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누군가에게 쫓기는지 허겁지겁 도망치고 있었다. 여자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두려움과 공포로 인해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의 짙은 화장이 땀으로 지워져 지금의 상황을 절실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몇 번을 넘어질 것처럼 여자는 있는 힘을 다해 뛰고 있었고, 그래도 불안한지 연신 뒤를 쳐다 보았다. 그녀의 검은 그림자가 그녀의 뒤를 바짝 붙어 따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림자가 둘이었다. 또다른 검은 그림자가 그녀의 그림자를 뒤따라 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사람들의 인기척 소리가 났다.
"야..술이 얼큰하게 취해서 너무 기분이 좋다..안 그러냐, 애들아. 우리 한 잔 더 하는 게 어때!"
"좋아. 그럼 너의 집에서 먹자. 오늘 한 번 끝까지 달려보자고.."
여자는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의 소리가 너무나 반가웠다. 여자는 목청 껏 사람들이 있는 곳을 향해 소리를 쳤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어..누가 살려달라고 하는데..우리 가보자.."
음산한 밤의 적막을 깨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여인의 처절한 절규. 청년 세 명은 소리가 났을 곳으로 추정대는 장소로 급히 뛰기 시작했다.
"저..저기다."
지칠대로 지친 여자는 땅 위에 쓰러져 숨을 고르고 있었다. 헐레벌떡 달려온 청년 세 명은 그런 여자한테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그러나 여자는 대답 대신 울음을 터뜨렸고 두려움에 젖은 눈길로 계속 뒤만 응시할 뿐이었다. 청년 세 명도 여자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눈길을 돌렸지만 어두운 밤의 세계는 그 어떤 것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캄캄한 밤은 모든 생명들과 무생물들을 자신의 영역 안으로 숨겨놓고 있었다.
청년 중에 그래도 덩치가 가장 큰 사내가 여자를 안심시키며 말을 했다.
"걱정마세요. 이제 우리가 곁에 있으니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를 차근차근 해주세요."
"그 여자를 이리 내 주게."
갑자기 어둠 속에서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흘러 나와 까만 밤의 정적을 산산조각 냈다. 모두들 소스라치게 놀라, 순간 심장이 멎는 줄만 알았다. 여자는 '꺄악'하고 괴성을 질러댔고 청년들은 여자의 비명소리에 더더욱 놀라 그만 땅바닥에 나자빠지고 말았다.
어둠에 눈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괴이한 목소리의 형체가 천천히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자는 여자를 뒤쫓던 검은 그림자의 사내였고 바로 악마로 새롭게 탄생을 한 경택이었다. 악마는 소리 없이 아주 천천히 걸어왔지만 어느새 그들 앞에 서있다. 이제 악마의 모습이 바로 앞에서 똑똑히 보였다. 그에게서 비릿한 피냄새가 물씬 풍겨져 나왔다. 순간 분위기는 공포에 휩싸였다. 그 무거운 공포감 때문에 질식할 정도로.
"넌 뭐냐! 여자를 괴롭히지 말고 썩 꺼지지 못해!"
그 중 그래도 가장 덩치가 좋은 청년이 용기를 내어 악마에게 큰소리로 말을 했다. 그러나 악마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웃고 있었다. 그 악마의 미소 속에 감추어진 하얀 송곳니. 그것은 달빛에 반사되어 더욱 선명한 빛을 발한다. 소름끼칠 정도의 날카로움. 살짝 스치기만 해도 살이 종잇장처럼 베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대로 쉽게 물러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머지 친구들도 술에 얼큰하게 취했기 때문에 금방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시작했고 덩치가 큰 친구와 합세를 해 수로 위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상대는 한사람이고 여긴 세사람이니까 숫적으로는 분명 우세했다. 때문에 청년들은 한 번 해볼만한 싸움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마는 음산한 분위기를 내뿜으며 천천히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청년들은 다급해졌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덩치 좋은 청년은 주위에 떨어진 빈병하나를 주워들어 공격자세를 취하였다. 한발짝 한발짝 악마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고요한 침묵만이 까만 밤의 공간을 지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긴장감의 연속이었다.
그때 침을 꼴깍 삼킨 청년은 그대로 빈병을 악마의 머리 위로 내리쳤다.
악마는 피하지도 막지도 않고 자신의 머리로 받아냈다. 그러자 악마의 머리는 둔탁한 소리가 나면서 맥없이 깨지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피가 흐른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덩치가 큰 청년이 머리를 쥐어잡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청년의 머리에도 병에 맞은 것처럼 깨져서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흘러 내리고 있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 보던 친구들은 당황했다. 분명 악마는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있었는데 어느새 공격이 이루어졌단 말인가?
