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리스(1)-에버리온(3)
글쓴이 그라테우스
“처참하더군요.”
“나도 설마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시신에 그런 짓까지 할 줄은…….”
그리 말하는 아저씨의 눈은 붉었다. 아마도 눈물을 억지로 참아내고 있는 것이리라.
“네. 그렇죠. 그런……. 그따위 짓을 하다니. 그따위 짓을!”
“흥분하지 마라.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갈 수도 있어.”
“예…….”
아저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수긍했다. 하지만 머리가 수긍했다고 가슴까지 수긍하는 것은 아니다. 설혹 누군가 내 말을 들어서 그자에게 밀고한다고 해도 당장 크게 소리치고 싶은 것이 내 심정이다.
“당분간은 마을에서 있거라. 연기할 필요도 없긴 하겠지만 우울해보이도록 하는 것이 좋겠지. 아니, 우울하게 보이지 않아도 좋으니 독기어린 얼굴로 돌아다니지는 말거라. 너는 어디까지나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으로 그가 알게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아저씨의 말의 끝을 흐렸고, 그 의미를 충분히 알아들었기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며칠 후에 밖에서 누군가 너를 찾아 올 거다. 예전에 네 아버지에게 신세를 졌던 사람이라고 말할 테니까 그를 따라가렴. 그가 네게 복수할 수 있는 힘의 기틀을 잡아줄 거다. 알겠니?”
“예.”
그러자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떠날 때 까지는 나를 찾아오지 말거라.”
그 말을 남긴 후 아저씨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아저씨의 뒷모습이 서서히 어둠에 먹혀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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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돌아가신지 사일이 지났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조금의 지장도 없이 돌아가는 세상. 난 그곳에서 또 하루를 시작한다. 무기력하게 일어나서 빵을 입에 물고 밖으로 나선다. 여전히 깨끗하고 잘 돌아가는 마을. 도시. 평소처럼 냇가로 가서 얼굴을 대충 씻고, 공장으로 향한다. 가끔가다 보이는 얼굴만 아는 얼굴들. 내게 연민의 시선을 보내는 그들을 애써 무시하며 난 공장으로 갔다.
“아, 왔냐.”
내 눈치를 살피며 공장장이 말했고, 난 고개를 끄덕이며 어두운 얼굴로 인사를 받았다.
“예.”
“그럼, 열심히 하거라.”
“예.”
간단한 대화. 열심히 하라고는 하지만 공장장은 내게 열심히 할만한 일을 주지는 않았다. 간단한 일. 그리 힘들지 않은 일만이 내게 주어졌고, 공장장 외에 다른 일꾼들도 그런 것이 당연한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별로 힘들 것도 없는 일은 노을이 지려할 무렵 끝나고, 일꾼들은 공장장의 앞으로 모였다.
“자, 오늘 일당이다.”
2개의 은화. 은화 하나를 받던 것에 비교하면 배나 되는 양이다. 요 며칠동안은 계속 일당을 더 많이 받고 있다.
“감사합니다.”
“뭘, 일한 값을 주는 건데.”
공장장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누가 봐도 이건 일한 값이 아니다. 이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치고 공장장이 자신의 월급에서 은화 한 닢씩 빼서 내게 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어찌 보면 쓸데없을 정도로 좋은 사람이다.
난 다시 감사의 뜻으로 공장장에게 인사를 하곤 공장 밖으로 나왔다. 해가 서서히 서쪽으로 떨어지며 내 그림자를 잡아당겼다. 길게 늘어난 그림자가 따라왔고, 난 일부러 경쾌하게 팔을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한 20분 정도 걸었을까. 하얀색의 작은 건물이 보였다. 멀리서 볼 때는 하얀색이었지만 점점 가까워질수록 그 건물 벽면의 얼룩이나 거미줄처럼 새겨진 금과 그 위에 덧씌워진 주홍빛 햇빛에 의해 그 작은 건물은 음산해보이기까지 했다.
“아르멜 신관님.”
“아, 왔는가?”
신전으로 들어서며 말하자 의자에 앉아있던 흰색 옷을 입은 중년인이 일어서며 나를 맞이했다. 보통의 오두막집보다 약간 더 큰 크기밖에 되지 않는 허름한 신전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신관이며, 부모님의 시신을 안장할 때 기도를 해주셨던 분이시다. 이 부근에서는 성자라고까지 불리는 진짜 신관이다.
