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 재직 시절 참 많은 노동자들이 구속됐다. 요즘 이명박이 노동자 구속하는 것보다 그 시절 노동자들이 구속됐을 때가 훨씬 열받았다.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긴 정치가 답게 김대중은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 독재자에게 고개 숙이고 아부하지 말라, 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또 독재에 이기는 법을 훈수를 두었다. "나쁜 정당에 투표 않기, 나쁜 신문 보지 않기, 집회 나가기, 인터넷에 글 올리기." 그가 남긴 공과를 떠나 쉽게 만날 수 없는 큰 인물은 분명한 것 같다. 이번에도 조문은 하지 않는다. 대신 글 한 꼭지 남긴다.
<사진> 2007년 12월 동교동 집을 찾아간 이소선
이소선이 김대중을 마지막으로 만난 날은 지난 6월 11일 6·15 공동선언 9돌 기념식장에서다. 이날 김대중은 과거 50년 동안 피 흘려 쟁취한 민주주의가 위태로워 걱정이라는 연설을 하였다. 연설을 마친 김대중이 휠체어를 타고 단상을 내려오자 이소선이 달려갔다. 김대중은 이소선의 손을 꼭 잡으며 “어머니는 걸어오셨어요?”하고 물었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당신이 원망스러웠나 보다. 헤어지며 김대중은 이소선에게 “건강하셔야 돼요, 건강하셔야 돼요”를 되풀이하며 당부하였다. 김대중은 이소선을 만나면 늘 건강을 챙겼다.
6월 11일 김대중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온 이소선은 그날 밤 장롱을 뒤지기 시작했다. 책이며 옷가지가 담긴 상자를 풀었다 닫았다 한다. “엄마, 어디 피난가요? 또 잠 안 오니까 장롱 뒤적이는 거지. 금붙이라도 나올까봐 그러나.” 이소선을 고개를 돌려 나를 째려본다. “썩을 놈, 찾을 게 있으니까 그러지. 모르면 가만히 있어. 힘들어 죽겠구만.” 이소선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다.
다음날 아침에 이소선을 만나니 손목에 못 보던 시계를 차고 있다. 몸에 뭐 달고 다니는 걸 끔찍이 싫어하는 이소선이다. 심지어 깃이 나온 옷도 답답하다고 입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시계를, 그것도 남자들이 차는 것인지 이소선의 자그마한 손목에 유난히 크게 도드라진 시계를 차고 있다.
“참, 살다보니 별 일이네. 어머니가 시계도 차시고.”
“야, 이거 찾느라고 어제 밤새 장롱을 몇 번 뒤졌다.” 이소선은 시계를 매만지며 말한다. “어제 내가 김대중 선생을 만나고 오지 않았냐. 건강이 너무 안 좋으신 거 같아. 그래서 너무 가슴이 아파. 나한테 맨날 어무니 건강하세요, 건강하세요 했는데 김대중 선생 건강이 더 안 좋아 보여. 그래서 이 시계를 찾은 거 아니냐. 나도 몸이 안 좋으니 이제 자주 찾아가 볼 수 없고, 이렇게 시계라도 몸에 지니고 있으면 김대중 선생을 보는 거 같으니.”
손목에 찬 시계는 김대중이 대통령 재직 시절 청와대로 이소선을 초청할 때 준 거다. 이미 전지가 다 되어 시계는 멈춰있다. 이소선은 멈춘 시계를 차고 김대중 선생과 맺은 좋은 인연 속에 한없이 머물고 싶은가보다.
이소선의 삶을 기록한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책을 낼 때 의도(?)적으로 유명한 정치인들과 얽힌 이야기들은 뺐다. 하지만 김대중 선생과 얽힌 이야기는 도저히 뺄 수가 없어 두 꼭지를 다뤘다. 그만큼 이소선에게 김대중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970년 전태일의 죽음으로 맺어진 인연은 40년을 끈질기게 이어왔다. 이소선에게 김대중은 자기의 속마음을 참되게 알아주는 지기지우와 같은 존재다. 김대중이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뒤 정계은퇴 선언을 하고 영국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이소선은 동교동 집으로 찾아갔다. 그냥 영국에 가서 쉬다오면 되지 왜 다시는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소리를 하냐고 이소선은 김대중한테 따졌다. 그때 김대중 선생이 슬그머니 이소선 곁으로 다가와서 귓속말을 하였다. “어머니, 다시는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으면 내가 영국 가기도 전에 죽을지 모릅니다. 그렇게만 아세요.” 이소선은 숱한 죽을 고비를 넘긴 정치인의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이소선은 김대중과 사적인 관계를 넘는 공적인 일에 부딪히면 독설을 퍼붓는다. 청와대를 찾아가 “대통령이 됐으면 당신을 죽이려고 한 국가보안법부터 없애야지, 금반지 모으는 일부터 하냐”고 쏘아붙였다. 이런 이소선에게 김대중은 한 번도 싫은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보이지 않게 이소선과 민족민주열사 유가족들을 챙겨주었다. (유가족들의 쉼터 ‘한울삶’ 집을 살 때 도와준 일화는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에 자세히 나왔으니 여기서는 건너뛴다.) 그래서 이소선은 김대중이 유가족들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고 말한다.
지난 13일 병문안을 가겠다고 나섰던 이소선은 창신동 골목을 나서다 기운이 없어 뒷날로 미루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더욱 애통해 한다.
첫댓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정작 우리가 원했던 것은 그게 아닌데, 정정당당함을 요구했는데 뒷구멍으로 슬그머니 도와주는 것을 바란게 아니었는데. 그래서 그를 욕했는지 모릅니다. 가고 나면 다 허망하다 하겠지만 우리는 아직 살아있으니 너무도 힘든 시기를 살아가고 있으니 그의 공과를 따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무현 김대중 두분다 저에게는 애증의 님들 입니다.
. 대통령까지 하신 분들이 국가보완법은 끝장못내고. 대추리는 끝장내고, 그에 대한 언급도 하나없이 노무현 대통령은 자살해서 얼마나 화가 나던지요. 전두환,노태우,이명박 그 인간들이나 귀신들이 잡아갔으면 정말 좋겠어요.
귀신 나부랭이 애기는... 푸념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가 행한 일들은 50 여 년 정도 지나가면 냉정한 역사의 심판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10 여 년 정도가 될 수도 있겠군요... 역사 속에서 시간의 흐름은 정말 빠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