뀌고 세상이 바뀝니다.
지금 이 제자들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귀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예수님 하시는 말씀들이 얼마나 중요한 내용인지 모릅니다. 낮 열두 시간 동안에는 넘어지지 않지만, 밤에는 넘어진다는 말씀은, 메시야의 생애와 사역의 타이밍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있어서 이 타이밍의 개념이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때가 되지 않았다는 말씀을 종종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지금은 아직 죽으실 때가 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또 우리 친구 나사로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친구라고 부르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나사로를 친구라고 하실 만큼 사랑하셨습니다. 그 친구를 위해서 유대인들이 이를 갈며 기다리는 유대로 가시겠다는 것은,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려고 죽음의 자리로 내려오신 메시야의 사역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나사로를 ‘우리 친구’라고 하심으로써 그 친구의 관계에 제자들까지 포함시키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성된 거룩한 백성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종종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가 어떻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잠을 잔다는 것은 다시 깨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그대로 영원히 끝장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깨어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눈을 감으면 저 세상에서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소망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잠들었으면 금방 낫겠습니다.” 아픈 사람이 한번 깊이 자고 나면 낫는 수가 있잖습니까? 자기들 생각과 예수님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무조건 튕겨 나가버립니다. 우리의 마음이 뒤틀려서 하나님과 코드가 맞지 않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습니다. 내가 마음의 문을 꽉 닫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예수님이 참 답답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죽었다고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하시는 말씀이, 나사로가 죽을 때에 거기 계시지 않아서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이틀이나 그냥 계셨던 것은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렸다는 것이 되겠군요.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셨다가 다시 살리시려고 작정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제자들로 하여금 믿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아직도 뭔 소리인지 모릅니다. 도마가 뜬금없이 일어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도마 하면 ‘의심 많은 도마’라는 별명으로 유명합니다. 사실 도마는 이 별명이 억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마 아니라 다른 제자였다라도 그 상황에서 그렇게 말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도마가 여기서 벌떡 일어나서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외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고, 제자들은 한사코 그런 주님을 말리는 갈등의 국면에서, 갑자기 도마가 예수님 편을 들고 나옴으로써 팽팽한 긴장의 균형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목숨도 걱정이 되지만, 자기들의 목숨도 걱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도 유대로 돌아가시려는 예수님의 뜻이 확고한 것을 보고, 도마는, 비록 자기와는 의견이 다르지만, 예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 결정에는 자기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동료 제자들에게까지 같이 죽으러 가자고 권유하고 설득합니다. 이미 제자들의 무리는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도마는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 그들의 믿음의 수준이 그런 단계입니다. 뒤에 14장에서도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간다고 하시면서,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또 도마가 나서서 말합니다.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모르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 도마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유명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도마는 아직 믿음은 없지만, 의리는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목숨 아깝지 않은 사람 없겠지만, 자기 목숨보다 예수님과의 의리, 즉 예수님과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비록 자기 생각과는 다르지만, 예수님이 그렇다고 하시면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것은 책망 받아야 할 일이지만, 의리와 예수님에 대한 신뢰는 칭찬 받을 만합니다.
의리는 믿음 이전에 갖추어야 할 기본입니다. 그 기본 위에 믿음이 들어가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문제 일으키는 사람들의 하나같은 특징이 믿음은 있다고 하는데 의리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도리를 다 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도모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좋은 땅에서 좋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좋은 성품 위에 좋은 믿음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 성품이 처음부터 까탈스러웠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주의 말씀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영광에 더 가까이 가게 된다면, 그만큼 우리의 까칠한 성품도 다듬어지고 비겁하고 무성의하던 우리의 행동도 성숙하게 변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열매,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조성하신 하나님의 손이 여러분의 마음을 만지셔서 거룩한 믿음을 담은 아름다운 인격으로 거듭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눈물
요 11:11- / 문기태 목사
지금 중국 땅에는 굶어 죽지 않으려고 북한 땅을 탈출하여 비참하게 숨어지내는 동족들이 수 만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금 팔레스타인에는 자살 테러가 쉴새없이 난무하고 이스라엘군대는 유엔의 강력한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무차별 공격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지난 해 미국에서는 세계무역센터 빌딩과 펜타곤에 테러리스트들이 여객기를 탈취하여 그대로 돌진하여 충돌케하여 수 천 명이 한꺼번에 죽고 전 세계인들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반테러의 명분을 앞세워 아프간을 공격하여 역시 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수 많은 가정들이 슬픔과 불행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최근에 일어나는 연속된 엄청난 사건들을 보면서 '과연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신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나 계십니까?' '참으로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신 것입니까?' '우리가 이 비극의 현실속에서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하고 항의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우리들이 끊임없이 품는 이 모든 질문과 항의앞에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답변이 요한복음 11장35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불행과 절망의 끝자락에서 울고 있는 이들을 위해 예수님은 오늘도 눈물을 흘리십니다.