“예.”
“그래, 아직은 괜찮은가?”
“…….”
그 질문에 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신관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으며 근처에 의자를 끌어와 내게 권했다.
“자, 앉게나.”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와 신관님은 의자에 앉았다.
“어떤가. 신전에서 사는 것은? 비록 이 신전이 허름하긴 해도 최소한 굶지는 않는다네. 저번에 자네가 말했던 것처럼 신앙의 문제라면 걱정할 것도 없고, 신전에서 일을 하면서 서서히 교리를 배우고 기도를 하다보면 언젠가는 그분의 존재를 느끼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니 말일세.”
신관님의 말에 나는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이틀 전에 내게 신전에서 사는 것은 어떠냐고 권하시더니 나를 만날 때마다 계속 설득하려 하신다. 생각 같아선 신관님의 권고를 받아들이고 싶긴 하지만…….
“그냥 살아온 대로 살아가려고요. 부모님을 안장할 때 기도를 해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신전에서 살고 싶지는 않네요.”
“흐음. 그런가. 생각이 바뀌면 언제라도 말하게나.”
“예.”
그 뒤로 30분가량 잡다한 이야기를 하곤 신전을 나섰다.
“잘 생각해보게나.”
신관님의 인사를 들으며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노을은 거의 다 저물어가며 붉은색의 융단을 마을 전체에 드리우고 있었다.
마을의 광장을 지나서 집으로 돌아가던 때였다. 광장의 중앙 분수대의 근처에 모여 있는 한 무리의 소년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큰 덩치의 소년을 본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경직시켰다.
“길버트 던힐…….”
길버트였다. 늘 그렇듯 수하나 다름없는 소년들과 함께 몰려다니는 던힐 가문의 도련님. 나와 무슨 원한이 졌는지 나를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그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로는 단 한번도 보지 못했었기에 잠시나마 잊고 있었는데 내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길버트는 나를 힐끔 보더니 내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나는 길버트가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뱀 앞의 쥐처럼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가 내 바로 옆까지 오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서서히 내게 다가온 길버트는 내 바로 옆을 스쳐지나갔고,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며칠 후에 보자고. 농노의 자식. 아니, 이제는 농노가 될 차롄가?”
내가 걱정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길버트가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않고 내 옆을 지나갔지만 난 계속해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증오. 적개심.
죽여 버리고만 싶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그따위로 말하는 저 놈을. 남의 터전을 차지하고 잘도 웃고 있는 저 낯짝을 찢어버리고만 싶었다. 아니, 길버트에게 그 말을 들은 순간 그렇게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최소한 지금은 아니다. 아직은.
“조금만 기다려. 조금만…….”
나직이. 하지만 강한 감정을 담아 강하게 내뱉은 후 난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붉다 못해 핏빛처럼 보이는 빛을 받으며 붉은 길을 걸어 집으로 향했다.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고, 집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레이번의 아들이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골목 구석의 어두운 곳에 녹아들듯이 서있는 갈색 가죽옷을 입은 남자. 순간 흠칫 놀랐다. 누구지. 누구기에 나를 아는 거지?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뒤엉켰다. 그러나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던 상관치 않고 그 남자는 다시 물었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네가 레이번의 아들이냐?”
낮은 톤의 그의 말에 복잡하던 머릿속이 한순간 맑아졌다. 아무런 망설임이 없어졌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로히만 아저씨가 말한 분이세요?”
그러자 그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호의적으로 행동한 것이겠지만 내게 그의 모습은 사나운 늑대와 같은 느낌의 주었다.
“그래. 이제부터 내가 너를 가르칠 거다.”
그러나 그의 대답이 들린 순간 그에게 느꼈던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바로 사라져버렸다. 사나운 느낌이면 어떤가? 이제부터 이 사나운 사람이 나를 지켜주고 가르쳐줄 것인데?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아저씨의 이름은 뭔가요?”
“나? 브레임. 브레임이다.”
“브레임…….”
난 그의 이름을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마치 잊어버릴 것을 걱정이라도 하는 듯이.
“그런데 네 이름은 뭐지?”
그의 질문에 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반사적으로 답했다.
“에버리온. 에버리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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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흐음.. 그라테우스 님은 잘쓰시는.. (난 언제쯤에야;;;) 건필!!ㅇㅅ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