두 친구는 함께 공격하자는 눈빛을 주고 받고 악마한테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악마의 몸에 많은 주먹과 발길질이 오고 갔다. 그런데 역시 공격하던 두 친구도 온몸에 상처를 입고 쓰러지는 것이었다. 악마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서있었는데,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악마는 쓰러져 있는 상처투성이의 두 청년에게 다가갔다. 두 청년은 벌벌 떨고 있었다. 한 청년은 너무 겁에 질린 나머지 오줌을 지리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지켜 보던 여자는 혼자 무작정 도망가기 시작했다. 너무 무서웠다. 공포가 모든 생각과 감정을 잘근잘근 씹어 삼켜버리는 듯 했다. 딱 하나, 두려움만 빼고 말이다.
악마는 두 손으로 쓰러진 청년의 목들을 각각 움켜잡는다. 악마의 손 끝으로 청년들의 떨리고 있는 생명이 가늘게 느껴졌다. 힘을 조금 손아귀에 불어 넣었다. 그랬더니 두 청년은 켁켁거리며 고통에 온몸을 흔들어 댔다. 마지막 처절한 몸부림이리라. 악마는 그 모습이 너무 웃겼는지 그 장면을 기억 속에 오랫동안 보관하리라 생각했다. 그때였다. 악마의 옆구리가 잠시 이물질에 의해 방해받고 있었다. 깨져서 날이 뾰족하게 된 병이 깊숙히 파고 들어왔던 것이었다. 묘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악마의 몸 속에 깊숙히 박힌 병은 서서히 녹아내렸다. 대신에 그 병을 악마의 옆구리에 꽂아버린 덩치가 큰 청년이 입에 한가득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그 청년의 옆구리는 심하게 살이 터져 보기에도 흉하게 손상되어 있었다.
그런 것에 아랑곳 하지 않고 악마는 마지막으로 손아귀에 강한 힘을 주었다. '우둑'하고 소리가 나자 두 청년의 7개의 목뼈가 나무젓가락 부서지듯이 손쉽게 동강나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손아귀에 잡힌 청년의 목이 기이한 각도로 휘어져 버렸다.
악마는 잠시나마 황홀했던 손 끝의 짜릿한 감촉을 떠올리며 도망간 여자를 사냥하기 위해 그 자리를 유유히 떠났다. 악마의 상처는 점점 나아가고 있었다. 상처난 부위의 피부세포, 근육세포, 신경세포가 급속도로 분화를 하며 재생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 저 멀리 묘령의 여인이 가슴을 움켜잡기 시작했다.
"헉! 시작됐군.."
여인은 갑작스런 가슴의 고통으로 인해 얼굴에 긴장감이 팽팽히 돌았다.
시급한 정황을 알리는 신호일까? 그녀는 목적지인 교회 안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기다렸다는 듯이 교회 안에서 어느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왔나..그래 너도 느꼈겠지..어서 들어오게..문제가 조금 심각하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왼손에 붕대를 칭칭 감은 목사였다. 어딘지 모르게 쇠잔해 보이는 의문의 노인. 왼손의 붕대. 묘령의 여인. 그리고 이들의 숙명적인 만남...
14) 운명
어둠만이 존재하는 세상. 그 속에서 고통과 파괴의 신이자, 지옥의 악마는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악마가 된 경택이 자신의 명령은 듣지 않고 혼자 독단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었다. 괘심하였다. 부아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울분을 삭일 수가 없었다. 어떻게 미개한 인간에게 신이 농락당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감히 어둠의 힘을 준 창조자에게 대항하다니..
예정된 계약으로는 벌써 인간세상은 대혼란에 빠져 있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만들어야 하는데, 악마가 된 경택은 홀로 유유자적하며 살육을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불로써 세상을 멸한다던,즉 핵전쟁을 일으켜야 할 주범이 저렇게 개인행동을 일삼고 있다는 것에 대해 붉은 눈의 악마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직접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신의 세계는 자신들의 영역이 엄연히 따로 존재하기 때문에 일탈은 전혀 허용되지 않았다. 그것이 공간과 공간의 법칙이었다.
꼭두각시 노릇을 충분히 해줄 것만 같았던 경택의 배신은 악마의 눈을 더 붉게 타오르게 만들었다. 금방이라도 불길이 확하고 번질 것만 같은 눈에서 복수의 손길이 뻗쳐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과는 대조적으로 인간세상은 너무나도 조용하고 평온했다. 마치 푹풍전야를 연상케하듯 세상은 그렇게 고요히 잠들고 있었으나, 강 형사는 어느 한적한 모텔에서 단란주점의 아가씨와 뜨거운 밤을 치루고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구멍으로 치닫고 있는 그의 남성은 오로지 구멍만이 탈출구인 듯 싶었다. 세상에 대한 반항이, 나약한 자아에 대한 연민이 격렬해질 수록 탈출구에 대한 그의 집념은 더욱 불타올랐다.