어느날 예수님께서는 오랜만에 베다니의 마리아의 집에 방문하셨습니다. 그런데 때 마침 그 집에는 초상이 나서 큰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달려 나가 맞았습니다. "주님 왜 이제야 오십니까? 주님이 여기 계셨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텐데..." 마르다의 뒤를 이어 마리아가 예수님께 나아와 발 앞에 엎드려 울며 원망스럽다는 듯이 말합니다. "주님이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며 슬피 웁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죽은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하고 물으시며 그녀들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픔에 잠겨 있는 가련한 이들앞에서 함께 울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죽음의 의미를 가르치려 들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없이 슬퍼하느냐?'고 핀잔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왜 나사로가 죽었는지 설명하려고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무슨 멋진 말로 위로하려고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슬픔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우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눈물을 처음 보았습니다. 모두 놀라며 말하기를 "보시오. 이 분이 얼마나 나사로를 사랑하셨는가?"하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1. 그 눈물은 우리의 비극을 알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겪고 있는 슬픈 상황을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려 있음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 11:11)' 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자 다시 설명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요 11:14)'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었음에도 예수님이 왜 지체하셨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필요로 할때 주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하고 원망스럽게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사로의 상태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주님께 투정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그러나 암세포가 퍼져갈 때 주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괴로와 할 때 주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제가 사업과 재산을 잃고 힘들어 할 때 주님은 왜 도우시지 않으셨습니까?" "저의 가정이 파탄에 이르도록 주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주님의 대답은 "그것은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내가 벌을 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네가 무엇을 안다고 따지느냐? 나도 다 생각이 있다."하고 말슴하시지도 않습니다. 단지 "그래 너의 눈물을 보니 나도 눈물이 나는구나!" 하시며 우리와 함께 우십니다. 주님의 그 눈물에는 '내가 너의 아픔을 다 알고 있단다. 너의 괴로움도 안타까움도 슬픔도 다 이해한단다. 많이 힘들지..'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엄청난 일을 당했을 때 여러 사람의 위로를 받지만 '너희들이 내 아픈 맘을 조금이라도 알기나 하겠냐? 형식적으로 위로하는체 하는거지..'하며 위로를 받아 들이려 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나의 아픔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무도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그런 아픔을 맛보지 않았을거라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는 이루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참하지만 너는 행복하지 않으냐?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나를 이해할 수 있겠느냐?' 하는 생각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오 헨리의 단편소설 중에는 [강도와 신경통]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한 강도가 한밤중에 남의 집에 들어가 잡 자는 주인을 깨우고는 권총을 들이대며 "손 들엇!"하였습니다. 주인은 벌벌 떨면서 왼손을 겨우 들었습니다. 그러자 강도는 신경질적으로 "오른 손도 들엇!"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죄송합니다. 저는 신경통이 심해서 오른 손을 들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신경통이라고? 참 나... 나도 신경통때문에 이 짓을 하고 있는 건데.." 강도의 총을 든 손이 슬그머니 내려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이 집에 무엇을 하려고 들어와 있는 것도 잊은 채 '언제부터 신경통으로 고생했느냐?' '신경통약은 뭐가 효과가 있더라.'등 오랜 친구처럼 친절하게 밤새 이야기 하다보니 두 사람은 어느 새 신경통의 아픔을 잊은 채 아침을 맞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신경통이라는 공통관심사가 있어서 강도와 집주인이라는 전혀 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만났지만 친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경통의 고통을 이해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강도도 다정한 마음으로 바뀌어 질 수 있었습니다.
