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1753] 이덕무(李德懋)7절-단양일집관헌(端陽日集觀軒)
단양일 집관헌(端陽日 集觀軒)
- 단오날 마을회관에 모여
이덕무(李德懋) 1741 – 1793
的的榴花燒綠枝
緗簾透影午暉移
篆烟欲歇茶鳴沸
政是幽人讀畵時
적적류화소록지
상렴투영오휘이
전연욕헐다명비
정시유인독화시
석류꽃 이글이글 녹색잎 다태우고
발틈새 얼비치며 흐르는 낮그림자
연기는 고물고물 찻물은 보글보글
지금이 그윽한이 그림을 볼때로세
적적(的的) ; 밝고 환한 모양. 적절한 우리말표현이 어렵다. 석류꽃의 붉음이 마치
불붙은 나뭇가지 인양. 푸른 잎마저 태울 만큼 붉고 밝다는 표현.
상렴(緗簾) ; 담황색 발, 비단주렴. 성근 발의 틈새로 밖앝 그림자가 보이는 형상.
투영(投影) ; 투(透)는 통하다, 뛰어넘다, 지나가다 등의 뜻으로 쓰이지만
살랑거리는 바람에 쳐진 발 틈새로 밖앝풍경이 어른거리는 모슴이라면
흘러간다도 풀어도 무방하리.
오휘(午暉) ; 한 낮의 햇빛,
전연(篆烟) ; 전(篆)이 연(烟)을, 연(烟)이 전(篆)을 서로 수식하고 있다.
전서(篆書) 또는 전자(篆字)라 하여 한문글체의 한 형태인데
마치 향의 연기가 하늘하늘 오르듯 붓이 흘러가는 특징을 가진다.
여기서는 그 전자체로 글을 써 놓은 것처럼 숯불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명비(鳴沸) ; 찻물 끓는 소리를 이렇게 한문으로 표현한 싯귀를 처음 접한다.
다들 탕비(湯沸)라고는 하지만 명비(鳴沸) 즉 물끓는 소리를
새의 울음으로 간주하기는 쉽지 않다.
드물게 놋쇠주전자가 있기는 하였으나 찻물을 끓일 때는 돌 주전자나
도기 주전자를 썼다.
숯불에 물을 끓이면 크게 네 단계로 물 끓는 소리가 난다.
일 단계는 소곤소곤 귀엣말을 할 때처럼
작은 물방울이 맺히면서 나는 소리.
둘째 단계는 물속에 녹아있던 산소가 차츰 분리되면서 생기는 소리다.
이 소리를 부글부글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셋째 단계는 울컥울컥 끓는 물의 움직임이 홍수가 강을 쓸어내리듯
공기덩이가 크게 움직인다. 이때 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다.
양은주전자 같으면 두껑이 덜컹거리는 단계다.
넷째 단계는 아무 소리도 없다. 아니 자세히 들어야 들린다.
그 소리를 솔바람소리에 비유한다.
이 네 단계의 물끊는 소리를 새의 울음에 비유했던 시인의 서정이
참 맑고 곱다.
유인(幽人) ; 세상의 번잡함을 피해 조용한 곳에 숨어 지내는 사람.
독화(讀畵) ; 그림을 감상하다.
석류나무 가지마다 붉은 불이 붙었다.
진녹색의 이파리가 저 붉은 꽃에 다 타버리겠다.
드리워진 발의 저편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살금살금 지나가는
한낮의 해 그림자를 본다. 방에 앉아 밖을 보는 유연함과 한가함이 묻어난다.
향로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연기도 한물가면서 시무룩 하다.
다시금 보글보글 찻물 끓는 소리. 향기는 여전히 코끝에 맴돌고,
마당에는 여전히 고양이 걸음으로 해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다.
마당 저편 석류나무엔 불이 붙어 이글거리고
방 안에선 솔바람소리 찻물이 네 물을 넘어선다.
단오날이라 아낙들은 그네를 타네, 널을 뛰네, 머리를 감네, 개울이며 뚝방이며
분주하게 오가는데
마을회관엔 벗님 몇이 모여 그림 한 장 펼쳐놓고 감상에 한참이다.
여보게들 그림 그만 보시고 이리들 오시게 찻물이 다 끓었네.
이덕무(李德懋)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무관(懋官), 호는 형암(炯庵)·아정(雅亭)·청장관(靑莊館)·
영처(嬰處)·동방일사(東方一士)·신천옹(信天翁).
정종의 제15자인 무림군 이선생(茂林君 李善生)의 14세손이며,
이상함(尙谽)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강계부사 이필익(必益)이고, 아버지는 통덕랑 이성호(聖浩)이며,
어머니는 반남 박씨로 토산현감 박사렴(朴師濂)의 딸이다.
박학다식하고 고금의 기문이서(奇文異書)에도 달통했으며,
문장에 개성이 뚜렷해 문명을 일세에 떨쳤으나,
서자였기 때문에 크게 등용되지 못하였다.