한편, 묘령의 여인과 목사의 어울리지 않을 듯한 만남은 그들의 특별한 운명에 대한 예견이었다. 묘령의 여인, 비구니치고는 아름다운 피부와 빼어난 미모를 가져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고 넋을 잃게 만들 정도였다. 그에 반해 텁수룩하며 쇠잔해 보이는 목사는 여느 목사와 다를바 없는 그런 평범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겉으로만 봐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그 둘은 딱 하나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범상한 기운. 분명 보통사람과는 다른 에너지였다.
그 둘은 무슨 비밀이야기라도 하는 듯 아주 조용히 귓가에 스치듯이 말을 주고 받았다. 그러다가 목사의 한숨소리가 땅이 꺼질 듯이 나온다.
"휴..아무튼 너무 위험하고 큰 일이야..내가 너무 늙어버렸어..그렇다고 해서 그 일을 너 혼자 떠맡길 수도 없고..왜 하늘은 이 큰 일을 우리 두 사람에게만 주었는지.....감당하기가.."
목사는 너무나도 허탈한 나머지 말끝을 흐렸다. 묘령의 여인은 그런 목사에게 힘이 되고자 자신만만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들의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인걸요. 그렇지만 목사님이나 저나 이 숙명 속에서 분명히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서로 다른 길이지만 종교에 몸을 담고 있는 거 아닌가요."
그렇게 이야기를 하기는 했지만 묘령의 여인도 숨을 조이는 듯한 두려운 마음은 확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운명의 꼬리처럼 여인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리고 그 순간, 강 형사는 자신의 뜨거운 욕정을 끝없는 구멍 속으로 전부 털어내 버렸고 악마는 또 다른 희생자의 목덜미에 하얗고 가느다란 송곳니를 박아버렸다. 도망가던 여자는 끝내 악마의 제물이 된 것이었다. 악마는 끓어오르는 희열을 감추지 못하고 두 눈을 지긋이 감았다. 그는 엄마의 젖을 빨아대는 아기처럼 아주 온순하게 여인의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빨아먹었다.
15) 서서히 다가오는 악의 그림자
성식은 경악했다. 아니 성식이 뿐만 아니라 학교전체가 공포의 도가니였다. 지금까지 구멍에 대한 자료에만 열중하고 있었던 터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일이 터지자 불안감은 배가 되었다. 나름대로 구멍이론이 완성되고 있었는데 큰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가 돌아왔다. 그는 사람들의 기대와 약속을 저버리지 않으려는 듯 멋지게 복수를 하고 있었다. 그만큼 하루 종일 대화의 화제는 악마의 부활에 대한 것이었다. 다시 돌아온 악마의 화신. 그것도 전보다 더 끔찍하고, 대담하고, 잔인하였다.
악마는 이제 AB형의 여성만을 원하지 않았다. 야수의 본능이 피를 토하듯 닥치는 대로 살육을 하고 있었다.
성식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자신의 집에서 혼자 기거하고 있는 염 노인 조차도 아침 뉴스속보를 전해듣자마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줄 알았다. 그것은 흡사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염 노인은 당장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당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악마는 한 번 목표한 사냥물은 절대 놓치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심산이었을까? 악마는 성식이가 살고 있는 마을로 이동하고 있었다. 자신한테 약간의 죽음의 공포를 맛보여준 그 마을로 가서 선물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특히 희정이의 피를 먹고 싶었다. 그녀의 가늘고 긴 목덜미가 자꾸만 아른거렸다. 비록 생식기가 사라져 원초적인 성욕은 사라졌지만 식욕만은 그대로였다. 붉은 피. 그건 악마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자 살아가는 본능이었다. 왜 그런지 붉은 피만 보면 흥분이 되고 어머니가 떠올랐다. 악마의 잠재의식을 건드렸기 때문인지 유아기적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더 강렬하게 갈증을 일으켰다. 그렇게 악마의 끔찍한 과거는 현재 비현실적으로 날조되며 나타나고 있었다.
한편, 악마의 이동경로를 따라 이동하는 자들이 또 있었다. 그들은 바로 묘령의 여인과 왼손에 붕대를 감은 목사였다. 운명의 길이라도 되는 양 그들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러고 있을 때 강 형사는 악마가 살인을 저지른 장소에서 수사에 촛점을 맞추고 있었다. 많은 형사와 경찰들, 기자들로 인해 지난 밤의 을씨년스런 장소는 대조적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래서 수사열기는 점점 고조되었지만 어떠한 증거도 나오지는 않았다. 단, 이 짓을 할 사람은 악마라는 것 외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