하물며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슬픔을 정확하게 이해하시고 함께 눈물을 흘리십니다. 여러분의 절망도 이해 하십니다. 고통도 다 아십니다. 여러분 정말 힘들고 괴로와 눈물이 끝없이 쏟아질 때 마리아 마르다와 함께 우셨던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 눈물을 흘리고 계심을 깨닫기 바랍니다.
2. 그 눈물은 우리의 비극을 돌보시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마르다와 마리아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눈물은 나사로를 향한 눈물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였습니다. 표준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보시오, 그가 얼마나 나사로를 사랑하였는가!"
많은 사람들이 세계 무역센터 빌딩의 붕괴를 여러 각도로 해석하였습니다. '일부 생명을 잃은 사람들이 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생명을 구하지 않았는가? 오 만명이 근무하는 빌딩임을 감안한다면.. ' '많은 이들이 절망하였으나 그로 인해 전 미국인들이 회개하고 교회로 돌아오지 않았는가!' '참사는 소름끼치는 것이지만 배금주의, 낙태, 부도덕 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이런 합리적인 해석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지만 정말 희생을 당한 당사자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무익한 말들일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성적인 설명이 필요한 때가 많습니다. 신학과 교리는 필요하고 유익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우리를 돌보시고 계심을 좀 더 우리의 심령에 확증할 수 있도록 하는 데는 그런 설명보다는 눈물이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위기감을 느낀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중에 수 년동안 양육한 교인이 이단에 현혹되어 넘어갈 위기에 처한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논리도 통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을 펼쳐서 옳고 그름을 열심히 설명해도 효력이 없습니다. 한 번 미혹되어 악한 영의 영향아래 놓여 있으면 명백하게 비진리임이 눈앞에 드러나도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사단에 미혹되어 멸망의 길로 나아가는 그 영혼이 한없이 불쌍하게 느껴지게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를 붙잡고 울며 기도하는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아무리 설득을 해도 요지부동이던 사람의 마음이 바뀌고 돌아서며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깨달은 진리가 [말로 안되면 울어버리면 된다.]입니다.
실험실에서 사람의 눈물을 분석한 결과 물이 90%, 소금이 7%, 단백질이 2%, 점액소가 1%라는 실험 결과가 나왔다. 이런 요소들은 인간을 움직이고 변화시키는데 아무런 도움도, 효력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물은 위대한 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모니카의 기도의 눈물은 탕자 어거스틴을 성(성)어거스틴으로 변화시키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에베소교인들을 위하여 많은 눈물을 흐리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눈물로써 훈계하였습니다. 눈물로써 세운 교회는 견고하게 섰고 교회사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을 때 그분은 나사로의 비극을 안타까와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친히 비극의 주인공을 돌보기 시작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으로 찾아가셨습니다. 역한 냄새가 나는 무덤의 문을 열게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말슴으로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도 눈물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단지 눈물만 흘리시는데 그치지 않고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 주십니다. 우리의 비참에 그리고 우리의 고통에, 우리의 절망에 스스로 연관되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기꺼워하시는 마음은 신학에 담을 수 없습니다. 눈물만이 주님의 간절한 마음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대인 생존자였던 베르니 세이언은 "나는 마음 속으로 믿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하게 했다. 그가 우리의 보호자요 안내자가 되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휴가중이거나 외출중이었다." 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에 하나님을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님을 진정한 인간이 되게 하셔서 고통중에 있는 우리 인생을 위해 눈물을 흘리시게 하셨을 뿐 아니라 친히 피를 흘리게 하시며 우리의 고통과 절망을 어루만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을 바라봄으로 우리의 비극을 친히 돌아보시고 치료하시고자 울며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3. 그 눈물은 우리의 비극을 승리로 바꾸시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37) 우리의 비극이 하나님의 권능을 무색하게 하는 듯 보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승리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때에 죽은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죽음을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능력은 비극을 승리로 바꾸시는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지체하고 계셨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예수님이 베다니에 나타나셨을 때는 나사로가 죽어 나흘동안 무덤에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이미 시체가 되어 썩는 냄새가 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지체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나사로를 죽음으로부터 지키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기까지 기다리셨다가 죽음에서 다시 살리심으로 부활의 주인이심을 입증하시고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죽음에 대한 온전한 승리를 드러내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베다니동네에서 일어난 나사로 사건은 예수님의 갈보리 사건을 이해하도록 미리 보여준 그림입니다.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나 걸어나온 사건은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무덤을 열고 나온 부활의 사건과 그대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영원한 세계를 보여주는 뚜렷한 그림입니다.