어릴 때 병약하고 빈한해 전통적인 정규 교육은 거의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총명하여 가학(家學)으로써 6세에 이미 문리(文理)를 얻고,
약관에 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와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라는 사가시집(四家詩集)을 내었다.
특히 박지원(朴趾源)·홍대용(洪大容)·박제가·유득공·서이수(徐理修) 등의
북학파 실학자들과 깊이 교유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경제면의 급진적인 개혁 이론보다는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고증학적 방법론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고염무(顧炎武)·주이존(朱彛尊) 등 명말청초(明末淸初)의
고증학 대가들의 저서에 심취한 나머지
1778년(정조 2)에는 사은겸진주사(謝恩兼陳奏使) 심염조(沈念祖)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직접 연경(燕京)에 들어가 기균(紀均)·이조원(李調元)·이정원(李鼎元)·육비(陸飛)·
엄성(嚴誠)·반정균(潘庭筠) 등 청나라 석학들과 교류하였다.
그리고 그곳의 산천·도리(道里)·궁실(宮室)·누대(樓臺)·초목·충어(蟲魚)·조수(鳥獸)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기록해 왔으며, 고증학에 관한 책들도 많이 가져왔다.
이것은 이덕무의 북학론을 발전시키는 데 기초가 되었다.
명성이 정조에게까지 알려져 1779년에 박제가·유득공·서이수와 함께
초대 규장각 외각검서관이 되었다.
14년간 규장각에 근무하면서 규장각신(奎章閣臣)을 비롯한 많은 국내 학자들과
사귀는 한편, 그곳에 비장되어 있는 진귀한 서적들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규장각의 도서 편찬에도 적극 참여해
『도서집성(圖書集成)』·『국조보감(國朝寶鑑)』·『규장각지(奎章閣志)』·
『홍문관지(弘文館志)』·『송사전(宋史筌)』·『검서청기(檢書廳記)』·
『대전회통(大典會通)』·『기전고(箕田攷)』·『규장전운(奎章全韻)』·
『시관소전(詩觀小傳)』 등 많은 서적의 정리와 교감에 종사하였다.
항상 소매 속에 책과 필묵을 넣어 다니면서 보고 듣고 생각나는 것을
그때그때 적어두었다가 저술할 때 참고하였다.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근면하고 특히 시문에 능해 규장각 경시대회(競詩大會)에서
여러 번 장원을 차지하였다.
그리하여 정조의 사랑과 신임을 받아
1781년 내각검서관으로 옮겨지고,
사도시주부(司寺主簿)·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적성현감
등을 거쳐 1791년 사옹원주부가 되었다.
비속한 청나라의 문체를 사용해 박지원·박제가 등과 함께 문체반정(文體反正)에 걸려 정조에게 자송문(自訟文)을 지어 바치기까지 했으나,
질병으로 1793년에 죽었다.
정조는 생시의 업적을 기념해 장례비와 『아정유고(雅亭遺稿)』의 간행비를 내어주고, 1795년 아들 이광규(李光葵)를 검서관으로 임명하였다.
글씨도 잘 썼고 그림도 잘 그렸는데, 특히 지주(蜘蛛)와 영모(翎毛)를 잘 그렸다 한다.
저서로는 『관독일기(觀讀日記)』·『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영처시고(嬰處詩稿)』·『영처문고(嬰處文稿)』·『예기고(禮記考)』·『편찬잡고(編纂雜稿)』·
『기년아람(紀年兒覽)』·『사소절(士小節)』·『청비록(淸脾錄)』·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앙엽기(盎葉記)』·『입연기(入燕記)』·
『한죽당수필(寒竹堂隨筆)』·『천애지기서(天涯知己書)』·『열상방언(洌上方言)』·
『협주기(峽舟記)』 등 16종이 있다.
단양일집관헌(端陽日集觀軒)
이덕무(李德懋, 1741~1793)
빨간 석류꽃이 초록 가지를 불태우는 듯하고
발에 비친 꽃 그림자는 햇빛 따라 움직인다
실연기 잦아들 제 보글보글 찻물 끓는 소리
이때가 바로 내가 책 읽고 그림 그리는 때라
的的榴花燒綠枝(적적류화소록지)
緗簾透影午暉移(상렴투영오휘이)
篆烟欲歇茶鳴沸(전연욕헐다명비)
政是幽人讀畵時(정시유인독화시)
음력으로 5월5일은 단오다. 나무들이 햇볕을 받아 녹음이
짙어가는 때다. 활짝핀 석류꽃은 마치 초록색 나뭇가지를
불사르는 듯 새빨갛게 이글거린다. 방문을 활짝 열고 성긴
비단으로 만든 발을 드리웠다. 그 위로 한낮의 햇빛을 받은
나무 그립자가 해를 따라 조금씩 옮겨간다. 마당 한쪽에서
올라오던 한 줄기 가느다란 연기가 그치려는데 찻물 끓는
소리가 들린다. 한가한 오후, 차 한잔 마시며 책을 읽을 시
간이다. 책이 머리에 안 들어오면 먹을 갈아 사군자를 치면
된다. 이덕무는 시서화에 능해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서얼
출신이라 높은 벼슬을 하지 못했다. 결구의 유인(幽人)은 자
신을 일컫는 말이다.