우리의 눈에 비추어진 세계는 비극입니다. 절망입니다. 게다가 초조하게 주님을 바라며 기도하지만 안타깝게도 주님이 너무 지체하시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승리를 선언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어떤 비극을 직면하여도 예수님의 사랑을 위축되지 않습니다. 죽음을 직면하여도 예수님의 능력은 물러나지 않습니다. 어떤 강력한 도전앞에서도 예수님의 승리는 손상되지 않습니다.
프러시아의 프레드릭 왕은 기독교를 조롱하는 사람이었으나 그의 충신 본진랜드 장군은 신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하루는 왕이 신하들과 함께 예수를 비웃었습니다. 그 때 장군이 일어나 말했습니다. "폐하, 대왕께서는 제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워 38번을 승전한것을 아십니다. 이제 저도 늙어 애왕이 비웃으시는 저의 구주 그리스도를 만나 뵈러 갑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가 대왕보다 더욱 위대한 분인 것을 압니다. 이제 소신은 물러가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장군이 즉시 처형될 줄 알았으나 왕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장군, 내가 잘못했소. 나를 용서하시오."
예수님은 눈물을 통해 우리를 향한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눈물을 통해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얼마나 잘 이해하는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눈물을 통해 죽음을 이기시는 승리자가 되심을 우리가 볼 수 잇도록 다가오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눈물을 통해 비극가운데서도 우리가 예수님을 신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비극의 한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눈물을 보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시련의 기쁨
요 11:14-15 / 정성섭 목사
한 집안의 가장이었던 사람의 죽음은 그 가정 전체에 매우 큰 슬픔을 가져다 줍니다.
더욱이 부모님이 계시지 않아 형제들끼리, 혹은 남매들끼리 살아가는 가정에서의 가장 노릇을 하던 맏형이나, 오라비의 죽음은 남은 형제, 자매들에게는 매우 큰 상처요 슬픔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경말씀을 통해서 만나게되는 사람들 역시 이러한 큰 슬픔을 당한 한 가정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향하는 길가의 한 동네가 있는데 그곳은 슬픔의 집. 괴롬의 집이라는 의미를 가진 베다니라는 마을입니다. 이 곳은 요한이 침례를 베푼 장소이며,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신 곳이 바로 이 곳 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승천하신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지닌 장소인 베다니 마을에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매우 행복한 한 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결혼을 하지 않은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의 3남매입니다.
부모님을 일찍 여위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서로간의 정이 남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 사람들은 그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배척했던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들은 예수님과 서로 잘 아는 사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그곳을 지나가실 때면 들리셔서 교제를 나누었던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8:28에 보면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오늘 우리가 만나고 있는 세 남매가 살던 그 특별한 시대에 예수님께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고 계셨습니다. 분명히 그분은 대부분의 사람들, 대부분의 가정들이 환영하지 않는 손님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다녔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다녔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어떤 사람이 이런 주장을 하고 다닌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누가 그를 온전한 사람이라고 여기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람이 미쳤거나 귀신에 사로 잡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게 되는 세 남매가 살던 그 당시에도 마찬가지이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 주위에 있던 사람들 역시 그런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들까지도 예수님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예수님의 주장과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 때문에 몹시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해를 당하지 않도록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아주 먼 길을 예수님을 찾아다니는 고생을 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이나 예루살렘 주변에 계실 때 항상 그 분을 자기 가정으로 맞아주던 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사람들이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만나고 있는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의 가족입니다.
나사로의 가정은 예수께서 유대 지방을 전도 다니는 중에 여러 번 방문하시어 휴식을 취하시던 곳입니다. 당시 집이 없으신 예수님에게 나사로의 가정은 참으로 평안과 쉼을 얻을 수 있는 귀중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집에 오시면 그들은 주위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조롱 섞인 말투에도 예수님을 위해, 그 일행들을 위해 모든 수고를 다 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해 맛있는 식탁을 정성껏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가끔씩은 많은 비용을 들여 잔치를 배설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행복했습니다. 자신들 같은 부족한 사람들이 비록 가난하고, 사람에게 배척을 당하시는 분이지만 자신들과는 다른 위대한 선생님을 가까이서 모실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들에게는 큰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함 속에서도 안타까운 일이 우리들을 어김없이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또 한번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을 모시면서 사랑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그들에게 매우 힘든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가정에서 실질적인 가장의 노릇을 했던 오라비인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그 병은 의사들이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심한 중병이었습니다.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이 이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어갑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을 것입니다. 자기들을 위해 헌신했던 오라비의 죽음을 앞둔 질병 앞에서 그들은 며칠을 밤을 새워가면서 간호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
좋다고 하는 약초들, 영양이 있는 음식은 다 구해서 먹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오라비의 병은 나을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오히려 점점 더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때에 그들은 자신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좋은 이야기를 들려 주셨던 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던 그 분,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라고 말씀하시던 그분에게 생각이 모아졌습니다. 그래 그분이라면 의사들도 할 수 없는 이 오라비의 병도 고치실 능력이 있을 것이다. 그 분이 여기에 오시기만 하면, 그 분이 이곳에 함께 계시기만 하면 오라비는 회복될 것이다. 아니 그분이 직접 오시지 아니하셔도 말씀만 하시면 오빠는 온전하게 낳을 것이다.
이런 소망을 안고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소식을 알립니다.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우리도 이런 혼란스러운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갑자기 사업이 망하고 말았습니다. 큰 질병에 걸려서 고생을 합니다. 자녀의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앞으로의 미래가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갈등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런 어려움이 나에게 있는 것인가? 이런 갈등에 빠질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 같은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원망하고 낙심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기도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그런 분이 없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계시는 분은 없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처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주여! 사랑하시는 자가 실패했나이다.
주여! 사랑하시는 자가 고민하나이다.
주여! 사랑하시는 자가 고통 중에 있나이다.
이러한 소식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들의 상식 밖의 모습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는 절박한 상황에서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간구 하였습니다.
와서 고쳐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부탁을 하면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사로와 이들의 자매들은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당장 뛰어 오시리라고 확신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하인이 병들었을 때나 또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병들었을 때 예수님이 즉시 가서 그들을 고쳐주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께 부탁을 하면 즉시 오시리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두 자매가 말했듯이 나사로는 주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지금 죽을병에 걸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놓여있음을 알렸는데도 주님은 바로 출발을 하지 않으십니다. 네 병에서 놓임을 받았다고 하는 치유의 메시지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단 지 그 분의 메시지는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영광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을병이 아니라는 예수님의 메시지의 답장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나사로는 여전히 병석에 누워있습니다. 죽을병이 아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서 용기를 내 보지만 고통은 점점 더 심해집니다. 혀는 말라갑니다. 기운은 점점 더 쇠약해져 갑니다. 결국 나사로는 죽음의 문을 통과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 흐느끼는 두 자매의 모습을 보십시오. 나사로의 가정에 위기가 당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위기는 바로 나사로의 죽음입니다. 나사로는 가정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정의 희망이 죽었습니다. 나사로는 가정의 보호자였습니다. 그런데 보호자가 죽었습니다. 때문에 나사로의 죽음은 이 가정의 절대 절명의 위기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오라비의 죽음 앞에서 두 자매는 슬피 울며 몸부림을 칩니다.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던 그 분은 왜 오시지 않는 것입니까?
우리들에게 항상 친절하시던 예수님, 당신은 왜 오시지를 않는 것입니까?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오라비는 결국 죽었습니다. 죽은 나사로의 싸늘한 시체 앞에서 몸부림을 치면서 애통해 하는 두 자매들 앞에 주위의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기 위해 모여듭니다.
결국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예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던 예수님이셨지만 11절의 말씀에 보면 나사로의 죽음을 주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볼 때는 죽음이었지만 예수님의 시각은 죽음이 아니라 잠을 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분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한다"
이 야기는 무슨 이야기입니까?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 주님을 사랑하는 나사로와 두 자매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이 땅의 많은 성도들이 슬픔에 차있습니다.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부모들의 죽음 앞에서 슬픔에 차있습니다.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자식들의 죽음 앞에서 슬픔에 차있습니다.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친구들의 죽음 앞에서 슬픔에 차있습니다.