[작가소개]
이덕무[ 李德懋 ] : 자국 중심의 세계관을 가진 고증과 박학의 대가
출생 – 사망 : 1741 ~ 1793
조선후기 서울 출신의 실학자 그룹인 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의 한 가지를 형성한
이덕무는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유득공(柳得恭)과 더불어 청나라에까지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문명(文名)을 날린 실학자이다.
그는 경서(經書)와 사서(四書)에서부터 기문이서(奇文異書)에 이르기까지
박학다식하고 문장이 뛰어났으나. 서자였기 때문에 출세에 제약이 많았다
. 그러나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하여 서얼 출신의 뛰어난 학자들을 등용할 때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 등과 함께 검서관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박물학에 정통한 이덕무는 사회 경제적 개혁을 주장하기 보다는
고증학적인 학문 토대를 마련하여 훗날 정약용(丁若鏞), 김정희(金正喜) 등에
학문적 영향을 준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정조에게 발탁된 서자 출신의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정종(定宗, 조선의 제2대왕)의 서자인
무림군(茂林君)의 10세손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자는 무관(懋官), 호는 아정(雅亭)인데 이 밖에 형암(炯庵)ㆍ청장관(靑莊館)
또는 동방일사(東方一士)라는 호도 사용했다.
특히 즐겨 사용한 청장(靑莊)이라는 호는 일명 신천옹(信天翁)으로 불린
해오라기를 뜻하는데, 청장은 맑고 깨끗한 물가에 붙박이처럼 서 있다가
다가오는 먹이만을 먹고 사는 청렴한 새라고 한다.
청장으로 호를 삼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성격을 상징한 것이라 하겠다.
이덕무는 서울 출신으로 아버지는 통덕랑 성호(聖浩)이고 어머니인 반남 박씨는
토산현감 사렴(師濂)의 딸이었다.
할아버지 필익(必益)은 강계부사를 지낸 인물이었다.
6살에 아버지가 아들인 이덕무에게 한문을 가르치고자
중국 역사책인 [십구사략]을 읽혔는데, 1편도 채 끝나기 전에 훤히 깨우친 영재였다.
16세에 동지중추부사 백사굉의 딸 수원 백씨와 혼인하였고,
20세 무렵에는 남산 아래 장흥방(현재 종로구 부근)에서 살았다.
이 무렵 집 근처 남산을 자주 오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를 많이 지었다.
이덕무는 가난한 환경 탓에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학문에 비상하고 시문에 능해 젊어서부터 이름을 떨쳤다.
사후에 그의 행장을 지은 연암 박지원은 시문에 능한 이덕무를 기리며
“지금 그의 시문을 영원한 내세에 유포하려 하니 후세에 이덕무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또한 여기에서 구하리라. 그가 죽은 후 혹시라도 그런 사람을
만나볼까 했으나 얻을 수가 없구나”하며 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이덕무는 청장이라는 별호에 어울리는 호리호리한 큰 키에 단아한 모습, 맑고 빼어난 외모처럼 행동거지에 일정한 법도가 있고 문장과 도학에 전념하여 이욕이나 잡기로 정신을 흩뜨리지 않았으며, 비록 신분은 서자였지만 오직 책 읽는 일을 천명으로 여겼다고 한다. 가난하여 책을 살 형편이 되지 않았지만, 굶주림 속에서도 수만 권의 책을 읽고 수백 권을 책을 베꼈다. 이덕무의 저술총서이자 조선후기 백과전서라 할 수 있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볼 수 있듯이, 사실(史實)에 대한 고증부터 역사와 지리, 초목과 곤충,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지적 편력은 실로 방대하고 다양하여 고증과 박학의 대가로 인정받았다. 그의 묘지명을 지은 이서구(李書九)는 이덕무를 두고 “밖으로는 쌀쌀한 것 같으나 안으로 수양을 쌓아 이세(利勢)에 흔들리거나 마음을 빼앗기지 않은 인물”이라 평했다.
이덕무는 1766년 그의 나이 26세 때 대사동으로 이사한 후, 서얼들의 문학동호회인 백탑시파(白塔詩派)의 일원으로 유득공ㆍ박제가ㆍ이서구를 비롯하여 홍대용, 박지원, 성대중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적 재능에 비해 신분적 한계로 천거를 받지 못하다가 1779년 그의 나이 39세에 정조에 의해 규장각 초대 검서관(檢書官)으로 기용되면서 벼슬길이 열렸다. 1789년에는 박제가, 백동수와 함께 왕명에 따라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하기도 했다. 검서관 이후에 사도시주부, 광흥창주부, 적성현감 등을 역임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덕무 [李德懋] - 자국 중심의 세계관을 가진 고증과 박학의 대가 (인물한국사, 정성희, 장선환)