이런 성도들의 슬픔에 예수님은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기쁘다니요 그 말은 그 슬픔에는 합당한 말이 아닙니다. 나사로는 무덤에서 썩어 냄새가 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사로를 사랑하신다는 예수님이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기뻐하신다니요.
그런데 오늘의 15절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한다. 이는 너희로 믿게 하기 하려 함이라"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기뻐하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이 제자들의 믿음에 놀라운 결과를 주실 것이기에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자들의 믿음이 성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제자들과 성도들의 믿음이 굳어지고 성장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성장하는 기회가 되기만 하면 슬픔도 기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시련의 연속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 시련은 우리들의 믿음에는 유익이 되고, 우리들의 믿음 성장에 도움이 되는 시련과 슬픔을 우리 주님은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옛날의 돛을 단 배들은 바다가 고요하면 항구에까지 갈 수 없었습니다. 바람이 이리 저리 불고 물결이 일어나야 원하는 항구까지 갈 수 있습니다. 물론 항구까지 가는 과정에는 배가 좌초할 수 있는 위험도 있습니다. 파도가 높아 물이 넘칠 위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과 싸워 이겨야 원하는 곳까지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막의 모래 가운데서 솟아나는 샘물보다 더 단 물은 세상에 없다고 합니다.
힘든 역경 속에서 살아 승리하는 믿음보다 더 보배로운 믿음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강물을 건너보지 않으면 그 강물의 깊음과 물살의 빠름을 알 수 없습니다.
때문에 오늘의 말씀이 주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우리 앞에 닥쳐지는 미래의 고통들, 시련들, 이모든 것들은 우리들에게는 슬픔이요, 두려움의 대상일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믿음에는 약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우리들의 슬픔일지라도, 그 슬픔이 우리들이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계기다 된다면 주님은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난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설교가인 스펄젼 목사님의 설교 말씀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일 자기 아들을 망하게 하고 싶으면 어려운 일을 시키지 마십시오.
어릴 때에 팔에 안고 다니고, 젊었을 때에 여전히 얼러 주기만 해 보십시오
그리고 어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돌보는 사람을 붙여 보십시오
그러면 이름난 바보로 만드는 데 성공할 것입니다.
만일 세상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면 흙에 닿지 않게 기르십시오.
그로 투쟁하는 일을 못하게 하십시오. 이마에서 땀이 나면 땀을 닦아주면서 "사랑하는 아가야 그렇게 힘든 일은 전혀 하지 마라"고 말해 주십시오.
벌을 받아야 할 때 동정하십시오. 원하는 대로 다 해 주십시오. 그리고 낙담시키는 일을 다 피하게 하십시오. 고통이란 고통은 다 면제시켜주십시오.
그러면 분명하게 패륜아로 키우고 있는 것이고 부모의 마음을 부수는 아이로 만드는데 대 성공을 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주님은 옆에서 얼러주는 과잉보호하는 어머님의 모습은 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넘어지고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고 피가 나기까지 내버려두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는 아픔을 겪어봐야 더욱 조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 가지 말못할 사정으로 고통 속에서 허덕이는 성도가 있습니까?
혹시 지금 이 순간에도 매우 견디기 힘든 시련 때문에 신앙생활에 회의를 품고 있는 성도가 있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지금 받고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다른 사람들의 평안함을 부러워하는 성도들 있습니까?
그들에게는 주님의 특별한 사랑이 임하시지 않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시련이나 환난을 보내시지 아니하실 지라도 주님이 사랑하시는 당신에게는 환란이라는 위장된 복을 주시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믿음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예배에 참석하는 것 때문에 핍박을 당하고 있습니까?
어려운 환경 때문에 잠못 이루며 고민하고 계십니까?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의 손안에서 어루만져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많은 시련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이 받는 시련이 여러분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을 경험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도하십시오.
그리하면 주님이 그 시련을 더욱 기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고통일지라도 여러분의 이웃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을 알아 가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해 가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받는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으로 생명을 얻도록 하는 그분의 의지를 드러내도록 노력하십시오.
생명을 주시는 그분의 능력을 입증하는 기회가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그분의 아들을 보내실 만큼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도록 노력하십시오.
여러분이 받는 믿음생활의 시련은
하나님의 일을 행하실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실 기회입니다.
연약한 믿음의 사람들을 믿음의 길로 인도하는 구원의 길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